'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에서 에미는 아직 한 번도 보지 못한 이메일 친구인 레오에게 자신의 가장 친한 친구인 '미아'를 소개시켜준다. 참 병신같기도 하지, 그 마음이 이해 안되는건 아니지만, 진짜 병신같은 짓이었다. 문제는 레오와 에미가 이메일 상으로 서로에게 사랑이란 감정을 품고 있었으면서도 어쨌든 레오와 '에미 친구'의 만남이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에미는 미아를 레오에게 소개시켜주고 잘됐냐고 떠보는데, 그 둘이 섹스를 했는지가 무척 궁금하다. 했는지 안했는지, 그에 대한 답이 듣고 싶다. 그리고 레오는, 오, 했다고 말한다.
이 때 에미가 무얼 느꼈던간에, 레오를 사랑하고 있던 나는 절망을 느꼈다. 그리고 그 사실에 절망을 느꼈다는 건, 내가 섹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의미라는 걸 뒤늦게 깨달았다. 나에게 섹스는 '아무것도 아닌 게 아닌' 것. 중요한 것이었다. 자, 그렇다면, 내가 섹스를 중요하게 생각한다고 해서 섹스가 정말 중요한 것일까? 나에게 중요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에게도 중요한 것일까?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섹스를 한 것은 그렇게 죽을만큼 절망스런 일일까? 배신감과 좌절이 쓰나미로 몰려들어야만 하는 그런 일인걸까? 아무리 내 개인적으로 그걸 중요하게 생각한다고한들, 그게 그렇게 밤 잠을 못이룰 정도로 영향을 미쳐야 하는걸까? 어쩌면, 정말 어쩌면, 사실 그건 아무것도 아닌건 아닐까? 내 남자친구가 다른 여자랑 밥을 먹고 차를 마시고 일을 하는건 괜찮은데, 그렇다면, 왜, 섹스는 안되는걸까? 왜 다른 여자랑 밥을 먹었다는 사실보다 다른 여자랑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더 화가 날까? 이런 감정이 내게 쓸모있는 감정인걸까? 만약 내가 밥 먹는것과 섹스하는 것에 그다지 큰 차이를 두지 않았다면, 그렇다면 나는 절망감을 덜 느끼게 되지 않을까?
이 책속의 '저드'는 자신의 아내가 자신의 상사와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하게 된다. 아주 질펀한 순간을. 게다가 이게 처음도 아니란다. 그 둘의 관계는 일 년째 지속되고 있단다. 그가 충격을 받을것은 자명한 사실. 집을 나오고 다시는 아내를 꼴도보기 싫어하는 것도 역시 자연스런 일이다. 그런 그에게 그의 엄마가 말한다.
"내 말은,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모든 일들이 완전히 끝나버린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는 거지."
"내 상관하고 1년 동안 그 짓을 벌인 게 없던 일이 되지 않는 한 그럴 일은 없어요."
"저드, 내 말은 그런 뜻이 아니다. 물론 그 애가 바람을 피웠고 그 일로 네가 마음을 다쳤다는 건 안다. 하지만 그래봤자 결국 섹스란다. 가려울 때 엉덩이를 긁는 것과 큰 차이가 없어. 우리들은 섹스에 지나치게 큰 의미를 부여하도록 세뇌가 된 것 뿐이야. 그 결과 다른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마는 거지. 섹스는 온 숲에 가득한 많은 나무들 중에 한 그루일 뿐이란다." (p.202)
그래, 어쩌면 섹스는 가려울 때 엉덩이를 긁는 것과 큰 차이가 없을지도 모른다. 만약 내가 그렇게 생각할 수만 있다면 이 세상의 모든 문제들 중에 어느정도, 그러니까 어느 일부만큼은 그 크기가 작아질지도 모르겠다. 그렇다해도 완벽하게 아무것도 아닌게 될 수는 없을 것 같다. 서로 가려울 때 엉덩이 긁어주자고 너랑 나랑 연인이 된 거 아니니, 그런데 왜 다른 애랑 엉덩이를 긁어주고 난리니, 라고 해버리면, 할 말 없지 않나? 여하튼, 온 숲에 가득한 많은 나무들 중에 한 그루일 뿐임을 잊지 말아야지. 물론, 저드는 그런 엄마에게 이렇게 대꾸한다.
"저한텐 엄청 큰 나무처럼 보이는데요." (p.202)
하아- 젠장. 좀 크긴 크지 않나?
이 책은 마치 '천명관'의 『고령화 가족』을 떠올리게 한다. 식구들 모두가 저마다의 커다란 문제들을 가지고 있으니까. 게다가 그 구성원들이 서로 살갑지도 않고 다정하지도 않다. 못잡아먹어서 안달난 사람들 같다. 그런데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뿔뿔이 흩어졌던 식구들이 장례를 치르기 위해 모이고, 유대교의 전통에 따라 일주일간 식구들 전체가 한 집에서 조문객들을 맞는 '시바'를 하기로 한다. 그게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의 마지막 유언이었다고 한다. 그들은 예전처럼 으르렁대고 서로의 문제 때문에 골치아파한다. 폴의 아내는 아이를 갖고 싶은데 아이를 갖지 못해서 조문기간 내내 -마침 배란기- 폴과 동침하려하고, 이마저도 뜻대로 되질 않아 시동생인 저드를 덮친다. 저는 아내 젠의 불륜현장을 목격하고 상처받은 채 아버지의 장례식에 왔는데, 그의 아내는 그를 찾아와 저드의 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직업도 없고 돈도 없는 필립은 자신의 심리상담사였던 열살이상 차이나는 여자를 여자친구라고 데려왔고, 그러면서도 다른 여자들을 여전히 집적댄다. 웬디 의 남편은 돈을 아주 많이 벌지만 좀처럼 웬디와 함께 있는 시간이 없다. 이들 모두가 한 집에서 일주일간 꼼짝없이 함께 해야한다.
이런 상황에서도 툭툭 유머러스한 문장들이 튀어나와서 지하철에서 소리내서 웃기도 했다. 특히 이 부분.
그녀는 집 앞에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짧은 반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테니스 운동화를 신은 그녀는 그대로 쌈을 싸서 먹고 싶을 만큼 앙증맞다. (p.338)
ㅎㅎㅎㅎ 쌈을 싸서 먹고 싶다, 는 표현에 빵터져버리고 말았다. ㅋㅋㅋㅋㅋ
저드가 젠과 별거중이란 사실을 알고 조문하러 온 친척들이 저마다 저드에게 여자를 소개시켜주고 싶어 안달이다. 이에 저드는 화가 나서 말한다.
"제가 그렇게 딱해들 보이시나요? 제 힘으로는 아무 여자도 못 만날것 같아요? 이 세상의 반은 여자예요. 그 많은 여인들 중 적어도 한두명 정도는 나랑 사귈 가능성이 없을까요?" (p.336)
이 말을 들은 친척들과 저드의 엄마는 당황하는데, 이런 저드에게 그의 동생 필립이 지원 사격을 해준다.
"딱 내가 하고 싶은 말이야." 필립이 끼어들었다. "별거에 들어갔다고 세상이 끝나는 건 아니에요. 참고로 말하자면, 어젯밤만 해도 우리 형은 섹스를 했다고요." (p.336)
아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저드가 어젯밤에 섹스를 한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 말해주는 필립이 너무 웃겨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물론, 그보다 더 많은 문장들이 삶의 일상적인 면들을 보여준다.
아버지는 어렸을 때 우리들을 무척 예뻐했다. 하지만 우리가 자라기 시작하자 아버지는 우리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알지 못하는 사람처럼 보였다.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은 완전한 세상이었던 어린 시절도 어느덧 정신을 차려 보면 온데간데없고, 삶의 속절없음에 망연자실한 채로 우리는 아버지의 무덤에 흙을 올리고 있는 것이다. (p.56)
우리는 아버지를 보고, 아내에게 키스를 하고, 어린 동생과 장난을 치지만, 언제가 그런 일들을 하는 마지막 순간인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분명히 모든 일에는 마지막 순간들이 있다. 그런 순간들을 다 기억한다면 우리는 슬픔에서 헤어날 수 없을 것이다. (p.215)
혼자만의 오랜 사색 끝에 도달하는 결론은, 모든 사람들에 대해 내가 확실하게 알 수 있는 유일한 사실은 그들에 대해 내가 아는 것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p.256)
"늙지 말게나. 그게 내가 저지른 잘못이라네."
나는 그가 고개를 숙이고 거리를 따라 걸어가는 것을 지켜봤다. 72세의 나이에도 여자들은 우리의 심장을 찢어놓을 수가 있다. 나는 아직 그런 일을 겪지 않았지만, 그럴 수 있다는 가능성이 너무 무섭기도 하고 묘하게 안심이 되기도 한다. (pp.405-406)
ㅋ ㅑ ~ 낮술을 마시고 싶어진다. 정말이지, 묘하게 안심이 되지 않는가. 남자의 전화를 기다리던 일흔살의 올리브도 생각나고.
사실을 열거하자면 이렇다. 나는 젠 같은 여인들에게 끌리고, 젠 같은 여인들은 웨이드 같은 인간들에게 끌린다. 어느 누게에게든지 이로울 것이 없는 설정이지만 어쩔 수 없다. 이 세상에 트레이시 같은 여인들은 필립 같은 인간들과 사랑에 빠질 것이고, 필립 같은 남자들은 틀림없이 첼시아 같은 여인들과 놀아날 것이다. 사랑, 혹은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을 지킨다는 명목하에 우리의 본성을 부정하며 우리는 빙글빙글 불나방처럼 춤을 추면서 돌아간다. (p.415)
우리들을 구체적인 사실들을 들먹이면서 솔직한 감정을 숨기는 데 능하다. 아버지의 영향이 우리들 안에 그대로 살아 있는 것이다. 우리의 부모님은 돌아가신 후에도 우리를 어딘가 부족한 인간들로 만들고, 그런 식으로 그들은 아직 세상에서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이리라. (p.430)
사실 옮겨오고 싶은 부분이 더 있지만 너무 길어지니 이쯤에서 그만둬야겠다. 이 책 속의 저드에게는 나랑 똑같은 면이 하나 있다. 바로, 그가 공상에 잘 빠진다는 사실이다. 그는 젠과 별거중이고 외롭다. 길을 지나치다 만나는 여성들과 사랑에 빠지는 상상을 하는데, 그의 상상이 순식간에 속절없이 진행되서 웃음이 난다. 그러니까, 그럴 수 밖에 없는 상황은 그의 외로움을 증명하는거니 애틋하지만, 번번이 공상에 빠지고야마는 그를 온전히 이해할 있음에서 나오는 동료의식이랄까.
나는 고속도로를 타고 곧장 메인 주까지 차를 달리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에 도착하면 바닷가 한적한 마을을 찾아가서 조그만 집을 하나 빌리고 그렇게 새 출발을 하는거다. 메인 주의 겨울은 혹독하겠지만 지금 타고 있는 렉서스 승용차를 팔아 바퀴에 체인을 걸 수 있는 튼튼한 트럭을 사면 될 것이다. 직접 손을 써서 일하는 일자리를 얻고, 동네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고, 한쪽 눈이 멀어 버려진 라바도르종 강아지를 한 마리 데려다 기르면서, 고기를 잡는 사람들과 친구가 되는 거다. 그들은 가끔 내 출신지를 가지고 사람 좋은 농담들을 할 것이다. 어쩌면 나를 '뉴욕'이라고 부를지도 모른다. 시간이 지나면서 서서히 나는 동부 사투리를 쓰기 시작할 것이다. 그곳엔 어쩌면 나처럼 잊고 싶은 과거로부터 도망쳐 온 여인이 있을지도 모른다. 예쁘장하지만 상처 받기 쉬운 그녀와 내가 만나면 우리는 서로를 금방 알아보고 오직 버림받은 사람들에게나 가능한 열렬한 사랑에 빠질 것이다. 우리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마을 광장 잔디밭에서 거행될 우리 결혼식에는 마을 사람 모두가 참석할 것이다. 동네 식당 앞에 커다란 천막을 치고 가장 저렴한 메뉴는 아니지만 비싸지도 않은 음식으로 하객들을 대접할 것이다. (p.45)
그의 이런 공상은 앞으로도 몇 번이나 더 나온다. 나는 『순수의 시대』를 읽다가 파티에 갔던 공상을 했던 내가, 『그 숲에는 남자로 가득했네』를 읽다가 벌목꾼과 사랑에 빠지는 공상을 했던 내가 떠올랐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살아갈 방법을, 자신이 위기에 빠졌을 때 도망치는 방법을 나름대로 찾아내 살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그 공상속에 져스틴 팀버레이크가 등장하기도 하고 현빈이 등장하기도 한다. 제이슨 스태덤의 옷을 벗기기도 하지만, 뭐 어떠랴, 괜찮다. 나쁘지 않다.
어제 아빠는 나에게 '힐링'이 무슨 뜻이냐 물으셨다. 요즘 여기저기서 힐링힐링 하던데 대체 힐링이 무슨 뜻이냐고. 나는 그것은 치유하다, 구하다의 뜻이라고 말했다. 아빠 그러니까 우리가 상처를 받거나 지치거나 했을 때 각자 뭐 맛있는 걸 먹는다거나(응?), 뭐 암튼 어떤 방식으로 그게 치유가 될 때가 있잖아, 그럴 때 힐링된다고 말해. 라고. 그러자 아빠는 아, 그렇구나, 상처받은게 치유되는 걸 말하는거구나, 하셨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 물으셨다.
아니, 그러면 치유된다고 하면 되지 왜 힐링이라고 쓰냐?
어? 그..글쎄? 그건 나도 잘....
그러게. 왜 다들 힐링이라고 할까? 나는 힐링거리지 말아야겠다고 불쑥, 생각했다. 그리고 뚝배기에 나오는 김치찌개도 이제 그만 먹어야겠다. 더워서 땀을 뻘뻘 흘리느라 점심이 힘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