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온 책 박스에서 꺼낸 책들은 위와 같다. 알라딘 노트를 한 권 받았고, 시디도 한 장 포함되어 있다. 정란의 시디. 그리고 나는 오늘 일요일, 이 책들 중 한 권을 꺼내들었다. 그 책은 '메리 올리버'의 『완벽한 날들』이었다. 잠깐, 그 책을 읽다가 그 책속에서 이런 구절을 보고 책 읽기를 멈추었다.
개들을 데리고 물이 많이 빠진, 그리고 아직 빠지고 있는 해변을 걷고 있는데 얕은 물속에서 뒹구는 게 눈에 띈다. 나는 발목까지 차는 물속으로 걸어 들어간다. 고립된 아귀다. 아, 너무나도 그로테스크한 몸, 지독히도 불쾌한 입. 몸 전체 크기만큼 거대한 어둠의 문! 아귀의 몸 대부분이 입이다. 그런데도 그 초록 눈의 색깔은 얼마나 아름다운지! 에메랄드보다, 젖은 이끼보다, 제비꽃 잎사귀보다 더 순전한 초록이고 생기에 차서 반짝인다. 나는 어쩔 줄을 모른다. 그 가시와 이빨투성이 몸을 선뜻 집어 들 수가 없다. 한 남자가 아이 둘을 데리고 걸어온다. 그들도 물속으로 들어와 그 불행한 물고기를 구경한다. 그 남자가 나에게 어깨에 걸고 있는 개 목줄을 빌려달라고 하더니 아귀의 육중한 몸 아래로 목줄을 넣어 아귀를 살짝 들어 올려서, 말 없는 괴상한 개를 끌고 가듯 천천히 깊은 물로 인도한다. 만세! 그 창의적인 정신과 따뜻한 마음씨에 환호가 나온다. 아귀는 거대한 입을 쩍 벌리고 초록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몸이 물에 완전히 잠길 때까지 허우적거린다. 그러더니 개 목줄 올가미에서 날렵하게 빠져나가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pp.22-23)
이 부분을 읽는데 친구 k 가 생각났다. 왜인지는 잘 모르겠다. 아니 알 것도 같다. 그 친구 생각이 나서 더이상 책을 읽을 수가 없었다. 책을 덮고 인터넷 창을 열어 이 책을 주문했다. 주소는 그 친구의 회사였다. 아마도 그 친구는 예상하지 못했던 순간, 예상하지 못했던 책을, 예상하지 못했던 대상으로부터(그러니까 나) 받게 되겠지. 나는 그 안에 300원을 추가하여 메모를 넣었다. 그 메모에는 이렇게 썼다.
이 책을 받는 순간부터 앞으로의 많은 날들이 완벽한 순간이기를 바랍니다
라고.
어제는 친구와 극장에서 영화 『스토커』를 봤다. 예고편을 본 적은 있지만 그 누구의 리뷰도 읽지 않은 상황이었던 터라 내용의 전개가 당황스러웠고 무슨 말을 하려는지도 모르겠더라. 확실히 내 취향의 영화는 아니었다. 이 영화를 같이 본 친구는 예전에 『줄리아의 눈』을 함께 보기도 했는데, 이 영화가 그 영화와 비슷하게 기분 나쁘다고 했다. 나는 스토커는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내가 전혀 모르겠고, 그렇지만 줄리아의 눈은 엄청 좋았다고 했다. 영화 감상은 이게 끝이다.
그리고 찾은 알라딘 중고샵은 내가 그 시간에 간 적이 처음이었던가, 와, 사람이 엄청 많았다. 너무 많아서 정신이 하나도 없고 여유롭게 책을 고를 마음도 생기질 않았다. 그래도 꿋꿋하게 돌아다니다가 두 권의 책을 찾아들었다.
이응준의 책은 개정판이 나왔다는 걸 알고 보관함에 넣어두었었는데 운좋게도 찾아냈다. 움화화핫. 백영옥의 소설을 충동적으로 집어들긴 했는데, 잘산건지는 좀 갸웃하게 된다.
사라진 아내를 8년간이나 기다려오며 다른 여자와 데이트조차 하지 않았던 남자 '그레이스'는 정말이지 오랜만에 아름답고 우아한 여성에게 데이트 약속을 받아내고 그녀와 함께 펍에 앉아있게 됐다. 물론 얼마 같이 있지 못하고 다시 경찰서로 돌아가야 하지만, 이 순간은 얼마나 짜릿한가. 그와 함께 데이트를 하기 위해 나온 클레어에 대한 묘사다.
클레오는 아찔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금방 감은 것처럼 반짝거리는 머리카락을 어깨 위에 늘어뜨린 클레오는 고급스러운 밝은 색 스웨이드 재킷 안에 옅은 갈색 민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다. 그리고 가느다란 발목이 드러나는 멋스러운 하얀색 7부 청바지를 입고 납작한 흰색 슬리퍼를 신고 있었다. (p.417)
아, 이 장면을 읽는 나의 조용한 일요일에 갑자기 봄이 찾아온것 같았다. 데이트를 하기 위해 머리를 감고 화장을 하고 향수를 뿌리고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다 벗기를 반복하고.. 역시 가장 좋은 시간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가려는 그 과정에 있는 시간인것 같다. 설레이는 마음으로 약속장소로 간다는 건 얼마나 근사한가! 게다가 이 여자, 진짜 멋지다.
클레어의 잔이 비어 있었다.
"한 잔 더 할래?"
"오, 좋아요. 하지만 이번에는 제가 낼게요." 클레오가 말했다.
"1시간 20분이나 기다리게 했어. 술은 내가 사. 다른 소리는 하지 마!"
"그럼 다음 번 데이트에는 제가 사요?"
두 사람은 서로 웃으며 눈을 마주쳤다.
"좋아." (p.422)
자연스럽게 다음번의 데이트까지 약속하는 여자라니. 아 멋져.. 아릅다고 근사하다. 아, 이 여자 클레어는 근사하고, 그레이스도 괜춘하지만, 이 책이 썩 괜찮지는 않다. 시작과 전개가 흥미롭고 사소한것까지 세심하게 써낸 작가의 노력은 대단하다고 생각하지만, 결말이 갑자기 허무해지고 말았달까. 이 책도 시리즈가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레이스와 클레어의 얘기가 궁금해서 시리즈를 읽고 싶어졌다. 그러나 나는 『스노우맨』을 읽고서도, 『백설공주에게 죽음을』을 읽고서도, 『인어의 노래』를 읽고서도 그 다음 책들을 읽지 않았었다. 그러니 어찌될지는 모르겠다.
지긋지긋한 비염으로 약을 먹고 초저녁에 잠이 들었다. 핸드폰이 울려서 깼다. 발신번호는 내가 모르는 번호였다. 누굴까, 생각하며 전화를 받았다. 상대는 내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을 댔다. 잘못걸린 전화였다. 나는 잘못 걸린 전화로 인해 잠에서 깼고, 깨고나니 젠장, 배가 고프다. 하아-
아직 일요일이 몇시간 더 남아있다. 남은 일요일은 메리 올리버를 읽으며 보내야겠다. 『완벽한 날들』을 다 읽고 책장을 덮었을 때, 내 앞에 남아있는 날들도 완벽할 거라는 확신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밤이다. 그리고,
비가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