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에 appletreeje 님이 올려주신 서문의 일부만 보고도 무척 읽고 싶어졌다. 책을 펼쳐들고 기대에 가득찬 서문을
읽어내려갔다. 서문은 생각보다 길었으나 내가 기대한 그대로였다. 그리고 나는 이런 부분을 서문에서 보게 된다.
서른 중반 즈음부터다. 결혼과 출산과 육아를 거치면서 삶이 복잡계 수준으로 얽혔고, 이성복 시인의 시구대로 "몇 개의 돌부리 같은
사건"을 지나오면서 나는 더 이상 한갓 취향으로 시를 읽을 수 없었다. 생이 기울수록 시가 절실했다. 일을 마치고 늦은 밤
귀가하면 식구들은 잠들고 집이 난장판이 되어 있곤 했다. 식탁 위에는 라면 국물이 반쯤 남은 냄비와 뚜껑도 닫지 않은 김치
보시기, 고춧가루 묻은 젓가락이 엑스자로 놓여 있었다. 남편과 아이들이 벗은 양말은 발 아래 낙엽처럼 채였다. 텔레비전은 저 혼자
무심하게 떠들고 있었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을 때면, 나는 책꽂이 앞으로 가서 주저앉았다. 손에
잡히는 시집을 빼서 시를 읽었다. 정신의 우물가에 앉아 한 삼십 분씩 시를 읽으면서 시간을 보냈다. 왜 그랬을까. 나는 기계적으로
일하는 노예가 아니라 사유하는 인간임을 느끼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서문中)
머릿속에 그림이 그려졌다.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몰라 아무것도 손댈 수가 없는 그 상황에서 책장 앞으로 가는 일, 그 앞에 주저 앉아 시집을 꺼내는 일, 그렇게 꺼낸 시집을 펼쳐 그 안에 있는 시를 읽는 일. 위로라는 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건만, 나는 그 순간에 이 책속의 저자가 얼마나 위로를 받았을까, 생각했다. 그순간 그녀에게 시집이 있었다는 건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손을 뻗으면 닿는 곳에 시집에 놓여있다는 게 말이다.
아직 발견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겠지만, 우린 저마다 찾아낸 각자를 위로하는 방식이 있다. 몸과 마음이 지쳤을 때, 혹은 영혼이 너덜너덜해졌다고 느꼈을 때, 나도 책장 앞으로 간 적이 여러번 있다. 물론 맛있는 걸 먹고 풀릴 때도 있고 음악을 들으며 가만히 누워있으면서 풀릴 때도 있다. 그러나 어떤 날엔 반드시 잘 읽혀지는 글로 쓰여진 아주 잘 쓴 글이 읽고 싶어졌다. 그 글은 반드시 기쁜 내용일 필요는 없었다. 행복과 위로를 말할 필요도 역시 없었다. 그것은 그저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내가 좋아하는 소설이면 됐다. 어떤 날에는 정미경의 글을 읽고 아 이제 됐다, 싶을 때도 있었지만, 사실 대부분의 시간엔 피츠제럴드를 꺼내 읽었다. 어떤 새벽엔 다니엘 글라타우어를 읽고 어떤 밤에는 줌파 라히리를 읽었다.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는 말해 무엇할까. 나는 지친 하루를 마감하며 시집을 꺼내 읽지는 않지만(내 책장에 시집은 꽤 빈약하다), 시집을 꺼내 읽는 그녀의 마음이 생생하게 읽혔다. 그녀에게 시집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정말 다행이라고.
게다가 시를 잘 읽어내지 못하는 내가 그녀의 산문속에 섞인 시를 읽노라니 그 시들이 다 좋게 느껴지는게 아닌가. 아, 나는 시를 시 자체로는 잘 느끼지 못하지만 누군가의 일상이나 설명과 곁들여진다면 좀 더 잘 읽어낼 수 있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 사이사이의 시를 읽다가 내가 아는 시가 나오면 반가웠다. 당연한 소리. 그 중 어떤 시들은 유독 가슴에 와 닿았다.
삶이라는 극지
그대라는 대륙
목표도 없이, 계획도 없이 그대를 여행하는 것이 이번 생을 횡단하는 나의 본질적 계획이었네
- 박정대의 시 「사랑과 열병의 화학적 근원」 부분
아니, 박정대라고? 박정대라면 내가 시집을 호기롭게 샀다가 한 번 읽어보고는 으응, 뭔 말이지, 싶어서는 다시 팔아버린 시집의 그 시인이 아닌가. 그런데 이런..시가 있었던가. 이 시 부분을 사진 찍어 여동생에게 보냈더니 무척 좋다며 이 시인의 다른 시들이 궁금하다고 한다. 난 내가 가진 시집을 팔아버렸다고 대답했다. orz 다시...사서 책장에 꽂아두어야 할까.
대체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의 예외없이, 유재하와 김광석 그리고 김수영을 좋아한다. 나는 그들에 대해 아는 것도 없고 그다지 관심도 없다. 노래를 듣거나 시를 읽고 좋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그건 그저 노래였고 시였다. 나에게는 별다른 감흥을 주지 않는. 그런데 어제 읽은 이 책 속의 김수영의 시는 무언가 달랐다.
혁명은 안 되고 나는 방만 바꾸었지만
나의 입속에는 달콤한 의지의 잔재 대신에
다시 쓰디쓴 담뱃진 냄새만 되살아났지만
방을 잃고 낙서를 잃고 기대를 잃고
노래를 잃고 가벼움마저 잃어도
이제 나는 무엇인지 모르게 기쁘고
나의 가슴은 이유 없이 풍성하다
-김수영의 시 「그 방을 생각하며」 부분
어젯밤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서 나도 이제 시를 한 편씩 필사해볼까, 하는 생각을 했다. 시를 잘 알지도 못하고 이해도 못하는 나이지만, 한 편씩 필사하다 보면 이해력도 좀 자라지 않을까, 싶었던 것. 또한 나 역시도 시집에서 위로를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하면서. 게다가 시를 읽고 이해하고 외운다는 것은 너무나 근사하지 않은가! 책 속에서 저자가 후배랑 카페에서 이야기하다가 '저기 이장욱 시인이요' 라고 하는 후배의 말에 고개를 돌려보니 이장욱 시인도 같은 카페에서 차를 마시고 있었다고 하는 부분이 있다. 그것도 아는 사람끼리의 얘기지, 만약 누군가 내 앞에서 우리 테이블 옆에 이장욱 시인 앉아있다, 라고 한다면 나는 그야말로 알아보지도 못할 것이며 말줄임표만 계속 떠오르지 않을까. 어쨌든 시를 필사할것인가 말것인가, 하고 생각을 해보는데 나는 도무지 내가 필사할 사람으로 생각되질 않는거다. 수첩을 사도, 그리고 알라딘에서 주는 노트를 받아도 그게 그저 빈 노트로 남아있는거지. 그런참에 오늘 라주미힌님이 올리신 페이퍼를 봤다.
바로 요기
오, 그래. 시를 필사하지 말고 빈 노트를 수단에 보내자, 라고 생각했다. 일단 회사에 있던 빈 노트들을 챙겨두었다. 집에도 펭귄에서 받은 노트가 두 권쯤 있을것이고 그 외에 다른 노트들도 있을것이다. 내가 노트를 가장 유용하게 쓰는 법은 시를 필사하는게 아니라 수단에 보내는 것 같다.
얼마전에 읽은 『서른 살의 집』은 언젠가 서울이 아닌 곳에서 집을 짓고 살고 싶다고 생각하며 고양이를 키우는 직장 동료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며 내밀었다. 나도 좋게 읽었지만 나보다 그녀가 좋아할 것 같아서. 아니나다를까, 읽다말고 그 책의 저자 홈페이지에 접속도 해보고 그랬단다. 이 책, 『올드걸의 시집』은 여동생에게 주어야겠다. 천천히 읽노라면 여동생은 아마도 위로를 받다가 웃기도 하다가 할 것 같다.
나는 이제 다시 소설을 읽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서 책장에서 꺼냈는데, 너무 두꺼워서 다시 넣어놓을까 싶다. 들고 다니려니까 너무 무거워...아, 요즘 잠들기 전에는 이 책을 보고 있다.
엊그제는 귄터 그라스를, 어제는 쉼보르스카를 읽었다. 사진도 인터뷰도 매우 흡족했는데, 오타가 자꾸..-_-
매일 한 명씩 골라 읽어야지, 하고 있는데 오늘은 회사 송년회다. 술에 쩔어 잠들겠지..
세상에 시가 있어서 참 좋다. 그리고 시를 읽고 위로 받는 사람들이 있어서 좋다. 그게 그냥 막 좋고 기쁘고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