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처음은 서투르다. 그걸 알면서도 그 서투름에 대해 간혹은 화가난다. 이 책을 읽으면서도 그랬다. 처음이니 당연히 이렇지, 라는 생각보다는 화가 먼저 났다. 주인공인 루카스가 지독하게 서투른 연애에 대해서.
루카스는 스무살이다.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여자와 키스를 해본적도 없다. 오히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는것이 몹시도 힘겨운 청년이다. 그런 그가 오스트레일리아로 여행을 떠난다. 거기서 그는 낯선 사람들을 만나 자신의 수줍은 성격을 조금이나마 고칠 수 있을거라고 기대한다. 그러나 그는 좀처럼 바뀌질 않아 좌절한다. 역시나 그곳에서도 타인과 대화하는 것은 어렵기만하다. 그러다가 도로시를 만났다. 도로시는 그의 친구가 되어주고 연인이 되어준다. 그의 첫키스 상대가 되어주고 그를 사랑한다고 말해주고 그의 섹스 상대도 되어준다. 루카스는 도로시를 사랑한다. 물론 그녀가 키스를 해주고 섹스를 해줘서가 아니다. 진심으로 그녀를 사랑한다. 그녀의 아픔을 나누고 싶고 그녀와 떨어져 있는게 싫다.
그래서 그는 그녀와 다툰다. 그녀의 우울한 기분을 달래주고 싶었을 뿐인데 그녀는 혼자있게 좀 해달라고 한다. 그는 혼자있게 해달라는 그녀에게 화가난다. 그녀와 다시 독일에서 만나기로 했지만 그녀와 잠시 호주에서 떨어져있는게 불안하고 두렵다. 다시는 만나지 못할까봐 그는 눈물을 흘린다.
어휴, 왜이렇게 짜증나게 굴지? 왜 혼자 있게 해달란걸 들어주지 않아? 영화, 『브로큰 잉글리쉬』에서의 남자는 여자가 우울해할 때 '내가 있어줄까요 비켜줄까요' 라고 묻는데, 루카스, 너는 왜 그렇게 해주지 못해? 왜이렇게 서투르고 바보같이 징징짜는거야? 나는 짜증이났지만, 그가 스무살이란 사실이, 그러니까 그가 사랑을 처음 겪어본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그래, 그는 서투른게 당연하다. 당연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는 앞으로 살아가면서, 또다른 사랑을 만나고 또다른 이별을 겪으면서 달라질 것이다. 조금 더 성숙해질 것이고, 여자를 가끔은 혼자있게 하는게 더 낫다는 사실도 알게 될 것이다.
그래, 그는 점점 더 괜찮은 연인이 될 것이다. 그는 배울 수 있는 청년이니까. 독서의 참맛을 알게됐듯이 연애에 대해서도 또 사랑에 대해서도 알게 될 것이다.
아냐를 알기 전까지는 책을 싫어했다. 나에게 독서는 학교, 독일어 수업, 쿤체 선생님을 의미했다. 그 멍청한 선생은 우리에게 늘 엄청나게 지루한 책들을 읽으라고 강요했다. 책 읽기가 즐거울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은, 어느 날 수영장에서 아냐가 내 옆에 누워 뭔가 우스능 책을 읽고 있었던 때였다. 아냐는 쉴 새 없이 웃었는데 그 모습을 보자 나도 호기심이 제법 생겼다. 게다가 아냐가 관심 있는 모든 것들에 나도 관심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아냐에게 그 책을 빌려달라고 했다. 이틀 뒤 나는 완전히 감염되었다. 나는 독서열에 사로잡혀 아냐의 서가를 야금야금 약탈해갔다. 존 어빙, 찰스 디킨스, 도스토예프스키, 그리고 나의 스타인벡까지 그 모두를 먹어치웠다. 책을 향한 나의 배고픔은 끝이 없었다. (pp.54-55)
짝사랑하던 여자 때문에 책을 읽게 되었지만, 루카스는 순수하게 책에 빠지게 됐다. 그리고 책을 제대로 읽는 청년이 되어, 오스트레일리아에서 독일로 돌아가기 전에, 그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서점에서 아주 많은 책을 구입하기까지 한다. 물론, 오스트레일리아로 갈 때도 책들을 가져갔고.
당신의 머리는 배우가 되고, 당신의 심장은 관객이 되어 모두와 함께 사랑하고 웃고 동정한다.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작가가 당신 머릿속에 들어가 심장을 건드리는 데 성공한다면 말이다. 예를 들어, 도스토예프스키처럼. 책을 읽기 시작할 때는 잘 모른다. 처음 몇 쪽은 지루하기까지 해서 '이게 다 뭐야?' 하고 스스로에게 물어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책의 매력에 빠지게 되면 더 이상 손을 놓을 수 없게 된다. 도스토예프스키는 당신의 뇌를 꽉 움켜쥐고서 마지막 쪽의 마지막 낱말을 소리 없이 발음하기 전까지 놔주지 않을 것이다. 이 러시아 할아버지, 정말 세계 최고다. (p.55)
그의 이 순수한 책에 대한 열정이 무척 좋지 않은가! 이 부분을 읽노라면 도스토예프스키를 당장 찾아 읽고 싶어진단말이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건 다를 수 있다. 수영이든 무용이든 그림과 음악을 감상하는 것이든 그게 뭐든 어떤 사람은 좋아할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관심이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책을 읽는것에 대해서라면 관심 없는 사람들에 대해서 나는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이렇게 재미있는데, 좀 읽어보지. 좀 읽어보면 책이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 수 있을텐데, 하는 안타까운 마음. 책을 전혀 읽어보지 않은 사람들이라면 일단 쉽게 책장이 넘어가는 책들로 시작하면 좋을텐데, 그러면서 잘 쓰여진 문장들이 가득한 책들로. 국내 작가들의 작품으로 시작하는 것도 좋을테고. 그리고 다른 책은 잘 읽을 수 있지만 소설 읽기가 좀 재미없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문장 부호를 충실하게 지켜가면서, 따라가면서 읽으세요.
라고. 따옴표에서는 정말 대화체로, 느낌표에서는 정말 감탄하거나 놀라듯이, 쉼표에서는 꼭 쉬어주고. 그러면 책은, 소설은, 정말정말 재미있는데!! 그렇게 분장 부호에 충실하게 읽다보면 머릿속으로 그림도 그려지는데, 그러면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펼쳐지는데!!
자, 다시.
위에서 말했듯이 루카스는 짝사랑을 했다. 물론 루카스는 그것이 짝사랑인줄을 미처 몰랐다. 함께 지내는 시간이 많고 이야기를 즐겁게 나누고, 그래서 상대인 아냐도 나를 똑같은 마음으로 대하는 줄 알았다. 아, 이부분을 읽는데 도무지 루카스와 내가 분리되지 않는다. 나는 루카스가 되고 루카스는 내가 된다.
나는 1년이 넘게 아냐를 사랑했다. 말 한 마디 못한 채로. 그 시절 우리는 여러 날 밤을 함께 앉아서 이야기를 나눴고, 그렇게 해서 결국 좋은 친구가 되었다. 아주 좋은 친구, 너무 좋아서 그 이상이 되기는 어려운 친구 사이 말이다. 그렇지만 그 사실을 나는 결코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희망은 쉽게 꺼지지 않는 법이다. 아냐가 내 몸을 살짝 건드릴 때마다 비록 실수로 발을 밟은 것일 뿐이라 해도 나의 희망은 부풀어 올랐고, 내가 사랑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어쩌면 아냐도 나를 사랑하게 될지도 모른다고 믿게 되었다. 그 시절에는 하루에 세번씩 아냐가 내 얼굴을 밟아도 괜찮을 것 같았다. 오히려 나는 그것이 애정의 증거라며 기뻐했을 것이다. (pp.64-65)
아, 그만해, 루카스. 이러지마, 루카스. 나 괴로워. 나로하여금 이런건 그만 읽게 해줘. 더이상 이 슬픈 기억을 떠올리지 마. 흑흑. 아, 그런데, 점점..
그러다가 더 이상 참을 수 없게 되었다. 아냐도 알아야 했다. 나는 열두 장이나 되는 긴 편지를 써서 2리터의 용기를 마신 후 아냐의 우편함에 넣었다.
어리석었다는 건 안다. 그때도 알고 있었다. 그 다음날 아침 아냐가 기쁨의 눈물을 흘리며 두 팔을 활짝 펴고서 우리 집 문 앞에 서 있지 않으리란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그럼에도 나는 아냐를 기다렸다. 아냐는 결국 오긴 했지만, 그저 답장을 내 우편함에 넣기 위해서였다. "루카스에게 ‥‥‥ 정말 놀랐어 ‥‥‥ 아름다운 편지였어 ‥‥‥ 정말 미안해 ‥‥‥ 안타깝게도 같은 감정이 아니야 ‥‥‥ 친구로 지냈으면 ‥‥‥." (pp.65)
나는 이순간, 루카스가 되어 슬픔에 쩔었다. 정말이지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2리터의 용기, 그것만으로도 안되는게 세상엔 많은거다. 특히 사랑에 대해서는. 본능적으로 예스란 답을 받지 못할것을 나도 알았는데, 그렇다고 해서 답을 기다리지 않는건 아니다. 알면서도 고백하고 그리고 답을 기다리는 그 마음이라니. 그리고 저 답장 꼬라지좀 봐라. 정말 놀랐어, 라니. 아냐, 정말 놀랐는가? 정말 몰랐는가? 둘이 처음 본 것도 아닌데? 그토록 오랜 시간을 함께 해오면서 정말로 루카스가 너를 특별하게 본다는 걸 몰랐다고? 그걸 알면서 그게 좋아 모르는 척 했던건 아니고? 나의 경험 앞에서 내 남동생이 화를 냈던...... 아니, 이 얘긴 그만하자. 이 쓸쓸한 가을날에 이런 얘기로 더이상 가슴을 후벼파진 말자. 노래 한 곡에도 처절해지는 가을날인데, 어쩌자고 이런 일들을 떠올리는가. 안 된다, 그러지말자.
오늘 아침 버스안에서는 하림의 출국을 들었다. 가사를 제대로 듣긴 오늘이 처음이었는데, 아마도 가사를 듣지 못해서 나는 그동안 이 노래에 대해 마구 좋다는 생각을 못했엇던가 보다. 오늘 들은 하림의 출국은, 오, 세상에, 절절함의 극치였다.
기어코 떠나버린 사람아 편안히 가렴
날으는 저 하늘에 미련따윈 던져버리고
바뀌어버린 하루에 익숙해 져봐
내게 니가 없는 하루만큼 낯설테니까
모두 이별하는 사람들 그곳에 나 우두커니
어울리는게 우리 정말 헤어졌나봐
모르게 바라보았어
니가 떠난 모습 너의 가족 멀리서 손 흔들어 주었지
하늘에 니가 더 가까이 있으니 기도해 주겠니
떠올리지 않게 흐느끼지 않게 무관심한 가슴 가질수 있게..
도착하면 마지막 전화 한번만
기운찬 목소리로 잘 왔다고 인사 한번만
그저 그것 뿐이면 돼
습관처럼 알고 싶던 익숙한 너의 안부 거기까지만.....
다른눈의 사람들 속에서 외로워져도 서러워져도
나를 찾지마.....
아, 가을에 들으면 안되는데 오늘은 하림의 출국을 반복해 들었고 엊그제는 휘성의 안되나요를 반복해 들었다. 화창한 날 들어도 눈물이 샘솟는 곡들인데 어쩌자고..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도 있고 떠나가기도 한다. 그러나 다시 찾아오기도 한다. 루카스는 새로운 연인을 만났고, 나는 오늘 점심 메뉴나 고민해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