텔레비젼을 거의 보지 않는 탓에 어느 드라마가 어느 방송에서 하고 있는지도 잘 모르고 지내고 있다. 그러다가 며칠전에 여동생이 재미있다고 해서 『신사의 품격』을 한 회분 보게 되었는데, 아, 너무 품격 떨어지는 드라마라 깜짝 놀랐다. 장동건이 분한 '김도진'이란 역할은 사실 장동건이 아니라면 소화해낼 수 없을 만한 재수없는 인물인데, 그 드라마의 모든 인물들이 현실과는 좀 동떨어진 인물들인 것 같다. 나이 마흔이 되어서도 친구의 문제는 내 문제, 라며 해결해줄 사람들이 있던가. 마치 학원물 만화의 한 부분을 옮겨놓은 것만큼 어처구니 없는 드라마라서 신사의 품격은 품격이 떨어지는 군, 하고 혼자 생각했었는데, 오늘 돈까스를 안주 삼아 다시 오랜만에 보게 된 신사의 품격은 재미있었다.

 

재미있는 건 그들의 캐릭터가 달라져서도 아니었고 드라마가 유치함을 벗어던져서도 아니었다. 김하늘과 장동건, 그들이 처음으로 연애를 시작하기 때문이었다. 그 설레임이 그대로 느껴져서. 그게, 그런거 아닌가. 나는 이 사람을 좋아해, 라고 하는게 몇년몇월며칠, 부터 좋아할거라고 계획하게 되는 것도 아니고, 언제부터 좋아졌어? 라고 물음에 그때부터지, 라고 대답하기도 곤란하고. 그런데 그 둘이, 어느 한쪽의 짝사랑으로 시작했던 그 연애가, 이제 펼쳐지려고 하는것이다.

 

연애가 시작되기 위해서는 어느 한쪽의 시작이 있어야 한다. 나와 너는 처음 만난 순간 처음부터 동시에 쑝갔고, 그래서 우리의 이 만남은 자연스러웠지, 는 지나치게 영화스럽고 가능성도 별로 없다. 어느 한쪽은 분명 먼저 말을 걸고, 데이트를 신청하고, 짝사랑을 스스로 자각하는걸로 남녀간의 연애는 시작된다. 그 짝사랑이 나만의 사랑이었다면 연애는 불발에 그치지만, 사실 그쪽도 나름대로 나에 대해 고민을 하고 있었다면 이 연애는 이제,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내가 신사의 품격을 보기전에 이 책을 읽지 않았다면, 이 드라마가 그렇게까지 재미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샬레인 해리스의 새로운 시리즈. 나는 이 책 속의 주인공이 수키를 닮았으면 어쩌나 자꾸만 고민했는데, 작가도 그것을 고민한건지, 이 책속의 여자주인공은 검은머리 검은 눈동자에 168센티의 키를 가지고 있다. 수키와는 다르다. 외모만으로 다르다고하기엔 부족한감이 없지 않지만, 이 책속의 주인공은 자신의 입으로 스스로 말하기 보다는 자신과 함께 다니는 오빠가 더 많은 말들을 대신해주고 있다. 아직 절반도 채 읽지 못해 이 책이 어떻다고 말할수는 없지만, 약속이 취소된 토요일, 나는 이 책을 읽다가 그만, 설레이고 말았다.

 

 


"홀리스입니다. 저녁을 같이하면 어떨까 싶어서요."

'메리 넬, 톨리버하고 같이 더블데이트를 할까요? 재미있겠네요.' 나는 입 밖으로 나오려는 이 말을 막기 위해 입술을 깨물면서 "저녁 약속이 있는데요"라고 머뭇거리듯 말했다. 딱 잘라 거절해야 하는 걸 알면서도.

"식사 후에 술 한잔은요?"

"좋아요."나는 잠시 생각한 뒤 조심스럽게 말했다.

"제가 모텔로 모시러 가죠. 여덟 시 어때요?"

"좋아요, 이따 봬요."

"이따 봅시다.

나는 전화를 끊었다. (p.134)

 

 

침대위에서 이 책을 읽는데 이 장면이 너무나 낭만적으로 읽혀졌다. 데이트의 정석같았다. 저녁을 함께할래요, 라고 말하는게. 그러나 나는 저녁 약속이 있다고 거절하자 재차 묻는다. 술 한잔은요, 하고. 나는 자고로 적극적인 남자가 예쁜 여자를 차지하게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확신한다. 저녁 약속 있어요, 라고 말할 때 아 아쉽네요 이만, 이라고 하면 그 약속은 불발에 그치며 더이상 진행되기 힘들다. 그러나 그 후의 술은요, 라고 제안해주니 나로서는 거절할 도리가 없는게 아닌가. 밥을 먹고서도 만날 수 있는 남자라면 어떤 일이든 못만나겠는가. 밥을 같이 먹을수도 있고 술을 같이 마실수도 있다니 근사하지 않은가. 너를 데리러 갈게, 라고 말하면 나는 내 집에서 그가 데리러오기 전까지 화장을 하고 거울을 보고 설레이는 마음이 된다. 나는 이 책의 이 부분을 읽는데 첫데이트 생각이 나면서 설레였다. 맛있는 것 사줄게, 저녁 먹자, 술 마시지 않을래, 그 모든 평범한 말들이 평범하지 않은 그 순간, 첫데이트를 수락하는 바로 그 순간.

 

 

 

나의 데이트들이 떠올랐다. 어느 여름에 나와 그는 공포영화를 보기로 했다. 우리는 아직 연인이라고 불리기엔 서투른 단계에 있었고, 공포영화를 예매해두고 극장앞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나는 예쁘게 보이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차 있었다. 왼쪽에서 올까 오른쪽에서 올까, 두리번거리며 내 모습을 가다듬고 있는데, 그는 갑자기 뒤에서 오면서 나를 툭, 쳤다.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고, 내 뒷모습을 그가 먼저 봤다는 사실에 긴장하고 불편했다. 왜 거기에서 오냐고 묻자 그는 차를대고 왔다고 했다. 주차장은 내 뒤쪽에 있었던거다. 제기랄. 뒤쪽에서 올줄은 몰랐는데. 욕 튀어나오네.

 

어느 가을의 데이트에서 한 남자는 서점에서 만나자고 했다. 나는 길치에 방향치인지라 서점 자체를 잘못찾았고, 뒤늦게 찾았을 때에는 많은 시간이 흐른후였다. 그는 내게 어디냐고 물었고 나는 이제 도착하긴 했지만 여기엔 출입구가 많아서 내가 있는 곳이 어느문인지 모르겠다고 말했다. 그는 너의 옆에 어떤것들이 있냐고 묻고는 거기 가만있으라고 했다. 내가 너를 데리러 갈게, 라고. 그리고는 내가 고른 책들을 계산해주었다.

 

어느 겨울의 데이트에서 그 남자는 약속시간보다 빨리 왔다. 나는 아직 좀 있어야 끝났다고 말했고 그는 서점에 들르겠다고 했다. 내가 끝나서 약속장소에 도착했을 때, 그는 시간계산을 잘못해 아직 도착하지 못하고 있었고, 결국 그는 나에게 줄 책을 산 뒤에 뛰어왔다. 그는 알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가 내게로 뛰어오는 모습을 봤다. 여전히 선명히 기억한다. 나는 그날 그가 내게 준 책을 반 년도 훨씬 넘게 가방에 넣고 다녔다. 내게 그 책은, 그 남자였다. 그남자에게 그 책은, 어쩌면 나였을 것이고. 나는 그 겨울을 기억한다.

 

 

 

원래 내가 쓰려던 페이퍼는 다른 페이퍼였는데, 술김에 엉뚱한 페이퍼를 써버리고 말았다. 이런. 밤 과 데이트는 사람을 코너로 모는 경향이 있다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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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eamout 2012-07-01 0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타 소리가 듣기 좋네요. 조용한 이 시간에 아주 잘 어울려요.

다락방 2012-07-01 17:54   좋아요 0 | URL
어제 드라마 보다가 음악이 좋길래 음악검색 했어요.
:)

이진 2012-07-01 01: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벽에 읽기에 참 달달하고 좋은 글이에요. 막 은희경의 소설을 다 읽고는 반쯤 잠에 빠져있어요. 꿈에서나마 데이트를 하길 바라며 이만 굳밤!

다락방 2012-07-01 17:55   좋아요 0 | URL
은희경의 소설을 다 읽었군요! 드디어!
좋은밤 보냈어요, 소이진님? 어느새 또다른 밤이 다가왔어요.

2012-07-0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전 여전히 이 드라마에 흥미를 못 느끼고 있어요. 출판사랑 짜고 넣는 PPL도 별로고..
그래도 다락방님 글은 좋네요. :)

다락방 2012-07-01 17:55   좋아요 0 | URL
저도 이 드라마 진짜 짜증난다고 볼때마다 생각해요. 보면서 막 부끄러워요. 아....뭐냐...이게 뭐냐....이러면서요.

치니 2012-07-01 1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드라마든 글이든, 어떤 식으로든 말씀하신 품격이 드러나고 작가의 평소 사상(?)이 조금이나마 반영된다고(사상이란 말이 좀 과하다면,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정도로 바꿔서 ^-^;;) 생각하는 저는, 신사의 품격을 도저히 못 보겠어요. 제게는 그 어떤 유치한 드라마보다 손발이 오그라드는 장면이 많고 못마땅한 사상이 많아서. 김은숙 작가는 아무리 봐도 저랑 코드가 안 맞는 듯. ㅎ (시크릿가든 때도 저 혼자 그렇게까지 재미있어 하지 않았던 기억이 또 나네요)

다락방 2012-07-01 17:56   좋아요 0 | URL
저는 코드가 안맞는다기 보다는 드라마가 짜증나요. 아, 이 작가가 시크릿가든 작가에요?
저는 이 드라마 몇번 보지도 않았지만 친구넷이 모인 장면들에선 어김없이 유치함의 절정을 찍는다고 생각해요. 가장 말이 안되는 장면이고 말씀하신대로 손발이 오그라들어서 원... 위에도 썼지만, 진짜 드라마가 부끄러워요. --;;

... 2012-07-02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옆 무덤의 남자, 다 읽었어요! 전반적으로 다 좋았는데 마지막 부분은 좀 엽기스러웠다는...

다락방 2012-07-02 17:07   좋아요 0 | URL
저는 그 마지막도 좋았어요, 브론테님. 음, 저를 엽기적이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을것 같은데, 저는 실제로 그런 생각을 해본적이 있거든요. 이 책 속의 여자가 마지막에 원했던 그런거요. 그래서 엽기적이라는 생각은 들질 않더라고요. 하핫;;
오히려 가볍게 생각했는데 생각보다 여운이 길어서 좋았어요.

아무개 2012-07-02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신사의 품격 몇번 봤는데 당췌 누가 신사라는건지 품격은 또 어디에? 뭐 걍 보지 말자..이랬었어요.

하는일 없이 슝~하고 지나가 버린 아쉬운 주말. 그리고 월욜이네요.
차라리 정신 없이 바쁜 하루가 되었음 좋겠어요. ㅡ..ㅡ::::::::

다락방 2012-07-02 17:13   좋아요 0 | URL
나이 많은 배우들 가지고 유치하게 드라마를 만들어놨어요. 그런데 제 친구가 제 글 보더니 신사의품격 욕하지 말라 그랬어요. 테러당한다고;; 하하하하핫 안해야지.

저는 미친듯이 일하고 정신차려보니 퇴근 한 시간 전이네요. 어휴. 월요일이 이렇게 가고 있어요, 마중물님. 어휴, 어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