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에 존 쿳시를 읽는 일은 그 누구에게도 추천할 수가 없다. 나 스스로도 그렇게 한 것에 대해 후회를 하고 있는 중이니까. 돌이켜보니 존 쿳시의 『추락』을 읽은것도 일요일이었다. 한숨 나는 밤을 맞이하게 되는 건 존 쿳시 때문이고 하필이면 일요일에 존 쿳시를 택한 나 때문이다. 젠장. 왜 일요일에, 그러니까 월요일이 다가올거라는 짜증스런 우울함에 사로잡혀 있을때에 존 쿳시를 읽은걸까. 대체 왜.
이 소설은 어렵다. 내가 기존에 읽었던 존 쿳시의 다른 책인 『추락』과 『슬로우 맨』에 비해서도 어렵고 다른 작가들의 다른 많은 소설들에 비해서도 어렵다. 여자가 도끼로 찍어 죽였던 아버지가 살아있기도 하고 총으로 쏴 죽였던 아버지가 살아있기도 하는 장면들을 읽으며 나는 혼란스러웠다. 뭐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고 실재하고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상상인 것이지?
이 소설은 또 무섭다. 아버지를 죽이는 딸이 나와서 무섭냐고? 아니다. 어떤게 더 끔찍한지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에 무섭다. 부조리하고 억지스러운 것들을 참아가며 함께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지, 그런것들을 없애버리고 혼자서 묵묵하게 살아가는 것이 더 나은지, 그것을 상상하는것이 무섭다. 괴롭지만 함께 살아가는 것 혹은 혼자서 평생을 외롭게 지내는 것. 적어도 이 책안에서는 어느 한쪽에 대해 그러지 말지 그랬어, 라는 생각을 할 수가 없다. 이것을 선택해도 그 삶이 괴롭고 저것을 선택해도 그 삶이 괴롭다. 이 책, 『나라의 심장부에서』를 읽는것은 무섭고 끔찍하며 괴로운 일이다. 『추락』을 읽었을 때처럼 쉽게 이 책으로부터 빠져나올 수가 없고, 외면하기가 힘이 들고, 잊을 수도 없고, 가슴 한켠이묵직하다. 다시 말하지만 괴롭다. 또 다시 말하지만, 아무에게도 이 책을 추천할 수가 없다. 적어도 일요일에는.
그러나 존 쿳시 책을 읽기 전에도 나의 일요일은 죽어 있었다. 그건, 내가 이 책, 『모든 죽은 것』을 읽었기 때문이다.
잔인한 장면들이 나오긴 하지만 이 책은 처음부터 재미있었다. 처음부터 재미있는 책은 오랜만인것 같아 나는 무척 신이 났었다. '존 코널리'의 다른 책들이 있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에 더 신이 났다. 이 책을 다 읽으면 이 작가의 다른 책을 읽을 수 있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그러나 나는 그의 다른 책들을 읽기가 꺼려지고 말았다.
이 책은 두껍다. 그 두꺼운 책에 자꾸만 새로운 사람들이 등장한다. 어느 순간부터 나는 혼란스럽다. 이 인물이 저 인물과 섞이고 또다른 인물에 대해서는 기억나지 않는다. 이 사람이 기존에 언급됐던 사람인가? 아, 어지럽다. 왜이리 많은 사람이 등장해야 했을까. 아니, 세상에는 더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니 이정도로 많은 인물들의 등장은 당연한 것인가.
그러나 이 책이 지긋지긋해지는 건, 너무나 많은 죽음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제목이 모든 죽은 것, 이라서일까. 나중엔 고개를 저을 정도로 죽음들이 곳곳에서 튀어나온다. 집에서도 길에서도 물 속에서도 죽음이 튀어나온다. 나는 어느 순간부터 이 죽음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죽음이 나오고 또 죽음이 나오고 계속 죽음이 나온다. 연쇄살인범이 나오는 소설이니 죽음이 멈추지 않는것이 당연하다 치더라도, 아, 그래도 그 모든 죽음들이 너무 끔찍하다. 이 인물들까지 죽이는 건 좀 심한거 아니야, 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된다. 누구의 죽음인들 심하지 않은 죽음이 있으랴마는, 그래도 여기까지 나가는건 좀 너무하지 않나 싶어지는 것이다. 이 책을 읽는데 며칠이 걸렸다. 재미는 있지만 빨리 책장을 넘기고 싶지만 범인이 궁금해 미칠 지경이 되었지만, 끝까지 등장하는 그 숱한 죽음들 때문에 처음 책을 읽을 때 느꼈던 재미는 서서히 줄어들기 시작했고,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은 다음에는 내 일요일이 죽어버렸다는 생각이 들어버렸다. 죽어버린 내 일요일.
다 내 잘못이다. 이 책을 읽고 이미 죽어있었던 일요일에 존 쿳시를 꺼내들다니. 내가 미쳤었나보다. 이럴 줄 몰랐어? 이럴 줄 몰랐냐고. 이거봐, 자정을 넘겼는데 안 자고 있잖아.
그렇지만 이 책, 『모든 죽은 것』에서도 분명 삶은, 살아있음은 존재한다. 책 속의 등장인물들, 그러니까 이 세상의 사람들이 삶을 선택하고 살아가는 방식은 저마다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것들은 '마찬가지' 혹은 '다르지 않음'을 가지고 있다. 이를테면 사랑 같은 것.
앙헬에게는 루이스가 필요했고 루이스도 나름대로 앙헬을 필요로 했지만, 관계의 균형이 앙헬 쪽으로 기울어져 있다는 생각이 가끔씩 들었다. 남녀든 남남이든, 모든 관계는 결국 한쪽이 더 간절하기 마련이었고, 간절한 만큼 괴로움도 컸다. (p.470)
다른 공간, 다른 시간에서 사는 사람도 또 다른 삶의 방식을 선택한 사람도, 사랑에 대해서 간절하고 괴로워하는 마음이 같다. 그건 여기에 사는 나와 별로 다를바가 없다. 나 역시 어떤 관계에서는 내가 약자였고 어떤 관계에서는 내가 강자였다. 나는 약해서 괴로웠고 상대가 내게 힘이 너무 세서 고통스러웠다. 상대가 내게 힘을 쓰고자 함이 아닌데, 나에게 모든 것에 영향을 미쳐서 고통스러웠다. 나는 내가 이토록 약하다니, 하는 생각에 힘들었다. 그렇다고 내가 더 강한 쪽이었을 때는 덜 힘들었던 게 아니다. 나는 내가 강자임을 느꼈고, 상대에게 많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걸 알았고, 상대는 나의 힘이 너무나 세다는 걸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았지만, 그건 그런대로 괴로웠다. 내가 상대에게 그정도의 힘을 가지지 않기를 바랐다. 나는 힘들고 싶지 않았던것처럼 상대도 그런식으로 힘들지 않기를 바랐다. 사랑에 있어서 약자가 되든 강자가 되든, 어느쪽이든 마냥 행복하기만 하지는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위에 인용한것처럼, 사랑이, 사랑을 할 때 곁에 붙어 함께 하는 모든 감정들이-질투와 시기 혹은 외로움과 절망- 간절한 만큼 괴로웠다. 내가 가장 괴로웠을 때는 내가 가장 간절한 때였다. 바꿔 말하자면, 내가 간절하지 않으면 괴롭지도 않았다.
말이란 공허하고 부질없을 때가 대부분이다. 모든 맹세는 말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맹세 또한 그렇다.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있을게." (p.473)
한달음에 달려갈 수 있는 거리에 있겠다는 말은 얼마나 근사한가. 얼마나 위안이 되는가. 나는 여기 있을거야, 늘. 나는 언제나 너와 함께 있을거야. 네가 부르면 언제든 달려갈게. 그러나 그 모든 말들은 얼마나 부질없는가. 내가 힘들때 너를 불러도 될까? 라는 물음에 언제든지 니가 부르면 달려갈거야, 라고 말했던 상대가 그러나 나에게 달려왔던 적은 별로 없다. 그것은 상대의 잘못은 아니다. 사람에겐 누구나 그때마다의 사정이 있는 법. 나 역시도 그렇게 말하고나서 달려가지 못했던 적이 더 많았다. 내가 지금 일하고 있어서, 내가 지금 다른 사람과 함께 있어서, 내가 지금 아파서.. 세상에 존재하는 그 수많은 '달려가지 못하는' 이유들. 그 뒤로 나는 장담하지 않았다. 단언하지 않았다. 내가 야심한 밤에 널 부르면 너는 내 부름에 응답할까, 하는 상대의 물음에 그건 그때가 되봐야 알지 너에게 달려간다고 말하고 사정이 있어서 달려가지 못하면 나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것이 되잖아. 나의 말을 상대는 얼마나 이해했을까. 얼마만큼을 받아들였을까. 그러나 그가 불렀을 때 나는 매번 달려나갔다. 나는 매번 달려나갈거라고는 한 번도 말하지 않았었는데. 그러나 그것은 내가 간절했고 그만큼 내가 괴로웠기 때문이었다. 내가 약자였기 때문이었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어쩌면 '달려갈게'라는 헛된 맹세일지도 모르겠다. 오지 않을 줄 알지만 정작 부를 수 없겠지만 '내가 안 불렀기 때문이야' 라는 말 뒤로 숨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렇기 때문에 어쨌든 말로는, 너에게 언제든 달려갈게, 라고 말하는 것에 위로를 받고 그 말을 붙잡고 싶은건지도 모르겠다. 뭐가됐든, 간절하지 않으면 괴롭지도 않다.
죽어버린 일요일은 가고있다. 갔다. 살아있는 월요일을 맞이하기 위해 나는 이번엔 좀 살아있는 책을 선택해야 겠다. 죽어있지 않은 것, 살아 있는 것. 간절하지 않은 것 그래서 괴롭지도 않은 것. 책장앞에서 조금 서성여야겠다. 살아있는 것을 선택하기 위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