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근 준비를 하면서 라디오를 들었다. 라디오에서는 아주 조용한 노래가 나오고 있었다.
나는 뜬금없이 제임즈 조이스의 단편, 「죽은 사람들」이 생각났다. 어서 빨리 들춰보고 싶어서 미칠것 같았다. 파티에 간 부부, 아내를 향한 욕망과 사랑에 가득찬 남자, 아내를 안고 싶은 남자, 아내가 내게 다가온 순간이 바로 그 순간이라 생각했지만 아내의 생각은 달랐다. 나는 갑자기 이 단편이 너무 생각나는거다. 아마 겨울이라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남편이 자기를 안고 싶어하는 순간 그녀가 떠올린건 그녀의 과거시절, 어느 겨울이었으니까.
왜일까. 왜 함께 있는 두 사람이 서로를 향해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지 않은걸까. 왜 서로를 향한 같은 욕망에 휩싸이지 못하는걸까. 왜 함께 있는 두 사람이, 같은 장소 같은 시간에 서로 다른 생각을 하게 되는걸까. 그리고 그건 왜 한쪽의 가슴에 구멍을 뚫는걸까.
"당신은 정말 너그러운 사람이에요, 게이브리얼." 그녀가 말했다.
게이브리얼은 그녀의 갑작스런 입맞춤에, 또 그녀가 한 말의 오묘한 멋에 기쁨으로 몸을 떨면서, 두 손을 그녀 머리칼에 얹어 손가락을 거의 대지 않으면서 머리칼을 뒤로 쓰다듬기 시작했다. 머리를 감아서인지 머리카락이 곱고 광채가 났다. 그의 가슴은 행복이 넘쳐나고 있었다. 그가 원하던 바로 그때에 그녀가 제 스스로 그에게로 온 것이었다. 아마 그녀의 생각이 그의 생각과 똑같이 진행되어온 것인지도 몰랐다. 아마 그녀가 그의 내부에 있는 그 격렬한 욕망을 느꼈던 건지도, 그래서 자신을 내맡기려는 기분에 사로잡힌 것일지도 몰랐다. 그녀가 이토록 쉽게 무너져오고 보니, 그는 왜 자신이 그렇게 망설였을까 의아했다. (p.296)
이 소설의 게이브리얼은 꼭 나같다. 나 역시 그랬던적이 있다. 우리가 함께 있을때 우리가 얼마나 자주 웃었는지 나는 알고 있었고, 우리가 얼마나 많이 눈을 마주쳤는지도 알고 있었다. 함께 있지 않을때는 상대를 생각했고, 통화를 할 때는 보고싶다고 말을 했다. 그를 마주하기 전에는 얼마나 가슴이 뛰었던지. 잡았던 손을 놓아야 했을때는 얼마나 아쉬웠는지.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을 상대도 느끼고 있을거라고 생각했고, 이것은 당연히 사랑이 아.닐.수.없.었.고 그렇다면 상대도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나는 그런 결론을 내렸던거다. 내가 차마 사랑이라고 입밖에 내지 못하는것처럼 그도 그런것일거라고, 나는 그렇게 믿어왔던거였다.
그는 양손으로 그녀의 머리를 감싸며 일어섰다. 그러고는 한쪽 팔을 재빨리 그녀 몸에 두르고 그녀를 자기에게 끌어당기면서 부드럽게 말했다.
"그레타, 여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어?"
그녀는 대답을 하지도 그의 팔에 전적으로 몸을 내맡기지도 않았다. 그가 다시 부드럽게 말했다.
"뭔지 말해봐요, 그레타. 난 무슨 일인지 알 것 같은데. 내가 아는거지?"
그녀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그러다가 그녀는 울음을 터뜨리며 말했다.
"아, 나는 그 노래, 「오 그림의 처녀」그 노래 생각을 하는 거예요."
(중략)
"왜, 그레타?"
"난 오래 전에 그 노래를 나한테 들려주곤 했던 사람을 생각하고 있어요." (pp.296-297)
물론 매순간을, 사랑하는 사람 혹은 함께있는 사람만을 생각하고 살 수는 없다. 그렇다해도 여기 지금 이곳에 너랑 나, 둘 뿐이고 나는 너에 대한 애정이 들끓고 있는데, 너는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하는 일, 그 말을 내가 듣는 그 순간, 그 순간에 나는 어떤 기분을 느껴야 할까.
게이브리얼의 얼굴에서 미소가 사라졌다. 무지근한 분노가 다시 그의 마음 뒤편에 모이기 시작했고 정욕의 무딘 불꽃이 혈관에서 성을 내며 작열하기 시작했다. (p.297)
그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던 순간이 생각난다. 나는 그때 얼마나 아팠던가. 자존심을 다쳐서 펑펑 울었다. 말도 안된다고 생각했다. 이게 어떻게 사랑이 아닌거야, 이게 어떻게? 나는 그를 병신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이 뭔지도 모르는 철부지 병신이라고. 이게 사랑이 아니면 대체 무엇이 사랑이냐고. 자신이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들여다볼줄도 모르는거라고. 나는 그런 병신같은 남자를 사랑하고 있었던 거라고. 병신을 사랑하는 나도 병신이라고. 그렇게 펑펑 울었었다. 분했다. 그 시간들은 다 뭐였지? 그 웃음들은? 그 대화들은? 그게 사랑이 아니란 말이야? 사랑도 아닌채 나를 마주하고 앉았던 남자를 나 혼자 연정을 품고 있었던거야? 그게 말이 돼? 그리고 계속 울었다. 인정할 수 없었다. 인정하기도 싫었다. 아팠고 분했다. 저주를 내렸다. 너는 평생 사랑하는 여자를 만나겠지만, 나처럼 좋은 여자를 만나지는 못할거라고. 사랑하는 틈틈이 자꾸만 내 생각이 날거라고. 뒤늦게 나를 사랑했었다는 걸 깨달을거라고. 그러나 그때는 너무 늦었을 거라고. 나는 너를 버릴거라고.
그가 그들 단둘만의 삶에 대한 추억으로 충만해 있었을 때, 애정과 부드러움과 기쁨과 욕망으로 충만해 있었을 때, 그녀는 마음속으로 그를 다른 자와 비교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자신이 수치스럽다는 의식이 와락 달려들었다. 그는 자신이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보였다. 이모들 심부름꾼 노릇이나 하고, 신경이 날카롭고 사람은 좋은 감상주의자, 속물들한테 연설이나 해대고 자기 자신의 바보스런 욕정을 이상화하는, 자신이 거울에서 흘끗 보았던 그 가련한 얼빠진 놈. 본능적으로 그는 더욱 빛을 등지고 섰다. 혹시 그녀가 자기 이마에서 불타고 있는 그 치욕을 보게 될까봐. (p.299)
내가 우리 단둘만의 감정에 푹 빠져있었을 때, 그는 마음속으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것을 견딜 수 없었고, 그것은 곧 나의 무능으로, 수치로 나를 덮쳤다. 아, 제임스 조이스는 그의 단편 「애러비」로도 나를 들었다놨다 하더니, 이 「죽은 사람들」로도 나를 쥐락펴락한다. 이 단편은 친구의 추천을 받아 작년인가 재작년에 읽은 책인데(기억이 가물가물하구나), 갑자기 오늘, 눈이 온 다음날, 라디오에서 조용한 음악이 나오는 아침에 생각이 나고 말았다.
이 책을 읽고 싶은데 이미 절판이어서 어렵게 친구에게 부탁해 겨우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 검색해보니, 오, 그 뒤로도 새로 나왔네. orz 그래도 나는 내 책이 제일 좋다. 움화화핫.
그리고 오늘 아침 이런 노래도 들었다.
하아- 노래 좋구나. 나는 오늘 해야할 일이 많은데, 그냥 이런 노래들이나 들으며 뒹굴거리고 싶다.
출근하기 전에 이미 근무중이신 아빠로부터 전화가 왔다. 길이 얼어서 많이 미끄러우니 미끄럽지 않은 신발을 신고 나가라는 거였다. 아니나 다를까 출근하려고 집을 나서니 길이 온통 얼어있더라. 조심조심 평소보다 훨씬 느린 걸음으로 길을 걸으면서 아빠 생각을 했다. 지금은 아빠가 아파트 경비일을 하시느라 새벽근무를 나가셔서 더이상 그렇게 해주지 못하지만, 그전까지의 아빠는 내 출근길에 길이 얼어 미끄러우면 나를 버스타는 데까지 바래다주곤 하셨다. 아빠 꼭 붙잡고 가, 라고 하시면서. 아빠도 미끄럽잖아, 아빠 신발은 안미끄러운 신발이야. 나는 아빠의 팔짱을 꼭 붙들고 별 걱정없이 버스정류장까지 가곤 했었다. 재작년까지도 그랬었다. 아빠는 이런 말씀도 잊지 않으셨다. 설사 너가 넘어져도 아빠가 옆에 있으면 덜쪽팔리잖아.
어제는 자정이 다 된 시간에 아빠가 주무시다 말고 나오셔서 옷을 챙겨입으시는거다. 아빠 어디가게? 니 동생 아직 안들어왔는데 들어오다가 넘어지면 어쩌냐 현관 입구에 신문 깔아둘라고, 하시는거다. 눈이 오면 현관 입구가 정말 미끄러워서 나도 몇 번이나 휘청였더랬다. 그런데 마침 그때 남동생이 문을 열고 들어왔다.
강남역에 내려서 회사까지 걷는길을 얼마나 힘들고 멀게 느껴질까, 이 미끄러운 길을 제대로 걷기나 할 수 있을까, 걱정하며 지하철역을 올라왔는데 오히려 우리 동네보다 덜 미끄러웠다. 빌딩에서 근무하는 모든 경비아저씨들과 또 모든 관계자분들이 모두 바깥에 나와 눈을 쓸고 삽으로 퍼내고 얼음을 깨고 계셨다. 또 아빠 생각이 났다. 우리 아빠도 지금쯤 눈 치우고 계시겠구나, 하고.
아빠한테 문자 보내야겠다. 넘어지지 않고 출근 잘했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