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니카 마론'의 『슬픈 짐승』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 자연스레 '엘케 하이덴라이히'의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가 떠오른다. 뗄레야 뗄 수 없이. 그 단편집에 실린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할 때」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역에 도착한 프란치스카는 신문을 샀고, 일등석에 앉아 읽기 시작했다. 하인리히와 단둘이서 그토록 행복하게 서로에게 열중하며 침대에 묻혀 있던 그 시간, 1989년 11월 6일에서 11일 사이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들이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나누던 그때에. (p.51)
베를린 장벽이야 무너지든 말든, 나는 지금 내 현재를 살아가고 내 눈 앞에 있는 사람과 사랑을 하겠다, 할 것이다, 이럴때의 나는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다, 내게 중요한 것은 지금뿐이니까, 라는 생각을 하면서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그 역사적 사건을 등지게 되는것이다.
그러나 모니카 마론은 그것은 그저 등지고 지나치게 될 에피소드가 아니라고 말한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져버리고 나니까, 누군가는 사랑을 하게 되고 누군가는 사랑을 잃게 되어버린다. 만약 그 장벽이 무너지지 않았더라면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숙명을 느끼지 않았을 것이고, 누군가는 사랑하는 이에게 심드렁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것이 그 때에 거기에서 무너져버림으로써, 그들 모두는, 그전과 다른 사람이 되었다. 예전과는 달라져버리고 말았다. 여자와 남자가 헤어지거나 남자와 여자가 만나고 말았다.
나는 한순간도 사랑 없이는 살 수 없다고 생각한적이 없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 삶에 남자가 필요하다고 생각한 적도 없다. 남자도 사랑도 있으면 좋겠지만 그것이 있어야만 내 인생이 충만해지는 것은 아니라고 늘 생각해왔다. 나는 남자에게 집착하는 여자를 보면 어리석다고 쯧쯧 혀를 차는 여자였고, 연인과 헤어졌다고 드러눕는 사람을 보면 저렇게 감정에 휘둘려서 어디다 써먹겠냐고 그렇게 궁시렁대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사실 나라고 이 사랑과 이별에 있어서 쿨했던 것은 아니다. 이렇게 말하는 나조차도 연인과 이별하고 울기도 했고, 다른 사람을 사랑한다는 사람때문에 외딴섬에 가서 혼자 조용히 죽어가고 싶다는 생각을 한적도 있다. 격렬한 증오를 품기도 했고 질투를 가지기도 했다. 사실 내가 손가락질했던 그 모든 면들이 내 안에 있었다. 그러나 나는 그러지 않은 척을 했을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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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속한 남자가 아니라 그녀에게 속한 남자였다. 죽자, 나는 생각했다. 죽자. 내게 닥친 고통에 맞서 죽음만이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생각에 주체할 수 없이 눈물이 쏟아졌다. (p.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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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이 두렵다고 말하면서, 나는 죽고 싶지 않다고 늘 말해왔으면서, 생에 대한 강한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면서, 고백하자면, 나도 그가 내게 속한 남자가 아니라는 사실 때문에 죽자, 고 생각했던 적이 있다. 이내 다시, 미쳤어? 남자 때문에, 고작 사랑때문에 죽어? 라는 생각을 하긴 했지만, 그 얼마간의 시간동안 나는 죽자, 고 여러번 생각했었다. 시간은 흐르고 상처는 아물고 이제는 그때 내가 상실감에 돌았었구나,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나, 하고 고개를 젓지만, 그러나 그 순간에 그 감정은 내게 분명 존재했던 감정이었다. 그래서 나는 이 책 속의 여자가 죽자, 고 생각하는 이 순간이 절절하게 느껴진다. 대체 이런 순간에 죽자, 라는 것 말고 더 무엇을 생각할 수 있단말인가?
물론 내가 상실감을 느꼈던 상대에 대해서 내가 운명 혹은 숙명을 느꼈던 것도 사실이다. 지금 생각하자니 피식, 웃음이 나지만, 무릇 사랑이란 빠져있을 동안에는 얼마나 절실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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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내게 작년 여름에 당신은 누구였느냐고 물을 것이다. 나는 그에게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모를 것이다. 프란츠가 없었을 때 내가 누구였는지 이제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무엇이 아니었는지는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일 년 전 나는 프란츠의 연인이 아니었다. 뒤늦게 떠오르는 생각으로는, 태어나는 날부터 시작하여 내 인생 전체를 프란츠에 대한 오랜 기다림이라고 이해할 때만 내 인생이 의미를 갖는 것 같다. 가끔 나는 베를린 장벽도 프란츠가 마침내 나를 발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무너졌던 것이라고 생각한다. (p.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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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모든 신비한 힘이 나를 위해 움직였다고 생각했던 때가 내게도 분명 존재했다. 지금까지 내가 이렇게 살아왔던 그 순간순간들이, 바로 이사람을 만나기 위해서였다는 생각이 들었던 때가, 내게도 있었다. 이토록 가치있는 사람을 내게 주기 위해서 그간 나에게 방황이 그리고 기다림이 주어졌던 거라고 생각했던 때가,
있. 었. 다.
나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고 이 책속의 여자에게도 믿어도 좋다고 말하고 싶다. 베를린 장벽은 당신이 프란츠를 만나기 위해 무너진 것이 맞다고. 당신은 그 운명의 힘을 제대로 느낀거라고. 그리고 내가 내 인생의 그 시점에 그를 만났던 것도 '나를 위해' 일어난 일이었다고. 그게 무엇이든 또 어떤 힘이든, 그것이 '나를 위한'거라고 생각했다면, 그것은 나를 위한 것이 맞다고. 그러나,
그것은 언제고 끝난다고, 지나가버린다고 말해주고 싶다. 그 모두가 어쨌든 결국은 과거형으로 끝을 맺게 된다고. 순간은 영원할 수 없다고. 영원할 수 없고 지속될 수 없기 때문에 순간이라고. 그렇기 때문에,
잊을 수 없을 거라고, 내내 기억할 거라고. 잊지 않기 위해 발버둥을 칠거라고. 그렇지만 잊혀질거라고.
이 책의 처음에는 이런 문장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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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마지막 연인, 그 남자 때문에 나는 세상을 등졌다. (p.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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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세상을 등지고 사랑을 하고, 누군가는 사랑을 잃고 세상을 등진다.
아, 졸려..나는 이제 세상을 등지고 자러 가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