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가 1989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고려해보면 이 소설은 확실히 잘 쓰여졌다. 고작 스물을 넘긴 시점에 쓴 소설이라니. 그러나 이 소설 자체만 놓고 보자면 이 소설은 뭐 그다지 특별할 것도 대단할 것도 없다. 천재작가라는 타이틀은 너무 오버한게 아닌가 싶지만, 그래도 고작 이십대 초반이라니, 앞으로 어떤 소설을 쓸지 기대가 되는구나.
60살 할아버지와 22세 젊은 여자와의 사랑이라니, 나는 작가가 혹여 22세의 여자에게 초점을 맞춰 한껏 멋을 부렸으면 어쩌나 걱정했는데, 웬걸, 이 소설은 60대 할아버지가 화자로 등장한다.
육십 대 남자의 심리와 그가 겪어온 시대적 문화적 배경들이 22세 아가씨가 썼다고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작품 속에 녹아들어 있다. 어떻게 해서 나이 든 남자 주인공의 1인칭 시점으로 소설을 쓸 생각을 했느냐는 질문에 안토니아 케르는 자신은 나이 든 남자들이 이야깃거리를 많이 갖고 있어서 나이 든 남자들을 좋아한다고, 나이 든 남자들의 이야기라면 몇 시간이고 들을 수 있다고 대답했다. -옮긴이의 말, 206
하하. 발랄하고 독특하다. 반면 나는 그녀에게 십년후에는 그 생각이 달라질 것, 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십년후에는 나이 든 남자들의 이야기를 듣기 보다는, 스스로가 더 많은 이야기들을 만들고 싶어질 거라고. 아니, 이건 나이 문제가 아니고 개인의 성향탓일지도 모르겠구나. 이야기를 듣기를 원하는 쪽과 자신이 이야기를 만들기를 원하는 쪽. 그건그렇고, 이 소설, 발칙하고 귀엽게 에로틱하다.
하지만 술 향기에 취한 것만큼이나 조에가 내 오목가슴 위에 남겨둔 어떤 것에 흠뻑 취했다. 나는 타이타닉호였고, 그녀는 빙산이었다. 머지않아 나는 꾸르륵꾸르륵 소리를 내며 침몰할 것이고, 그녀는 자연의 업적답게 영원히 그 자리에 있을 터였다. (p.62)
자신이 너무 늙어서 그녀에게 맞는짝이 오랜시간 될 수는 없을거라고 생각하는 남자, 그 남자는 자신을 침몰하게 될 타이타닉호에 비유했다.
그녀의 하얀 팬티가 드러났다. 그 마술적인 광경이 내 아랫배를 경련이 일도록 뒤흔들었다. 우리는 친구로 보기는 어려운 기묘한 관계에 대해 환상을 갖고 있었기 때문이다. (p.67)
나는 남자와 여자 사이의 친구 관계에 대해서, 더 정확히 말하자면 '친구로 보기는 어려운 기묘한 관계'에 대해서 아주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생각하면 웃음이 난다. 입꼬리가 올라간다. 친구로 보기는 어려운 기묘한 관계. 더 나아가지는 않되 긴장을 풀 수 없는 이런 관계가 삶을 조금 더 탱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는 자신의 딸이 선택한 남자가 마음에 들질 않는다. 자신의 손주들의 아버지가 정말 내키질 않는다. 그리고 자신이 그렇다는 걸 딸에게 숨기지도 않는다. 그런참에 딸과 통화를 한다.
"기분 좋아질 거다. 하지만 네가 네 아이들을 위해 다른 아빠를 원한다면 나에게 도움을 청하거라. 나는 너처럼 예쁜 여자를 돌보는 일을 반겨할 매력 있는 젊은 남자들을 많이 알고 있어. 어쨌든 오언보다 나은 남자를 찾는 건 별로 힘들지 않을 게다‥‥‥" (p.125)
딸은 행복하다는데도 그는 딸에게 이렇게 말함으로써 결국은 딸이 울면서 전화를 끊도록 만든다. 그런데 난 이 부분이 너무 웃겨서 피식피식 웃었다. 하하하하. 네 아이들을 위해 다른 아빠를 원한다면, 이라니. 하하하하. 그리고 또 빵 터졌던 부분은 길에서 우연히 만난 수의사와 대화를 나누는 바로 여기.
"시장하십니까? 제가 토끼 한 마리를 준비했습니다. 관심 있으세요? 오늘 아침 일하러 나가기 전에 총으로 쏘았어요. 우편함 옆에서 서서 자고 있더군요."
"나는 당신이 수의사인 줄 알‥‥‥."
"우리는 동물을 사랑할 수도 있고 동물이 맛있다고 생각할 수도 있죠."
그가 대답했다. 분별 있는 말이었다. 그는 과학 잡지들과 포르노가 꽉 들어찬 카운터 위에 김이 피어오르는 짐승을 내려놓았다. (p.138)
하하하하. 이 여자, 재밌네.
어제는 친구에게 편지를 썼다. 마지막에 나는, 생뚱맞게 이런 글귀를 첨부했다.
레오, 고백할 게 있어요. 물론 해서는 안 되고, 하는 게 좋지도 않지만 그냥 하고 싶어요. 레오, 저는 지금 행복하지 않아요. 왜인지 아세요? (알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그래도 얘기할래요. 미안해요.) 저는 행복하지 않아요. 당신이 없어서. 레오의 이메일들은 제 행복에 속해요. 제가 행복하려면 레오의 이메일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없어요. 그 메일이 얼마나 그리운지 모르겠어요. 당신 목소리를 알게 된 뒤로 메일이 세 배는 더 그리워요. (p.325)
나는 에미가 저렇게 말하는게 너무 좋다. 당신이 있어야 하는데 없어서 나는 행복하지 않다고 말하는 게. 그리고 목소리를 알고 나니 세 배는 더 그립다고 말하는 게. 하나를 가지면 다른 하나를 더 가지고 싶고, 다른 하나를 더 가지면 전부를 가지고 싶다. 욕망은 늘 더 간절해지고 충족되질 않는다. 그리운 사람에게 그립다는 말을 하는 에미가, 이 여름을 보내면서 나는 무척이나 아름답게 느껴진다.
I have to admit something, Leo. Actually I don't have to admit it, and it's not a good thing that I am, but I can't help it. Leo, I'm so unhappy at the moment. And do you know why? (You probably don't want to know at all, but that's just too bad-sorry.) Because you're not there. Emails from Leo make me happy. And I'm unhappy because I'm not getting them. It is my misfortune that my happiness depends so much on your emails. And now that I know your voice, I'm missing your emails three times as much. (p.225)
내가 당신의 에미였어야 했는데. 그렇다면 좀 더 오래 아주 오래 당신 곁에 머무를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나는 어쩌자고 당신의 현실이었을까. 왜 에미이지 못했을까.
- 오늘 아침 출근길에는 지하철을 타자마자 책을 읽기 위해 귀에 꽂고 있던 이어폰을 뺐다. 그리고 책을 펼쳤는데 코끝으로 훅- 옆에 서있는 남자의 향수냄새가 밀려왔다. 대놓고 볼 수가 없어서 책을 펼친 뒤 옆을 흘깃 보니 깔끔하게 양복을 차려 입은 남자가 스마트폰을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갑자기 기분이 좋아졌다. 며칠전부터 거리에서 여자들의 향수냄새가, 지하철안에서의 남자들의 향수냄새가 달라졌다. 내가 어떤 향을 맡아왔는지는 전혀 기억나지 않지만, 공기중의 향기는 분명 달라졌다. 날이 추워지고 어둠이 빨리 찾아오면서 나도 향수를 바꿨는데 아마 다른 여자들도 그리고 다른 남자들도 그랬는가보다. 다들 계절의 변화를 어떤식으로든 받아들이고 있는 것 같다.
- 어제는 동료와 함께 수제버거를 먹으러 갔다. 콜라를 따라놓은 컵 하나에 빨대를 두개 꽂았다. 하나는 하늘색이고 하나는 분홍색. 나는 분홍색 빨대를 입에 물기 전, 동료에게 말했다.
"내가 핑크로 먹을게. 괜히 나랑 간접키스 하고 싶다고 핑크 빨대로 빨지 마요."
동료는 소리내어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