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3학년때의 어느 토요일 오후. 텔레비젼에서는 영화 『You call it love』를 방송해줬다. 나는 소피 마르소가 나온다길래 당연히 보았는데, 와, 이 영화에서 소피 마르소는 정말, 정말 예뻤다. 스키장의 케이블카 안, 스키모자와 고글을 벗는 소피 마르소. 그 앞에 앉아있던 남자 주인공이 그 모습을 보고 갑자기 넋을 잃던 표정.
영화속에서 소피 마르소는 학생이었던가, 여튼 공부할때는 안경을 끼고 있었다. 안경 끼고 공부하는 그녀는 정말 예뻤지만, 공부하지 않을 때 안경을 벗고 있는 소피 마르소는 진짜 샤라라랑 효과음이 날 것만 같았다. 이 영화가 크게 '재미있었'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았지만, 소피 마르소 때문에 이 영화는 아주 강하게 기억이 나는 그런 영화였다. 나는 이 영화의 OST 를 구하고 싶었는데, 그 당시 동네 레코드샵에 가니 주문해야 받을 수 있다고 했다. 내가 사려는 건 CD 나 LP 가 아니라 카셋트 테입이었다. 다음날 가서 왔나요? 또 그 다음날 가서 왔나요? 며칠 이렇게 반복하다 보니 레코드샵 사장님(컷트머리의 여자사람분이셨다)은 어느날 내게 녹음된 테입을 내미셨다.
이거 구하기 힘들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가진걸 녹음했어요.
나는 우와- 하고 놀라서 감사합니다, 그러면 얼마를 드려야 하지요? 라고 물었더니 레코드샵 사장님은 그냥 가지라고 하셨다. 선물이라고. 그동안 발품이 어디냐며. 그 뒤로 나는 그 레코드샵에 종종 놀러갔다. 악보를 사기도 하고 다른 테입들을 사기도 했다. 그리고 고등학교에 진학했는데 1학년 초에 이사를 가야 했고, 나는 커피를 뽑아들고 챕스틱을 사들고 그 레코드샵을 마지막으로 갔다.
저 내일 이사가요. 가기전에 인사드리러 왔어요. 입술 트지 않게 챕스틱 바르고 다니세요.
내가 받은거에 비하면 보잘것 없지만 난 그동안 고마웠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었다. 게다가 나는 열일곱살, 돈도 겨우 챕스틱 하나 살만큼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사장님은 서운하다고 하셨고 또 고맙다고 하셨다. 그러더니
지금 당장 갖고 싶은 테입이 뭐에요? 딱 떠오르는거?
나는 아니에요, 괜찮아요. 지난번에 유 콜 잇 러브도 주셨잖아요. 정말 괜찮아요. 하고 말했는데 사장님은 주고 싶어요 빨리 말해봐요, 라고 말씀하셨고 그래서 나는 알라딘 OST 를 또 선물 받았었다. 아, 그런데 이 얘기 하려던게 아니었는데..미친 삼천포.. orz
유 콜 잇 러브를 보기 훨씬 전부터 나는 '가운을 입은 여자'에 대한 환상 혹은 로망을 가지고 있었다. 일을 할 때는 가운을 입고 안경을 끼고 머리를 틀어올린다. 일이 끝나면 가운을 벗고 안경을 벗고 머리를 풀어 헤치고 아름다운 사복으로 갈아입어 완벽한 여성으로 변신한다. 나는 이미 안경은 끼고 있으니 일단 하나는 충족한 셈이다. 공부만 열심히 해서 닥터가 되든 약사가 되든 과학자가 되든 뭔가 되자. 가운 입는 직업을 갖자. 그리고 머리를 풀어헤치며 퇴근하자. 근무시간에는 똑똑한 일꾼으로, 퇴근이후에는 섹시한 여성으로 변신하자.
그러나 지금 현실의 나는 ...... 어제는 정말 최악의 하루였다. 퇴근 무렵, 퇴근후에 이걸 할까 저걸 할까, 나름대로 몇개의 계획을 머릿속에서 굴리고 있었는데, 거래처에서 전화가 왔다. 욕을 한바가지로 얻어먹고, 그걸 해결하기 위해서 1공장에 그리고 3공장에 전화를 했으며, H차장, B부장, L차장과 통화를 했다. 그분들 모두 널 힘들게 하지 않게끔 해결하겠다고 말씀을 하셨고, 이런 과정에서 나는 너무 스트레스를 받아서 뇌가 꽉 찬 기분이었다. 퇴근후의 계획따위는 물거품이 되고 나는 퇴근후 집에 가서 기진맥진..책도, 신문도 읽을 수가 없었다. 좀처럼 스트레스로 꽉꽉 찬 나의 뇌가 평온해지질 않았다. 하아-
오늘도 그랬다. 오늘도 뇌속이 포화상태. 왜 직장일이란게 시간이 지나도 늘 스트레스를 줄까. 왜 오래되도 새로운 문제는 발생할까. 자꾸만 스트레스가 쌓여서 좋은 걸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래, 그래도 나는 주변 사람들이 서로 도와주겠다고 하잖아. 그게 어디야. 그러니 금세 해결하잖아. 그래, 힘들기만한건 아니야.
퇴근하고 집에 오기 전, 좀 걸었다. 요즘은 가끔 걷는다. 걷는 동안은 아주 평온하다. 오롯이 나 혼자만의 시간이다. 집에 돌아오니 배가 고파서 김을 한장 꺼냈다. 살짝 구운다음 쟁반에 놓고 거기에 밥을 한가득 펴 발랐다. 그리고 매운고추장을 꺼내 쓱쓱 발랐다. 둘둘 말아 양손에 쥐고 뜯어 먹었다. 그 순간 행복하다고 생각하면서, 그러나 내가 이렇게 먹는 사진을 알라딘에 올린다면 즐찾빠지는 건 시간문제일거야, 라고 생각했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이제 자러가야지. 머리 좀 쉬게 해줘야지. 유 콜 잇 러브를 한번 더 들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