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이 맞다면 '시드니 셀던'의 『별빛은 쏟아지고』에는 젊은 여자와 불륜의 관계를 맺고 있는 한 노인이 등장한다. 이 책속의 주인공은 '젊은 여자'이고(주인공 이름이 로라였던가? 갸웃) 노인은 조연이며 그녀의 뒤를 받쳐주는 든든한 백이 되어주는 역할인데, 역할이 역할인만큼 그는 한 기업의 사장이며 돈이 아주 많다. 그는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사무실에 따로 전화를 설치하고 옷차림에 신경을 쓰는 장면들이 당연히 나오는데, 그런 그를 보고 그의 아내가 그는 지금 어떤 여자와 사랑에 빠져있다는 걸 짐작하게 된다.
그가 남자가 되었어.
라고 아내는 생각한다. 그는 지금까지는 회사의 사장이었고,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을텐데(아버지였는지는 잘 모르겠다 기억이 안나지만 대체적으로 그런 역할을 수행하니까), 그가 갑자기 '남자'로 변신하는 것. 그것때문에 그녀는 그의 외도를 눈치채게 된다. 나는 이 책을 읽을 당시에 고등학생이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짐작할 수 있었다. 노인이 어느날 남자가 되는 것. 짐작할 수 있다고 해도 그것을 몸소 느낀건 아니었는데, 그 뒤로 시간이 지나고 내가 스스로 여자임을 자각하는 순간, 혹은 여자이고 싶다고 느끼는 순간, 나는 그때 그 소설속의 그 장면에 대해 생각해보면서 그가 말하고자 했던게 바로 이런것이었겠구나, 라고 생각하게 되는거다.
나는 어느순간부터 그런 이야기들을 좋아하게 됐다. 자식으로서 부모를 공경하고 부모로서 자식에게 희생하는, 또 한 가족의 구성원으로서 다른 가족을 다 먹여살려야 하는 책임감을 어깨에 무겁게 지게 된 그런 이야기 말고, 자기가 자기 자신이 되고자 하는 이야기, 자신이 온전히 여자이고 싶은 이야기, 자신이 온전히 남자이고 싶은 이야기. 현재 자신이 맡은 수많은 역할들을 다 뒤로 감춘채 여자로서 혹은 남자로서 빛나고 싶은 그런 이야기들. 나도 내가 이런 이야기들을 좋아하는 줄은 미처 몰랐는데, 어느 순간 내가 그런 이야기들을 읽으며 기뻐하고 있었다. 그래, 그렇게 살아. 다른 역할들에 너 자신을 감추지마, 라고 힘껏 응원하면서.
그런 점에서 '존 쿳시'의 『슬로우 맨』은 또 하나의 기쁨이었다.
주인공인 남자는 예순살이다. 아내도 없고 자식도 없이 혼자산다. 그러던 그가 자전거를 타고 가다가 어느 젊은이가 운전하는 차량과 부딪쳐서 다리 한쪽을 잃는다. 한쪽 다리의 무릎 아래를 절단해낸다. 수술을 해낸 의사는 그에게 이 선택 밖에는 없었고, 수술은 무척 잘 되었다고 말하지만, 그는 화가 치밀어 오른다. 왜 나한테 어떤것들을 감수하고서라도 다리를 자르지 않을지도 모를, 그런 선택을 하게끔 물어보지 않았느냐고 화를 내고 싶다. 그는 수치스럽고 치욕스럽다. 자신의 다리 한쪽이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도 감당하기도 힘이 든다. 왜 내게 묻지 않았습니까, 왜, 왜. 그는 이제 사람들을 만나기 겁이 나는 지경이 되었다. 이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 당당하게 다리 한쪽이 없다고 밝히는 일이 그에겐 무척이나 어렵다. 그런 그를 돌봐주기 위해 퇴원한 그의 집에 정기적으로 간호사가 방문하게 되고, 그녀의 다정하고 숙련된 간호에 그는 그녀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다. 그는 그녀의 종아리를 보고 감탄하고, 사랑이라 생각하고, 혹은 욕망인가 갈등하고, 무엇보다 그는 남자이고 싶은 강한 열망에 사로잡힌다.
그는 움츠러든 남자이긴 하지만 이 모든 일의 와중에서도 남자로 남아 있으려고 노력한다. (p.45)
예순살의 남자, 다리 한쪽을 잃은 남자, 목발이 없이는 걸을수도 없는 이 남자가 '남자로 남아있기 위해' 노력하고 싶어하는 이 장면에서 나는 희열을 느낀다. 그의 절절한 마음. 예순이지만 사랑을 하고 싶고, 예순이지만 남자로 있고 싶은 마음. 나는 그를 응원해주고만 싶다. 그를 설레이게 한 세 아이의 엄마이자 한 남자의 아내인 그녀의 이름은 마리야나 조키치.
그에게 일어난 좋은 것 중 하나는 마리야나 조키치가 그의 삶 속으로 들어온 것이다. (p.45)
그는 그녀를 만날 수 있게 되고 사랑할 수 있게 되어서 이제는 자신을 차로 들이받은 젊은이에게 고마움까지 느낀다.
그가 여자에게서 원하는 건 무엇일까? 그는 그녀가 다시 미소를 지었으면 싶다. 자신을 향해 미소를 지어 줬으면 싶다. 그는 그녀의 마음속에 아무리 작더라도 자신의 자리가 있었으면 싶다. 그는 그녀의 연인도 되고 싶은 걸까? 그렇다. 어떤 의미에서 보면 그걸 간절히 바란다. (p.97)
사랑한다고 해서 반드시 '연인'의 형태로 그 사람의 옆에 있고 싶은 건 아니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도 그렇다. 너무 좋아서 오히려 연인이 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다. 거기에는 사소한 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쩌면 너무 좋아서 그의 벌거벗은 몸을 보고 싶지 않은걸 수도 있고, 어쩌면 너무 좋아서 헤어짐을 감당하고 싶지 않아 연인이 되고 싶지 않은걸수도 있다. '이정도의 관계'가 이 좋은 감정을 유지할 수 있는 가장 적절한 거리일지도 모른다. 그러니 그가 사랑을 느낀다고 해서 '연인도 되고 싶은걸까?'하고 묻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아, 사람의 욕망은 얼마나 단순한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미소를 지어주기를 바라는 이 순수한 욕망. 물론 그 욕망은 그것들이 충족되는 순간 더 커지고 더 다양해지겠지만, 미소만을 요구하다니 정말 감탄할만하지 않은가. 그런데 이 미소가, 왜 그토록 얻기 어려운 것일까.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는.
게다가 그는 여자의 육감이란 것이, 여자가 느끼는 공기의 흐름이란 것이 얼마나 예민한지도 알고있다.
"마리야나, 당신은 분명히 알고 있을 거요. (입이 마르고, 가슴이 쿵쿵거린다. 열여섯 살 때처럼 두렵고 짜릿한 느낌이다.) 여자는 늘 알잖아요." (p.102)
여자는 사랑앞에서 그리고 남자앞에서 예민해진다. 숨겨져있든 감각의 촉수가 모두 뻗쳐나온다. 공기의 흐름이 달라지는 것을 느낀다. 남자와 한 공간에 있는게 아니어도 이 공기중에 어떤 감정들이 숨겨져있는지 느낄 수 있다. 그는 바로 그걸 지적하는 것이다. 자신이 말하지 않아도 자신이 여자에게 가진 감정을, 너는 여자이니 알 수 있지 않느냐, 하는 것. 물론 그녀는, 다른 모든 여자들과 마찬가지로 모르겠다고 답한다.
그에게는 이제 그녀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일, 그녀를 돕는 일, 그녀가 행복하게 하는 일이 가장 큰 과제다. 가장 큰 소망이다. 그는 그녀에게 말한다.
"당신에게서 나를 차단하지 말아요." (p.215)
무엇보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그가 '자신이 원하는 것'을 갖지 못했다고 해서 '원하지 않는 차선책'을 선택하지는 않는다는거다. 세상의 잣대로 보면 그에겐 가진게 얼마 없으니, 그가 가지기에 적절한 것은 '원하지 않는 차선책'이었을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을 갖지는 않겠다고 한다. 그는 고집스럽다. 자신의 뜻을 굽히지 않는다. 나는 차선책을 선택한적이 있었다. 별로 원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원하지 않았지만 상대가 원하니 괜찮을거라는 생각으로. 그러나 그 후에 찾아온 건 엄청난 후회였다. 나는 차선책으로 만족할 수 없는 사람이란 걸, 그때는 몰랐다. 사랑도 노력하면 될거라고 생각했는데, 나는 그다지 노력하는 인간도 아니고 내게 사랑은 노력이 아니었다. 그는 고집스러움으로써, 차선책에게 예스를 말하지 않음으로써, 남자로서의 자존심을 세우고 꼿꼿하게 살아갈 것이다. 여자이기 위해서 그리고 남자이기 위해서 내던지지 말아야 할 것은, 그러니까 마지막까지 가지고 있어야 할 것은 자존심일지도 모르겠다. 자존심이 여자를 여자로, 남자를 남자로 지탱하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