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는 조금 걸었다. 걸으면서 나는 임태경의 '이음악 향기롭다' 코너를 들었다. 임태경은 '오페라의 유령'을, '글렌 굴드'를 이야기했다. 그의 목소리가 너무 좋아서, 아, 이토록 나직한 목소리라면 책을 읽어주어도 좋겠다, 고 생각했다. 그런 생각을 하다보니 문득, 나는 여태 살아오면서 누군가 내게 책을 읽어주었던 경험이 전무했단 걸 깨달았다. 어릴적에 엄마가 읽어주었을 것 같지도 않고. 친구도 연인도, 그 누구도 내게 책을 읽어준 적이 없었다. 아 이런 젠장. 물론 나는 그 누군가가 내게 책 한권을 통째로 읽어주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가끔은 조용한 목소리로 당신이 인상깊었던 부분을 읽어준다면, 내게 들려주고 싶은 부분을 속삭여 준다면, 그건 정말로 짜릿하지 않을까. 임태경의 것과 같은 그런 목소리라면, 듣는 내내 마음이 조용조용할것 같다. 심장도 격하게 뛰지 않을 것 같고. 내가 아직 젊을 때, 침대 위에 벗은 육체를 기대어 누웠을 때, 그때 옆에 있는 사람이 읽어주어도 좋겠지만, 내가 아주 많이 늙었을 때, 그러니까 아주 오랜 후에 더이상 글자들을 읽는일이 힘들어 질 때, 그때 누군가 읽어주어도 좋을 것 같다. 나는 아주 예쁜 할머니가 되어서 젊고 낭랑한 목소리, 그리고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주는 그 책들을 만나고 싶다.
그 때 나에게 책을 읽어줄 젊은이는 여자일 수도 있고 남자일 수도 있을테지. 나의 손자일지도 모르고 이웃집에 사는 마음씨 좋은 청년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들이 읽어주는 책의 내용을 머릿속에 그려보다가 가끔은 오늘은 책 읽는것 대신 이야기를 해볼까, 하고 그들과 대화를 할수도 있을거다. 나는 그때의 그들에게 그런 이야기들을 하고 싶다.
나는 한 때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내가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을 선물해 준 적이 있었단다. 내 책꽂이에 꽂혀있던 그 책은, 어느 순간 그의 책장에 꽂히게 됐지. 그런데 지금은 그 책이 어디에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구나.
혹은,
나도 한 때 누군가에게 책을 읽어주었었단다. 내가 읽은 부분은 성인 남녀가 사랑을 나누는 부분이었어. 나는 읽어주다가 얼굴이 붉어졌었지. 나는 중간에 멈춰야 했어. 끝까지 다 읽었다가는 내 얼굴이 폭발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했거든.
내 얘기를 듣고 그들이 당장 집으로 뛰어가 자신의 책장에서 가장 소중한 책, 많이 읽은 책을 뽑아 자신의 가장 소중한 사람에게 건넬 수 있기를. 내 얘기를 듣고 그들이 당장 집으로 뛰어가 자신의 책장에서 가장 격정적인 책을 뽑아 들고, 자신의 소중한 사람에게 그 부분을 읽어줄 수 있기를. 그리고 다음날 그들이 내게 왔을 때의 얼굴은 복숭아빛이기를, 오렌지 향기나는 공기를 뿜고 있기를.
나는 그런 모습들을 보며 미소지을 수 있는, 아주 예쁜 할머니가 되고 싶다.
책을 읽고 있다. 별로 재미는 없는 책. 절반 이상을 읽었지만 아직까지도 주인공에게 도무지 몰입이 되지 않는 책. 주인공은 울지만 나는 전혀 울고 싶지 않아지는 책. 그래서 미안하다. 헬렌, 미안해. 네가 울 때 내가 울어줘야 했는데, 네가 사랑할 때 내가 같이 흥분해줘야 했는데, 그런데 나는 좀처럼 네가 될 수 없었어. 그렇지만 제기랄, 제임스가 네게 청혼을 하고, 책을 읽어주겠다고 했을 때, 그 순간에는 네가 부러워 견딜 수가 없었어.
"결혼하면, 같이 여행 다녀요."
내 말이 제대로 전달됐는지 확실치 않았지만, 잠시 후에 그가 말했다.
"기차 타고."
"배도 타고, 영국도 가보고."
"중국에도."
"아프리카에도."
제임스가 내 귀 뒤로 머리카락을 쓸어 넘겼다.
"밤마다 서로에게 책을 읽어줄 수도 있을 거예요." (p.272)
제임스와 헬렌이 서로의 존재를 알게되고, 그리고 헬렌이 하룻동안 그를 피해 있었을 때, 그 다음날 제임스는 그가 묻고 싶은 말을 노트에 적어 그녀에게 보여준다.
"어디 갔었어요?" (P.33)
아. 나는 이 물음이 지독하게 달콤하게 느껴졌다. 어디 갔었어요, 다음에 나올 그 무수한 말들이 기다려진다. 어디 갔었어요? 이제 다시는 내 옆을 떠나지 말아요. 어디 갔었어요? 한참 찾았잖아요. 어디 갔었어요? 내내 기다렸어요. 어디 갔었어요, 다음에는 좀처럼 계속 꺼져있어, 라는 말이 나오기는 쉽지 않으니까.
이 둘이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니, 사랑할 수 밖에 없는지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노력을 한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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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걸 어떻게 말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마치 세상에서 유일하게 날 이해해 줄 사람이 당신인 것 같았어요. 그런데 지금 당신이 이렇게 날 바라보고, 나와 얘기 하고 있어요."
그가 수화기에 대고 아주 비밀스럽게 말했다.
"기적 같아요." (P.4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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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이 지구 위에서 같은 언어로 말하는 단 두 사람, 혹은 단 두개의 종인 것 같지 않아요? 그런데 어떻게 서로 떨어져 있을 수 있겠어요?"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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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한참 동안 나를 바라보았다. 브라운 씨가 마음에 드는 문장을 연구할 때처럼, 다음 페이지로 넘겨달라는 나의 아우성과는 상관없이 브라운 씨가 그 페이지의 좋아하는 표현만을 내리 쳐다보고 있을 때처럼.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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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적 같다고 말하는데, 지구 위에 존재하는 단 두개의 종인 것 같다는데, 책의 좋아하는 페이지를 들여다보는 것 처럼 바라본다는데(이건 정말 근사하다! 언젠가 나도 써먹어야지!!), 그런데도 이 모든 문장들이 아, 그들이 정말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으로는 다가오질 않는다.
그러나 이 이야기의 끝은 궁금하다. 유령인 그들이 존재하게 된 그 몸 안에 그들은 계속 존재할 수 있을 것인지, 그들의 가족은 여전히 그들의 존재를 알아차리지 못할것인지, 그리고 그들의 사랑은 결국 어떻게 마무리 될 것인지.
나는, 어디 갔었어요, 뒤에 이런 말을 덧붙이고 싶어졌다.
돌아올 줄 알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