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스 윌리스' 주연의 영화 『써로게이트』의 시간적 배경은 미래인데, 이 시대에서는 자신의 외모를 자신이 원하는대로 바꾸는 것이 가능하다. 더 예쁘게 더 섹시하게 바꿀수도 있고, 나이를 먹어도 더 젊은 모습으로 연출할 수도 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그런것이 가능해서 모두가 자신이 생각하는 최상의 모습으로 바꾸고 살아가는데도 그들 모두가 서로 '다른' 외모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만약 미에 대한 기준이 절대적이라면 아마도 그런 시대를 살아갈 때 여자는 모두 김태희 같거나 남자는 모두 송승헌 같거나 해야 할텐데, 그렇지 않다는 것. 이것은 우리가 서로 미에 대해서 각자만의 관점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어떤 사람은 쌍커풀이 큰 눈을, 어떤 사람은 쭉 찢어진 눈을 예쁘다고 생각할 것이고 어떤 사람은 두꺼운 입술을 어떤 사람은 얇은 입술을 예쁘다고 생각할 것이다. 콧구멍이 위로 향한 코를 예쁘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 살짝 휜 코를 예쁘다고 생각할 수도 있다.
사람이 다른 사람을 사랑하는 것도 마찬가지. 내가 가진 '이상형'은 단지 이상형일뿐, 실제로 눈 앞에 누군가 보여졌을 때 그 사람을 사랑하는 것은 내 '의지'와도 그다지 관계없는 일이고, 다른 사람들의 '조언'과도 역시 관계 없는 일이다. 야, 어떻게 그런 사람을 좋아해? 나라면 좋아할 것 같지 않은 사람을 내 친구는 좋아하기도 한다. 나는 가슴에 털이 부숭부숭한 남자를 결코 사랑할 수 없을 것 같고, 입술이 얇은 남자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고, 배 나온 남자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고, 머리가 긴 남자를 사랑할 수 없을 것 같고, 유약해보이는 남자를 사랑할 수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그런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가 존재한다는 것도 분명, 알고있다. 그러니 이 세상에 다양한 커플들이 존재하고, 세상 모든이들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살 수 있는것 아니겠는가.
책을 읽고 있다.
미국에 있는 약혼자를 만나러 가려고 배를 탔던 요코는, 그 배에서 일하는 사무장과 사랑에 빠진다. 그래서 미국에 갔다가 다시 일본으로 돌아온다. 실화를 바탕으로 쓰여진 책이라는데, 그런데, 요코가 사랑하는 사무장은 이런 남자다.
뭔가 향기로운 술 냄새와 시가 냄새가 이 남자 특유의 살내인 것처럼 강렬하게 요코의 코를 찔렀다. 요코는 좁은 계단을 쿵쾅거리며 내려가는 남자의 굵은 목덜미에서부터 넓은 어깨 언저리를 뚫어지게 쳐다보면서 그 뒤를 따랐다. (p.92)
그래, 이 남자가 주는 육체적 매력에 요코가 흠뻑 빠진것을 알겠다. 요코가 도도하게 그를 모른척 했음에도 결국은 그에게 흠뻑 빠져버리게 될 수 밖에 없었던 것도 이해된다. 간혹 사무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때면 나는 자꾸만 할리퀸 로맨스의 신체건장한 남자를 떠올리게 되는데, 이 책속에서의 사무장은 신체가 건장해도 너무 건장한 것 같다. 굵은 목덜미도, 넓은 어깨도 여자들에게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그 굵은팔로 뒤에서 끌어안았을 때 온 몸이 부서질 것 같이 약하게 느껴지는 것도 뭔지 알겠다. 그래, 그럴 수 있겠다. 그런데,
나는 별로다. 나는 이 사무장이 좀처럼 마음에 들질 않는다. 내가 미국에 가는 배에 탔다면, 나는 이 사무장과는 사랑에 빠지지 않았을 것 같다. 요코에게 이 남자를 만나게 된 것, 이 남자를 사랑하게 된 것은 마치 운명같고, 피할 수 없을 것 같았지만, 나는 그때의 요코에게 이 남자가 '반드시' 필요한 건 아니었다는 생각은 든다. 요코의 사무장은 내게는 마치 [안나 카레니나]에서 '안나'의 '브론스키'와 같다. 요코에게 그리고 안나에게, 그들은 내 자신이 여자임을 증명해주는, 다시 잃었던 빛을 찾게 해주는 남자들이었음은 분명하지만, 그들이 다른 여자에게도 어필할 만큼의 매력을 갖추었느냐 하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하겠다. 그녀들의 선택을 이해할 수 있고, 그래 그런 사람을 사랑할 수 있겠지, 라는 생각은 들지만 나라면 사무장을, 그리고 브론스키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들은 내가 아니고 나 역시 그녀들이 아니다. 될 수 없다.
흥미롭게 이 책의 247페이지쯤 까지 읽었는데, 읽다가 그런 생각을 했다. 어째 이렇게 매력없는 남자들 뿐이람, 하는 생각. 그래서 나는 책장을 덮고 내가 사랑하는 남자는 누구였지, 하고 생각했는데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의 '판탈레온'이 생각났다. 물론,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생각나는 건, 어쩔 수 없이, 부인할 수 없이,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의 레오였지만.
2시간 뒤
Re:
떠나기 전에 하나만 더. 레오, 솔직하게 말해주세요! 저에 대한 관심을 잃었나요?
5분 뒤
Aw:
정말로 솔직한 답을 바라세요?
8분 뒤
Re:
네, 물론이에요. 솔직하게, 그리고 빨리요! 요나스 깁스 풀러 병원에 데려가야 한단 말이에요.
50초 뒤
Aw:
당신에게서 이메일이 와 있는 걸 보면 가슴이 두근거려요. 어제 그랬고 일곱 달 전에 그랬던 것처럼 오늘도 꼭 그래요. (pp.267-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