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아침 출근길에 핸드폰 사진첩에 있는 사진 몇개를 지워야겠다고 생각하다가 이 사진을 봤다. 어젯밤이었다. 내가 길을 가다가 이 사진을 찍었나 보구나. 봄밤의 벚꽃. 밤 벚꽃. 그제서야 생각났다. 나는 어제 집에 돌아오는 길, 우동집에도 들렀다는 것을. 그러나 밤 열한시 반의 우동집에는 사람이 바글바글, 내가 앉을 자리가 없었다. 밤 열한시반에 우동을 먹는 사람들이 왜이렇게 많을까? 나는 먹지 않고 그냥 지나쳐 갔다. 그 시간에 우동은 참 간절했는데.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보았던 날을 기억한다. 여주인공이 혼자 혹은 누군가와 함께 와인을 마시는 장면이 아주 많이 등장하는데, 덕분에 이 영화를 보고 와인을 마시러 갔었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 때문에 기분이 아주 업 되었던 것도 생각이 난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남자는 키스를 하려고 하고, 여자는 키스를 하지 않으려고 하는 장면도 또렷하다. 그녀는 자신이 해온 그동안의 연애에 좌절하고 있었던 바, 쉽게 사랑에 빠지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프랑스에서 온 남자 줄리앙과 주말을 함께 보내면서 사랑에 빠지게 됐다. 그런건 어쩔 수 없으니까. 영화속의 줄리앙은 영어가 서투르다. 배가 고프다(hungry)고 말해야 하는데 화가 난다(angry)라고 말해버리는 남자다. 그러나 그가 중요한 말들을 놓치는 법은 없다. 그녀의 친구가 그녀를 향한 줄리앙의 시선을 눈치채고 그에게 귀띔한다. 

she's very good girl 이라고. 줄리앙은 i know 라고 답한다. 술 취해 혼자 잠든 그녀를 줄리앙은 의자에 앉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불을 꺼준다. 아침에 일어난 그녀가 커피를 준비해 둔 줄리앙을 맞닥뜨리고 놀란다. 나는 당신이 어제 떠난 줄 알았는데. 줄리앙은 말한다. 나는 남아있다고. 

어제 이 영화를  DVD 로 다시 봤다. 어제 보고 유독 마음에 남았던 장면은, 그 전에는 미처 몰랐는데, 그녀가 힘들어 할때의 줄리앙이었다. 힘들어하고 약을 먹고 침대에 엎드린 그녀를 보면서 줄리앙은 안아준다거나 그 자리를 피해준다거나 하는 대신에 그녀에게 묻는다. 너는 내가 너와 함께 있어주기를 원하니, 아니면 너를 혼자 있게 해주기를 원하니. 나는 그가 그렇게 묻는게 너무 좋았다. 그가 그녀에 대해 아는척 하지 않아서. 그녀가 원하는대로 해주고 싶어해서. 관심을 가지고 이럴때 그녀에겐 이런게 필요해, 라고 알아서 해주는 것도 좋지만, 어제 내 기분에는 그가 물어봐 주는게 아주 마음에 들었다. 그쪽이 더 낫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줄리앙이 좋다. 프랑스 파리의 지하철 안에서 줄리앙은 기대하지 않았는데 그녀와 재회한다. 여기에 어쩐일이냐고 묻고 여자는 공항에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줄리앙은 눈에 띄게 초조해한다. 그녀가 세시간 후면 떠난다고 말한다. 줄리앙은 그 긴 다리를 떤다. 그 짧은 순간 그의 머릿속에는 대체 어떤 생각들이 오고갔을까. 그녀의 앞에서 초조한 마음에 다리를 떠는 줄리앙이라니.  

여자, 노라가 좋다. 상처받을 것이 두려워 키스도 제대로 못하는 여자. 그의 전화번호가 쓰여진 종이를 잃어버리고 패닉에 빠진 여자. 그래서 그를 결국은 만날 수 없을거라고 생각하며 좌절하는 여자. 그러나 그와 재회한 여자, 기꺼이 비행기를 놓쳐버린 여자.  

나는 이 영화를 사랑한다. 이 영화는 최고다. 

 

친구로부터 쪽지를 받았다. 그 친구와 나는 주저앉고 싶을 때 서로에게 얘기한다. 우리는 서로의 기쁜일이나 슬픈일을 꼬치꼬치 묻지 않는다. 상대가 얘기하는 딱 그 만큼만을 듣고 거기에 반응한다. 우리는 내게 더 많은 것을 얘기하라고 요구하지 않고, 또 우리는 이건 너만 아는 비밀이야, 라고도 말하지 않는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에게 하는 이야기가 다른 사람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을 알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서로 다르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같아지기를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옷을 벗고 함께 목욕탕에 갈 만큼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만, 수시로 지금의 감정이 어떤 상태에 있는지를 서로에게 얘기한다. 우리는 서로에게 많은 것을 욕심내지 않는다. 쪽지에는 친구가 나와의 관계가 소중하다고 그래서 이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겠다고 써있었다. 아! 나와의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계속 노력하겠다고 말하는 사람이라니. 이런 사람이 내게 있다니. 이런 사람을 곁에 둔 나라는 인간은, 정말, 지독하게 멋진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근사하다. 젠장. 멋져.  

같이합시다, 노력. 혼자 노력하는 것 보다는 같이 하는게 낫겠죠. 여러모로. 

 

곧 비가 올 것 같다. 비 냄새가 비릿하게 공기중을 떠돈다. 비가 와도 괜찮다. 나는 사무실에 우산을 가지고 있다. 심지어 세개씩이나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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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사이 2011-04-15 14: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런 인연이, 그런 친구사이가 있다는 거,
우산을 세 개나 가지고 있어서 비가 와도 괜찮은 다락방님에게 있다는 거,
기분 좋네요. ^^

다락방 2011-04-15 17:20   좋아요 0 | URL
비가 올듯 올듯 하면서 오지는 않고 습기만 가득한채로 어둑어둑해지고 있어요.
저는 섬사이님이 안나 카레니나를 '그렇게' 읽어주셔서 참 좋아요.
:)

nada 2011-04-15 14: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같이합시다, 노력.

이건 흡사 송편이 정원이에게 말하는 투를 떠오르게 하는군요.

락방님은 멋져요, 솔직히.

다락방 2011-04-15 17:21   좋아요 0 | URL
처음에 송편이라고 해서 유머하는줄 알았어요, 꽃양배추님. 그런데 정원이랑 연관시키면서 송편이 뭘까, 이랬는데 송편집장 ㅋㅋㅋㅋ 김석훈 ㅎㅎㅎㅎ

멋지다고 말해줘서 고마워요, 꽃양배추님.
저는 멋져요. 꽃양배추님이 멋지다고 말해주는 사람이니깐요.
으쓱.

개인주의 2011-04-15 16: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편안한 사이. 좋은 인연을 두었군요.
친구인데도 이상한 질투심에 불타는 사람들이 간혹 있잖아요.ㅋㅋ

다락방 2011-04-15 17:23   좋아요 0 | URL
다른사람에게 말하지 않을까 하는 걱정 없이 어떤 이야기도 할 수 있다는 점이 전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 친구도 저를 그런쪽으로 믿고 있다는 것을 저는 알고 있구요. 어떤 얘기를 해도 괜찮고 그렇다고 모든 얘기를 다 하지 않아도 좋으니, 정말 근사한 친구죠. 훗 :)

무스탕 2011-04-15 1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밤 열한시반엔 우동 먹지 마요. 아침에 부으면 어쩌려구..;;
비가 올듯한 하늘을 조금전에 보고 들어왔어요. 요즘 비는 반갑지 않은 비라서 예고없이 내리면 참 미울거에요.
작년까지의 봄비는 꽃잎을 떨구지 않으면 반가웠는데 올해의 봄비는 '비' 라는 자체만으로 공포를 몰고오니 참 어쩌다 이리 됐는지 속상해요. 애들 가방엔 우산이 필수품이 되었구요.
오늘은 비가 오던 어쩌던 하여간 금요일 밤. 밤 열한시반에 우동을 먹고싶지 않도록 그 전에 포만감을 채워두시길 :)

다락방 2011-04-16 08:57   좋아요 0 | URL
흑흑 무스탕님.어제 아침, 상무님께서 다락방과장은 점점 몸이 더 좋아진다, 라고 하시던데 그건.... 제가 가끔 밤 열한시반에 혼자 우동을 먹기 때문일까요? 심지어 저는 그시간에 배고프지도 않았어요. 엊그제 우동집에 갔을때는 회식자리에서 소고기 잔뜩 흡입하고 간거였어요.제가 고픈건 배가 아닌거죠. 흑흑..여자한테 몸더 좋아졌다고 하는건 무슨 의미에요,무스탕님? 네?
저는 지금 공항 가는 지하철 안이에요. 비가 오면 어쩌나 했는데 다행히 비가 오질 않네요. 무스탕님,주말 잘 보내세요!!
아 맞다! 월요일에 제가 이메일 쓰게 될거에요. 기대하셔요~~ :)

mira 2011-04-16 1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념에 젖게 하는 봄밤의 벛꽃향기가 블로그를 통해 날아오르네요 치열하고 초초했던 저의 어리고 유치햇던 봄밤이 기억이 나네요 사랑,친구들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게 만드는군요 ㅎㅎ

다락방 2011-04-17 01:25   좋아요 0 | URL
어린날은 유치했던 기억들만이 가득한가봐요. 저도 제 어린날을 떠올리면 참으로 유치하기만 하거든요. 그래서 어떤 기억들은 싸그리 지워버리고 싶은데, 아마도 시간을 돌려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면 또 똑같은 말을, 똑같은 행동을 할 것 같아요. 그게 자기 자신이니깐요.
봄밤에는 유독 기억나는 것들이 많은 것 같습니다. 봄밤은 봄밤이라는 단어 자체만으로도 이미 많은것들을 건드리는 능력이 있는 것 같아요.
밤이 늦었어요. 편히 주무세요.

마노아 2011-04-1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만추가 떠올라요. 중국어를 알아듣지 못하지만 적당히 마땅한 대꾸를 해준 훈이 말이에요.
지금은 부산에 있을까요, 돌아오는 중일까요, 이미 돌아왔을까요?
목요일에는 벚꽃 사진을 찍었는데 다락방님이 떠올랐어요. 다락방님은 수시로 떠올라요.
여러 곳에 다락방님이 있어요. 어디서든 볼 수 있어요.^^

다락방 2011-04-17 01:28   좋아요 0 | URL
마노아님. 저는 부산에 갔다가 돌아왔어요. 부산에서 친구와 스테이크를 먹고 심지어 샐러드도 소고기가 들어간 샐러드를 먹었는데, 그 뒤로 커피를 마시고 김해공항에 오니 또 배가 고프잖아요? 혼자 푸드코트에 가서 튀김우동을 먹었어요. ㅋㅋㅋㅋㅋ 먹고 바로 비행기 탑승해서 다시 서울로 왔는데 도넛츠가 너무 먹고 싶더라구요. 그런데 김포공항에 던킨도넛츠는 보이질 않았어요. 슬퍼라.. 결국 집에 왔는데 온 몸이 녹초가 됐습니다. 서울에서 부산을 하루만에 왕복하는건 진짜 체력이 뒷받침 되어야만 하는 것 같아요. 그런면에서 볼때 저는 이미 국민체력을...(응?)
수시로 제가 떠오른다면 수시로 제 생각을 하세요. 그건 결코 나쁘지 않아요. 히히히히히히히히히
안그래도 마노아님 생각했는데 서재 들어왔더니 마노아님의 댓글이 있네요. 이런거 좋아요.
:)

버벌 2011-04-18 0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우산이 두개인데... 락방님 짱인듯. ㅡㅡ;;; 잘 다녀오셨어요? 저는 책 잘 읽었어요. 옛문체인데 전혀 촌스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어요. 느티나무 말고 가슴이 멍먹해지는 글들이 많더라구요. 잘 모르던 작가였는데 좋아하게 되버렸어요~~ ^^ 무리와 부조리.

다락방 2011-04-18 09:03   좋아요 0 | URL
버벌님 저는 강신재는 젊은 느티나무를 읽은게 다인데 다른 단편들도 좋았군요. 저도 읽어봐야겠어요. 무리와 부조리의 상징. 좋죠? 아아 나는 그를 더 사랑하여도 되는것이다, 라는 끝맺음이라니요, 흑흑. 설레임을 주는 소설이에요.
전 잘 다녀왔어요. 게다가 저 역시 베티 스미스의 [나를 있게 한 모든것들]을 다 읽었습니다. 주말에요. 다 읽고 카톡 보낼까 하다가 말았어요. 히히.

버벌 2011-04-19 03:08   좋아요 0 | URL
저는 단편집을 샀는데. 젊은 느티나무를 본 후에 처음부터 차례로 읽고 있거든요. 양공주에 관한 단편이 있었는데..기회가 되면 한번 읽어보시라고 하고 싶어요. 재미보다 이 느낌이 뭔지 모르겠어요. ^^ 저에게 설명을 좀. ㅎㅎ 베티 스미스 보셨구나. ^^ 저 역시 느티나무 읽고 카톡 보낼까 하다가. 말았어요 히히.

다락방 2011-04-18 22:38   좋아요 0 | URL
버벌님. 명령이에요. 이제 앞으로 나한테 카톡 보내고 싶으면 참지말아요. 참지말고 그냥 보내요. 알았어요??!!

버벌 2011-04-19 03:10   좋아요 0 | URL
네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