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에는 『안나 카레니나』를 읽으면서 톨스토이는 정말이지 천재가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하고 있다. 톨스토이는 그 소설속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된다. 안나가 되었다가 브론스키가 되었다가 레빈이 되었다가 한다. 안나가 보는 브론스키, 안나에게 보여지는 브론스키, 그리고 실제로 생각하고 있는 브론스키, 그 모두가 다를 수 있다는 것을 톨스토이는 알고 있고, 그것을 그대로 드러내준다. 심지어 톨스토이는 안나의 감정을 얼마나 섬세하게 철저하게 묘사했는지, 와, 기가 막힐 노릇이다. 안나가 행복한 이유, 안나가 절망하는 이유, 그 모두가 아주 고스란히 와 닿는다. 톨스토이는 정말 천재인가! 아니면 그는 전생에 안나로 살았던가!
사실 톨스토이를 만나서 천재라고 감탄하기 전까지는 친구와 내내 '다니엘 글라타우어'가 얼마나 천재인가에 대해 얘기했다. 그도 역시 에미가 되었다가 레오가 되었다가 한다. 길고 다정하고 장황하게 이메일을 보내는 에미, 그러나 그럴때는 간단하고 조금은 사무적이기까지 한 톤으로 답장을 보내서 가슴을 후벼파는 레오. 표독스러워지고 집착하는 에미, 그럴때는 친구의 표현을 빌자면 '입안의 혀'처럼 구는 레오. 다니엘 글라타우어도 전생에는 사실 에미였던게 아닐까. 어떻게 여자가 느낄 수 있는 순간순간의 감정을 이렇게 지독하게 잘 표현했을까.
오늘 일기예보에서 어제보다 8도정도 기온이 내려갔다고 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완전무장을 하지도 않았는데(부츠를 아직 못꺼냈다.....귀차니즘....), 안추웠다. 안추운거다! 난 안추웠다고. 오히려 조금 웃었다. 그냥. 웃고 싶어서. 그리고 이 책의 이 부분이 생각나서 히죽히죽했다.
2분 뒤
Aw:
에미, 말문이 막혀버렸어요. 내가 몹시 놀랐다는 소리예요. 당신 목소리와 말투를 전혀 다르게 상상하고 있었거든요. 당신, 정말로 늘 그렇게 말해요? 아니면 목소리를 일부러 꾸민 건가요?
45초 뒤
Re:
제 목소리가 어떤데요?
1분 뒤
Aw:
끝내주게 에로틱해요! 포르노방송 진행자처럼.
7분 뒤
Re:
그거 칭찬이죠? 한시름 놓았어요! 당신도 나쁘지 않은걸요. 당신은 글보다 말이 훨씬 대담해요. 목소리가 아주 허스키하게요. "내가 줄곧 이런 사람이랑 얘기하고 있었던 거야?" 이 대목이 마음에 들어요. 뭐랄까, 무척 방탕하고 섹시한 느낌이 나요. 그런 목소리라면 비아그라 같은 정력제 광고에 써도 아주 잘 어울릴 것 같아요. (p.304)
와우- 후아- 정말이지,
'끝내주게 에로틱'하며 '포르노방송 진행자'같은 목소리는 대체 어떤 목소리일까!!!!!!!!!!!!!!!!!!!!!!!!!!!!!!!!!!!!!!!!!!!!! 그런 목소리는 연습하면 되는걸까? 아, 나도 '네 목소리는 포르노방송 진행자처럼 에로틱해'라는 말을 듣고 싶다. 내가 살아생전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나는 「Harlem Blues」를 부르는 'Cynda Williams'같은 목소리를 가지고 싶은데, 정말 그러고 싶은데, 그런 목소리를 가지게 된다면 그때는 나도 그런 말을 들을 수 있을까? 끝내주게 에로틱해요, 포르노방송 진행자처럼! 후아- 그러나 목소리는 타고나는 거겠지. 에로틱한 목소리 훈련법, 뭐 이런건 없잖아? 오늘은 정말이지 끝내주게 에로틱한 목소리를 가진 여자였으면 좋겠다고, 입도 좀 컸으면 좋겠다고, 입술도 좀 두꺼웠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다. 그래야 은교씨처럼, 무재씨로부터 섹스해볼까요, 라는 말을 좀 듣게 되지 않을까.
섹스 말인데요, 그게 그렇게 좋을까요.
좋지 않을까요.
좋을까요.
좋으니까 아이를 몇이나 낳는 부부도 있는 거고.
글쎄 좋을지.
궁금해요?
그냥 궁금해서요.
여기서 나가면 해 볼까요.
나갈 수 있을까요.
언제까지고 숲이 이어져 있는 것은 아니니까요.
나는 좋아하는 사람하고 하고 싶은데요.
좋아하면 되지요.
누구를요.
나를요.
글쎄요.
나는 좋아합니다.
누구를요.
은교 씨를요.
농담하지 마세요.
아니요. 좋아해요. 은교 씨를 좋아합니다. (pp.22-23)
나는 원나잇은 어림도 없고, 심지어 좋아하는 사람한테도 섹스 앞에서는 '노'를 말하는 좀 고지식하고 보수적인 여자사람인데, 무재씨라면, 그러니까 궁금하다고 말하니까 그럼 해볼까요, 라고 말하는 그런 사람이라면 음, 그러니까, 이 책속의 무재씨처럼 따끈한 국물 먹으러 갑시다, 라고 말하는 사람이라면, 음, 음, 음..........
아 패쓰.
쓰다보니까 어째 간질간질해졌는데, 그러니까 내가 하고 싶었던 말은, 톨스토이도 천재, 다니엘 글라타우어도 천재, 레오는 나쁜놈(응?), 은교씨는 무재씨와 섹스를 해도 좋겠다, 이며 그보다는 끝내주게 에로틱한 목소리를 갖고 싶다는 것 쯤이 되겠다.
사과나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