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영화 『더티 댄싱』에서는 부잣집에서 자란 여자 '프란시스 하우스만' 이 휴가를 보내는 리조트의 댄스 강사 '쟈니'와 사랑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닥터인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언제나 자신의 딸을 자랑스럽게 여겼고, 그녀에게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는 사실을 가르쳐주었다. 그러나 프란시스가 일개 댄스강사랑 사랑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고 그녀의 아버지는 몹시 분노한다. 그런 아버지에게 프란시스는 말한다.
아버지도 나빠요. 사람은 모두 평등하다고 저한테 말씀하셨잖아요. 그런데 아버지는 지금 그렇게 행동하지 않으시잖아요.
'하퍼 리'의 『앵무새 죽이기』에서도 이와 비슷한 대화가 나온다. 어린 소녀, 스카우트와 오빠와의 대화.
"게이츠 선생님은 좋은 분이시지. 안 그래?"
"물론이지. 그 선생님 반에 있을 때 좋아했어."
"히틀러를 엄청 싫어하시는데......"
"그게 뭐가 잘못이야?"
"그게 말이야. 오늘 히틀러가 유대인들을 그렇게 취급하는 게 얼마나 나쁜 일인지 말씀하셨거든. 오빠, 누구라도 박해하는 건 옳지 않은 일이지. 안 그래?"
"스카웃, 물론 옳지 않고말고. 한데 왜 그렇게 안달하는 거야?"
"그게 말이야. 그 날 밤 게이츠 선생님이 법정에서 나오고 계셨거든-우리 앞에서 계단을 내려가셨기 때문에 오빠는 선생님을 볼 수 없었지-선생님이 스테파니 아줌마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계셨어. 누군가가 그들에게 본때를 보여줄 때가 되었다고. 점점 분수도 모르고 주제넘게 군다고. 이러다가는 우리하고 결혼할 생각까지 하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시는 걸 들었거든. 오빠, 히틀러를 그토록 끔찍하게 미워하면서도 돌아서서는 바로 자기 나라 사람에 대해서는 비열하게 대할 수 있냔 말이야-" (p.464)
어른들은 말이다, 말로는 그런다. 말로는 사람을 차별하는 것이 나쁜 것이라고 하고, 누군가에게 편견을 갖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들이 보여주는 행동은 그들이 하는 말과는 달라서 아이들은 혼란스럽다. 아이들이 말로 들었던 것은 차별하지 말라는 것이지만, 아이들이 실제로 직접 보게 되는 것은 어른들이 차별하는 모습이고, 구박하는 모습이고, 편견을 갖는 모습이고, 폭력을 일삼는 모습이다. 그런 모습들을 너무 많이 봐와서 아이들은 결국 어른이 되었을 때, 늘 주변에서 보던 어른처럼 되고야 만다.
재스퍼 존스는 사실 한번도 문제를 일으킨 적이 없다. 그러나 재스퍼 존스가 원주민과의 혼혈아라는 이유만으로, 온 마을의 모든 범죄는 마치 그가 저지른 것 처럼 부풀려진다. 우체국에 불을 지른것도 재스퍼 존스가 되고, 로라가 실종되었을 때는 재스퍼 존스가 경찰들에게 죽도록 얻어 터진다. 로라의 죽음을 가장 슬퍼한게 재스퍼 존스인데, 사람들은 재스퍼 존스의 말을 들으려고는 생각도 하지 않는다.
월남전에 자신의 아들이 참전했다며 같은 마을에 사는 베트남 사람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도 어른들이고, 마음을 다쳐 숲 속에서 살고 있는 노인네를 살인마로 둔갑시킨 것도 어른들이고, 약하디 약한 로라를 다치게 한 사람도 어른들이고, 그런 로라의 말을 들으려 하지 않았던 것도 어른들이다. 세상은 온통 이런 어른들 투성인데, 어디에서도 인정 받지 못하고, 심지어 박해를 받는 아이들이 괜찮은 어른이 되는게 가능할까? 아이들은 누구를 믿고 누구에게 의지해야 할까?
재스퍼 존스는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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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찰리, 나한테 누군가를 믿는다는 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야. 사람을 믿는다는 자체가 위험한 일이지. 난 지금 너한테 나를 믿어 달라고 부탁하는 중이야. 강요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너만은 내 편에 서서 이 문제를 봐 주길 기대했어. 그렇게 하고 있는 거 맞지? 넌 책을 읽는 아이라 다른 사람들 입장에서도 생각하는 법을 알잖아." (p.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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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 존스가 왜 이렇게 말했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그렇지만, 책을 읽는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도 생각하는 법을 안다면, 세상은 얼마나 더 좋아졌을까. 그러나 실상은 그렇지 않다. 저 위에, 프란시스의 아버지는 의사였고 그 밑에, 스카우트의 앞에서 자기 나라 사람에 대해 비열하게 말하는 사람은 교사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보다 책을 더 읽었으면 더 읽었지 덜 읽진 않았을 것이다. 단순히 책을 읽는다고 더 나은 사람이 되는게 아니라 책을 읽는 사람에게는 '열린 마음'도 필요한 것이다. 아무리 지식을 머릿속에 넣어봤자, 그것을 수용하는 열린 마음이 없다면, 책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이 대체 무슨 차이가 있을까. 남들보다 '똑똑'하다는거?
물론, 찰리는 재스퍼 존스가 믿을만한 좋은 아이다. 다름 사람들 입장에서도 생각할 줄 아는 그런 아이. 찰리는 눈앞에서 자신의 아빠가 마을 사람들에게 심하게 구타당하는 것을 목격한 친구를 위로할 줄 아는 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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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를 따라가기 전 나는 제프리의 어깨에 손을 올린다. 내 엄지로 그의 쇄골을 지그시 누른다. 내 마음이 전달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는 끄덕이며 입술을 꽉 다문다. 그러고는 집 안으로 들어간다. (p.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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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개를 끄덕인 제프리는 필시 찰리의 마음을 알았을 것이다.
그리고 찰리는 엉망진창인 어른들 틈에서 무엇이 진실인지 서서히 깨달아가고, 이제 친구의 진심이 무엇인지도 깨닫는다. 누가 말해주지 않아도. 그러니까 우리가 사는데 어떤 것들은 말하지 않아도 저절로 알게되기도 한다. 누구보다 힘이 세 보였던, 강해보였던 재스퍼 존스, 그 아이의 감춰진 마음같은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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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제야 나는 알게 된다. 그를 알게 된다. 가장 슬픈 사실을 알게 된다. 모든 것을 잃어버린 버려진 아이. 나는 항상 재스퍼를 랜들 맥머피라고 여겼고 나 자신은 힘없고 겁 많은 따개비라고, 그래서 그에게 붙어 공생하면서 용기를 위장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재스퍼도 나와 같은 이유로 내가 필요했다는 사실을 이제 알게 되었다. 내가 똑똑하거나 믿을 만하거나 충성스럽거나 착해서가 아니라 그냥 누군가, 아무라도 필요했던 것이다. 혼자서 이 문제를 해결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스퍼가 그날 밤 내 방 창문으로 찾아온 것은 완전히 겁에 질려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게 전부였다. (p.4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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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스퍼도, 찰리도, 제프리도, 그리고 일라이저도. 모두 상처받은 아이들이다. 그 아이들은 어른들의 부조리를 목격했고, 어른들의 폭력을 목격했고, 어른들의 부당함을 목격했으며, 어른들의 편견도 목격했다. 그리고 그 모든것들이 옳지 못한것들이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그러니 그들만큼은 그 '옳지 못한' 어른들처럼 자라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들은 말도 안되는 이유로 고통받는 이들의 편에 서 주는 그런 어른들로 자라줬으면 좋겠다. 지금처럼 친구의 말을 들어주면서, 친구를 위로하면서, 친구의 감춰진 마음을 깨달으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의 입장을 생각하면서. 적어도 그들만큼은 말과 행동이 다른 어른으로 자라지는 말기를.
덧붙여,
찰리는 일라이저와 결혼하고 싶어한다. 나는 며칠 전 이 책을 읽다가, 친구에게 '너는 내가 가진 패중 가장 좋은 것' 이라고 문자메세지를 보냈는데, 이 책에서 인용했다고는 말하지 않았다. 그 친구가 이 책을 읽지 않아야 할텐데. 나의 창작인줄 알아야 할텐데. 걱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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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라이저에게 나와 결혼해 달라고 말하고 싶다. 다른 사람은 싫다. 그 애만 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 애 없이는 견딜 수 없다. 내 손에 쥔 패 중 유일하게 좋은 것이다. 나는 이것을 손가락에 감아 반지로 만들고 싶다. 언젠가 내 안에 용기가 더 생기면 말하리라. 그때는 적절한 단어를 몽땅 모아서 말할 것이다. 그럼 그 애도 내게 똑같이 말해 줄지도 모른다. (p.47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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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는 이렇게도 말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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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 난 맨해튼에 살 테니 넌 브루클린에 살아. 그럼 우린 플라자 호텔에서 만나서 영국 차를 즐기는 거야. 나는 여우 털로 만든 코트를 입고 페니로퍼를 신을게. 너는 타탄체크 무늬의 스카프를 두르고 가느다란 줄무늬가 있는 갈색 정장을 입어. 파이프도 물고." (p.1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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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어쩐지 조금쯤 신나는, 그래서 재스퍼와 찰리와 제프리와 일라이저에게도 좀 나누어 주고 싶은,
금요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