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879페이지이며, 17.900원이다. 다시 말해, 출퇴근길에 읽기에는 지독하게 무겁다는 얘기. 단순히 책의 무게만 무거운게 아니다. 그 안에 실린 내용도 엄청나게 무겁다. 이 책을 읽고 나서는 도무지 기분이 좋아질 수가 없다. 그런 책을 나는 방금 다 읽었다. (또) 다시 말해, 내 기분은 지금 무겁다는거다.
제목은 '적절한 균형'인데 이 책은 끝까지 적절한 균형을 보여주지 못한다. 가난한자는 여전히 가난하고 불행한 자는 나락으로 떨어진다. 비참함에는 끝이 없다. 세상이 변해간다고 해도 여전히 변하지 않는게 있다. 약자를 괴롭히는 비열한 강자와 강자에게 굴복해서 계속 약할수 밖에 없는 사람들이 공존한다는 것. 그것은 무서운 진실이다. 이 책은 879페이지, 그런데 110쪽쯤을 읽었을 때부터 눈물이 고인다. 팔분의 일쯤을 읽었을 때부터 이 책은 나를 괴롭혔다. 무겁게.
6월2일 선거가 있기 며칠전, 출근길 강변역에서 한 후보를 보았다. 그 후보는 허리를 굽혀 시민들에게 좋은 하루를 보내라고 인사를 했다. 정중했다. 그런데 나는 그 모습을 보자 갑자기 피식- 웃음이 났다. 저렇게 허리를 굽혀 인사를 해놓고서는, 막상 뽑히고 나면 그들은 다시는 허리를 숙이지 않으니까. 뽑아준 시민들에게 '당선자'는 결국 귄위로 똘똘 뭉친 거만한 인사가 되고 마니까.
이 책속의 인도, 그 인도에서도 그랬다. 자신을 뽑아달라는 연설을 하는 후보들은 희망에 차있고 국민 모두를 구원해줄 것만 같다. 그들의 약속은 감미롭다. 그러나 듣는자들은 알고 있다. 저것들은 무의미 하다는 것을. 그들이 그저 말 뿐이라는 것을.
연설에는 모든 종류의 약속이 담겨 있었다. 학교를 새로 짓고 깨끗한 물을 공급하고 건강을 지켜 주며, 땅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재분배와 땅 상한제 법을 엄격하게 실시하여 땅을 주고, 카스트가 높은 사람들에 의한 차별과 괴롭힘을 방지하기 위해서 보다 강력한 법을 제정하며, 노예 제도, 아동 노동, 남편을 따라서 함께 죽는 것, 혼인 지참금 제도, 어린이 결혼등을 금지시키겠다고도 했다.
"우리나라에는 똑같은 법들이 엄청나게 많은 모양이다." 둑히가 말했다. "선거 때마다 20년 전에 만든 것과 똑같은 법을 만들겠다고 하니 원. 이젠 그런 법들을 실행할 때라고 누군가가 알려줘야 할 텐데."
"정치인들한테 법을 통과시키는 건 오줌 누는 거나 마찬가지죠. 죄다 하수구로 들어가서 도로 아미타불이죠." 나라얀이 말했다. (p.212)
선거를 하고 새로운 정치인이 뽑혀도 불가촉천민들의 삶은 나아지지 않는다. 지금이야 어떤지 나는 잘 모르지만 불과 몇십년전의 인도는 대단히 차별이 심했다는 것을 이 책을 보고 알았다. 불가촉천민들은 높은 신분의 사람들이 버린것만 취할 수 있었으며, 그나마도 말대꾸 하다가는 심하게 얻어맞기 일쑤였다. 그들에게 공정과 공평이란 단어는 존재할 수 없었다. 심지어는 아들을 낳는 것까지도 질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인도는 지금, 그때보다 살기 나아진걸까?
얼마전에 영화 『데저트 플라워』를 보면서도 생각한건데, 그 사회에 전통적으로 뿌리박힌것은 아무리 그 제도 자체가 잘못된것이라고 해도 바로잡기 힘들다. 여성 할례제도를 바깥 사회에 간신히 드러냈고, 그것은 이제 세계적으로 금지하는 사항이 되었지만, 여전히 하루에도 몇천명의 아프리카 여성들의 성기는 제대로 소독되지도 않은 면도칼로 도려내어지고 있다. 인도 사회도 마찬가지. 차별이 옳지 않음을 꾸준히 말해오는 사람들이 있지만 언제나 그들의 말은 묵살된다. 그리고 처형된다. 사회가 바뀌기 위해서는 사람들의 용기가 필요한데, 용기는 말 그대로 용기라 그것을 내기가 힘들다. 용기를 냈다가 목숨이 새똥취급당할 수도 있다. 그저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숨어사는 것이 서민들이 할 수 있는 전부다.
인도의 사회에서 불가촉천민들에게는 투표권이 없었다. 그러나 인도 정부는 그들이 민주사회임을 알리기 위해 그들 모두에게 선거권을 준다. 그러니까 선거장소에 가서 나는 선거하러 왔소, 라는걸 증명할 수 있게 이름 옆에 지장을 찍지만, 투표용지는 지주에게 돌아간다. 그러니 투표에 '참여'는 하지만 직접적으로 '투표' 자체를 할 수는 없는 것. 그것에 불만을 품은 불가촉천민 '나라얀'은 아버지의 경고를 무시하고 투표권을 주장한다.
"지문을 찍으라고요? 내 이름을 다 서명할 겁니다. 투표용지를 주세요."
(중략)
"우린 지시같은 건 필요 없어요. 이건 유권자로서 우리의 권리에요." (p.215)
나라얀과 나라얀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젊은 청년 두명은, 자신의 투표권을 주장했기 때문에 결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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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거벗겨져서 반얀나무 가지에 발목이 묶여서 거꾸로 매달린 채 온종일 매질을 당했다. 의식이 들었다가 잃었다가 하던 그들의 비명 소리가 점점 더 희미해졌다. (중략) 멀리 들판에서는 사내들이 거꾸로 매달린 머리통 세 개에다가 오줌을 갈겼다. 의식이 반쯤 나간 상태에서 바싹 마른 그들의 입은 물기가 고마웠고 졸졸 흐르는 오줌을 절박함 때문에 힘없이 핥았다. (중략) 투표함들을 옮기고 난 후 저녁에 그들의 성기는 석탄불로 지져지고 입에는 불타는 석탄이 집어넣어졌다. 그들의 입술과 혀가 다 녹을 때까지 마을 전체에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pp.216-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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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하지만 이 책은 879페이지다. 그런데 이런 이야기들이 이미 217쪽쯤에서 펼쳐진다. 그렇다면 당연히 남은 600페이지가 사랑과 행복으로 넘쳐나길 바라겠지만, 이 책은, 삶이 그렇게 쉽게 흘러가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것들 말고도 더 나쁜 일이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책장을 넘기면서 나는 놀랍고 슬픈 마음으로 알아가게 된다. 불가촉천민으로 '태어난'이상 그들은 죽을때까지 가난을 면치 못한다. 팔다리가 잘려나가는 것 쯤은 그들에게 불행축에도 끼질 못한다. 그들이 가끔 느끼는 행복은 지독하게 작은것이고, 그런 그들이 인내해야 할 고통은 지독하게 큰것이다.
인도의 가난한 자들은 국가가 자신들에게 행하는 짓을 보고 있었다. 더 좋은 나라를 만들기 위한다는 명분으로 총리가, 그리고 정부가 그들에게 한 짓을 그들은 고스란히 당하고 있었다. 그러나 부자들이 보는 인도는 그렇지 않았다. 정부가 하는 짓은 옳은 짓이었다. 가난한 자들을 거세하고 강제로 정관수술을 시키고 거리로 내쫓고 집을 부수는 것들이 아름다운 나라를 만들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행해져야 하는 일들이라 생각했다. 부자들이 보는 세상은 가난한 자들이 살고 있는 세상과는 거리가 멀었다. 물론 이게 어디 비단 인도의 일이기만 할까.
이 책을 다 읽고 책장을 덮으면, 책의 뒷 표지에 '피코 아이어'라는 소설가의 이런 말을 읽을 수 있다.
"이 소설로 인해서 당신의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플 것이다."
맞다.
맞는데, 그러니까 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픈데, 내가 아무것도 할 수가 없다. 너무나 무력하다. 그저 이 책을 읽는 행위, 그 자체뿐이라 답답하다. 그저 한숨 한번 내 쉬는 일이 고작 내가 할 수 있는 전부다. 도무지 어쩔줄을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