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꽤 파악이 쉬운 인간이다. 지나치게 단순해서 뭘 잘 숨길수가 없다. 작년 여름,  

 

[군인은 축음기를 어떻게 수리하는가]를 읽고 있던 C님과, N님, W님을 만나 맥주를 마시는데, 이 책 때문이었던가, 알라딘 문학 MD님의 이야기가 잠깐 나왔고, 그때 W님은 내게 

"다락방님. 문학 MD님이 책 고르는거, 글 쓰는거 딱 다락방님 취향이죠?" 라고 물으셨다. 

오- 맞아요, 맞아. 딱 내 취향이에요. 완전 좋아요. 나는 그렇게 답했던가. 

 

어제 김치갈비전골에 소주 한잔을 하러 식당엘 갔는데, 그 사장님이 갈비를 잘라주시면서 내게 그러신다. "삼겹살과 전골을 번갈아 드시네요." 네-  

엊그제 레스토랑에 가서 와인을 마셨는데, 와인을 따라주던 종업원이 내게 그런다. "지난번에도 와서 스테이크랑 와인 드시지 않으셨어요?" 네- 

며칠전 '돼지불백'을 먹으러 식당엘 갔는데, 거기 종업원은 "돼지 시키실거죠?" 한다. 그래서 내가 네- 하자 "항상 돼지만 드시더라구요. 되게 좋아하시나봐요." 네- 

아놔. 어디가서 뭐 하지를 못하겠고 뭐 먹지를 못하겠네. 같이 간 사람들은 그럴때마다 웃으면서 그런다. "왜 항상 우리들과 같이 오는데 니 얼굴만 기억하지?" 오- 그건 내가 너무 먹어대기 때문인가?  

여튼 나는 참 파악이 쉬운 사람인데, 내가 하려던 얘기는 그런데 이런게 아니라 취향에 대한 거였고, 다시 취향에 대해 돌아가보자면,  

글도 그렇다. 글도 그렇지만 글을 쓰는 사람에 대한 취향도 그렇다. 그러니까 나는 글을 참 잘쓰는구나, 하고 생각하는 서재인도 있지만 글을 잘쓴다 못쓴다를 다 떠나서 딱 내 취향에 맞는 글을 써주는 사람들이 무척 좋다. 대단히 좋다. 오래전부터 내가 좋아했던 서재인중의 한명은 여태 작성한 페이퍼의 페이지수가 4페이지를 채 넘기질 못했고, 글은 어찌나 뜨문뜨문 쓰는지. 가장 최근에 작성한 글이 2008년의 글이다. 그랬으니 말 다했지. 아마 비밀번호를 잊어버려서 다시 돌아오지 못하고 있는건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알라딘을 영영 잊고 다른 곳에서 터를 잡아 살고 있는지도 모르겠고.  

나는 그분의 서재를 꽤 좋아해서 글이 별로 많지도 않은 그분의 서재에 무작정 가서 읽었던 글을 또 읽고 또 읽고 했었다. 글을 많이 쓰지 않기 때문이었던가 그분의 서재에는 오는 사람이 그다지 많지 않았는데, 나는 거기서 살다시피 해서 그분의 모든 방명록에는 내 얼굴로 채워져 있었고, 그분의 모든 페이퍼에는 내 댓글이 있었던 것도 같다. 그에 비하면 그분의 댓글을 내 서재에서는 찾아보기가 힘든데, 그래도 그분이 활동하던 그 잠깐의 시절에는 내게 종종 방명록을 남겨주었었다. 잊을 수 없는 근사한 방명록을. 아, 정말 나는 그분이 남겨주는 방명록을 사랑했다. 그 방명록에는 샐린저의 이런 글이 있었다.  

오, 멋진 생각이다! 그가 약간 들뜬 채 이곳을 떠나게 하자. 그러나 어떤 식으로 들뜨는 거지?
내 생각에는, 당신이 사랑하는 누군가 힘겨운 테니스 3세트 뒤에, 결국 승리를 거두고 나서 싱긋 웃으며,
싱긋 웃으며 포치로 다가와 당신에게 자신의 마지막 샷을 보았느냐고 물을 때처럼 들떠서, 그래, 위.
 - 샐린저
 

[호밀밭의 파수꾼]부터 샐린저를 좋아했던 나는, 샐린저의 [아홉가지 이야기]를 읽은 터였는데, 그분의 서재를 보고 [프래니와 주이]를 읽었고, 그분의 방명록을 보고 [목수들아 대들보를 높이 올려라]를 읽었다. 그러다 보니 국내에 번역된 샐린저를 [골목밖의 철학자]를 빼놓고는 다 읽어버렸다.  (poptrash님의 제보에 의하면, 골목밖의 철학자와 프래니와 주이는 같은책이랍니다. 그러므로 저는 백프로를 흣-)

 

 

 

 

주변에 샐린저를 좋아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샐린저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니! [프래니와 주이]를 인생의 책이라고 평가하는 사람이라니! 

 

오늘 신문에서 '김학순 대기자의 서재에서' 란 코너를 보는데 하필 샐린저에 대한 이야기였다. 샐린저는 김학순 대기자의 표현을 빌자면 육신의 옷을 벗었고, 샐린저를 내게 옮겨줬던 알라디너는 더이상 서재에 나타나질 않는다. 샐린저도, 그리고 더이상 나타나지 않는 그 알라디너도, 모두 내게 좋아해달라고 말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좋아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버리는건 참 나쁘다고 생각한다. 왜, 그 영화 [내 어머니의 모든 것]을 보면 이런 대사가 나오지 않는가. 

 

 

 

 

   
 

"다시는 그렇게 떠나지마. 난 내가 좋아하는 사람과는 꼭 작별인사를 하고 싶어. 비록 가슴이 아플지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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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떠남과 남아있음
    from 유리동물원 2010-02-07 15:47 
    떠남과 이별에 대한 연작시리즈를 그린 이탈리아 화가 움베르토 보초니 (Umberto Boccioni)에 의하면 안녕을 고하고, 떠나고, 남아있는 것 모두에게는 혼란스러움, 침울함 그리고 외로움의 무게가 쌓여있습니다. 그런데 왜, 남아있는 것의 무게는 항상 가장 무거운 듯 느껴질까요? 그 견딜수없는 무게때문에 선택할 수 있다면 떠나는 편이 나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State of Mind I: The Farewell
 
 
blanca 2010-02-06 22: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이 페이퍼 참 예쁘네요. 저도 그런 알라디너 분이 한 분 있는데. 그 분의 글 자체보다 그 분의 삶이 좋았어요. 뭐랄까. 힘겨워 뵈는데 그 씩씩해 보이고 솔직한 고백이 되레 열등감 없어뵈고.페이퍼로 사생활을 열심히 염탐하며 알라딘에 발을 들여놓게 되었는데 저는 당시 서재 활동을 안해서 저는 존재감이 아예 없었죠. 어느 순간 서재를 닫아 버리더라구요. 다락방님은 교감이 있었으니 더 아쉬움이 남을 것 같아요. 단순함에 관해서라면 저의 별명이 아메바였답니다.-..- 사람들이 단순하다고 하면 열등감 없는 척 원래 제가 그렇잖아요! 하면서 막 큰소리치는데 사실 저는 아주 복잡다단한 인간이라고 자위하며 살고 있답니다.

다락방 2010-02-07 21:23   좋아요 0 | URL
제가 좋아했던 그분은 사실 별로 글을 쓰지 않으셔서 그분의 사생활에 대해 그다지 짐작할 수도 없었어요. 그런데 그저 그 얼마안되는 글때문에 저는 그분에게 푹 빠진거죠. 다시 돌아온다면, 다시 돌아와서 계속 글을 써준다면 저는 변함없이 예전처럼 그분의 팬임을 자처하며 열심히 들락거릴텐데, 정말 많이 애석해요. 우리는 각자 저마다 좋아하는 분들을 가슴속에 품고 있는가봅니다.

순오기 2010-02-06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떠나신 그 분이 뉘신지는 모르지만 취향에 맞는 글을 쓰던 분을 못 뵈서 많이 서운하겠네요.
샐린저를 좋아하신다니 영화 '파인딩 포레스터'도 보셨겠죠?
샐린저를 추억하며 다시 보고 싶은 영화라 갖고 있는 비디오 테잎을 삼남매랑 같이 돌려보려고요.

다락방 2010-02-07 21:23   좋아요 0 | URL
아뇨, 순오기님. 파인딩 포레스터란 영화를 보진 않았습니다. 그 영화가 그 숀코네리 나오는 영화 맞지요? 샐린저를 추억하며 다시 보고 싶은 영화라니, 저도 이 참에 디비디를 구입해서 볼까봐요.

gimssim 2010-02-07 08: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호밀밭의 파수군> 다시 한 번 읽고 싶어집니다. 아마 지금은 또다른 감동으로 다가오겠지요.
순오기님. 이웃 서재 나들이에서 만나는군요.
<파인딩 포레스트> 좋지요... 숀코네리

순오기 2010-02-07 14:31   좋아요 0 | URL
예~ 저도 여기서 뵈니 반갑습니다.
숀 코네리는 최고예요. 우리 나이쯤이면 모두 반했던 배우가 아닐런지요.^^

다락방 2010-02-07 21:25   좋아요 0 | URL
호밀밭의 파수꾼은 저도 두번 읽었는데 두번 다 좋더라구요. 저마다 읽으면서 인상깊게 보는 구절은 다 다른법이라지만, 또 그때그때 기분에 따라 제가 인상깊게 느끼는 것도 다르더라구요. 책을 다시 읽으면서 예전에 밑줄 그었던 부분을 보는 것도 재미있고, 또다른 부분에 강한 인상을 받는 것도 퍽 좋은 경험이에요.

딸기 2010-02-07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재미있게 잘 읽었어요.
저도 정말 좋아하던 알라디너 한분이 계셨는데... 어느날부터인가 소식이 없으시더라고요.
마지막으로 소식 남기신 것이 벌써 2년은 지난 것 같아요. 떠나신 모양이예요.

다락방 2010-02-07 21:25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고맙습니다 딸기님.
저의 경우에 여전히 그분의 서재는 살아 있으니...떠났다기 보다는 아예 여길 잊고 지내시는게 아닐까 싶기도 해요. 아쉬워요.

2010-02-07 12:4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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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1:2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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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13:5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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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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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15:0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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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1:2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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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18:3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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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1:2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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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1:3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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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2-07 21:3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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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icia 2010-02-08 10:06   좋아요 0 | URL

다락님 삼월 오면 우리 작년처럼 소주에 고기먹어요~ W님도 N님도 모두 불러서^^
다락방님 아프지 마세요. 다락님이 아프면 저도 아파요.

음..엊그제 누워서 혼자 설국을 읽었는데 '헛수고'란 말이 왠지 아파서
저도 가죽물주머니에 구멍이 난것 같았어요. 헛수고. 사실 모든게 헛수고일수는 없잖아요.
모두 이렇게 열심히 살아가고 있는걸요. :)

다락방 2010-02-08 14:13   좋아요 0 | URL
네네, 3월이 오면 N님도 W님도 만나요. 삼겹살에 소주랑 노가리에 맥주랑 잔뜩해요, 우리.

그리고 난 안아파요. :)

poptrash 2010-02-08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골목밖의 철학자>와 <프래니와 주이>는 같은 책이에요.
어차피 <골목밖의 철학자>는 절판되어 헌책으로밖에 구할 수가 없는 상황.
그렇다면 이건 좋은 소식인일까요 나쁜 소식일까요.

그나저나 오늘도 멋진 글을...
꼴딱 밤을 샌 월요일 아침부터 갈비김치전골이란 게 먹고 싶을 뿐이고...

다락방 2010-02-08 09:25   좋아요 0 | URL
엄청 좋은 소식이죠, poptrash님!! 그럼 제가 번역된 샐린저의 모든 책을 읽었다는 거잖아요!! 아, 저 완전 멋진데요!

고맙습니다, 멋진 글이라고 해주셔서. 그나저나 꼴딱 밤을 왜 새셨을까요? 헤헷. 김치갈비전골 완전 맛있는데 말이죠. 소주랑 함께 하면 술도둑이에요. :)

무스탕 2010-02-09 08: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갈때 가더라도 지금은 안 가고, 갈때는 꼭 인사하고 갈게요 :)

다락방 2010-02-09 09:23   좋아요 0 | URL
네, 무스탕님. 가급적이면 계속 안가셨으면 좋겠습니다!!

바이런 2010-02-09 23: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비교적 호불호가 명확하게 갈리는 편인데, 다락방님 글을 참 좋아해요(수줍)

다락방 2010-02-09 23:36   좋아요 0 | URL
하하 뒤에 수줍 때문에 웃었어요. 와- 기분 좋은데요!
고맙습니다, 바이런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