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레어 맥킨토시'의 소설 [나는 너를 본다]에는 자매가 등장한다.

언니는 동생이 당한 강간에서 빠져나오지 못한다. 동생이 그 일로 아플까봐, 트라우마에 시달릴까봐, 자신이 더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나 동생이 강간범에 대해 기소하지 않기로 했다는 결정을 내렸다는 걸 알고 혼란스러워한다. 왜, 그 놈을 잡아야지, 그 놈을 잡아 족쳐야지, 어째서 너는 그 일이 있는데도 마치 없는것처럼 살아가려는거야. 이 일로 사이좋은 자매는 수시로 긴장감을 형성하는데, 시간이 흐른 후에 비로소 언니는 우리가 다른 사람이라는 것을 받아들인다. 어떤 사람은 끝까지 범죄자를 쫓으려하고 어떤 사람은 자기 인생에 더 기쁜 일들을 떠올리며 그 일을 잊고 싶어한다는 것을.


소설의 이 부분에서 내가 크게 놀랐던 것을 기억한다.

나는 강간 생존자에 대해 책 속 언니와 같은 생각을 늘 가졌던 사람이다. 강간 피해에 대해 누구나 트라우마를 가질 것이고 그걸로 인해 고통스러운 기억을 계속 갖고 갈것이라고. 그런데 누군가는 그 일이 마치 내게 없었던 일인것처럼 잊고 살아가고자 할 수도 있다는 것을 알게된 거다. 범죄자를 잡아서 그 일에 대한 벌을 내리는 것보다 그런 일이 일어난 적 없었던 것처럼 살아가는 것을 택하는 사람이 있기도 하다는 것을 말이다.

물론 나는 여전히 강간범을 잡아 족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이 책을 읽은 후로 나와는 다른 사람들, 그냥 없던 것처럼 잊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잊지 못하고 어떻게든 응징하고 싶어한다면 내 안에 분노가 있겠지만, 그저 잊고 살고자 한다면 가슴 속에 분노는 달고 살지 않을 수 있겠구나.


내가 이 책의 이 장면에 대해 생각한 건, 이번달 여성주의 같이읽기 책인 [교만의 요새]에서 이 부분을 읽었기 때문이다.




어떤 여성들은 강간으로 큰 트라우마를 얻어서 법적 정의에 호소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지만, 또 다른 이들은 직장, 친구들, 치유 과정, 혹은 그저 삶에 몰두하는 일이 법적인 투쟁보다 낫다고 느낀다. -p.150











그래, 맞아, 그렇지. 그런 사람들도 있을 수 있지. 그런 사람들도 있다고 했어. 클레어 맥킨토시가 그랬다, 고 나는 생각했다. 그러면서 새삼 소설 읽기의 쓸모에 대해 생각했다. 누누이 말해왔지만 나는 책을 재미있어서 읽어왔고 앞으로도 재미있어서 읽을 것이다. 내 독서의 아주 많은 부분은 소설이었다. 사실 전부가 소설이라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이었다. 최근 몇 년간 비소설 분야도 좀 더 읽기 시작했지만, 나는 소설만 계속 읽었던 사람이다. 


때로 어떤 영화에서나 혹은 어떤 사람들이 소설을 그리고 소설을 읽는 사람들을 무시하는 걸 종종 보아왔는데, 나는 그런 사람들이야말로 소설을 제대로 읽어보지 못한 사람이라고 언제나 생각해왔다. 소설은, 그 안에 아주 많은 이야기와 생각들을 품고 있고 그걸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다. 그걸 읽으면서 독자가 그 안에서 무엇을 얼마만큼 가져가느냐는 독자에게 달린 것이다. 소설은 한심해, 소설은 유치해, 소설은 시간낭비야, 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불쌍하게도 소설을 읽으면서 아무것도 찾아내지도 가져가지도 못하는 사람들이고. 이거 봐봐, 마사 누스바움이 자신의 책 교만의 요새에서 말하고자 하는 바를, 나는 이미 몇 해전에 소설에서 읽고 알고 있었다니까? 그러고보면 내가 필요한 모든건 대부분 소설에서 얻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것 같다. 내가 필요한 건 모두 소설이 주었다.


그렇다는건, 마사 누스바움도 이미 자신의 책 [시적 정의]에서 말한 바가 있다.


소설 속에서 묘사되고 함양된 능력들이 사실 경제학 및 도덕·정치 이론 없이는 불완전하다는 점은 명백하다. 물론 이러한 능력의 함양 없이 추상적 이론은 맹목적인 것이 되기 쉽고, 동기를 부여하는 데 있어서도 무력해지기 쉽다는 점 또한 사실이다. 소설 읽기의 경험은 함축적으로 인간의 어떤 활동이 가장 중요한지, 어떻게 다양한 종류의 정치적 활동이 그러한 활동을 뒷받침해주는지 혹은 그렇지 않은지 등에 대한 성찰을 내포한다. 이는 소설이 우리로 하여금 비판적으로 사유하도록 유도한다는 뜻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p.106


소설 읽기는 인간적 가치에 대한 감각을 생생하게 일깨워주며, 우리를 온전한 인간으로 만들어주는 가치 판단 능력을 발휘할 수 있게 하기 때문이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p.110


소설은 삶의 질을 평가하는 데 필요한 형태의 정보를 제공해주며, 독자로 하여금 평가를 내리는 과정에 참여하도록 이끈다. 그리하여 이는 이후의 양적인 평가에 근거한 단순화된 모델이 형성되어야 할 범위 내에서, 공적인 업무에 적합한 종류의 상상력의 틀을 보여준다. 동시에 이는 공적인 삶뿐만 아니라 사적인 삶에서도 그러한 평가를 현명하게 하기 위해 필수적인 상상력의 능력을 길러주면서 동시에 그 한 예를 제시한다. -마사 누스바움, 시적 정의, p.119



나는 시적 정의를 쓴 마사 누스바움을 좋아한다. 마사 누스바움의 책이라면 다 읽어보겠다고 다짐했던 건, 그녀의 시적 정의를 읽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교만의 요새]에서는 조금 당황스럽다. 처음 '교만'에 대해 설명해주고 결국 여성을 혐오하는 일이 남성들의 교만이란 감정에서 오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에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래 바로 이게 마사 누스바움이지, 했다. 그간 읽어온 여성주의 책 번역서들 중에 가장 잘 읽히기도 했고. 

그런데 교만과 교만의 요새-여성들과 젊은 남성들이 일상적으로 학대받는 곳 p.154-에 대한 개념을 말해주는 것도 좋았고 성희롱 만연한 곳이 직업적 환경이 되는걸 짚어준 것도 좋았지만, 그 외에는 딱히 특별할 게 없었다. 뒷부분에 숱한 사례들은 해결방안을 마련하고 설명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었겠지만 읽기가 싫더라. 게다가 마지막 결말 부분에 가면 내 불안함과 불만이 전혀 해소되지 않는데, 처음부터 시종일관 사랑을 말했던 마사 누스바움이, 결국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과 대화라고 말하기 때문이다.


네? 정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마사 누스바움은 이렇게 숱한 사례를 직접 경험하고 듣고 알고 있으면서도 어떻게 사랑과 대화로 많은 걸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을까? 물론 나 역시 머리로는 안다. 동의한다. 어떤 사람이든 그 사람과 깊은 대화를 한다면 그 사람을 이해하게 될 것이고 그 이해를 수반한다면 다른 태도를 기대하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너 참 힘들었겠구나, 그렇지만 그건 안되는 거 아니겠니, 하는 식으로 그 다음이 진행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데, 정말 그럴까?


나는 거기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마사 누스바움은 개인적으로 복수심을 가지지 말라고 하지만, 그리고 세상엔 마사 누스바움이 말하기 전부터 개인적인 복수심을 버리고 법의 처벌을 바라거나 혹은 위의 소설 속 등장인물처럼 다 잊고 눈 앞의 행복만 보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만, 글쎄, 난 잘 모르겠다. 나는 여전히 졸라 복수하고 싶고 분노가 끓어오른다. 그 새끼들과 대화가 될 거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대화가 된다고 순간적으로 생각할 수도 잇지만 뒤돌아서면 그 놈들은 '내가 반성한 줄 알았지?' 하며 또다른 피해자를 만들어낼 거라고 생각한다. 지금 성학대와 강간등의 성범죄를 저지르는 모든 놈들은 악이고, 악은 게으르고 무지함에서 온다. 물론 그건 마사 누스바움이 재차 말했듯이 환경이, 그리고 사회가 그렇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환경을 바꾸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을 것이고. 사랑과 화해라니, 나는 결말 부분에 크게 실망했다. 아아, 내가 원하는 건 이런게 아니야. 쎈언니들의 말이 듣고 싶다! 세상을 파스텔톤 필터 하나 더 가지고 보는 사람의 선한 글이 아니라, 쎈 언니들의 글을 보고 싶다. 성폭력에 대한 철학적 고찰이 등장할 줄 알았고 그래서 교만으로 성폭력을 데려왔을 땐 역시 마사 누스바움이야! 했는데, 막판에 사랑 대화, 이러는데 당황했습니다. 틀린 말은 아니지요. 사실 궁극적으로는 그게 맞겠지요. 그런데 그게 얼마나 효용이 있을까요? 


미성년자들의 얼굴에 나체사진을 합성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친족들에게 성폭력을 가하는 이들에게, 자신의 유명세를 이용해 여자들을 약먹이고 강간하는 이들에게 글쎄 .. 사랑과 대화가 뭘 어떻게 바꿔줄 수 있을까? 문제를 일으키는 것도 인간이고 구원도 인간으로부터 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긴 하지만, 마사 누스바움 님.. 나보다 훨씬 인간에게 거는 기대가 큰 것 같다. 선한 사람이라서 선하게 보는걸지도... 나는 아마도 마사 누스바움이 그렇게는 되지 말라고 하는, 그런 페미니스트가 될 것 같다. 정희진 쌤이 페니스트라 인정하지 않는, 그런 페미니스트가 될 것 같다. 그리고 이런 내가 페미스트가 아니라고 하면, 그러면 페미니스트가 아닌 거라고 해도 나는 상관없다. 



마사 누스바움의 이 책은 선하지만, 나는 좀 실망했다.




매키넌은 여기서 조금 더 나아간다. 대상화라는 것은 너무나도 편만해 있어서 여성들은 대상화에 둘러싸여 있을 뿐 아니라 자신들도 거기에 젖어 있다는 것이다. 매키넌은 "모든 여성들은 물고기가 물속에서 사는 것과 같은 방식으로 성적 대상화 속에 살아간다."라고 기발한 은유를 사용하여 말하는데, 이는 대상화가 여성들을 둘러싸고 있을 뿐만 아니라 여성들이 바로 그 대상화로부터 양분과 지속성을 끌어내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 P41

남성과 여성의 성적 상호 관계에는 애매함과 잠재적 갈등이 따르기는 하지만 몇 가지 오해를 넘어서는 자명한 사실이 분명 존재한다. 섹스가 강요될 때의 인식 속에서 젠더 격차가 존재할 뿐만 아니라 젠더라는 수렁이 존재한다는 것. 우리는 원치않았던 성적인 행위를 남성으로부터 강요받았다고 말하는 많은 여성들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극소수의 남성만이 여성에게 강요했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여성과 남성을 젠더 이슈로 몰고가는 차이점과 여성과 남성의 섹스 경험에서 나오는 상이점이 보여 주는 사실은 이것이다. 바로 두 가지 분리된 성적 세계, 그의 세계와 그녀의 세계가 다르게 존재한다는 것이다. (에드워드 라우만, Sex in America) - P51

인터넷과 소셜 미디어 문화는 이러한 문제들을 확대시키면서 여성들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너무나도 쉽게 부정할 수 있게 만들었다. 인터넷 포르노는 겉보기에도 완전 교환 가능한, 고분고분한 여성을 무수히 재현하고 그 모든 동작과 표현들은 남성의 통제감과 권력 의식을 고양시키는 데 초점을 맞춘다. 이 여성 재현물들에는 여성의 주체성이 결여되어 있고, 여성은 남성의 바람을 충족시키기 위해서만 존재하며 남성의 사양에 맞춰 제작된 가짜 주체성을 띤다. 이는 분명 ‘진짜 세계‘에 여파를 미친다. 그 규모에 대해 누군가 반박할지라도(그리고 누군가는 어떤 포르노는 페미니스트에게 필요하다 주장한다 해도) 말이다." 인터넷 문화 역시 오랫동안 광고나 포르노 인쇄물 및 다른 매체들 속에서 여성을 묘사해 온 방식과 별반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여성을 재현한다. 하지만 그 정도에 있어서는 불안할 정도로 차이가 있다. 인터넷 포르노는 하나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 P53

(계속) 시청자가 완전히 몰두해서 그의 요구에 맞춰 줄 준비가 된, 오로지 재현된 여성만을 바라보는 세계. 오늘날 많은 남성들이 이 세계에서 많은 시간을 보낸다. - P53

교만은 습관적으로 자신이 타인들 위에 있다는 생각과 다른사람들을 충분히 인정하지 않으려는 생각을 수반하는 특성이다. 교만에는 많은 형태가 있는데, 어떤 사람들은 교만의 한 가지 형태만 갖기도 한다. (인종적 교만을 보이는 사람들이라도 계급적 교만은 없을 수 있고, 그 계급적 교만 대신에 인종적 교만에 매달릴 수도 있다.) 하지만 남자들이 미국 내 위계질서 어디에 위치해 있든 간에, 오랜 전통들은 그들에게 여성은 충분히 중요하지 않으니 깔봐도 괜찮다는 젠더적 교만을 공급해 왔다. 교만은 탐욕과 질투 같은 다른 나쁜 성질들에 부추김 당하기도 하는데, 이 다른 성질들이 교만함과 결합하면 무엇보다도 사회적으로 유독해진다.
일반적으로 교만은 여성 종속의 근원이다. - P56

흄은 교만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고 덧붙이는데 일반적으로는 자아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 개인의 성격이나 외모, 재산과 같은 것들이다. 똑같은 성질들을 타인에 대입하거나 타인의 소유물로 상상할 때는 교만이 발현되지 않는다. 게다가 교만은 보통 평범한 것이 아니라 ‘자신에게 특유한 것이거나 적어도 극소수의 사람들에게만 알려진‘ 것들에 의해 발현된다. 흄이 제시하는 이유는 교만이 대상의 내재적인 면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것인데, 여기서 요점은 교만이 발생하는 이유가 근본적으로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당신에 관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 미지의 대상이 모두가 가진 것이라면 당신은 교만을 느끼지 못한다. 흄이 보기에 사회적 판단이란 어떤 경우에서든 내재적이기보다는 상대적인 것이고, 교만의 핵심은한 사람을 다른 사람들 위에 놓는 데 있었다. 그러므로 훌륭한 만찬이 차려진 곳에 수백 명의 손님들이 와 있고 그들이 모두 기쁨을 느낄 수는 있으나 오직 그 ‘자리의 주인‘만이 교만을 느끼게 된다. - P60

(계속) 그만이 "자화자찬과 자만심이라는 부가적인 정념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 P60

남편들은 분명 수백 년 동안자기 부인에 대해 교만을 느껴 왔고, 그 태도 또한 여성의 자율성과 주체성을 꾸준히 자각하는 것과 양립할 수 있는 것으로는 보이지 않는다. 말 그대로 여성을 전투에서 승리해 얻을 수 있는 트로피로 여겼던 호메로스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의 우리 역시 ‘트로피와이프‘에 대해 익히 알고 있다. 여성의 아름다움(혹은 아내다운 미덕)이 그녀를 ‘획득한‘ 남성의 남성성에 위신을 가져다 준다는 교만의 대상으로써 말이다. - P61

감정으로서 교만은 이미 수단화를 수반하고 있으며, 완전한 자율성과 주체성을 거부하는 경향은 물론 대상화마저 동반한다. - P61

그들 상상 속의 경쟁 목표는 사회적 지위를 향하는데, 상대적으로 자신보다 성공한 다른 남성을 겨냥한다. 일례로, 웹사이트 오토어드밋 (AutoAdmit.com)의 경우 경쟁은 전문적인 영역에서 벌어졌지만 질투는 여성들 자체에게로 꽂혔다. 이 웹사이트는 원래 로스쿨 입학을 조언해 주려는 목적으로 만들어졌다가 순식간에 포르노 사이트로 타락했다. 이 사이트에 글을 쓰는 익명의 남학생들이 여성 법학도들의 이름을 대면서 ‘창녀들‘이라고 묘사하며 포르노적인 시나리오들을 연출했기 때문이다. 문제는 그들이 단순히 높은 성취를 보인 동기들을 창녀라고 묘사함으로써 여성들에 대한 우월성을 선언한 데서 그친 게 아니라, 피해 여성들이실제로 구직을 하는 현실 세계에서도 피해를 입었다는 데에 있다. 잠재적 고용주들이 그 이야기들을 믿었는지 여부와 관계없이 피해 여성들을 바라보는 시각은 이미 오염되어 있었던 것이다. - P79

그 사이트는 심지어 어떻게 하면 해당 여성의 이름이 명시된 위조된 이야기를 구글 첫 페이지에 띄울 수 있는지 조언하기도 했다. 이 사이트는 강의실 내에 긴장을 조성했을 뿐 아니라(익명의 게시물을 올린 이들은 여성들의 이름과 신체적 특징까지도 알고 있었다.) 실제적인 위해를 가하기도 한 것이다. 실제로 예일대학교에서 높은 성취를 보였던 두 여성은 명예훼손 및 감정적 피해로 가해자들을 고소했다. 인터넷의 익명성은 큰 장벽이었다. 연루된 많은 이들 중 세명의 남성들만이 추적되었고, 소송에 제기된 이름들은 다 가명이었다. 결국에는 합의가 이뤄졌지만 그 조건은 밝혀지지 않았다. - P79

많은 사람들이, 어떤 형태의 표현이든 승낙을 받아야 하는게 성적 열정을 삭힐까 봐 두려워한다. 하지만 성적인 친밀감에 대한 의사 표현만큼 개인의 자율성을 드러내는 표현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인가? - P141

모든 주가 법정 강간으로서 미성년자와의 성관계를 금하는데, 그러한 성관계는 ‘좋다‘는 말이 있든 없든 그 자체로 위법이다. - P143

어떤 여성들은 강간으로 큰 트라우마를 얻어서 법적 정의에 호소하지 않고는 지나칠 수 없지만, 또 다른 이들은 직장, 친구들, 치유 과정, 혹은 그저 삶에 몰두하는 일이 법적인 투쟁보다 낫다고 느낀다. - P150

선한 남성들은 악한 행동을 못마땅하게 여기고 종종 충격을표현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들은 악인을 붙들고 말하는 것 외에 다른 방도를 전혀 모르고, 설상가상으로 그런 대화는 상황을 더욱 어렵게 만든다. (많은 경우, 이러면서 생각 없이 고발자의 이름을 발설한다.) 좋은 의도를 가진 남성들이 주저하는 것을 보면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유명한 구절을 떠오르게 한다. "최선의 인간들은 확신을 잃었고, 최악의 인간들은 강렬한 열정으로 가득하다." - P157

일터에서의 성희롱은 즉 착취적인 권력의 사용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성희롱을 어떻게 이론화하더라도 결국 성희롱은 권력 남용이다. 교만에 대한 분석대로 법정이 인식해 온 성희롱의 두 종류는 ‘대가성‘과 ‘적대적인 환경‘이다. 둘 다 비대칭적인 권력을 수반한다. ‘대가성‘ 괴롭힘에서 원고는 성적인 최후통첩을 받는다. ‘적대적인 환경‘에서는 성적 관계에 대한 압박이 얽혀 있든 업무 관계에서 보다 확산되어 있는 성애화가 얽혀 있든 간에, 원치 않는 무언가를 견뎌 내야 한다는 압박이 퍼져 있다. 두 경우 모두 여성이 실제 덫에 걸리기 전까지는 무엇이 잘못됐는지 우리는 알 수없다. 그녀는 폭력적인 상황을 견딘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녀의 고용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 P180

상술한 요인들을 검토하면서 고서치 판사는 성희롱을 비롯한 여러 차별에 있어서 첫 번째 요인이 되는 독자성의 중요도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고용주를 상대로 한 성희롱 건에서 승소하기 위해 고용주가 모든 여성을 혹은 대부분의 여성을 괴롭혔다는 사실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는 것이다. 그녀는 자신이 겪은 차별에 있어 자신의 성별이 주요한 요인이었다는 것, 똑같은 상황에 놓인 남성이라면 그런 식으로 대우받지 않았으리라는 것만을 드러내면 된다. 그녀와 고서치 판사는 자기 앞에 놓인 사실 관계들을 본다. 그 사실 관계들은 딱 보기에도 실질적으로도 단도직입적이다. - P194

교육과 사법 판단 모두에 있어서 술과 관련해 주의가 필요한또 다른 문제는 의식을 잃은 사람 혹은 그 직전 단계의 사람과의 섹스는 폭행이라는 의식이다. 이는 적극적 동의라는 기준에 대해 내가주장해 온 것으로, 반복해서 말할 필요가 있다 - P206

그의 수많은 농담처럼 그것이 농담이었다는사실 자체가 그에 대해 많은 것을 폭로한다. - P230

일단 유명해지면 많은 것들이 유명한 이들을 보호하기 위해돌아간다. - P276

어린 미식축구 선수들은 범죄를 저지르기 좋은 대학 스포츠 프로그램에 들어서는 것이다. 그들의 교만은 그들이 특별하다고 독려하는 다년간의 사회적 훈련과 그 교만을 더욱 악화시키는 선발 과정에 의해 증폭됐다. 그들에게 타인은 온전한 실재가 아니다. 특히나 여성은 실재하지 않는, 자신들의 자부심을 높여 주는 소품 같은 존재일 뿐이다. 윈스턴의 룸메이트인 캐셔가 잘 알지도 못하는 여성들과의 섹스 장면을 종종 영상으로 찍어서 공유했다고 했을 때,
"그건 미식축구 선수들이라면 해도 되는 그런 일"이었던 것이다. - P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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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4-09-24 16: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390쪽에 대한 긴 답변 잘 들었습니다.
이 책은... 누스바움 언니의 얼굴처럼 너무 선했던 거 같아요. 저는 누스바움 언니 팔뚝(근육) 같은 책이길 바랐는데... 또르륵...

독서괭 2024-09-24 18:27   좋아요 0 | URL
응? 팔뚝 사진 찾아봐야겠네요 ㅋㅋ

다락방 2024-09-25 07:47   좋아요 0 | URL
네 다 맞는 말이고 궁극적으로는 그렇게 해결해가야 하는 것이겠지만 그런데 그게 될까? 라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처음부터 좀 착하긴 했어요. 반복적으로 착한 남자도 있다, 좋은 남자도 있다.. 라고 말하면서 모두 끌어안고 가려는 포용력과 선함...
첫부분은 재미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책 오타도 넘나 많아요..

독서괭 2024-09-24 18: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잠자냥님이 지적하신 부분 다락방님도 같은 걸 느끼셨나보군요. 너무 착한 누스바움 언니…
전 지금 함달달도 막 밀리고 있어서 큰일입니다 ㅜㅜ

다락방 2024-09-25 07:48   좋아요 1 | URL
독서괭 님, 천천히 천천히 진행하시길 바랍니다.
이 책은 그간 여성주의 책들에 비하면 아주 잘 읽힙니다. 그러니 한 번 손에 잡으면 술술 읽게 되실거에요. 힘내세요 독서괭 님. 화이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