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포의 권력 읽기가 무척이나 어려워서 이걸 어쩌나 하던참에, 수하 님 서재에서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알게 되어 급박하게 구입했다. 오늘 출근길에 읽기 시작했는데, 오, 이거 너무 좋다. 32페이지 까지만 읽은 현재, 여러분 이 책은 도움이 됩니다.
사실 책날개의 옮긴이에 대한 약력을 읽으면서 좀 갸웃했다. 왜 국문학과 출신이 철학,정신분석학 저자의 책을 번역.. 한 것인가. 책날개에 드러난 것 말고도 많은 것들을 알고 있는건가? 그런데 심지어 이 책은 <옮긴이의 말>이 제일 앞에 있다. 보통 옮긴이의 말은 뒤에 있고, 나는 책에 대한 예의를 갖추며 옮긴이의 말을 대부분 다 읽는 편인데, 옮긴이의 말 때문에 책에 대한 인상이 나빠지는 경우가 더러 있다. 아주 가끔, 옮긴이의 말이 책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주곤 하는데, 이 책, 경계에 선 줄리아크리스테바의 이부순 옮긴이는 내가 지금까지 몇 장 읽어온 공포의 권력을 그리고 앞으로 읽을 공포의 권력을 읽는데 크게 도움이 되더라. 감사한 마음으로 밑줄 박박 그으며 읽었다. 친절하고 다정한 나는, 그 내용을 여러분과 공유하겠다. 온누리에 사랑을 … 샤라라랑~
다음으로 크리스테바와의 동행은 우리의 페미니즘 논의에 새로운 논점과 활력을 부여할 수 있다. 크리스테바는 뤼스 이리가레이, 엘렌식수 등과 더불어 프랑스의 정신분석학적 페미니즘의 한 축을 이룬다. 그녀의 작업은 프로이트와 라캉으로 전개되는 남근주의적 정신분석 이론에 대한 여성주의적 도전이자 전복이다.
프로이트와 라캉의 정신분석학은 주체의 형성 과정을 전 오이디푸스적 어머니와의 분리, 그리고 아버지와의 동일시로 설명한다. 그들의 이론에서 어머니는 단절하거나 거부해야 할 대상이다. 아버지의 법과 기능만을 강조하는 그들의 정신분석이론에 맞서, 크리스테바는 그들이 배제한 전 오이디푸스적 어머니를 복원하여 ‘기호적 코라‘로 개념화한다. 그녀에게 기호적 코라는 아버지의 이름, 법과 거세가 지배하는 상징계에 반하여, 원초적인 리비도의 복수적인 힘이 작동하는, 어머니의 몸과 연결된 전복의 공간이다. 이 ‘모성적 육체‘로서의 기호적 코라는 앞서 본 대로 상징적 언어, 곧 남성적 질서를 깨는 혁명의 언어로서, 그리고 이질적 타자성을 내포한 열린 주체만이 창조할 수 있는 ‘사랑의 윤리‘로서 해석된다.
크리스테바는 임신과 출산으로 집약되는 모성적 경험뿐만 남녀의 성적 차이 또한 긍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녀에게 여성성은 여성의 자유를 가로막고 수동성과 의존성을 부과하는 악덕이 아니라 반대로 여성 자신의 신체, 여성 자신의 욕망을 표현하는 미덕으로 재해석된다. 또한 여성성은 모성과 더불어 남성성이 결여하고 있는 사랑의 윤리를 담보함으로써 억압과 배제의 상징적 질서를 혁신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간주된다. 이처럼 크리스테바는 남녀의 차이는 부정되고 거부되어야 할 차별이 아니라 긍정되어야 할 차이로, 그리고 섹스와 젠더의 구분은 해체되어야 할 이분법으로 인식한다. - <옮긴이의 글>, P8~P9
자, 위의 인용문에서 눈에 띄는 단어는 '기호적 코라' 이다. 역시 이게 뭔말이여 싶지만, 최근에 읽은 《차학경 예술론》에 이 '코라'가 언급됐던 바, 이해에 도움이 될 것 같아, 내 또 친히 가져오도록 하겠다.
『시적 언어의 혁명 Revolution in the Poetic Language』에서 줄리아 크리스테바(Julia Kristeva)는 언어 이전에 존재하는 비언어적인 공백을 말하기 위해 고대의 창조론으로부터 논거를 빌려온다.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화자인 티마이오스가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는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가를 의문하며, 그곳에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공백으로서의 ‘장소‘를 일컫기 위해 쓴 개념, ‘코라(chora)‘가 그 주인공이다.‘ ‘코라‘는 그 자체로서 선험적 기원을 갖는 이름이 아니라, 이미 언술이 이루어진 이후에 소급적으로 추론될 수만 있는, 서출(庶出, nothos)적인 근원이다. - 《차학경 예술론》, 김종국 외, P140
크리스테바는 플라톤의 서술에 발생한 논리적 균열을 언어학에 적용, 기표의 생성 이전에 존재할 수밖에 없는 공백을 논한다. 이 이름 붙여질 수 없는 곳에 붙여진 이름이 ‘기호적 코라(semiotic chora)‘이다. 이는 기의가 점유하기 이전의, 지시되지 않는 개념적인 빈자리다. 물론 이러한 설정은 기호가 생성된 이후에야 소급되어 이루어진다. 기호의 생성을 가능케 하는, 언어 이전의 무정형적인 원형이자, 언어의 균열을 함축하는 구멍이 ‘코라’이다. 서현석이 다른 곳에서 밝혔듯, "언어를 넘어서는 공백은 없다. 코라는 언어에 의해 성립된 공백이다. (중략) 상징계의 질서는 코라에 의존하면서도, 동시에 이를 부정한다." 크리스테바에 있어서, 코라는 만물의 언어적 근원이며, 여성적 창의성의 원천이다. -《차학경 예술론》, 김종국 외, P141
크리스테바를 만나기 위해 차학경 예술론을 읽은건 아니었는데, 차학경 예술론을 읽다보니 이렇게 크리스테바의 코라를 만났다. 나는 위의 인용문이 재미있고 공포의 권력에 비하면 이해가 쉬웠다. '창조주가 만물을 창조하기 이전에 그 자리에 무엇이 있었는가' 라는 문장과 '존재할 수밖에 없었을 공백으로서의 장소' 가 '코라' 라니. 무슨 말인지 알겠지 않나요? 위의 코라에 대한 인용문을 읽었다면, 이제 다시 돌아가서 저 위의 가장 처음 인용문을 다시 한 번 읽어보자. 크리스테바가 '오이디푸스적 어머니를 복원'한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처음 읽었을 때보다 잘 이해될 것이다. 뒤돌아서면 까먹을지도 모르지만, 이 개념을 일단 한 번 읽고 머릿속에 새겨둔 다음에 공포의 권력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물론, 공포의 권력이 주로 다루는 단어는 아브젝시옹, 아브젝트 이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이부순 옮긴이가 말한 아브젝시옹에 대해 보자. 이것도 참 알기 쉽게 잘 풀어주어서 오늘 아침 읽고 밑줄그으며 매우 많이 베리 머치 흡족했다.
역자가 보기에 크리스테바 이론의 가장 매력적이고 강력한 개념적 도구는 ‘아브젝시옹abjection‘이다. 아브젝시옹은 상징계가 요구하는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즉 안정된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이질적이고 따라서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들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심리적 현상'을 가리킨다. 이 과정에서 버려진 것들, 경계 밖으로 제외된 것들이 ‘아브젝트abject‘이다. 주체는 자신의 아브젝트를 배제·추방함으로써 그 경계를 통해 주체로서의 특권적 위치를 구현하고, 사회 역시 경계를 설정한 뒤 반사회적 요소들을 몰아내거나 억압함으로써 질서를 확립한다. 크리스테바의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 이론은 프로이트와 라캉의 주체형성이론, 따라서 우리의 문화적 · 상징적 질서가 분리와 배제의 논리, 경계 설정에 따른 동일화의 메커니즘에 의존한다는 것을 가장 극적으로 드러낸다.
크리스테바는 상징계가 경계의 저쪽으로 몰아내려 한 바로 이 아브젝트의 현존과 그것의 전복적인 작용에 주목한다. 그녀에게 아브젝트는 상징계의 밑바닥, 상징계가 거부하고 숨기며 동시에 포함해야만 하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완벽하게 제거되지 않고 오히려 주체와 사회가 구축한 경계를 허문다. 주체의 정체성과 사회의 질서는 아브젝트의 전복적인 힘 앞에서 늘 불안정과 무질서의 위협을 받지만, 바로 그 덕에 자기동일적 폐쇄성과 규범화된 지배적인 삶의 억압에서 벗어날 수 있는 변화의 가능성을 잃지 않는다. 크리스테바는 내 안의, 나아가 우리 안의 아브젝트, 즉 이질적 타자성의 수용이야말로 주체의 쇄신과 현실의 변혁에 필수적인 요건임을 강조한다. 그것이 바로 그녀가 말한 심리적이고 정치적인 ‘반항‘의 의미이자 효과이다. 이런 점에서 크리스테바의 정신분석학은 또한 정치학이기도하다. -<옮긴이의 글>, P10~P11
위의 문장도 아브젝트와 아브젝시옹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문장이 아닌가 싶다. 위에 밑줄 그었지만, '적절한 주체가 되기 위해 이질적이고 따라서 위협적으로 여겨지는 어떤 것을 거부하고 추방하는 심리적 현상'이 아브젝시옹이고, 그 과정에서 버려지는 것들이 '아브젝트' 라는 것. 자, 공포의 권력을 읽으면서는 어렴풋하게 잡히던 가닥이 이 문장들로 비로소 더 구체적인 모습을 띄는것 같다. 내식대로 해석하자면, 그러니까 내가 이 문장을 이해하기 위해 생각해보자면, 성소수자(외국인 노동자)를 혐오하는 일, 더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동성간의 결혼을 법으로 허락하지 않거나 동성애를 병으로 보는 것, 생활동반자법을 통과시키지 않는 것 등이 아브젝시옹이 되고 이 과정에서 배제되는 동성애,성소수자, 외국인노동자는 아브젝트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 역시 내 식대로 이해하자면, 우리가 그들을 배제하거나 혐오한다고 해서 그들의 존재가 없지 않고, 아브젝트의 현존과 그것의 전복적인 작용, 그러니까 그들이 드러나고 자신의 권리를 주장하면서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그들에게 연대하면서 이 사회를 전복하는 일, 다시말해 '이질적 타자성을 수용'하는 일이 주체성과 만나 지금 우리 사회에 필요하다는 얘기가 되는 것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공포의 권력을 다같이 읽어봐야지 생각하게 된 계기는, 여성학 책을 읽으면서 크리스테바의 이름을 어떻게든 만나게 되기 때문이었다. 최근에는 작년에 함께 읽었던 '바바라 크리드'의《여성 괴물》에서도 언급됐었고. 그래서 여성학적으로 접근하고자 함께 읽기로 선정한 책이었는데, 막상 공포의 권력 책장을 넘기니 거기엔 정신분석학이 수두룩했다.
어떤 책이든 계속 읽다보면, 나의 경우는 많은 비중을 소설이 차지하긴 하지만, 사회학, 정치학, 여성학, 신한, 경제학 등등이 결국은 철학에서 만나게 되지 않나 싶다. 그런한편 그것들은 서로 연결될 수밖에 없고. 그러니 여성학으로 접근한 크리스테바를 정신분석학으로 만나는 것도 필연적인 것이었을테다.
맨 위의 인용문에서 크리스테바가 강조한 '사랑의 윤리', 여성과 남성의 성적 차이, 임신과 출산 등에 대한 긍정적 생각으로 페미니스트들과 반목하기도 한 것 같은데(좀 더 크리스테바를 읽어봐야 알겠지만, 어쩌면 나도 종국에는 크리스테바와 반목할런지도 모르겠다), 아브젝시옹과 아브젝트를 보면 정치적인 면으로도 훌륭하지만 사회학적으로도 인간적인게 아닌가 싶다.
크리스테바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관류하는 가장 중요한 이론적 강점은 그녀가 ‘경계인‘의 사유를 보여준다는 데 있다. 그녀의 사유 체계에는 그 자신이 불가리아 출신의 프랑스 지식인으로서, 달리 말해 불가리아의 추방자(망명자)이자 프랑스의 이방인으로서 겪은 실존적 경험이 녹아 있다. 추방자 이방인으로서의 경험이 그녀를 경계의 어느 쪽에도 완전히 귀속되지 않은 경계선상에 위치 지우면서 문학이론, 정신분석, 페미니즘, 정치학 등 다양한 영역에 걸쳐서 이질적 타자성의 의미작용을 탐색하도록 추동한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녀의 사유에서 발견되는 미덕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사유가 자칫 무정부주의적인 분열과 해체의 미로 속으로 빠져드는 것과는 달리, 경계의 양 극단 사이의 균형을 놓치지 않는다는 데 있다. - <옮긴이의 글>, P11
그녀가 끊임없이 사유하고 글을 쓰는 건, 그녀 자체가 경계인 그리고 이방인이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얼마전 읽은 차학경 예술론에서, 차학경 역시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위치에 대해 사유하고 그걸 글로 그리고 미술 작품으로 표현했다고 했는데, 그 책에는 이런 구절이 인용된다.
고향이 없는 사람에게 글쓰기는 거주(居住)가 된다.
- 테오도르 아도르노 - 《차학경 예술론》, 김종국 외, P86 (재인용)
자, 여러분 그리고 기죽지 말자. 공포의 권력은 나에게만 그리고 우리에게만 어려운 책이 결코 아니다. 《경계에 선 줄리아 크리스테바》를 쓴 저자 '노엘 맥아피'도 바로 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그녀의 초기 저서들, 예컨대 초기 저서인 『시적 언어의 혁명Revolution in Poetic Language 』(1974)은 극도로 이론적이고 추상적이며 거의 과장된 산문체로 유명하고, 「눈물 흘리는 성모Stabat Mater」(1977)와 『공포의 권력Powers of Horror』 (1980) 같은 일부 후기 저서들은 또 다른 종류의 난해함, 일종의 시적 독창성과 다양성을 특징으로 삼는다. - P23
그러니 쫄지말고 계속 읽자. 읽다보면 어떻게든 나에게 들어와 남는게 있지 않겠나. 화이팅!!
크리스테바는 말하는 존재가 그 모든 것 사이의 ‘불가사의한 접strange fold‘, 즉 내적 충동이 언어 속으로 흘러들어가고, 섹슈얼리티가 사고와 상호 작용하고, 육체와 문화가 만나는 장소임을 보여준다. - P1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