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시간 보다 한시간 쯤 일찍 도착했다. 책을 읽기 위해 부러 그랬는데, 약속장소는 을지로3가역 11번 출구로 나가면 된다지. 그런데 아뿔싸, 쭉 계단 뿐이네, 그렇다면 다른 출구로 나가자, 하고는 12번 출구로 나갔다. 나가는 길에 지하도와 연결된 큰 빌딩이 있었고 거기에 까페가 몇 개 있는 것 같았다. 여기로 갈까, 하다가 아니야, 지하 싫어 나는 바깥으로 나갈래, 하고는 12번 출구로 나갔다. 나가자마자 저기, 투썸 플레이스가 보였다. 밖에서 보니 사이즈도 커보이는데 어라? 사람은 별로 없네? 나는 들어가 빈 테이블 하나에 백팩을 두고 커피를 주문하러 간다. 키오스크 주문이다. 커피를 주문하고 내 자리로 와 책을 펼치는데 까페 천장이 매우 높아서인지 음악소리가 들리는 게 은은하고 하나도 귀에 거슬리지 않고, 사람도 없고, 밖은 환하고, 까페는 깨끗하고 넓고. 이 모든게 갑자기 너무 좋았다. 아, 나는 진짜 도시가 좋다, 지금 이 순간이 좋다. 도시 만세야!
그렇게 준비해간 책을 꺼내 읽는데, 이 책 진짜 너무 재미있어! 그러다가 똭- 이런 문장을 만난다.
타오 치엔은 그녀를 황홀경 저 너머 사랑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차원으로 데려갔다. 두 사람은영혼이 확장되고 모든 욕망과 기억들이 사라져 무한한 명정(明靜)의 경지에 빠져드는 걸 느꼈고, 그 놀라운 공간에서 서로를 알아보고 껴안았다. 타오 치엔이 암시하듯이 두 사람은 전생에도 같이 있었고 후생에도 수차례 더 함께할 터였다. 우리는 영원한 연인이어서 매번 서로를 찾아다니다가 만남에 이르는 게 업보라고 타오가 감동에 젖어 말했다. 그러나 엘리사는 웃으면서 업보씩이나 되는 거창한 게 아니라 단지 잠자리를 함께하고 싶은 욕망일 뿐이라고 대답했다. 사실은 이미 수년 전부터 그와 사랑을 하고 싶어 죽을 지경이었고 앞으로 타오의 열정이 고갈되지 않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라고, 자신에겐 인생에서 그게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고백했다. 두 사람은그날 밤을 서로 뒤엉켜 보내고, 다음 날도 허기와 갈증에 더이상 버틸 수 없을 때까지 시시덕거리다가 도취감과 행복에겨워 비틀거리며 밖으로 나왔다. 혹시라도 깨어나 보니 환각으로 정신을 잃어 생긴 일이었으면 어쩌나 두려워 서로 손을 꼭 잡은 채였다. - P75
그러니까, 황홀경 저 너머 사랑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차원으로 데려가는, 섹스... 라고?
나는 이 문장을 사진 찍어 나를 만나러 오는 친구들에게 보내며,
인생 헛살았네, 헛살았어, 했다.
황홀경 저 너머 사랑과 죽음이 하나가 되는 신비로운 차원으로 가 본 적이 나는 없는데?
헛살았네 헛살았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