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에 이 책을 읽고 쓴 후기를 찾아보니 좀 학술적인 글이라 어렵다, 더 쉽게 써줬으면 좋을 것 같다고 적어두었더라. 지금은 2022년. 약 5년여의 시간이 흐른뒤 나의 독서 근육은 그때보다 확실히 더 단단하게 키워진 것 같다. 이번에 읽을 때는 아주 잘 읽혔다. 전부 동의하진 않는다 하더라도 충분히 의미있는 글이었고 밑줄 박박 그으며 읽었다. 재독이라서 그런걸까, 생각해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독서 근육쪽이 더 맞는 것 같다. 재독인데 내용은 하나도 생각나지 않았으니까.


3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여성괴물]을 읽기 전에, 비체에 대한 개념을 좀 잡고 시작하면 좋을 것 같아 굳이 이현재 선생님의 책을 재독했다. 2017년이면, 저 책을 읽기 전이나 후에 이현재 선생님의 강의를 여러차례 들으러 갔었다. 강의를 듣기 전에 이 책을 읽은건지 강의를 듣고 나서 이 책을 읽은건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선생님의 강의도 들었었고 이 책도 읽었다.


2017년에 이 책을 읽으면서도 비체가 뭔지 잘 모르겠고 그 후에도 여전히 비체를 간혹 책에서 만나면 뭔지 모르겠다.. 좋다는겨 나쁘다는겨.. 했었는데, 이번에 읽으니 대략 정리가 되었다. 이 책을 읽고 내가 이해하는 비체란, '대상이 아닌 것' 이렇게 말하면 손에 잡히지 않는 느낌이지만, 그러니까 규정해놓은 것과는 어긋나는 것, 이다. '여자란 남자에게 사랑받기 위해 예쁘게 꾸미고 그러다 결혼하고 아이들 낳고 좋은 엄마가 되어야지' 가 세상이 정해둔 기준이고 또 남자들이 바라는 여성의 모습이라면, 이것은 그저 남자들이 생각하는 대상화된 여자일 뿐이다. 그러나 여자들이 이런 역할을 하기를 거부하면서 얌전하지도 않고 연애와 결혼을 거부하고 일터에서도 남자들과 경쟁하고 열심히 공부하고 여행다니고 여성들을 대상화하지 말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남자가 생각하는 여자, 기대하는 여자의 모습과 어긋나고, 그럴 때 바로 여자는 '비체'가 된다. 책에서 이현재 선생님은 그래서 남자가 혐오하는 건 자기들이 생각하는 기준에 맞는 여성이 아닌, 그렇지 않은 여성, 즉 비체라는 것이다. 남자가 혐오하는 것은 비체다, 라는게 저자의 요지. 물론 동의하지만 그러나 백프로 동의할수 있는 건 아니다. 애초에 여자를 그런 모습이라고 규정한 것부터가 혐오이니까. 비체가 될 줄 모르는 존재라고 본 것 조차 혐오일테니까.


그래서 내가 이 책을 읽고 내린 결론은, 모든 페미니스트는 비체라는 것이다. 남자들은 여성들에게 페미니스트를 기대하지 않는다. 페미니스트는 세상이 불공평하다고 말하고 차별이 있다고 주장하고 그러므로 바꾸겠다고 액션을 취한다. 여성의 참정권을 주장했던 것부터 비체들이 한 일이다. 각각의 페미니스트들이 모두 같은 걸 주장하는 것도 아니고 또 우선순위로 삼는 것도 다르지만, 그러나 남성들의 시장, 남성들의 사회에서 다른 말을 찾고 '아니야'를 외치며 액션을 취한다면, 그 여성은 비체가 되는 것이다. 현재를 살아가는 여성들은 그러므로 대부분 비체이겠구나, 생각했다. 아마도 안티페미성향의 남성들은 이 비체를 메갈쿵쾅이라 부를텐데, 내가 보기엔 '비체'라는 단어를 몰라서 그러는 것 같다. 



이 책은 2016년에 나왔는데, 그 때에도 여전히, 지금처럼 남성들이 여성을 혐오했었구나. 정작 그들이 원망해야 할 것은 공정하지 못한 세상인데, 그런데 여자를 혐오의 대상으로 삼았구나. 소위 '인셀'에 대해서도 이 책을 통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영웅, 에 대해서 사람들이 따르거나 흠모하는 일이야 있을 수 있지만, 반대 방향으로도 나타날 수 있다. 






얼마전에 '로버트 패틴슨' 주연의 영화 [더 배트맨]을 보았다. 나는 히어로들이 등장하는 영화들 중에 배트맨을 가장 좋아했는데 최근에 베놈쪽으로 많이 흔들리다가 이번에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을 보고 역시 나는 배트맨이 좋다, 생각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정체를 감추고 행동해야 하는데에서는 모든 영웅들이 그렇듯 배트맨도 많이 외롭고 고독할 것이다. 그런데 이번 배트맨에서는 유독 더 쓸쓸하고 고독함이 묻어나왔다. 집이 그렇게나 부유한데 그것을 제대로 써먹지도 못하는 것 같고, 브루스 웨인의 행색을 보면 부자같지도 않아. 머리는 안감고 다니는 것 같다. 브루스, 머리 좀 감고 다녀요.. 영화가 시종일관 어두워서 좀 더 낮에 좀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는데, 어두워서 고독함이 더 잘 드러난 것 같다.


나는 외로움이란 감정은 나와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다. 나는 애인이나 친구가 없어서 외롭다고는 딱히 생각해본 적이 없다. 어차피 인간은 혼자라는 생각을 갖고 있고, 그래서 애인도 있다가 없을 수 있고 친구도 지금 각별했다 멀어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다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지금 내 옆의 사람들과 다정하게 지내기인데, 얼마전부터 이런 나도 외로움이 훅 하고 찾아올 때가 있었다. 그건 '나를 사랑해줄 누군가가 내 옆에 없다'는 외로움이 아니라, '지금 느끼는 나의 이 감정을 아무도 알아주지 못할 것이다'에서 오는 것이었다. 그것은 사소한 일상에서 일어나는 감정이기 보다는 커다란 문제들에 직면했을 때 찾아왔다. 내가 지금 느끼는 이 무력함과 안타까움 두려움, 이 감정을 누구도 알아주지 못할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노라면 외로움이 나를 후려치는 것이다. 그러다가도 얼마만큼의 시간이 지나면 극복하고 다시 살아가긴 하지만, 나는 이제 외로움이 나랑 거리가 멀지 않다는 것을 깨닫고 있다. 아마 사는 동안 그런 식으로 외로움은 또 나를 후려치고 그러다 사라지곤 하겠지. 그렇다고 해서 그 외로움을 상쇄하고자 누군가를 옆에 두는 것은 나와 상대에게 못할 짓일 것이다. 또한 누군가를 옆에 둔다고 해서 그 외로움이 반드시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배트맨을 보고 그런 생각을 했다. 브루스 웨인이, 선한 아버지를 본받아 선한 사람이 되고자 밤이면 악과 맞서 싸우는 배트맨이, 너무 외롭고 고독해보였다. 그러다 캣우먼을 만나는데, 그래서 캣우먼과 어떤 동질감이랄까 동지의식 같은 걸 느끼고, 그래서 캣우먼이 '여기 말고 저기로 가자, 여기는 변하지 않을거야' 라고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트맨은 안가겠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 작별하는데, 나란히 달리다가 어느 지점에서 각자의 지점으로 갈라지는 장면은 나를 너무 아프게 한다. 내내 쓸쓸하고 외롭고 고독했던 브루스가 같이 행동해줄 수 있는 사람을 만낫는데 그런데 그 사람을 따라가지 않고 여기가 내가 있을 곳이다, 생각하며 그 사람과 다른 길을 선택하는 것. 고독하고 쓸쓸한 시간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을 의미하지만, 그래서 그 장면에서 너무 가슴이 시렸지만, 그러면서 생각했다. 그런데 그럴 수밖에 없었을거야, 라고. 저게 맞는 걸거야, 라고.


물론 브루스가 오롯이 혼자인 건 아니었다. 큰 집을 관리해주는 아버지의 오랜 벗도 내내 함께 있었으니까. 그 사람이 다치게 되자 '나에게서 두려움은 다 사라진 줄 알았는데, 아끼는 사람을 잃을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남아 있었네요' 라고 말하는데, 아, 배트맨이 고독한 와중에도 아끼는 사람이 있다, 배트맨은 괜찮을 것이다, 라는 생각이 들면서 아무튼 배트맨이 너무 좋았다. 로버트 패틴슨의 배트맨 나는 좀 좋네. 그 고독함과 쓸쓸함을 다른 사람도 좋아할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이건 혼자 해결해야 한다' 고 등장인물들이 느낄 때, 그래서 혼자 문제에 맞서는 걸 볼 때마다 어김없이 너무 아프고 공감이 된다. 혼자인 거 힘들지, 그렇지만 지금 혼자서 해낼 수밖에 없지. 



그리고 이 영화에는 당연히 안티 히어로가 나온다.  '리들러'는 살인을 저지르고 자신이 저지르는 살인마다 배트맨을 소환한다. 보이지 않는 존재였던 그는 그렇게 보이지 않는 존재라고 생각하는 자들에게 지령을 내리고, 그들은 리들러의 지령을 받는다. 리들러는 자신이 살인을 하는 동안 그리고 경찰에 잡히면서 자신이 드디어 보이는 존재가 됐다고 사람들이 나를 알아챈다고 좋아하면서 자신과 배트맨과 한팀이라고 생각한다. 

리들러를 보면서 최근에 읽었던 책 [낫씽맨] 이 생각났다.



나는 닥터 위어에게, 그녀가 아는 사실을 바탕으로 낫씽맨은 어떨 것 같은지 물었다.
"맙소사." 그녀는 말했다. "나한테 소위 ‘프로파일링‘을 시작하게하지 마요. 하지만 이 말은 할게요. 그는 지루할 거예요. 지루하고평범하고 별 볼 일 없고요. 친구들이 있을 수도 있지만, 그를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많지 않겠죠. 결혼생활도 대단치 않을 거예요.
정말로 잘하는 것도 없을 테고, 너무나 지루하고 성취감 없는 직업을 가졌을 테고요. 그런 직업으로는 암 치료도 못 하겠죠. 근본적으로, 그는 사람들을 강간하고 살해했다는 사실 외에는 그다지 보잘것없을 거예요. 낫씽맨은 연쇄살인범에게 특별히 잘 들어맞는 이름이에요, 이브, 그를 찾아내면, 아마 그가 사실 얼마나 아무것도 아닌지에 대해 충격받게 될 거예요."  -캐서린 라이언 하워드, [낫씽맨], p.297






물론 리들러의 살인에는 리들러만의 이유가 있었다. 그래서 그는 세상에 복수를 한다. 그 복수는 그에게는 정의였다. 악한 사람을 죽이는 일.  겉에서 보면 정의를 위해 악당과 싸우는 일은 모든 히어로들이 하는 일인데, 리들러와는 어느 지점에서 그게 갈라지는 걸까. 

<여성혐오, 그 후> 에는 이런 구절이 나온다.

노동이 아니라 돈으로 돈을 버는 속도가 광속으로 빨라지는금융자본주의 시대에 취업, 구애 등에서 거절당한 사람들은 좌절과 분노를 안게 되며, 이를 극복할 구체적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사람들은 자신의 고통을 오인된 대상에 공격적으로 투사하게 되는 심리적 퇴행을 보이게 된다는 것이다. -p.85

나는 도시적 삶의 양식이 되어가는 이러한 과열된 성취원리에 따른 개인의 경쟁을 성취인정을 둘러싼 투쟁‘으로 명명하고자 한다. 도시적인 삶 속에서 개인들은 이제 삶의 영역 모두에서 자신의 우월성을 증명하는 데 집착하고 있으며, 다른 사람보다 더 주목받기 위해 노력한다. 오늘날 "주목 경쟁"이라고 부르는 것은 끊임없이 자신을 내보여 인정받아야 하는 강박적 성취인정 경쟁의 전형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개인이 성취해야하는 것은 진정한 authentic 자아나 자율적 자아가 아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어떻게든 주목받고 소비를 통해 자기를 과시하며, 자극적인 발언을 통해 자신을 표현하는 것이다. -p.93~94


나는 여성을 혐오하는 집단들이 강한 인정욕망을 드러내는 일차적인 이유가 바로 "성취원리", "성취인정"과 연관되어 있다고본다. 이들은 신자유주의적 도시 노동이 부추긴 성취인정의 욕망으로 인해 자신의 정체성을 인정받으려는 성취인정 투쟁의 끈을 놓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들에게 성취를 위한 인정투쟁은 곧 생존을 위한 투쟁이기도 하다. 그들은 살아남기 위해서 어떻게든 주목을 받으려고 하고, 자신의 능력과 정체성을 과시하고자 한다. 성취인정은 이미 전반적인 도시적 삶의 양식이 되었기 때문에, 그것이 물질적 성취로 연결되지 않을 때도 맹목적으로 수행된다.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 여성 추모현장에 탈을 쓰고 나가 추모하는 여성들을 조롱하겠다는 댓글을 남기거나, 피해 여성을 추모하는 현장에 "남자라서 죽은 천안함 용사를잊지 맙시다."라는 문구가 들어간 화환을 보내는 일베 유저의 자극적인 행위는, 그들이 자기 존재의 과시와 주목을 통해 우월한 자아를 인정받고자 하는 과열된 성취인정의 욕망을 체현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과열되고 맹목화된 성취인정은 심각한 문제에 당면한다. 우선 성취인정을 둘러싼 경쟁에서 개인은 끊임없는 자기계발에 시달리는 가운데 오히려 자아를 소진할 수 있다. 신자유주의 시대에 개인은 어떠한 기본적 재화도 보장받지 못한 상태에서 무한의 경쟁에 내몰리게 되기 때문에 자아계발을 위한충분한 시간과 자원을 갖지 못한 채 자신을 무한대로 소비하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아실현이 아니라 자아소비이며, 자기강화가 아니라 자기소진이다. -p.94~95


그들은 성취인정의 과도한 경쟁 속에서정체성 소진, 자기계발 실패에 따른 불안감을 느낀다. 겉으로는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실제로 남녀평등을 가능하게 하는 제도적, 물질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에는 관심이 없다. 결국 이들은 새로운 젠더를 구성하는 방식으로서의 인정이 아니라 과거의 불평등한 젠더관계를 고수하는 이데올로기적 인정에 집착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이 주장하는 인정은 새로운 관계를 "구성"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지배적 관계를 "재생산하는 이데올로기적 인정일 뿐이다. 그들의 여성혐오는 여성을 열등한 것으로 만들어 개별적 성취인정에서 경험한 "자존심의 붕괴" 를 회복하려는 것이며, 이데올로기적 인정 논리를 통해 남성의 집단적 우월성을 확인받고자 하는 왜곡된 인정욕망의 반영일 뿐이다 -p.101~103


위기감에 봉착한 남성들은 신자유주의를 비판하기보다, 자신의 우월성을 확보해줄 지배적 남성성을 유일한 안전장치로 활용하게 된다. 이들은 수사적으로는 남녀평등을 주장하지만, 정작 이를 가능하게 해줄 제도적, 물질적 차원의 변화에는 관심이 없다 . 여기서 젠더관계는 단지 이데올로기적으로 재생산될 뿐이다. 따라서 이들은 물질적, 제도적 변화를 주장하는 페미니스트들을 비체로 혐오하게 된다. -p.108



리들러가 죽인 대상은 나쁜놈이었다. 그러니 리들러의 입장에서는 그 나쁜놈들을 처단하는 것이 정의일 것이고, 그건 지금 고담시의 히어로인 배트맨이 하는 것과 같은 일이다. 그런데 왜 한 명은 히어로가 되고 한 명은 안티 히어로가 될까. 똑같이 가면을 쓰고 똑같이 정의를 위해 악당을 혼내주는데, 왜 그들은 다른가. 왜 한 명은 배트맨이고 한 명은 리들러인가, 에 대해 계속 생각해봐야 했다. 어딘가 다른데, 그 어딘가가 대체 무엇일까, 어느 지점일까, 에 대해서. 그런데 <여성혐오, 그 후>를 읽다보니 목적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히어로는 히어로가 되기 위해 악을 처단하는게 아니라, 악을 처단하다보니 히어로가 되었다. 그러나 안티 히어로는 안티 히어로가 되기 위해 살인을 저지른다. 그리고 그것을 정의라고 포장함으로써 자기 같은 존재들을 또 만들어낸다. 누구에게도 사랑받지 못하고 누구의 관심도 받지 못하고 그렇지만 관심을 갈구하는 바람에, 그것을 이뤄내고자 살인을 선택하는 것은 이현재 선생님의 말대로 '자기 소진'에 다름아닐 것이다. 



월요일 이 밤 이 시간에 이러고 있다. 모카롤, 커피, 책들.....



나는 우리 사회에 등장한 새로운 페미니즘의 주체들을 비체로 인식하게 되면서 나를 머뭇거리게 만들었던 정체 모를 중압감에서 한 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녀들은 지금까지의 이념이나 도식으로는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지금까지 페미니스트들이 상상해왔던 그 주체성에 꼭 들어맞지도 않을뿐더러 기존의 페미니즘 언어로도 뚜렷하게 설명될 수 없는 존재방식을 갖는다. 그녀들은 통일된 이념을 갖지 않으며, 남성과의 경쟁에도 익숙할 뿐 아니라 페미니즘을 거부하면서 동시에 페미니즘의 전략을 수행한다. - P13

그녀들을 비체로 인정하는 순간, 순수성과 완결성으로 무장‘한 나의 이념에 스스로 갇혀 있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페미니즘은 어떠해야 한다, 페미니스트는 어떠해야 한다와 같은 잣대를 만들어놓고 그녀들에게 도덕적 순수성과 논리적 완결성을 요구하는 일이야말로 버틀러가 말한 ‘윤리적 폭력‘과 다름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비체는 어디에도 끼워 맞춰지지않는다. 새롭게 부상한 주체들을 비체로 인정할 때 비로소 우리는 그녀들이 어떻게 경계 넘기를 하는지, 무엇과 무엇을 조합하는지, 그러한 혼종 만들기를 통해 어떤 빗나감을 가능하게하는지, 이를 통해 어떤 유쾌한 ‘트러블을 만드는지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이 결국 갇혀 있던 타자를 해방시키는 것에 목적이 있다면, 페미니스트들은 지금 부상하는 비체의 해방적 잠재성에 먼저 주목해야 한다. 그녀들의 급진적 타자성을 마주하면서 그동안의 언어들을 점검하고 수정할 필요가 있다. - P14

비체는 흐르는 것이자 경계를 넘나드는 것이며 고체화되지 않기에 어떤 규정, 어떤 언어로도 잡히지 않는다. 비체가 대상object이 아닌 이유는 그것이 주체의 모든 규정성을 넘어서기 때문이다. 비체는 손에 잡히는 착한 대상이 아니다. 비체는 경계를 넘나드는, 그래서 더럽다고 여겨졌던 것이며 잡힐 수 없기에 공포스러운 것이다. 비체는 철통방어라고 여겨졌던 경계에 구멍이 있다는 것을 알리는 존재이며, 따라서 특정 사회적 질서와 동일성을 강화하려는 자들에게 경계를 위협하는 비체는 공포를 넘어 혐오의 대상이 된다.
이를 여성혐오에 적용해보자. 자신을 여성과 뚜렷이 구분되는 경계를 갖는 주체, 즉 남성으로 이해하고 있는 남성들이 있다. 이 남성들은 남성 정체성의 경계를 교란하고 위협한다고 여겨지는 여성을 오염되고 불순한 것, 공포스러운 비체로 간주하여 혐오하게 된다. 여기서 경계를 흐트러뜨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비체로서의 여성은 뚜렷한 경계를 갖는 주체와 동격이 될 수 없다. - P35

비체로서의 여성은 대상과도 다르다. 만약 남성들이 부여한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지 않는다면, 즉 착한 대상에 머무른다면 여성은 멸시받기는 하지만 혐오되진 않는다. 그 대상은 적어도 주체가 파악할 수 있는 대상이며, 주체로서의 경계를 뒤흔든다고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여성은 자신이 재생산을 위한 성녀임을 입증하는 한, 어느 정도의 보상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대상으로서의 위치를 벗어나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가 되는 순간 여성은 멸시를 넘어 혐오된다. 여성혐오는 여성 대상이 아니라 여성 비체를 향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서구의 철학자, 사상가들이 여성을 알 수 없는 존재‘, ‘예측할 수 없는 존재‘로 간주해온 것은 여성들이 대상으로서의 역사가 아니라 비체로서의 역사를 써나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 P36

여성이 비체의 역사를 쓰고 있었음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혐오의 구조에 구멍을 내는 여성들의 행위자성을 발견하게 된다. 비체에 드리웠던 오염물의 이미지는 우리가 비체를 긍정적으로 재전유하는 순간, 여성혐오의 구조를 흐트러뜨리는 힘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비체는 타자 배제에 기반하는 주체가 되지 않고도, 여성성을 열등하고 수동적인 존재로 부정하지 않고도 여성의 ‘행위자성‘을 추동할 수 있는 존재방식이다. - P37

디시인사이드 메르스갤러리에서 본격적으로 사용해서 화제가 되었던 미러링 mirroring 역시 비체들의 젠더 패러디로 볼 수있다. 이 전략에서 여성은 여성이 아니라 남성의 목소리를 모방하는 가운데 남성들의 대상화 논리를 그대로 남성들에게 반사한다. 안티고네가 크레온의 목소리를 모방함으로써 크레온의 목소리가 가진 폭력성을 드러내 보여주었듯이, 메갈리안들은 남성들의 목소리를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여성혐오를 일삼는 남성들이 어떤 폭력적 배제의 논리를 사용하고 있는지를 볼수 있게 만들었다. 이 과정에서 사용하는 메갈리안들의 거울은 단순히 남성의 주체성을 확인시키는 착한 대상의 거울이 아니다. 그녀들의 미러링은 남성들만큼 여성들이 남성들을 모방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여성이자 남성인, 젠더의 경계를 넘나드는 비체의 거울이다. - P40

주인과 노예의 투쟁에서 투쟁에 주도권을 가진 자는 노동을통해 자신의 자율성을 자각하게 된 노예였음을 기억하자. 여기서 노예는 착한 대상이 아니라 주체와 대상의 경계를 넘나들게된 비체였다. 투쟁이 시작된 상태에서 자신이 주인이라고 믿는쪽은 이미 나약하다. 비체가 인정하지 않는다면 주인은 주인으로서의 자리를 잃는다. 비전과 대안을 제시하는 일은 언제나 비체의 몫이었다. - P110

여성혐오에 대한 미러링으로서의 ‘혐오‘를 여성혐오와 동일한 것으로 볼 것인가를 두고는 논쟁이 있을 수 있으나 여기서 이 문제를 다루지 않을 것이다. 메갈리안의 감정을증오가 아닌 ‘분노‘로 분석한 글로는 윤지영, 「증오의 프리즘으로서의 일간 베스트 현상읽기: 파토스의 정치학과 윤리학은 가능한가?」, 『철학논집」, 제41집, 2015, 171-207쪽이있다. - P113

문제는 동정심이 불평등을 전제로 하는 감정이라는 데 있다. 고통스러워하는 자들에게 동정심을 갖는다는 것은 내가 그들보다 우월하거나 혹은 그들의 수준은 우리의 수준보다 낮다는믿음을 포함한다는 것이다. 고통스러워하는 자는 고통을 이겨내거나 고통받고 있지 않은 내가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사람이다. 이런 의미에서 길리건과 위긴스는 동정이 사랑과 별 상관없는 말이라고 한다. 오히려 누군가를 동정한다는 것은 그/녀를 진정 사랑하지 않는다는 의미다. 왜냐하면 동정은 대상에대한 나의 우월성을 전제로 하기 때문이다. - P127

자아가 있고 타자가 자아 밖에 분리된 것이 아니다. 자아는 오히려 타자의 발견에서 시작되는 것이다. "나는 반복적으로 자신을 자기 밖에서 발견한다." 이것은 자기관계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나 자신을 생각할 때 언제나 나 자신의 타자이다. 어제의 나는 어제의 나를 바라보는 오늘의 나에게 낯설다.
"나는 언제나 나 자신에게 타자이고 나 자신으로의 귀환이 일어나는 어떤 최종적인 순간도 존재하지 않는다." "나는 내가겪는 만남에 의해 항상 변형된다." 따라서 나는 나를 알기위해서라도 너를 물을 수밖에 없다. 나는 오직 "너는 누구인가"를 물음으로써만 알아갈 수 있다.(주디스 버틀러, 윤리적 폭력비판) - P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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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3-15 00: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 글 두고두고 봐야지 배울게 많아 하다가 ㅎㅎ 먹을 것도 많군요 다락방님. ~ 이건 테러입니다 모카롤 ㅠㅠ

다락방 2022-03-15 07:48   좋아요 1 | URL
책은 마음의 양식 빵은 육체의 양식. 저는 모든 양식을 좋아합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한밤중에 먹는 모카롤은 꿀맛이에요. 하하하하하.

책읽는나무 2022-03-15 08: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밤중에 커피와 모카롤!!
모카롤은 이해가 되는데, 커피?? 괜찮으신가요?
전 저녁에도 커피 못마시겠던데요~날밤 새거나, 숙면이 안되더라구요ㅜㅜ
아직 젊으시군요?ㅋㅋㅋ

비체라는 단어를 여성괴물에서 처음 접했을 때, 그런가보다~하고 생각했었는데 이렇게 널리 쓰이고 있었던 용어인 줄 처음 알았네요.
이런 책을 읽지 않았었다면 관심 두지 않아 영영 몰랐었을 수도, 들어도 흘려 넘겼었을 단어입니다.
무지를 깨우쳐 주셔 감사합니다.
매달 달달하게 채찍질 해주시는 그대는 달콤한 모카롤 같은 분이시군요ㅋㅋㅋ
그리고 배트맨도 고독해...모카롤 먹여 주고 싶군요^^

다락방 2022-03-15 08:52   좋아요 2 | URL
책나무 님, 예리하신 분!! ㅋㅋ 언제나 책나무님의 섬세함에 감탄합니다.
저 커피는 디카페인 이에요. 모카롤과 커피를 먹고 싶은데 저 역시도 커피를 오후에 마시면 잠을 못자고 말똥말똥해서 ㅋㅋ 디카페인으로 마셨답니다. 저, 젊지 않아요. 책나무님과 함께 늙어가고 있습니다 ㅋㅋㅋㅋㅋ

저도 이렇게 비체라는 단어를 알게 돼서 좋아요. 무엇보다 한 번 읽은 것보다 두 번 읽었더니 그리고 그동안 계속 읽었더니 어려웠던 것들이 덜 어려워지는 것 같아서 그건 너무 좋은 경험이라고 생각해요. 이런 경험들이 반복된다면 우리는 더 많은 것들을 계속해서 알아갈 수 있겠죠. 후훗.

아 책나무님. 댓글 읽고나니 진짜 배트맨 만나서 모카롤.. 나눠 먹고 싶네요. 커피도 내려주고, 모카롤도 썰어 주면서, 함께 먹자 하고 싶어요. 내가 당신의 모든 고민을 함께 해줄수도 없고 아마도 내가 이렇게 커피 한 잔 내려주어도 당신은 여전히 고독하겠지만, 그래도 이런 시간들이 살아가는데 도움이 되지 않겟습니까, 하고 배트맨 집에 제 방도 하나 마련해달라 하고 싶네요. 집 엄청 크던데 말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책읽는나무 2022-03-15 09:27   좋아요 1 | URL
아...배트맨 집 그리 컸나요?
저도 방 몇 개 얻고 싶네요^^
이사를 해야 하는데..아~~집값이!!!!!!!
있다가 배트맨씨 집주소 좀 찍어 주세요^^
모카롤 들고 찾아가서 어떻게 좀 회유를 해봐야 겠네요ㅋㅋㅋ

다락방 2022-03-15 10:12   좋아요 2 | URL
배트맨은 고담시의 재벌인 것입니다!! 저택이에요, 저택. 저는 방 한 칸만.. 물론 두 칸 주면 더 좋겠지만.. 그리고 제 마음대로 살다가 가끔 배트맨 고독해할 때 커피 친구나 되어주고 그러면서 살고 싶네요. 껄껄. 배트맨한테 책도 추천하고... 여성주의 책 읽기 같이 하자고도 해보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 삼겹살 먹고 싶네요. (갑자기?)

수이 2022-03-15 15:2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빌리러 도서관 왔는데 ㅠㅠ 그새 누가 빌려갔네요 ㅠㅠ

다락방 2022-03-15 17:33   좋아요 1 | URL
아이고, 이걸 요즘 빌리는 사람이 있단 말입니까?! 아무도 안 볼 것 같았는데 말이지요 ㅋㅋㅋㅋㅋ
비타 님, 예약 걸어두고 오세요! ㅜㅜ

수이 2022-03-15 17:37   좋아요 1 | URL
대출자는 아마도 알라디너? 🤔 예약하고 왔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