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리, 마리아, 마틸다 한국문화사 한국연구재단 학술명저번역총서 서양편 775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메리 셸리 지음, 이나경 옮김 / 한국문화사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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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리>는 답답하기 짝이 없는 소설이다. 주인공 메리가 남편을 싫어한다는 것, 만나고 싶어하지 않으며 만나려 하지 않는다는 것은, 그 당시에 반항적이었을지는 모르겠지만 그것 말고 이 단편에는 도대체 뭐가 더 있나 싶다.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자라면서 병약한 친구를 간호하고 그리고 죽음으로 작별하고 그러다 사랑하게 되는 남자도 병약한 남자이며 그러다 죽고.. 뭐 어쩌라는건지. 도약은 한 번에 크게 이룰 수 없는 것이기 때문에 당시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을 한 것이었다 할지라도, 지금의 여기에서 내가 보기에는 정말이지 착한 여자 컴플렉스로 똘똘 뭉친게 아닌가 싶다. 물론 착한 여자 컴플렉스라는 것도, 사랑을 받고자 하는 욕망에서 기인한 것일테다. 사람들이 자신의 쓸모 혹은 가치를 증명하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고, 그중에 하나는 아픈 사람 돌봐주기 이기도 하니까. 그러나 병약한 자를 열심히 간호하고 또 간호하는 것은, 타인을 위해서만 자신의 가치를 증명하는 것 아닌가.


작가는 자신이 아는 한도 내에서만 글을 쓸 수 있다. 내가 모르는 분야에 대해 글을 쓰고자 한다면 충분히 공부하고 연구해서 써야할 것이다. 내가 상상하는 한계치 내에서만 인물이나 사건을 만들어낼 수 있고, 그러니 <메리>가 작가의 자전적 소설이라는 것은 너무나 자연스럽고 당연하며, 그리고 작가라면 누구나 더 많은 소설, 그리고 다른 소설을 쓰기 전에 한번쯤 거쳐가야 하는걸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자전적 삶이라면, 울스턴크래프트가 이런 삶을 살면서 [여성의 권리 옹호] 같은 책을 쓴 것은 자신의 자리에서 끊임없이 생각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일테다. 그렇다해도 어쨌든 <메리>는 영 답답하다. 페니미즘 소설의 초기작 이라니.. 흐음.



<마리아>는 이 책에 실린 총 세 편의 단편들중 가장 좋았다. 나로서는 <마틸다>에 가장 관심을 두고 기대를 했는데, 마틸다 읽으면서 너무 당황해버렸어. 이건 이따 다시 얘기하고, 일단 마리아에 대해 얘기하자면, 이 단편 <마리아>에서 비로소 아, 작가가 여성의 권리 옹호를 쓴 사람이지, 하고 연결지을 수 있었다. 남편의 뜻대로 되지 않는 여성임에 정신병원에 감금된 것은, 지금도 크게 다르진 않지만, 이 거대한 세계의 은유라 봐도 좋을 것이다. 샤론 볼턴은 자신의 책 [희생자의 섬]에서 주인공이 거주하는 섬을 '비슷한 남자들이 지배하는 세계'라 했었는데, 나는 이점과 닿아있다고 본다. 정신병원이라는, 섬이라는 어찌보면 작은 세계에서 여성을 억압하고 남성의 권력으로 다스리고자 하는 것은 그것을 한 국가로 놓고 전 세계로 놓고 보았을 때도 다르지 않으니까. 부당한 입장에 처한 주인공 '마리아'는 자신의 부당함이 어디에서 오는 것인지를 잘 안다. 그 점이 주인공 마리아의 그리고 저자 메리 울스턴 크래프트의 가장 용기 있는 부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우리가 힘들거나 억울할 때 그것이 어디에서 온 것인지를 들여다보려고 하고 인지하는 것, 인지했으므로 기필코 따지고 들고 발언하는 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경지이다. 문제를 들여다보고 그 원인을 알고자 하는 것은 그 후의 문제 해결을 불러오기 때문에, '원래 그런거야' 라며 관습적으로 넘기려고 하는 경우가 세상엔 훨씬 더 많으니까. 바꾸려고 하지마 너만 힘들어, 왜 바꾸려고 들어 다 불편해지게. 우리는 이런 말을 무수히 듣게 되지 않는가. 알게 모르게 우리가 발언했을 수도 있고.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장 자크 루소'의 책을 읽고 거기에 반박하기 위해 [여성의 권리 옹호]라는 책을 썼다. 루소의 책을 읽은 사람이 울스턴크래프트 만은 아닐 것이고, 그걸 읽으면서 바보같다고 생각한 사람 역시도 울스턴크래프트 한 명만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울스턴크래프트는 읽고 분노했고 썼다.



루소가 그의 탐구에서 한층 높이 올라섰거나, 혹은 그의 눈이 그가 거의 언제나 호흡할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 안개 낀 대기를 궤뚫어 보았다면, 그의 활동적인 정신은 참된 문명을 확립하고 인간의 완성을 숙고하는 데로 돌진했을 것이다. 맹렬하게 날아서 감각적인 무지의 밤으로 되돌아가는 대신에 말이다. -[여성의 권리 옹호] 제1장,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책세상문고



<마리아>를 읽는다면 바로 이 울스턴크래프트를 만날 수 있다. 그녀는 여성이 남성에게 종속되는 것, 여성의 재산이 여성의 것으로 인정되지 않는 것에 대해 분노한다. 이것이 불공평하고 부조리하다는 것을 안다.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자유로운 영혼이었으나, 세상은 그녀가 자유롭게 살게 놓아두질 않는다. 아무리 논리적으로 자신의 상황을 피력해도 그녀에게 돌아오는 것은 죄인이라는 딱지일 뿐. 그녀는 자신의 아이도 그리고 재산도 지킬 수 없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녀에게 사랑이 찾아오고 그 사랑에 빠져든다 한들, 아아, 세상이여, 그리고 여자들이여 또 남자들이여, 남성은 여성을 구원하지 못한다. 여성이 처한 불리한 상황과 위험을 알고 그 고통을 알고 거기에 들어가 함께 구하고자 하는 것은 같은 성별인 여성이었다. 사랑한다고 속삭이는 남성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고통을 당하고 있다는 것을 공감하는 여성인 것이다. 마리아여, 그리고 제미마여, 부디 남은 생은 당신들에게 축복이고 행복이기를.




<마틸다>는 읽으면서 가장 당황스런 작품이었다. 나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을 너무 재미있게 읽고 흥분해서 여러차례 글을 남겼던 터라, 이 세 단편에서도 마틸다를 가장 기대했는데, 읽으면서 수시로 '도대체 이걸 왜 썼을까'를 계속 생각해야 했다. 여기 어디에 페미니즘적 요소가 있다고 페미니즘을 이 책의 타이틀로 걸어둔걸까. 내가 놓친 무언가가 있는걸까, 나는 꾹 참고 읽어가면서 마지막 해설까지 읽는다. 해설은 내가 놓친 많은 부분을 설명해줄 수 있을 것이고, 그렇다면 나는 아아 내가 이걸 이해를 못했구나, 할 수 있겠지 했던 거다. 결론을 말하자면, 나는 해설을 읽었고 다른 비평가들의 <마틸다>의 여성주의 텍스트에 대한 해석도 읽었지만 딱히 동의되는 것도 아니고 무슨 말인지도 모르겠다.


마틸다는 근친상간을 다룬다. 사랑했던 아내가 아이를 낳고 죽어버리자 아버지는 아이를 사랑할 수 없고 아내를 잃은 괴로움에 그 어린 아이를 자신의 누나에게 맡기고 집을 나가버린다. 가급적 아이에게서 멀리 떨어지려고 한 것. 그렇게 십육년을 해외에서 지내고 그 사이에 그 아이 마틸다는, 다정하지 않은 고모의 사랑을 갈구하면서 아버지를 그리워한다. 언젠가는 아버지를 만날 수 있겠지.. 하면서. 그러다가 십육년만에 아버지가 쫜- 하고 나타났고, 그렇게 나타나서는 매일 수시로 많은 대화를 하고 다정하게 대하며 서로 사랑하며 지내는거다. 부모의 정 없이 살아왔던 마틸다이기에 아버지를 만난 기쁨은 너무 크고 이제 자신이 세상에 의지할 이는 아버지뿐이고 이 시간은 마틸다에게 너무나 행복하다. 아버지도 그간 만나지 못한 것을 미안해하며 최선을 다해 마틸다에게 잘해주는데, 아아, 마틸다가 십대 후반이고 그녀를 여성으로 보면서 애정을 품게 된 청년의 존재를 알게된 순간, 아버지의 딸에 대한 사랑은 남자의 여성에 대한 사랑으로 바뀌게 된다. 그러니까 자신에게 딸인 이 소녀가 누군가에게 연인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알게되자마자 애정이 방향을 틀어버린 거다.



"저는 여러 해 동안 어쩌면 영영 영국을 떠나 있겠습니다. 하지만 제가 오로지 저 자신만 생각하는 것은 아님을 알려드리고자 누님께서 필요하다고 생각하시는 모든 것을 서신으로 알려주실 때까지 이 도시에 머무르겠습니다. 제가 이곳을 떠나면 제 소식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지금까지 맺은 모든 관계를 끊어야만 합니다. 저는 방랑자가, 버림받고 떠도는 불쌍한 존재가 되겠습니다. 아무도 없이! 혼자서!"  편지의 다른 부분에서 아버지는 나를 언급했다. "제가 볼 수도 없고, 입에 올릴 수도 없는 그 불행한 어린 것에 대해서는, 누님의 보호에 맡기겠습니다. 그 애를 잘 보살피고 아껴주십시오. 언젠가 제가 그 애를 찾으러 갈 수도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미래는 어둡습니다. 그 애의 현재를 행복하게 해주십시오." -<마리아>, p.320


(진짜 가지가지한다..)


작가도 그렇고 독자도 그렇고 그러니까 우리는 개개인이 저마다 가진 가치관이나 성향이 있을 거다. 경험의 폭이 다르듯이 이해의 폭도 다를 것이고. 마틸다를 썼던 메리 셸리에게는 분명 어떤 의도나 목적, 뜻이 있었을 것이다. 이런 이야기를 해야했던, 써야했던 그 순간의 어떤 생각이나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게 뭐였든 간에 나에겐 전달되지 않았고, 아버지가 딸에 대한 사랑의 방향을 틀어버린 순간 내게 이 소설은 너무도 읽기 힘들고 당황스런 소설이 되어버렸다.

해설까지 읽고 비평가들의 분석에 대한 것도 읽었지만, 나는 그 모든 비평가들에게 동의할 수 없고, 내가 이 소설 <마틸다>를 읽고 생각한 것은, 한 아이를 방치하고 났을 때 그 아이에게 다가올 불운한 미래였다.


마틸다는 부모의 사랑을 내내 갈구했다. 아버지는 응당 자신이 주어야 할 사랑과 보살핌을 제때에 주지 못했다. 그렇게 그들 사이에 만나지 못한 시간이 십년 이상이었고, 그렇게 나타난 후에 드디어 마틸다는 아버지의 사랑을 받았다고 좋아했건만, 아버지는 딸을 여성으로 본다. 물론 아버지는 그것이 아주 역겨운 일이며 죄악이라는 것을 안다. 그러나 그는 이미 여성으로 딸을 봐버린 이상 다시 딸로 보기가 힘들다. 아이일 때 돌보지 못하고 버려두고 간 아버지라니, 이 얼마나 무책임한가. 가장 아버지의 돌봄이 필요할 때 내팽개쳐놓고서는 아직 채 성인이 되기 전에 나타나 여성으로 인지하다니. 정말이지 근친상간 이라는 것보다 이 지점에서 더 짜증이 난다. 부모로서 해야 할 의무는 저버린 채 남자가 되어 나타난다? 게다가 그 사이의 나이차 역시도 역겹고. 하나부터 열까지 짜증나는데, 마틸다는 그래서 아버지를 피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아버지라는 것을 깨닫는다. 인정한다. 그리고 거기에서 죄책감을 느끼며 사회로부터 스스로를 고립시킨다. 그녀는 혼자 지내고 계속 혼자 지낸다. 그녀는 친구도 애인도 아무도 받아들일 수가 없는 상황이 되고 그 뒤로 사회화가 되질 않는다.



내가 좋아하는 '버지니아 앤드류스'의 소설 [다락방의 꽃들]에는 어릴 때부터 다락방에 감금되어 온 네남매가 등장한다. 이중 첫째와 둘째인 크리스와 캐시는 아주 어린 쌍둥이 동생들을 돌보면서 서로에게 의지한다. 사춘기때 갇혀 거기에서 몇년을 지내며 만나게 되는 사람들이라고는 서로가 전부인 그들은 사랑에 빠진다. 결국 다락방에서 탈출하고 나서 캐시는 다른 연인을 찾지만, 그러나 크리스는 캐시에게 집착한다. 이 이야기 자체는 근친상간을 다룬 금기의 소설이지만, 그러나 나는 그 상황이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이렇게 감금되어 있는데 대체 어떻게 살란 말인가, 하고. 이들에게 이런 환경이 주어지면 안되는 거였는데, 그런 환경을 준 다음에 그것이 잘못이라고 우리는 어떻게 비난할 수 있을까, 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크리스와 캐시가 사랑하는 것에 대해서 나는 비난도 역겨움도 가지지 못했다. 그러지 않았다.



그러나 마틸다의 아버지에 대해서라면 너무나 화가났다. 처음 사라짐부터 나중에 등장해서 다시 그녀에게서 사라지는 이 모든 순간들에 마틸다의 아버지가 생각한 건 자신 뿐이었다. 마틸다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결정을 처음부터 끝까지 내렸고, 그 과정에서 마틸다는 외로웠다가 행복했다가 다시 절망하며 고립되어야 했다. 어쩌면 이런 지점에서 여자의 인생 자체가 이렇게 남자에게 휘둘린다는 얘기를 하려고 한건지 모르겠지만, 나로서는 그저 비극적인 소설이었고 당황스런 이야기였다. 내내 생각한 건, 사람이 한 사람만을 사랑한다는 것은 얼마나 위험한가에 대한 것이었다. 예전부터 누누이 말해왔지만, 사람이 단 한사람만을 사랑하고 나를 올인하는 건 진짜 피해야 할 일이다. 그 상대가 사라졌을 때 내가 무너져서 일어날 수가 없기 때문이며, 필연적인 집착을 불러오기 때문이다. 우리에겐 다른 사람이, 다른 관계가, 다른 애정이 반드시 필요하다.



마틸다가 아버지를 그리워하다 아버지를 알게되어 행복했을 때, 그녀에게 다른 좋은 관계들이 더 있었다면 이야기는 아주 많이 달라졌을 것이다. 아버지와 보내는 시간들 중 일부는 다른 사람들과 보냈을 것이며, 지신을 살게 하는 행복과 기쁨들중 일부는 다른 이들로부터 총족되었을 것이다. 또한 아버지로 인해 고통스러웠을 때 그녀를 붙잡아주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고, 그녀가 무너지는 일은 없었을 것이며 설사 무너졌다해도 고립대신 스스로 일어나기를 선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 관계 자체가 근친상간이어서가 아니라, 이렇게 한사람을 바라보는 것이라는 이유로 나는 사람들이 다른 사람들을 충분히 확보해두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너 말고 다른 사람도 반드시 필요하다. 나는 <마틸다>를 읽고는 그런 생각을 더 강하게 하게 됐다. 내 기쁨도 내 행복도 오로지 너야, 나는 너의 것이야. 절대 안된다, 이런 마음은.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이것도 할거고 저것도 할거고.. 그렇게 살면 안된다. 너를 위해서라면 나는 이건 할 수 있지만 저건 하지 않을거야, 나한테 그런거 시키지마, 라고 할 수 있어야 하고, 그런 기준을 가지고 너 말고도 다른 사람들을 둘 수 있어야 한다. 너만 있으면 돼, 는 나에게도 위험하고 너에게도 위험하다. 그러면 안된다 진짜. 게다가 그 너가 아버지이거나 딸이라니, 미치고 팔짝 뛸 노릇이다. 게다가 그 너가 한 명은 어른 남자에 한 명은 미성년자라니. 진짜 뒤집어질 노릇이다. 안된다. 너 말고 다른 사람 이 관계 말고 다른 관계를 가질 수 있어야 한다. 물론 그건 '원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나의 액션도 필요하다. 나의 액션도 나의 리액션도 필요하다. 액션과 리액션을 가진채로 다른 관계를 갖자. 진짜 마틸다 때문에 내가 돌아버리겠다. 휴...



[메리, 마리아, 마틸다]를 읽으면서 선하고 착하다는 것에 대해 생각했다. 우리는 선하기 위해서 선한게 아닌가. 그것은 과연 옳은가. 우리는 꼭 착해야 할까. 나보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을 열심으로 돌보는 것은, 과연 상대를 위한 것일까. 그것이 돌봄이든 사랑이든 온 몸을 던지는 것은 자기 파괴를 불러온다. 그것이 무엇이든 누구이든 어떤 관계든 우리는 반드시 거리를 조절해야 할것이다. 내 인생을 진창으로 몰고 가지 않기 위해서는 그 거리가 반드시 필요하다.

물론, 이 책의 단편들을 읽노라면 그 거리가 필요한 걸 몰라서가 아니라 알아도 할 수 없게끔 만들었던 환경이라는 것이 존재하지만 말이다.




세상에서 여자들이 높은 지위를 얻을 유일한 길이 남자들의 방탕을 조장하는 것밖에 없으니 사회는 여자들을 괴물로 만들고, 그들의 비열한 악덕을 지력이 열등하다는 증거로 내세운단다. <마리아> - P218

조지는 숙부가 함께 계실 때는 짤막하게 법률에 관한 질문을 하거나 숙부의 뛰어난 판단력을 존중하는 적절한 말을 하는 것 이외에는 별로 입을 열지 않았거든. 그러니 숙부는 그와 함께 계실 때면 늘 그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큰 잠재력을 가졌다고 말씀하셨지.
숙부만 그런 의견을 가진 것이 아니었단다. 하지만 내 말 믿으렴. 증오심 때문에 편견을 가진 것은 아니란다. 다른 젊은이들의 활발한 영혼이 젊음의 폭발을 내던지고 있을 때, 이렇게 적절하게 던진 말, 이 소리 없는 경의의 표현은 생각이 깊거나 겸손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저 머릿속에 아무것도 없고, 상상력이 빈곤한 결과였단다. 패기만만한 망아지가 그와 같은 속도로 날뛸 거야. <마리아> - P220

이런 신중한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가진 능력을 익히는 데 필요한 뜨거운 불길이 없고, 그저 어리석지 않다는 이유로 현명하다는 말을 듣는 거란다. <마리아> - P220

한숨이 자꾸만 나오는구나. 하지만 가슴이 여전히 답답하다. 나는 무엇을 위해 말없이 견디는 것일까? 어째서 남자로 태어나지 않았을까? 아니, 대체 왜 태어난 것일까? <마리아> - P221

"우리 같은 마음은 짝을 만날 뿐, 어울리는 상대를 만나지 못하네."
처음에는 이런 것이 즉흥적인 감정이었으나, 재치 있고 세련된 예의를 갖춘 남자들을 알게 되니 가끔은 너무 일찍 결혼한 것을 후회하지 않을 수 없었단다. 잠시 남에게 의지해야 하는 처지에서 벗어나 잘 알지도 못하는 하늘에서 어린 날개를 펼치려다가 나는 그만 덫에 걸려 평생 새장에 갇힌 처지였다. <마리아> - P225

지는 저는 제 결혼 후에 태어난 그 남자와 하녀의 아이를 데리고 있습니다. 교육과 상황이 남자들로 하여금 더 분방하게 사고하고 행동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는 사회가 질서 유지를 위해 여자들에게 요구하는 것과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비록 이 아이의 탄생을 용서해줄 수는 있지만, 이 불운한 아이를 버리게 할 수는 없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마리아> - P296

울스턴크래프트와 블러드의 우정은 비밀을 공유하는 청소년 시절의 단짝 친구 사이 이상이었다. 산후우울증을 겪던 여동생 엘리자에게 근본적인 문제는 결혼 생활 자체에 있다고 진단하면서 별거를 조언한 울스크래프트는 패니, 그리고 엘리자와 함께 학교를 설립하고 감정적으로나 재정적으로나 서로 의지할 수 있는 일종의 여성 유토피아 건설을 시도했다. - <작품 해설> - P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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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5-28 10:5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읽느라 수고하셨어요! ^^* 현실과는 너무 먼 이야기라 저도 읽으면서 갑갑한 느낌이 들더라구요. 해설이 없었으면 아마 리뷰도 쓰기 힘들었을 듯. 제가 의아한건 당시 근친상간에 관한 소설이 어떻게 유행이되었는지 실제로도 유행이었는지예요. 하...

다락방 2021-05-28 12:48   좋아요 2 | URL
시대적 배경을 생각하며 봐야겠지만 저는 진짜 답답하더라고요. 특히 메리는 왜이렇게 사나 싶을 정도였어요. 병약한 사람들 끌어안고 사는데 여기 어디에 페미니즘적 요소가 있단 말인가.. 하고 말이지요. 너무나 아픈 사람들을 돌봐야 한다 생각하는 지점에서 스스로를 그 상황에 가두는 것 같기도 했고요. 너무 답답한 소설이었어요.
먼저 완독하신 미미님, 수고하셨어요! 다음달에도 우리 함께 열심히 가봅시다. 다음달 책은 뭔가 가슴을 뻥 뚫어주기를 바랍니다. 으쌰!

잠자냥 2021-05-28 12:0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마틸다>에서 마틸다가 아버지를 사랑하기로 ‘스스로‘ ‘선택‘했다고 봤어요. (근친상간일지언정) 주체적으로 사랑하고 그 사랑을 인정함으로써 사회에서 추방당하는 게 아니라 자기 ‘스스로 등을 돌렸다‘고 봤는데, 그런 점에서는 전복적으로 보이기도 했고(사회가 금기한 사랑도 욕망하는 주체로서), 당시로서는 급진적이지 않았을까 봤는데... 이건 한편으로는 아버지의 가스라이팅으로 볼 수도 있겠군요.

다락방 2021-05-28 12:51   좋아요 2 | URL
해설에도 주체적 선택이라고 나오던데 저는 여기 어디에서 주체적이고 선택인가 싶더라고요. 아버지가 아이를 방치하지 않았다면, 오만년만에 나타나지 않았다면, 그리고 너를 여자로 본다 말하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을 일이었을텐데요. 그래서 저는 오히려 그런 지점을 보여주려고 한건가 생각도 했어요. 이것봐라, 여자의 삶이 이렇게 어떻게든 남자에게 휘둘린다, 라는걸 보여주려는건가 하고 말이지요. 제 안에 근친상간-특히 아버지와 딸-을 엄청 밀어내려는 기질이 강해서 이 이야기에서 어떤 긍정적인 면을 찾아내지 못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해요. 제가 너무 밀어내서요. 저한테는 너무 힘든 소설이었어요. 한장 한장 책장 넘기는게 진짜 힘들더라고요. 특히 아버지가 고백하는 부분 있잖아요. ‘다른 사람이 사랑할 수 있는 여자로 보인다는 걸 인지했을 때부터 내 마음도 그러해졌다‘고 하는순간 너무 역겹고 분노가 차오르더라고요 ㅠㅠ 비정상적인 소유욕을 본 것 같아서요. ㅠㅠ

공쟝쟝 2021-05-31 15: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메리> 읽으면서 즐거웠어요. 마지막에 메리가 ˝천국은 결혼없는 세상임˝러면서 죽는데 진짜 울스턴크래프트 만만세 했음 ㅋㅋㅋ (하지만 그녀는 결혼을 하고 메리를 낳았다...) 마리아에서 은유를 짚어내신 부분은 제가 생각지 못했던 것 같고요!
마틸다는 읽으면서 이거 근친상간 다락방님 엄청 싫어하겠다.. (저도 싫었음) 이랬는 데 이 리뷰에서 대차게 까주시니, 저는 내말이요. 제말이요, 그러니깐요. ㅋㅋㅋ 이러고 웃는 중입니다!! 6월이다!!!

다락방 2021-06-01 09:02   좋아요 0 | URL
결혼을 했기 때문에 천국은 결혼 없는 세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던 것 아니겠습니까!
<마틸다>는 가장 기대했던 작품인데 읽는 내내 견디기 힘들었어요. 저는 근친상간 이라는 것도 싫지만 무엇보다 다른 남자가 딸을 여자로 본다는 걸 인지한 순간 아버지도 그렇게 보잖아요. 그 지점에서 역겨움이 완전 폭발했어요. 인간 쓰레기처럼 느껴짐요 ㅠㅠ
아아 고통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