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은 이상한 열망이 타오른다. 하등 쓸데없는 것을 갖고싶어지면 기어코 가져야만 하는 것이 무릇 인간된 도리 아닌가. 음.. 아니고요, 그것은 인간된 도리라기 보다는 나라는 한 개인의 특성 같은 것일테다. 그러니까 나는 책을 갖고 싶다.
베트남에서 말레이시아 난민 수용소를 거쳐 캐나다에 정착한 킴 투이의 자전적 소설을 읽는 내내, 나는 이 책이 좋아서 베트남어로 사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베트남에서 캐나다로 간 작가라니까, 나는 당연히 처음 쓰여진 언어가 베트남어일 거라고 생각한 거다. 나는 언젠가 베트남에 가 살아보고 싶고, 그래서 공부하지 않았지만 베트남어 교재도 사두었으니, 소설책으로 베트남어를 배울 수 있다면 또 좋은 기회가 아닌가 말이다. 게다가 킴 투이의 이 소설 [루]는 분량도 적고 문장도 짧게 끝난다. 베트남어를 배우기에 되게 맞춤할 것 같은 거다. 베트남 태생의 여성작가의 소설로 베트남어를 공부한다니, 너무 짜릿하지 않은가. 읽으면서 '다 읽고 베트남어 판으로 사야지 후훗' 하였고, 그렇게 오늘 아침 일어나 이 책의 남은 분량을 다 읽었는데, 아아, 그제야 나는 알게 된다. 이 책의 원어는 베트남어가 아니라 프랑스어라는 것을. 킴 투이는 이 책을 프랑스어로 썼다. 원서는 불어로 되어있는 것이다. 아아.
그러나 이 책은 인기가 많아서 세계 여러나라에 번역되어 있다고 하니 베트남어로도 번역되어 있겠지. 그렇다면 그렇게 사도 뭐 괜찮을거야. 애초에 베트남어로 쓰여진 것과는 차이가 있겠지만 뭐 어때. 그런데, 베트남어 책은 어떻게 산담?
나는 알라딘에 킴 투이의 루 를 넣고 검색해봤다. 베트남어는 검색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아마존으로 가 역시 킴 투이의 루를 넣고 검색해봤다. 아니, 세상에. 이 책이 인터내셔널한 베스트셀러임은 부인할 수가 없구나. 영어, 불어, 스페인어, 터키어, 중국어, 불가리아어, 페르시아어 다 번역되어 있고 구매할 수도 있다. 그런데 단 하나, 베트남어가 없어. 야!!
니네 나한테 왜이래?
하는수 없이 이베이로 가 검색했다. 역시 베트남어는 없다. 그렇다면 나는.. 나는 어쩌나?
베트남에 가야한다. 베트남에 가서 서점에 들러 사야 한다. 베트남 태생의 작가이고 세계적인 작가이니 베트남 서점에는 분명 이 책이 베트남어 번역으로 있을 것이다. 존재할 것이다. 그런데 내가 베트남에 갔을 때 큰 서점에 들렀던 적이 있던가. 기억을 돌리고 돌려본다. 내가 뉴욕에서는 서점에 간 적이 여러번이지. 가만 있자, 아시아 어디 쇼핑몰의 그 큰 서점, 거기는... 태국이었던가? 마캌오에서도 서점은 갔었고. 하노이..하노이에서 서점은? 아무리 아무리 기억을 해보려고 해도 큰 대형서점에 간 기억이 없다. 롯데백화점 안에 서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거기 컸던가? 아니, 거기 말레이시아 서점인가? 아아 모르겠다. 하노이에서 서점에 가서 어떤 것들을 봤는지, 내가 서점을 갔었는지, 큰 서점이 있었는지가 기억나질 않아. 그래서 나는 하노이 서점으로 검색해보았는데, 이미 하노이에서 큰 서점에 들렀던 블로거들이 사진을 찍어 올려두었고 아아, 내 마음은 이미 하노이에 가있다. 하노이야...
하노이로 말할 것 같으면 나에게는 정말이지 너무나 특별한 장소이고 내가 너무나 좋아하는 곳이라서, 내가 결국 어떻게든 몇 개월이나마 살아보고 싶은 곳이면서 동시에 수시로 들르고 싶은 곳이다. 몇해전에는 너무 가고 싶어서 금요일 퇴근하고 바로 공항으로 가 비행기를 타고 새벽에 하노이에 떨어져서 몇시간 잔 뒤에 토요일을 온전히 하노이에서 보내고 일요일 점심 비행기를 타고 돌아온 적도 있다. 그렇게 훌쩍 떠나고 싶은 곳이 하노이다. 그러니까 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정말 쓸데없는데 돈과 에너지를 낭비한다고 보이겠지만, 나는 진짜로 내가 원해서, 그렇게 훌쩍, 킴 투이의 베트남어로 쓰여진 소설책을 사기 위해 하노이로 날아갈 의지가 있다. 그러고 싶다. 하노이에 훌쩍 가서 서점에 들러 책을 한 권 사들고 올 생각을 하면 벌써부터 너무나 흥분되고 짜릿해진다. 그런데!!
코로나 때문에 갈 수가 없어 ㅠㅠ
코로나 뭐야 진짜 ㅠㅠ
왜 나를 이렇게 만들어.
왜 이렇게 욕망에 후달리게 만들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나 킴 투이의 루 베트남어로 갖고 싶어. 막상 가지게 되면 한 장도 펼쳐보지 못하고 역시나 베트남어 글자 하나 익히지 못할 확률이 매우 크지만, 그래도 갖고 싶어. 갖고 싶다고 생각한 이상 가져야겠어. 그런데 어떻게 가질 수 있는거야? 엉엉 ㅠㅠ 베트남어로 쓰여진 루 를 사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거야. 나 베트남 가서 책 한 권 사오는거 할 수 있어. 나 그거 좋아. 괜찮아. 나 그거 돈 아깝다고, 시간 아깝다고 생각하지 않아. 기꺼이 즐거운 마음으로 행할 수 있어. 그런데 상황이 그렇게 하면 안된다고 해. 엉엉. 그러면 나는 이거 언제 가질 수 있어? 가질 때까지 나는 계속 생각하게 될텐데, 나는 어떻게 해야 하는거야? 엉엉. 킴 투이 루 갖고 싶어. 엉엉.
근데 이 책 베트남어로 구할 수 있나 검색해보다가 와, 표지가 다 너무 예뻐서 깜짝 놀랐다. 여러분, 표지 한 번 보고 가자, 킴 투이의 소설들.
매일 아침 외할아버지의 집 앞에 서 있던 여자가 있었다. 날품팔이꾼이던 그녀는 매일 아침 그 자리에 서서 자기에게 일거리를 주는 남자를 기다렸다. 그리고 매일 아침 외할아버지의 정원사가 바나나 잎에 싼 찰밥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리고 매일 아침 그녀는 파라고무나무 농장으로 향하는 트럭 짐칸에 서서 할아버지의 정원사가 부겐빌레아 정원으로 머어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어느 날 아침 늘 흙길을 건너 아침을 가져다주더 남자가 나타나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날도 …… 또 다음 날도 …… 어느 날 저녁 그녀는 내 어머니를 찾아와 물음표가 가득 그려진 쪽지 한 장을 건넸다. 아무 내용도 없이 물음표들뿐이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인부들을 태우고 떠나는 트럭에서 그 여인을 볼 수 없었다. 그녀는 고무나무 농장에도 부겐빌레아 정원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외할아버지의 정원사가 결혼을 원했지만 그의 부모가 허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채 떠난 것이다. 정원사의 부모가 외할아버지를 찾아와 아들을 다른 도시로 보내달라고 청했고 할아버지가 그 청을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아무도 그녀에게 말해주지 않았다. 그녀가 사랑하던 정원사는 편지 한 장 남기지 못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준 사람도 없었다. 그녀는 글을 쓰지도 읽지도 못했고, 남자들과 함께 일하러 다니는, 피부가 햇볕에 심하게 그을린 여자였기 때문이다. -p.104-105
그리고 킴 투이의 다른 소설들. 이 아니라 한 권 밖에 없구나.
어제 친구들과 앞으로 나아갈 길에 대해서 그리고 지금 우리가 살아가는 것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와중에 친구 한 명이 내게 '너를 만나면 나는 좀 더 선명해지는 것 같아' 라는 말을 해주었다.
살면서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게 되고 그러다보면 그들중 누군가는 특별한 방식으로 특별한 말들을 내게 던지곤 한다. 더 선명해지는 것 같은 그 느낌은 도대체 어떤건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친구에게 그것은 긍정적인 것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말한 뒤에 '그래서 너를 좋아하는 것 같아' 라고 덧붙였다. 나는 발그레져서 웃었다. 누군가에게 어떤 좋은 느낌을 준다는 것, 방향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되는 친구가 된다는 건 너무 근사하지 않은가. 친구는 글로만 나를 보았을 때도 내가 좋았다고 했지만 만나고 나서는 더 좋다고 했다. 누군가에게 호감을 가졌는데 만나고나서 그 호감이 더 커졌다면 그건 그 사람에게도 또 상대에게도 모두 좋은 일일 것이다. 애정을 표현하면서 사는 일은 분명 인생을 좀 더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얼마전에는 어떤 이로부터 비밀댓글이 달렸다. 내 음식 페이퍼를 좋아한다는 거였다. 역경을 헤치고(응?) 기어코 해내는 글을 읽는게 너무 좋다는 거였다. 아니.. 너무 좋지 않은가. 그러니까 나는 그냥 나로서 존재하고 나로서 글을 쓸 뿐인데 내가 아닌 다른 사람들이 여기 이렇게 있는 나로부터 좋은 점들을 막 끄집어내서 좋아해준다. 인생은 진짜 졸라 살아볼만한 거야...
자, 나는 이제 조카들을 보러 가기 위해 준비하겠다. 빠샤.
아버지는 혹시라도 공산주의자들이나 해적들에게 잡힐 경우 청산가리 알약으로 가족 전부를 마치 잠자는 숲속의 공주처럼 영원히 잠들게 할 계획을 세웠다. 오랫동안 나는 아버지에게 묻고 싶었다. 어째서 우리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못했는지, 어째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가능성을 우리에게서 미리 앗아가려고 했는지. - P18
사람들은 자꾸 잊어버리지만, 남편들과 아들들이 등에 무기를 지고 다니는 동안 여인들이 베트남을 짊어지고 있었다. 우리가 자꾸 그 여인들을 잊는 것은, 그녀들이 원뿔형 모자를 쓴 머리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들은 묵묵히 해가 질 때까지 버텼고, 그런 뒤에는 정신을 잃다시피 잠에 빠졌다. 잠이 밀려오는 동안에도 어디선가 산산조각이 나 있을 아들의 몸을, 혹은 난파선처럼 강 위를 떠다닐 남편의 몸을 떠올렸다. - P63
나도 골목길로 달려 나가 이웃 아이들과 돌차기 놀이를 하고 싶었다. 나는 쇠창살이 달린 창문 앞이나 발코니에 서서 아이들을 바라보며 부러워했다. 우리 집은 2미터 높이의 콘크리트 벽에 둘러싸이고 그 벽 위에는 감히 넘어올 엄두조차 내지 못하도록 유리 조각들까지 박혀 있었다. 창문 앞에서 혹은 발코니에서 바라보노라면, 벽이 우리를 보호하고 있는지 반대로 우리가 삶에 다가갈 수 없도록 가로막고 있는지 헷갈렸다. - P1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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