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결혼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우리 둘 다 구원을 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둘 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서로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P110

















주인공 '이사도라'는 세상이 얼마나 기울어져있는지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 혼자 사는 여성의 삶이란 것은 얼마나 불편한지를 알고, 세상이 남자와 여자를 어떻게 다르게 대하는지도 안다. 세상 그 누구보다 통찰력이 뛰어나고 똑똑한 여성인데, 읽는 내내 그녀가 남자로부터 구원을 찾으려고 해 짜증스러웠다. 남편과 애인 사이에서 누구를 선택할까, 이 남자도 좋지만 저 남자 너무 좋아, 이런 사랑 처음이야 하면서 갈팡질팡하고 그러다 상처를 받고 힘들어하는 걸 보면, 대체 왜이러나 싶어져서 중간에 책을 집어 던지고 싶어지는 마음이 수시로 생겨난다. 아니, 이렇게 다 잘 알면서, 잘 보면서, 그 누구보다 통찰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대체 왜이렇게 남자한테 매달리는것인가.


물론 남자 없는 여자를 사회에서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기 때문에 어떻게든 남자를 붙잡고 있으려고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그 과정에서 이사도라 라는 자신은 자꾸 수도 없이 바닥으로 내팽개쳐진다. 이렇게 똑똑한 여자가 정작 어디에서 벗어나야 하는지를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을 보는게 진짜 짜증스러웠다. 이성애에 대한 환상도 맹목적이라 기차 안에서 낯선 남자를 만나 섹스하고 싶다는 열망도 그녀는 놓지 못한다. 이 남자로부터 버림 받고서는 저 남자가 나를 받아줄까, 하는 고민들은 정말 읽기에 힘들었다. 만약 그녀가 마지막까지도 어떻게든 누군가를 붙잡아 자기 인생을 구원받고자 했다면 나는 이 책에 별 셋을 주며 화를 냈을 것이다. 그러나, 그녀는, 늦게라도 깨닫는다. 결국 자신을 구원해줄 남자는 없다는 것을, 그러니까 남자로부터 구원 받는 다는 것 자체가 망상 이라는 것을, 그런 식으로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다는 것을.



나는 황당하게도 에이드리언이 내 영혼의 짝이라고 믿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그러나 나는 바로 그걸 원했다. 나를 완성시켜줄 남자를 원했다. 파파게노에 어울리는 파파게나. 그것이야말로 내 모든 망상 중 가장 심각한 망상이었다. 다른 사람은 결코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완성할 힘이 없을 때, 사랑을 찾는 건 자살 행위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희생이 곧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P553

















영화 《러브, 비하인드》에서 여자는 전(前)남편과 친구처럼 지낸다. 여전히 같은 집에서도 지낸다. 그러나 전남편에게 새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고, 그제서야 그녀에게 이별은 비로소 현실이 되었다. 이별을 받아들이는 과정은 매우 아팠고, 그래서 그녀는 자기가 생각하는 범위 내에서 모든 망가지는 일들을 한다. 술에 떡이 되고, 울고, 대마초를 피운다.


그런 그녀 앞에, 새로운 남자가 나타난다. 새로운 남자는 그녀에게 자신과 연애를 하자고 다가온다. 옛남자와 헤어지고 새 남자를 만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겠지만, 그녀는 자신의 이별의 고통 그리고 외로움 앞에 일단 자기 자신을 사랑으로 내던지기를 거부한다. 그녀는 새로운 남자에게, 일단 내가 혼자 서는 걸 먼저하고, 이 이별을 극복하고 나서, 건강한 상태에서 너의 제안을 다시 생각하겠다고 얘기한다. 나는 이런 지점들이 매우 좋다. 결국은 혼자 서야 한다는 걸 깨닫는 순간.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전작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를 읽고 후속작 《일곱 번째 파도》를 읽지 않은 사람에게는 스포일러가 되겠지만, 에미 역시 그랬다.

에미는 결혼한 상태에서 레오를 알게 됐고 그 둘은 연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아슬아슬한 감정의 선을 넘나든다. 레오는 에미에게 마음이 있지만, 그러나 그녀가 결혼한 상태이기 때문에 더 가까이 가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이메일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농담을 하고 정을 쌓으면서, 그러면서 각자의 연애를 한다. 레오는 자신이 내내 마음에 에미를 품고 있다는 사실을 뒤늦게 깨닫지만, 그 때까지는 어쨌든 현실의 여성들과 연애를 한다.

레오는 에미가 싱글이었다면 어쩌면 진작에 더 훅 다가왔을지도 모르고 또 그 사실을 에미도 알고 있지만, 그러나 에미가 싱글이 되고 나서, 에미는 레오에게 나 싱글이 됐다고 얼른 알리지 않는다. 에미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갑자기 싱글이 되었으니 이제 나랑 어떻게 해보자, 고 다가서는 것은 자신의 마음에게 그리고 둘 모두에게 단단하지 못한 일이라는 것을 알았던 터다. 나는 이런 지점들이 좋다. 내 처지를 내가 이용하지 않는 것, 그리고 내 처지를 네가 이용하게 하지 않는 것.



자, 다시 이사도라의 얘기로 돌아가서,

이사도라는 자신이 로맨스에 대해, 이성애에 대해, 남자에 대해 망상을 가졌음을 뒤늦게 깨닫는다. 이제 혼자 설 수 있어야만 비로소 자신을 구원할 수 있음도 안다. 그토록 자신이 꿈꿔오던 기차 안에서의 낯선 남자와의 섹스가 자신에게 다가왔을 때, 그녀는 그것이 자신이 생각한것처럼 낭만적인게 아니라는 것을, 무섭고 두려웠고 자신과 둘만있는 상황을 상대가 이용하려 한다는 것을, 그것은 성폭행임을 인지한다. 세상이 보여준 로맨스는 그러니까 현실에서 여성을 당당하게 서게 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남자가 이끄는대로 자신을 내던지는 것을 의미했고 그것은 남자가 원할 때 옷을 벗는 것을 의미했다. 그녀는 그것을 뒤늦게 깨닫는다. 그녀가 깨달아서 얼마나 다행인지!!


책을 읽고 한참이나 이렇게 똑똑한 여자가, 결국 스스로 깨닫긴 했지만, 왜 이렇게 늦게까지 거기에서 빠져나오지 못했을까, 왜이렇게 오래 이남자에서 저남자로 다시 또 다른 남자로 자신을 맡겨가며 살았을까 생각했는데, 그건 이성애라는 것이 커다란 세뇌이기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주 커다랗고 아주 강한 세뇌. 아주 오랫동안, 세상이 창조된 이후로 내내, 세상은 끊임없는 주입을 시켜왔다. 여자는 남자를 만나야 해, 여자는 남자가 보호해주어야 해, 여자는 남자에게 사랑받는게 최고 가치를 이루는 길이야. 거기에서 '스스로' 빠져나온다는 것은, 그러므로 결코 쉽지 않았을 것이다. 이사도라는 기자이고 그러므로 글을 쓰는 직업을 갖고 있었는데, 그런 이사도라에게 언니는, 그따위 글을 쓰면서 인생을 낭비하지 말고 아이를 낳는 기쁨을 너도 느껴보라고 얘기한다. 이사도라가 늦게 깨달을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주변 환경 모두가 이성애에 절여져있었기 때문도 크다. 가부장제와 이성애에 다들 푹 젖어 있는데, 거기에서 나 혼자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단 말인가. 결국 그녀가 늦게라도 스스로 깨달은 것은, 그녀가 자꾸 잃어버리는 와중에도 자기 자신을 찾으려고 중심을 잡았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녀가 읽고 쓰고 보고 생각하고 통찰하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어떤 식으로든 결국, 똑똑한 여자는 자기 자신을 구원하는 방법을 안다. 그것이 뭐가 됐든.



그건그렇고,

이사도라가 사랑에 빠진 얘기를 해볼까.

다시는 에이드리언을 만나지 않겠다고, 이제 다 끝이라고, 잠깐 일탈을 감행하긴 했지만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에이드리언을 보았고 나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느 순간 사랑 노래의 가사와 유치한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한심한 작태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심장이 박자를 놓쳤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나의 태양이었다. 우리의 심장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가 나와 한 방에 있을 때면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로 초조해졌다. 일종의 광기였고 완전한 몰입이었다. 내가 쓰기로 되어 있던 기사도 완전히 잊었다. 그 사람 외에는 다 잊었다.- P226



살면서 누구나 이런 사랑에 빠져보지 않는가. 이제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고 다짐해도 한순간에 무너지는 사랑. 세상 모든 유치한 노래 가사가 내것이 되는 사랑. 한 공간에 있을 때 숨이 턱 막혀버리는 사랑. 누구나 다 그런 경험은 살면서 한 번쯤 해보잖아요? 그러니까 이런 일이 사랑에 빠질 때마다 번번이 일어나는 경우도 있겠지만(그런 사람도 있을 수 있겠지) 나의 경우에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 매우 드물게 일어나는데, 그러니까 '그런 경험이 있다'는 정도로만 말할 수 있는데, 아아, 그런 경험은 결국 이별이 닥쳐오더라도 얼마나 소중한가. 그 후에 많은 것들을 그 날의 기억들과 경험들로 버텨나갈 수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일종의 광기였고 완전한 몰입! 마치 아니 에르노가 그랬던 것처럼!!



작년 9월 이후로 나는 한 남자를 기다리는 일, 그 사람이 전화를 걸어주거나 내 집에 와주기를 바라는 일 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슈퍼마켓에 가고, 영화를 보고, 세탁소에 옷을 맡기러 가고, 책을 읽고, 원고를 손보기도 하면서 전과 다름없이 생활했다. 그러나 오랫동안 몸에 밴 습관이 아니었다면, 이런 일상마저 내게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특히 사람들과 대화를 나눌 때면 내가 완전히 넑을 잃고 사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말이나 문장, 웃음조차도 내 생각이나 의지와는 무관하게 내 입 속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듯했다. 게다가 나는 내가 한 행동, 내가 본 영화, 내가 만난 사람들을 또렷이 기억해낼 수가 없었다. 나의 모든 행동이 자연스럽지가 않았다. 내 의지나 욕망, 그리고 지적 능력이 개입되어 있는 행동(예측하고, 찬성하고 반대하고, 결과를 짐작하는)은 오로지 그 남자와 관련된 것뿐이었다. -《단순한 열정》, 아니 에르노, p.11-12






내가 사랑에 빠진 사람이 좋은 사람이라면 더할나위 없이 좋겠지만, 그러나 내가 사랑에 빠졌다는 것이 상대가 반드시 좋은 사람이라는 것을 의미하지 않으며, 게다가 그 사람이 나를 그만큼의 크기로 사랑한다는 것도 장담할 수 없다. 그러니까 그렇게 숨이 턱 막힐 정도로 내 모든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상대가, 그러나 나랑 섹스할 때 풀죽은 고추를 가지고 있다면.... 계속 사랑할 수 있을까? 이사도라를 유혹하고 강한 마력으로 그녀를 휘어잡고 남편을 떠나라고 종용하는 이 남자, 이사도라가 강하게 사랑에 빠져버린 에이드리언은, 정작 이사도라랑 섹스만 하려고 하면 고추가 말을 안듣는다. 그가 원하는 건 '이사도라'가 아니라, '남의 여자'인 이사도라 였음에, 이제 자신에게 와버렸다고 생각하고 나니 딱히 섹스에의 능력이 발휘되지 않는 것.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모욕은 드러누운 페니스. 이성간의 전쟁의 최종 병기는 축 늘어진 페니스. 적진의 깃발은 불완전한 발기. 종말의 상징은 자폭하는 핵탄두 페니스. 그것이야말로 결코 바로잡을 수 없는 불평등이다. 남자가 페니스라고 불리는 근사하고 매력적인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여자가 전천후 보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 비바람도 진눈깨비도 밤의 어둠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보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을 증오하는 것도 당연하다. 남자들이 여자의 불완전함에 관한 신화를 지어내는 것도 당연하다. -p.174



섹스는 인생에 있어서, 아니지 사랑이나 연애에 있어서 필수적일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다. 어떤 이들에게는 없어서는 안될 것일 수도 있고 없어도 크게 상관없을 수도 있다. 그렇게 숨이 턱 막히게 나를 긴장시키는 남성미 뿜뿜 뿜어대는데, 정작 시들어버리는 거시기라면, 내 사랑은 그 다음에도 계속, 여전히, 불에 타고 들끓어 오르고 초조하고 긴장할 수 있을까? 그 긴장감, 숨이 막히는 감정이라는 것은 성적 매력에서 온 게 아닌가? 그런데 성적으로 어떻게 나랑 뭔가를 하지를 못해? 그렇다해도 나는 그를 사랑할 수 있을까, 계속, 지금 그랬던 것처럼? 한두번이야 그럴 수도 있지, 너도 긴장했나봐 할 수 있지만, 그런데 계속 그렇다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 이즈 포에버가 될 수 있을까?


이 역시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을 것이다. 막 만나서 열정이 들끓어올라 뜨겁게 사랑해 섹스섹스 좋아좋아 너도 좋고 섹스도 좋은데 좋은 너랑 섹스하니까 미치게좋다 할수도 있겠지만, 내가 이나이까지 살아보니까... 꼰대의 입장에서 말을 해보자면, 그것은 어느 순간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은 순간이 찾아오고야 만다...는 것이다. 뭐, 이것도 사람 나름이겠지만, 어떤 사람들은 구십살이 될때까지 섹스섹스 고추 파워업 울트라 만만세 섹스섹스 섹스가 최고야 만만세 할 수도 있겠지만, 그런 사람이 없지 않을 것이고, 의외로 또 많을 수도 있겠지만, 뭐,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는 것.. 이다. 섹스, 하게 되면 좋지만 안해도 그렇게 인생에 써운하지 않은 그런 시점이 기어코 찾아오고야 말아버려.... 할 수 있을 때 부지런히 해라, 젊은이들이여... 나중에는 욕망 자체가 사그라드는 날이 온단다.... 샤라라랑~ 슬프지만(어쩌면 안슬프지만) 그리 된단다. 샤라라랑~ 내게도 불붙었다가 상대가 사그라드는 바람에 실망했던 시간들이 분명히 존재하고(이 사랑이.. 지속될까? 나 바람피는게 낫지 않을까?), 섹스가 너무 좋아서 그냥 결혼할까?(정신적 유대는 다른 사람과 나누면 되지 않을까?) 생각했던 시간들이 존재한다. 그 모두를 함께 만족시키는 상대는 세상에 존재할 수 없을 거라고 나는 생각했었다. 다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인류는 성별을 막론하고 친구로 지내야 합니다... 위 아 더 월드.. 피쓰! 우정을 나누자 얘들아!!



프렌쉽 이즈 뽀에버!! (아님)






여자가 혼자인 것은 언제나 선택이 아닌 포기의 결과로 간주된다. 그래서 최하층민 대접을 받는다. 여자가 품위 있게 혼자 살 수 있는 방법이란 도무지 없다. 물론 남자만큼은 아니어도 경제력이 있을 수 있지만 정서적인 측면에서는 아무도 그런 여자를 평화롭게 살게 내버려두지 않는다. 친구들, 가족, 직장 동료들은 그녀가 남편이 없다는 사실, 아이가 없다는 사실, 한마디로 이기적이라는 사실을 결코 잊을 수 없게 만든다. - P31

"제 생각엔요, 콜너 박사님. 박사님은 정신과 용어로 ‘소인 콤플렉스‘라는 걸 갖고 있어요. 전지전능한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지적받으면 갑자기 짜증을 내면서 욕을 하기 시작하잖아요. 물론 162센티미터의 키로 산다는 게 쉽진 않겠죠. 하지만 당신도 나한테 이렇게 분석당하면 그런 사실조차 한결 견디기 쉬워져야 하는 거 아닌가요?"
"막대로 지르거나 돌을 던져서 뼈가 부러지면 모를까, 난 말에는 상처받지 않아요."
콜너가 화를 내며 말했다. - P43

"진심이야. 넌 내 동생이고 난 네가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고 생각해. 넌 글쓰기를 그만두고 아기를 가져야 돼. 아기를 갖는 건 글쓰기보다 훨씬 더 보람있고……."
"내가 가장 두려워하는 게 바로 그거야."
"그게 무슨 소리야?"
"언니, 애를 아홉이나 낳은 언니한텐 이상하게 들릴지 몰라도, 난 정말 애들을 갖고 싶지 않아. 그러니까, 언니의 아이들이나 클로이, 랄라의 아이들을 사랑하지만 지금은 내 일에 만족하고 있고 다른 보람은 원하지 않는다고." - P92

아기를 갖는 것 자체가 부당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남자를 위해 아기를 갖는 건 부당하다. 그들의 이름을 가질 아기를 갖는 것,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당신이 늘 기쁘게 해주어야 할 남자를 위해 아기를 갖는 것,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고통을 감수하면서 봉사해야 하는 남자를 위해 날 구속할 아기를 갖는 건 부당하다. 사랑이야말로 가장 강력한 족쇄다. 가장 아프고 가장 오래가는 족쇄다. 그 속쇄에 나는 영원히 갇힐 것이다. 나 자신의 감정과 내 아기의 인질이 될 것이다. - P99

우리의 결혼은 처음부터 이상했다. 우리 둘 다 구원을 원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우리 둘 다 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서로 붙잡으려 하고 있었다. - P110

남자들의 세상에서 결혼 안 한 여자로 산다는 건 너무도 성가신 일이었고 그 어떤 상황도 그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결혼은 분명 독신보다 나았다. 그러나 훨씬 나은 것은 아니었다. 더럽게 똑똑한 놈들. 남자들이 독신 여성의 삶을 얼마나 견디기 힘들게 만들어놓았는지 나쁜 결혼도 독신보다는 차라리 나았다.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저임금 노동을 하면서 매력 없는 남자를 물리쳐가면서 틈틈이 매력 있는 남자를 찾아다니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없었다. 물론 독신 남자들도 외롭겠지만 적어도 신변의 위협을 느끼진 않는다. - P151

"이봐요. 난 나 자신을 알기 때문에 당신을 아는 거예요." - P167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모욕은 드러누운 페니스. 이성간의 전쟁의 최종 병기는 축 늘어진 페니스. 적진의 깃발은 불완전한 발기. 종말의 상징은 자폭하는 핵탄두 페니스. 그것이야말로 결코 바로잡을 수 없는 불평등이다. 남자가 페니스라고 불리는 근사하고 매력적인 물건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아니라 여자가 전천후 보지를 갖고 있다는 사실. 비바람도 진눈깨비도 밤의 어둠도 그것을 무너뜨릴 수는 없다. 그것은 언제나 그 자리에 있고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생각해보면 보지는 얼마나 두려운 존재인가. 그러고 보면 남자들이 여자들을 증오하는 것도 당연하다. 남자들이 여자의 불완전함에 관한 신화를 지어내는 것도 당연하다. - P174

다시는 에이드리언을 만나지 않겠다고, 이제 다 끝이라고, 잠깐 일탈을 감행하긴 했지만 이제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에이드리언을 보았고 나는 한순간에 무너졌다. 어느 순간 사랑 노래의 가사와 유치한 할리우드 영화에 나오는 한심한 작태를 그대로 실천하고 있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았다. 심장이 박자를 놓쳤다. 그가 다가올 때마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그는 나의 태양이었다. 우리의 심장이 서로의 손을 잡고 있었다. 그가 나와 한 방에 있을 때면 가만히 앉아 있기가 힘들 정도로 초조해졌다. 일종의 광기였고 완전한 몰입이었다. 내가 쓰기로 되어 있던 기사도 완전히 잊었다. 그 사람 외에는 다 잊었다. - P226

왜 나는 행복한 쾌락주의자가 되서는 안 되는가? 그게 뭐가 잘못인가? 역사상 삶으로부터 (그리고 남자들로부터)가장 많은 걸 얻어낸 여자들은 결국 가장 많은 걸 요구한 여자들이었다. 고귀하고 매력 있는 여자처럼 행동하면 남자들도 고귀하고 매력 있는 여자로 대접하고, 발닦개가 되기를 거부하면 그 누구도 밟지 않는다. 비굴한 여자는 짓밟히고 여왕처럼 구는 여자는 여왕대접을 받는다. - P240

정신분석이니 자기분석이니 그들이 했던 얘기들은 순 헛소리였다. 그들의 삶에서 진정으로 의미 있는 사건에 직면했을 때 그들은 그 사실을 얘기조차 할 수 없었다. 타인의 삶은 얼마든지 분석할 수 있으리라. 누군가의 동성애적 욕망, 누군가의 오이디푸스적 삼각관계, 누군가의 간통은 분석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정작 그들 자신의 경험 앞에선 모두 할 말을 잃었다. - P276

두 사람의 결합은 영혼의 틈을 서로 메워주고 그로 인해 우리는 좀 더 강해질 수 있었다. 그 결합이 반드시 섹스와 관계가 있는 건 아니다. 오랫동안 함께 살았던 부부, 혹은 거의 섹스를 하지 않는 나이든 동성애자들에게서도 그런 결합을 볼 수 있고 때로는 결혼한 부부들에게서도 나타난다. 마치 아치형 석조 버팀목처럼 서로를 떠받치고 있는 두 사람. 서로에게 의지하고 서로의 응석을 받아주고 서로를 바깥세상으로부터 보호해주는 두 사람. 단지 그런 결합을 누리는 것만으로도 결혼은 온갖 불이익을 감수할 만큼 가치 있는 일이다. 결혼은 이 무정한 세상에서 단 한 명의 진정한 친구를 갖는 것이다. - P303

그는 지휘자 데뷔를 꿈꾸었다. 그러나 꿈꾸는 것 말고 딱히 하는 일은 없었다. - P403

모든 애정 문제는 결국 불균형 배분의 문제였다, 젠장. 사랑의 감정은 넘쳐나지만 항상 엉뚱한 장소, 엉뚱한 사람에게로 향한다. 사랑받는 사람은 더 사랑받고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은 더 사랑받지 못한다. - P419

요동치는 비행기 안에서는 누구도 무신론자일 수 없었다. - P431

마치 나의 모든 문제의 해결사처럼 베넷 윙이 내 삶에 흘러들어왔다. 그는 스핑크스처럼 말수가 적은데다 다정했다. 그는 구원자이자 정신과의사였다. 나는 유럽에서 침대에 쓰러졌던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결혼에 쓰러졌다. 푹신한 침대 같았지만 그 밑에 못들이 숨겨져 있었다. - P460

"당신은 왜 페미니스트가 되었나요?"
최근에 여성운동에 열심인 남자에게 물은 적이 있다.
"요즘엔 그게 섹스하기 가장 좋은 방법이거든요."
그의 대답이었다. - P552

나는 황당하게도 에이드리언이 내 영혼의 짝이라고 믿었다.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그러나 나는 바로 그걸 원했다. 나를 완성시켜줄 남자를 원했다. 파파게노에 어울리는 파파게나. 그것이야말로 내 모든 망상 중 가장 심각한 망상이었다. 다른 사람은 결코 나를 완성하지 못한다. 우리 자신이 우리를 완성하는 것이다. 우리가 스스로 완성할 힘이 없을 때, 사랑을 찾는 건 자살 행위이다. 그럴 때 우리는 자기희생이 곧 사랑이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 P553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지나갈 것이다. 불행히도 지금껏 항상 그래왔다. 처음에는 건드리지도 못할 것 같은 마음의 멍들이 결국에는 무지갯빛 자국이 되고 고통이 멎는다. 우리는 그렇게 잊는다. 심지어는 다시 사랑을 만날 때까지 우리에게 심장이 있었다는 사실조차 잊고 살기도 한다. 그러다가 또다시 그런 일을 겪으면 어떻게 그 기억을 잊을 수 있었는지 놀라워한다. 그리고 생각한다. "이번이 더 강렬해. 이번 사랑이 더 좋아."
예전의 사랑을 완벽하게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 P5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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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21-03-16 09: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섹스섹스 고추 파워업 울트라 만만세 섹스섹스˝ 라는 문장을 이번 생에 읽게 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워업 뭐야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1-03-16 10:11   좋아요 1 | URL
파워업은 관계유지에 매우 중요한 것입니다.
그럼 이만.

감은빛 2021-03-16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의 이름을 지우고 읽어도 단번에 누가 쓴 글인지 알아볼 수 있는 글이네요. ㅎㅎ

[새벽 세 시, 바람이 부나요?] 의 속편을 읽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어요. 그런데 다락방님의 쓰신 내용만 읽어도 공감이 가고, 납득할만한 전개라고 여겨져요.

저도 다락방님의 좋은 친구가 될 수 있다면 좋겠네요.

다락방 2021-03-17 09:03   좋아요 1 | URL
감은빛님, 새벽 세시 후속편에 대해 여기서 스포일러 당하셨네요. 죄송합니다 ㅎㅎ

감은빛님은 이미 저의 너무나 좋은 친구이십니다. 저는 감은빛님이 언제나 제 말에 귀 기울여주시고 제 편이 되어주신다는 걸 알고 있습니다. 좋은 친구십니다.
:)

붕붕툐툐 2021-03-16 2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 너무 저같아서 깜놀했네요! 저에겐 필독서입니다. 우정이여 영원하라!!ㅎㅎㅎㅎ

다락방 2021-03-17 09:03   좋아요 1 | URL
섹스 따위 다 꺼져버려! 우정이여 영원하라. 우정 뽀에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