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중은 일하느라 바쁘고 주말은 나름의 스케쥴로 바쁘다. 이번 주말에는 여동생네에 다녀왔다. 여동생은 큰 집으로 이사를 했고 그래서 식구들 모두가 염원하던 '각자의 방'을 갖추게 되었다. 여동생이 자기만의 방을 갖게된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책상을 사는 일이었다. 식구들 모두의 책상이 있지만 그동안 여동생의 책상은 따로 갖추지 못하던 터였다. 이제 넓은 집에서 식탁은 식탁의 일을 할것이고 여동생방의 책상은 여동생 방에서 책상의 역할을 할것이다. 나는 여동생 집에 도착해서는 네 책상 볼래, 하고 여동생 방으로 갔다. 이전에는 언제나 안방이던 곳, 모두의 방이던 곳, 그리고 모두가 거쳐간 곳. 그러나 이제는 여동생이 집에서 제일 큰 방을 쓰면서 책상과 책장을 갖춰두었고, 거기에는 여동생이 보아야 할 그리고 보고싶은 책들이 꽂혀 있다. 아직 막내는 엄마방을 엄마와 제방으로 생각하고 잠 역시 엄마랑 함께 자지만, 여동생은 책상을 사두었다.
늘 벼르던 차에 화장대를 정리했다. 내 방의 화장대는 내가 고른 것이 아니었고 산 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마음에 들었던 적이 없다. 여닫이 수납장의 문은 언제나 세게 닫히고 서랍을 열고 닫을때면 손잡이가 느슨해지기 일쑤이며, 무엇보다 화장대가 좁다. 화장품을 늘어두고 의자에 앉아 화장을 하는 것이 크게 불편하진 않았지만 언제나 좀 더 큰 화장대를 갖고 싶다고 생각했던 터다. 그러나,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나는 화장하는 화장품의 종류를 줄이고 줄여서 이제는 색조화장을 일절 하지 않으며 눈썹도 그리고 다니지 않는다. 출근할 때면 피부 화장에 볼터치에 눈썹도 그리고 립스틱도 발랐었는데, 이 과정들의 절반 이상이 생략되었다. 며칠전에는 좁은 화장대를 차지한 화장품들을 보면서 이것들 중의 절반 이상을 쓰지 않는데 이렇게 차지하게 둘 게 무어람? 생각하게 되었고, 그래서 어제는 대대적 정리에 들어갔다. 버릴 건 버리고 치울 건 치웠다. 여전히 립스틱 몇 개와 파우더는 버리지 못했다. 어쩌면, 어쩌면 언젠가는 한번쯤 쓰게 되지 않을까, 하고. 그렇지만 그 때쯤이면 유통기한이 훨씬 지나가 있어 아마 새로 사는게 낫겠지. 일단 그런 마음으로 화장대 위에는 정말 사용하는 것만 올려두었다. 스킨, 에센스, 크림, 썬크림. 이게 전부였다. 그러자 화장대가 넓어졌고, 나는 이렇게 정리한 뒤에 놓아둘 독서대를 사둔 터라, 그 포장을 뜯고 독서대를 올려두었다. 화장대는 이제 내 침실의 책상이 되었다. 충분히 넓지 않지만, 그러나 책상의 기능을 충실히 한다.
지금 내가 부모님과 함께 사는 집은 방이 세 개다. 남동생이 결혼해 집을 나간 후로 방 두 개를 내가 쓰고 있다. 그러니까 남동생이 쓰던 방은 나의 서재가 되어서 거기에 내 책들이 온통 가있고, 또 책상! 넓은 책상, 큰 책상이 있다. 오래전부터 우리집 식탁으로 쓰던 대리석이 무척 마음에 들어서 이거 버리게 되면 내가 책상으로 쓸거야, 하던 거였다. 엄마는 식탁을 새로 사고 싶어했고, 나는 집에 식탁을 새로 사두고는 기존의 대리석 식탁을 내 서재방으로 들여 책상으로 만들어두었다. 내가 원하던 것이었다. 그렇지만, 미래는 예측불허, 그리하여 생은 의미를 갖는 것.
서재에 내가 사들이는 책이 쌓이고 쌓여서 책장을 넘어서기 시작했고, 결국 자리를 찾지 못하는 수많은 책들은 책상 위에 쌓여가기 시작했고.. 책상은 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나의 노동이 필요해졌다. 맥북을 열고 책을 읽고 글을 쓰기 위해서는 그전에 반드시 쌓여 있는 책들을 한쪽으로 치우는게 필수다. 게다가 겨울의 서재는 춥다. 발이 시려워. 그래도 서재에서 책 읽는게 좋아 읽다가는 멈추고 나와 양말을 신고 가디건을 걸쳐야 했다. 그런 참에 따뜻한 내 방에 책상을 사두고 싶어졌고, 그러려면 화장대를 버려야 하는데, 버리는데 돈들지 책상 사는데 돈들지... 하다가 그냥 화장대를 책상으로 바꿔버린 거다. 그렇게, 내게 책상은 두개가 되었다.
화장대를 깔끔하게 치워두고 책상으로 바꿔버린 뒤, 나는 이번달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를 펼쳤다. 그간 너무 바빠 읽기 시도를 못하고 있다가, 자 이제 각잡고 읽어보자, 독서대도 샀다, 내 방은 따뜻하다! 하고 읽기 시작했는데, 서문부터 읽기 싫어졌고 아아, 그래도 읽어야 해, 읽다가, 본격적인 본문에 들어가서 1장이 너무 재미있는 게 아닌가!
1장은 '도로시 앨리슨'의 <계급의 문제>이다.
도로시 앨리슨의 빈곤한 과거와 성학대를 당했던 유년시절 그리고 레즈비언으로 살아가는 이야기들을 만나게 된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이 그렇게 온종일 열심히 일하는데 왜 우리는 항상 돈이 궁한지를. 그렇지만 공장이나 제철소에서 열심히 일하는 엄마의 형제자매들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p.79
익명의 세계가 나를 감싸주었고, 사람들은 마지못해 인정하면서도 과연 내가 어떤 사람이 될지 궁금해했다. 그들이 이미 내 삶은 빈곤과 무기력으로 결정났다고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비로소 나는 나 자신을 위해 다른 미래를 상상할 수 있었다. -p.82
나는 가난하고 혐오스러운 아이로, 신체적이고 정서적이고 성적인 폭력의 희생자로 자라났다. 고통을 겪는다고 사람이 고귀해지지 않음을 안다. 고통은 사람을 파괴한다. -p.102
얼마전에 본 영화 [내가 사랑했던 모든 남자들에게 3] 에서는 '좀 더 견문을 넓히라'고 조언하는 언니를 둔 주인공이 나온다. 주인공 라라 진의 아버지는 산부인과 의사이고, 라라 진은 좋은 집에 산다. 라라 진은 견문을 넓히라고 조언해주는 어른(언니)이 있다. 게다가 진학하게 될 경우 학비를 내는 것도 그리 어렵지 않은 일이다. 그런 라라 진은 빈곤한 가정에서 자란 사람보다 더 많은 것을 보고 배울 확률이 크다. 당연한 얘기다. 나는 그것을 문화자본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뉴욕에 총 세 번 갔었는데 그 중 한번은 매우 부유한 젊은 친구와 함께였다. 그 친구는 나이가 나보다 훨씬 어린데도 불구하고 나보다 아는 것이 더 많았고 나보다 더 많은 것을 볼 줄 알았다. 그 친구는 공부든 유학이든 뭐든 하고자 했을 때 집으로부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어렵지 않게 해주었던 것. 그 친구와 나는 인생의 시작점부터가 달랐다. 그 다른 시작점에서 한 명이 다른 한 쪽보다 더 유리하다고 해서 더 잘되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그러나 더 잘 될, 그러니까 더 좋은 사람을 만나고 더 좋은 환경에 속할 수 있을 확률은 훨씬 높음은 자명한 일이다.
요즘의 뉴스를 보면 누구나 다 알겠지만, 돈이 돈을 번다. 이미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게 된다.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던 사람들은 시세차익으로 몇 억씩 챙길 수 있지만, 그러나 부동산을 갖고 있지 않은 사람들은 기존에 가진 돈으로 다시 집을 구하기가 어려워졌다. 더 외곽으로, 더 아래로(지하) 더 위로(옥탑) 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들은 매일 일찍 일어나 늦게까지 일하고 성실하게 살아도, 살겠다고 발버둥을 쳐도, 이미 자산을 충분히 가진 사람보다 아니, 그 사람들 만큼 풍족하게 살아갈 수가 없다. 한달에 이백만원씩 벌어서 아끼고 아끼고 산다고 해도 내년에 전세금 오천만원 올려주세요, 라고 한다면 그걸 대체 어떻게 감당할 수 있단 말인가. 아파트는 더 층수가 높게 올라가는데도 여전히 살아갈 곳이 없어 끙끙대는 사람들이 많다.
어린 도로시 앨리슨이 보기에 이건 너무 이상하다. 자신의 부모들은 정말정말 열심히 일하는데, 그런데 여전히 빈곤하고, 그 빈곤으로 혐오당하는 사람이 되고, 그 빈곤으로 앞으로의 가능성까지 멈춰버린 존재가 된다.'린다 티라도' 역시 자신의 책, 《핸드 투 마우스》에서 빈곤하게 태어난 사람은 계속해서 빈곤의 늪에 빠져 허우적댈 수 밖에 없음을 얘기한 바 있다.
바닥에서 사는 대부분의 사람은 빈곤 상태와 빈곤을 아주 살짝 벗어난 상태를 주기적으로 오간다. 때때로는 괜찮지만 때때로는 물 밑에
잠기는 것이다. 연도에 따라, 직장에 따라, 또는 건강에 따라 변한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계층 하락은 모래
늪과 같아서 한 번 빠지면 완전히 휩쓸릴 때까지 당신의 선택권을 계속 제한한다는 것이다.- 린다 티라도, 《핸드 투 마우스》, P27
도로시 앨리슨의 친척들은 계속 가난하고, 진학이 막히고, 감옥을 왔다갔다할 때, 도로시 앨리슨은 가족들 중 유일하게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가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위치와 처지에 대해서 이런 것의 불공평함과 부조리함에 대해서 글을 쓴다.
나는 동성애자를 혐오하는 세상에 태어난 동성애자였고, 가난뱅이를 경멸하는 세상에 가난뱅이로 태어났다. 내가 산 세상을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그런 세상이 있음을 믿게 만드는 것도 내가 소설을 쓰는 이유 중 하나다. -p.73
나는 도로시 앨리슨이 글을 쓰고자 하는 이유와 꼭 같은 이유로 글을 읽는다. 나는 내가 살아온 환경밖에 볼 수가 없다. 지금도 그렇지만 과거에는 더더욱 우물안 개구리였다. 나에게는 내가 볼 수 있는 미래, 내가 상상할 수 있는 미래가 제한적이었다. 나는 도로시 앨리슨처럼 빈곤하게 자란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부유하게 자란 것도 아니었으며, 집 안 어른들이 견문을 넓히라 조언해준 적도 없다. 나 역시도 친척들 중에 드물게 대학에 진학한 케이스이고, 그것은 아빠의 자랑이었다. 나는 내 견문을 내 스스로 넓혀야 했고, 내가 모르는 것을 내 스스로 알아서 공부해야 했다. 글을 읽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된다. 글을 읽음으로써 비로소 나는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다른 환경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다른 사람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고 우정을 나누고 사랑을 나누는 것도 좀 더 넓은 다른 세상을 만나는 방법이지만, 여행도 그렇고 책을 읽는 것, 영화를 보는 것도 역시 그런 방법이다. 어딘가에서 누군가가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런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나는 여기에서 '내가 경험해보지 못한 세상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글은, 그래서 좋다.
글은, 그래서 좋다.
글은 그래서 좋다.
글은, 쓰는 사람에게는 정리와 해소와 위안과 기쁨과 정보가 되기도 하지만-내가 글을 쓰는 이유다- 읽는 사람에게도 역시 같은 역할을 한다-내가 글을 읽는 이유다-.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이 읽고 또 써야 한다고 나는 믿는다. 도로시 앨리슨의 모든 부분에 내가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포르노를 언급한 부분), 그러나 도로시 앨리슨이 그런 생각을 갖고 있다고 써준 것을 읽는 게 매우 좋았다. 극도의 빈곤을 이런식으로 마주하는 것은 윤리적이지 못한걸까, 이것이야말로 멀찌감치 떨어져서 보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지만, 그러나 글로 읽지 않는다면 여전히 더 많이 모르는 채로 살아갈 것이다.
읽고, 쓰자. 부지런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