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크맨
애나 번스 지음, 홍한별 옮김 / 창비 / 2019년 10월
평점 :
품절


여자는 열여덟살이다. 길을 걸으며 책을 읽는 것이 그녀가 좋아하는 일인데 나중에야 그 일이 다른 사람들에게 이상하게 보여진다는 걸 알게 된다. 여느날처럼 걸으면서 책을 읽다가 '밀크맨'이 옆에 차를 대며 태워주겠다고 한다. 그녀는 거절했지만, 그 뒤로도 그는 예고도 없이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조깅을 하던 중이기도 했고 프랑스어 수업을 듣던 중이기도 했다. 그는 그렇게 갑자기 나타나서 말을 걸고 또 갑자기 사라진다. 그런 그녀는 신경줄이 팽팽해진다. 외출을 하면서도 혹시 여기서 나타나지 않을까 저기서 나타나지 않을까 두리번거리고 겁을 먹게 되고, 그가 자신의 어쩌면-남자친구(그러니까 확실한 남자친구는 아니고 공식적인 관계도 아니지만 비슷한 관계)에게 자동차 폭발 사고가 일어난다고 암시하기까지 한 마당에 그녀는 두렵다. 어쩌면-남자친구에게 운전하지 말라고 하지만 어쩌면-남자친구에게 그 말은 생뚱맞다. 그녀와 밀크맨이 함께 있는 그 잠깐 동안의 모습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그것은 부풀려져서 전해진다. 그녀는 그가 타라고 한 차에 탄 적도 없는데 그를 따로 만난 적도 한 번도 없는데 오히려 예상치 못한 곳에서 기습적으로 그가 찾아올까봐 두렵기까지한데, 사람들은 그녀에게 유부남이면서 나이 차이도 많이 나고 반정부 영웅인 그의 정부라고 소문을 낸다. 그녀의 엄마조차도 그가 영웅인 것이 멋져보이겠지만 그러나 그의 세컨드가 되면 안된다고 그녀에게 지청구를 늘어놓는다. 그녀는 자신이 어떤 말을 해도 사람들의 귀에 닿지 않을 것임을 알지만 그래도 엄마가 하도 걱정하는 통에 엄마 그게 아니야, 나는 그의 애인이 아니야, 나는 그를 멋지게 생각하지도 않아, 그가 내가 같이 있는 모습이 왜 목격되었느냐면, 그가 갑자기 나를 그 자신이 원할 때에 찾아오기 때문이야, 우리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그런 관계가 아니라고, 말을 하고 엄마가 자신의 편이 되어주길 바랐지만, 그녀의 말을 듣고 엄마는 그녀에게 '거짓말'이라고 화를 낸다. 엄마는 믿어야 하는 딸의 말을 믿는 대신 자신이 믿는 바를 확고히 한다. 그것이 설령 사실이 아닐지라도.



여자는 이 일에 대해 사람들에게 말할 수 없음을 안다. 어쩌면-남자친구에게도 또한 가족에게도. 모든것이 그녀의 잘못으로 여겨지리라는 것이 자명한 사실이기 때문에. 누가 너더러 길을 걸으면서 책을 읽으랬니, 그거 이상하다고 예전부터 말했잖아. 사람들은 네가 밀크맨과 관계있는 것보다 걸으면서 책을 읽는 걸 더 이상하게 생각해. 누가 너더러 프랑스어 공부하러 다니라고 했니, 조깅은 왜 혼자 나간거니, 거기를 왜 혼자 걸었니 등등. 그녀는 그로 인해 두렵고 행동에 제약을 받고 이 모든 것 때문에 신경줄이 팽팽해져 어쩌면-남자친구와 다툼도 잦아진다. 그렇지만 만약 이 일에 대해 누군가에게 말한다면 그녀의 경험부터 두려움까지 이해받지 못할 뿐더러 축소될 것이 분명하다.



왜 그렇게 두려워하는데? 그가 너를 때렸니? 라고 묻는다면 '아니' 라고 대답해야 하니까. 그러면 그가 너를 만졌니? 라고 물어보면 또 '그건 아니야' 라고 말해야 하니까. 그렇다면 대체 왜그래. 뭐가 두려워, 뭐가 겁나, 왜 피해 의식에 사로잡혀있는거야, 네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니야? 그가 너를 만진 것도 아니라며, 라는 말들 앞에서 그녀는 뭐라 답할 수 있을것인가. 분명 나는 그를 피하고 싶고 그를 만날까봐 두렵고 집 밖으로 나서는 것도 걱정되고 집 안에서조차 혹시 그가 나를 보지 않을까 미칠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도대체 어떤 일이 일어났다고 그러는거야, 할테니까.



서서히 피해자를 잠식해가는 가해자의 모습을 보는 건 피해자 뿐이다. 오히려 가해자는 세상에 알려지길 정부에 반하는 영웅이다. 만약 이 상태 그대로 피해자가 '그 때문에 두렵다'고 세상에 밝혔다면 '도대체 피해가 뭐기에 그러느냐, 그런 사소한 일로 한 남자의 인생을 망치지 말라'는 말을 들을 것이다. 그것이 성폭행이냐, 네가 당한건 희롱 축에도 못끼지 않냐, 고 피해자도 아닌 제삼자들이 피해자가 당한 일의 경중을 재려들 것이다. 분명 세상이 손가락질하는 것은 가해자가 아닌 피해자가 될것이다. 그것이 네 피해의 전부이냐고, 그런것을 성폭력으로 퉁칠 수 있냐고, 그것은 아니지 않냐고, 피해자가 아닌 제삼자들이 입을 모을 것이다. 그 남자가 세상을 위해 한 일이 있는데, 너같은 여자와 단지 말을 섞었을 뿐인것 가지고 성범죄자가 되어야겠냐고, 그것이 정말 너와, 네 가족과, 이 지역과, 이 나라를 위한 일이냐고 손가락질 할것이다. 가해자가 그녀를 만진 것도 아니니까, 때린 것도 아니니까, 성기를 삽입한 것도 아니니까, 그러니까 너는 피해를 당한건 아닌데 피해를 당했다고 호소하고 있으니까, 그렇게 너는 한 남자의 인생을 바닥으로 내팽개치고 있다고, 그것이 도대체 누구를 위한거냐는 비난의 말들이 피해자에게 쏟아질테니까, 그녀는 침묵한다. 침묵은 그녀를 약하게 만들고 침묵은 어쩔 수 없이 그의 차에 타게 만든다. 아무런 약속 없이 불쑥 나타났던 가해자는 이제 그녀와 약속하고 만나는 사이로 성큼 자리할 수 있게 된다. 어떤 피해는 대의를 위해 눈감아야 하는가? 한 여성을 바닥으로 내팽개치면서 좇아도 되는 대의라는게 있는건가?


좆같아 진짜...




'애나 번스'의 밀크맨은 한 피해자가 어떻게 가해자에게 휩쓸려가는지를 잘 보여준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힌다는 건 실제 피해가 존재했다는 걸 의미한다. 피해자는 고립되어지고 그녀는 서서히 기운이 딸리고 있다. 그것이 이 이야기를 중심에서 잡아나가면서 그러나 소설 밀크맨은 한 늙은 남자가 한 어린 여자에게 접근해 자기 뜻대로 하려는 것만 보여주는 이야기는 아니다. 문제있는 여자들이라 불리는 페미니스트들과 사람들에 대한 감시와 부풀려지는 소문들과 이루지 못한 사랑과 드러내면 안되는 사랑까지 다 담겨있다. 문체도 특이하고 내용은 탄탄하다. 때로 너무 많은 이야기를 담으려는 작품들을 읽노라면 작가가 감당하지 못할만큼 욕심을 부렸네, 라는 생각을 하게 되는데, 애나 번스에 대해서라면 전혀 그렇지 않다. 이 이야기들을 이렇게 자연스레 녹여낼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다. 나는 밀크맨을 한 번 더 읽을 것이다.



소설의 처음부터 애나 번스는 밀크맨을 죽이고 시작한다. 그 점이 고마웠다. 내가 죽이고 싶었는데 이미 죽여줘서 고마웠다. 때로 작가들은 이런 식으로 해야 할 일을 한다.



"너희 둘은 미쳤어." 언니가 말했다. "꽉 막힌 통제광들. 항문기에서 벗어나지 못한 강박적 미치광이들- 아니 대체 어떤 미친 새끼가 달리기를 하지?" - P30

어쩌면 우리 관계가 ‘어쩌면‘ 단계이기 때문에 참을 수 있는 것일지도 몰랐다. 내가 공식적으로 그애와 같이 사는 건 아니고 우리가 공식 커플은 아니니까. 우리가 정식 관계이고 공식 커플로 같이 산다면 내가 가장 먼저 하게 될 일은 떠나는 것일 수도 있었다. - P63

이데올로기적 대의에 헌신한 사람들이 항상 대의를 위한 행동만 하지는 않는다는 건 나도 알았다. 개인적 편향, 이상한 변칙, 주관적 해석을 앞세우기도 했다. 미친 사람들도 있었다. - P241

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불신이 너무 강해서 나를 도와주고 지지하고 위로해줄 사람이 있었을 텐데도 친구를 만들고 지원을 끌어낼 수 있었을 텐데도 아무것도 보지 못했다. 사람들을 못 믿었고 나 자신을 못 믿었고 나한테 도움을 구할 자격이 있다는 생각을 못했기 때문에 기회를 놓쳤다. 하지만 그때에는 정신을 붙잡고 추스르는 게 내 최대 목표였고 그곳에서는 다른 사람들도 제각기 정신을 붙잡고 추스르려 애쓰고 있었으니, 어쩌면 나로서는 도움이나 위안이라는 개념을 알아차리거나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했을 것이다. 어떤 사람들이 나에게 접근하기는 했고 그중 몇몇 사람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고 정말 좋은 뜻으로 그랬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나는 계속 움츠러들었는데, 두려움과 고집 때문만은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무엇이라도 사람들에게 말할 만한 일이 있는지 아닌지조차 확신을 못하고 있었다. - P256

그런 식으로 일이 이루어졌다. 밀크맨이 아주 조금씩 접근하고 잠식하고 육식동물처럼 슬금슬금 다가왔기 때문에 뚜렷하게 집어 말하기가 힘들었다. 여기에서 조금, 저기에서 조금, 어쩌면, 어쩌면 아닌지도, 아마도, 모르겠다. 계속적인 암시, 상징, 재현, 은유가 있었다. 내가 받아들인 의미가 그가 의도한 것일 수도 있지만 아니었을 수도 있었다. 밀크맨이 한 말을 액면 그대로 놓고 보거나 각 사건을 따로 떼어 묘사한다고 해보자. 아무리 애써 말로 전달해봤자 별것 아닌 일이 될 것 같았다. - P257

"페기가 그 사람의 가슴을 찢어놓고 하느님에게로 가버리자 그 사람은 페기를 잊고 다른 사람하고 결혼하지는 않겠다고 해서 다른 모든 여자들의 가슴을 찢어놓았어." 그래놓고도 그는 계속 잘생겼다. - P359

여자들이 아무개 아들을 때려눕혔다. 아무개 아들의 행동 때문도 아니고 권총을 휘둘렀기 때문도 아니고 누군지 빤히 아는데도 복면을 쓰고 다녀서도 아니고 나, 여자, 그들의 자매 중 한명을 위협해서도 아니었다. 그런 게 아니었다. 남자이면서 여자 화장실에 들이닥쳤기 때문이었다. - P439

우리는 작은 대문을 열고 닫고 할 것도 없이 작은 산 울타리를 훌쩍 뛰어넘었고 나는 초저녁의 빛을 들이마시며 빛이 부드러워지고 있다는 것, 사람들이 부드러워진다고 부를 만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저수지 공원 방향으로 가는 보도 위로 뛰어내리면서 나는 빛을 다시 내쉬었고 그 순간, 나는 거의 웃었다. - P4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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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las 2021-02-04 10:2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시 읽고 읽고 또 읽어도 재밌을 책이예요. :):):) 밀크맨 새벽에 다 읽고 왠지 좀 두근두근 하면서 한숨을 쉰 기억이 나요 :):)

다락방 2021-02-05 07:42   좋아요 1 | URL
문체도 좋았어요. 다 좋았어요. 저도 시간이 좀 지난 뒤에 다시 읽고 싶어요. 책 좋아하는 사람들이 좋다고 말하는 책은 정말 좋은 책일 확률이 높다고 밀크맨 을 읽으면서 생각했어요. 후훗.

잠자냥 2021-02-04 10:36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그 미친 스토커 놈이 아주 그냥 주변에서 서성이면서 서서히 압박해 오는 거 정말 미치고 대환장.... 정말 죽여줘서 얼마나 고맙던지요. 이 작품 작가의 경험이 담긴 것 같은데, 작가가 정말 끔찍했을 거 같아요. -_-

다락방 2021-02-05 07:43   좋아요 1 | URL
처음부터 죽이고 시작해서 너무 좋았어요. 안그랬으면 읽는 내내 너무 쫄려서 심장이 터졌을거에요 ㅠㅠ
진짜 밀크맨 이야기도 너무 좋았어요. 남들이 뭐라 하든 자기 생각으로 위기에 처한 사람들을 돕는 것도 좋았고 그래놓고도 계속 잘생긴것도 좋았고요 ㅎㅎ

페넬로페 2021-02-04 11: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며 숨이 막히는 기분이란 이런것일까하며 읽었어요~~
만약 나에게 이런 일이 일어났다연!
누군가를 쉽게 비난할 수 없는 이유가 이 책에 있었어요^^

다락방 2021-02-05 07:44   좋아요 1 | URL
맞아요 숨이 막히죠. 이렇게 한 사람의 삶은 지배당하고 있는데 누군가에겐 이렇다 말할만한 게 없다 생각하게 되니 여자의 삶이란 대체 뭘까...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정말 좋은 독서였어요, 페넬로페님.

공쟝쟝 2021-03-08 1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흡.. 밀크맨... 짱이였어요... 😭 근데 다락방님 말대로 작가님이 욕심 잔뜩 부렸는 데 욕심 고마운 느낌이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