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책
요즘 가장 나를 흥분시키는 건 뭐니뭐니해도 책이다. 얼마전에도 기다리던 책의 복간 소식에 흥분하면서 아아, 나는 역시 책으로 흥분하는 사람이구나 깨달았는데, 그런 일이 오늘도 있었다.
그러니까 나는 퇴근전에 알라딘 서재에서 친애하는 ㅁ 님의 글을 읽게 된다. ㅁ님의 페이퍼에서는 한나 아렌트의 이름 옆에 나란히 '메리 맥카시'란 이름이 등장해 있었다. 어쩐지 익숙한 이름인데 아무것도 작품이 떠오르질 않는걸 보면, 그저 들어본 이름일뿐 내가 읽었던 책들의 작가는 아닌 것 같았다. 나는 한나 아렌트와 나란히 등장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흥분하기 시작했고, 뭐든 읽어보자! 하는 마음으로 알라딘에 검색했는데, 뭔가 이렇다할 번역서가 나오질 않았다. 도대체 뭐하는 사람인지 모르겠는거다. 그렇다면 내가 이 이름이 왜이다지도 익숙한가, 했더니, 그건 아마도 영화배우 '멜리사 맥카시' 때문인가 보았다. 어쨌든,
한나 아렌트와 나란히 언급될 정도라면 분명 작품이 있을 것이고, 어딘가에서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것이다, 해서 나는 네이버 창에 메리 맥카시를 검색했고, 아아, 이 책의 존재를 알게 된다.
20세기의 매력적이고 논쟁적인 여섯 여성 지식인을 다룬 책이다. 독특한 신학과 정치학을 개진했던 철학자 시몬 베유, 20세기 최고의 정치이론가 한나 아렌트, 소설가이자 당대 지성계에서 독보적 여성이었던 메리 매카시, 미국 최고의 에세이스트이자 평론가, 소설가인 수전 손택, 사회적 주변인들을 작품에 담았던 천재적 사진작가 다이앤 아버스, 2005년 전미 도서상을 수상한 작가 조앤 디디온. 이들은 어떤 단일한 전통도 따르지 않으며, 단순한 범주로 묶을 수도 없다.
하지만 저자 데보라 넬슨에 따르면 그들은 문체와 철학적 관점에서 서로 연관성이 있다. 바로 고통을 대하는 태도에서 유난히 ‘강인한’ 마음을 지녔다는 점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터프함’은 그간 여성의 미덕처럼 여겨져 온 감정 표현에 대한 혐오가 아니라, 작가의 윤리적 입장과 미학적 접근방식을 결정하는 ‘비감상주의적 태도’를 가리킨다. -알라딘 책소개 중
메리 매카시의 저작은 아니지만 한나 아렌트와 메리 매카시, 수전 손택, 어머 이게 무슨 일이야, 시몬 베유까지. 여성 지식인을 다룬 책이라는 게 아닌가. 아아, 너무 흥분돼. 내가 요즘 최고 관심 가진 한나 아렌트와 우엇 도대체 누구지? 하는 생각을 하게된 메리 매카시가 한 권에 들어있다니. 대체 이거 뭐야, 이거 뭔데 내가 몰라? 왜 이제 알았지? 이런 책있네? 하면서 나는 흥분한거다. 이 책의 저자는 '데보라 넬슨'이라는데 아아, 이름부터 너무나 훌륭함의 포스가 느껴지지 않는가. 나는 급격하게 흥분 모드가 되었다. 아아, 흥분돼. 누구아, 뭐야, 이거 뭔데, 누가 어디에서 이런 책 쓰고 있었던 거야, 꺅.
나는 급한 마음에 얼른 서점에 가서 이 책을 사자 싶었다. 지금 읽고 있는 책도 마저 읽어야 하고 사실 지금 당장 읽을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당장 사고 싶었던 거다. 교보문고에 검색해보니 마침 교보문고 우리 동네 지점에 이 책의 재고가 있었다. 좋아, 퇴근하고 고고씽, 사는거야, 사러 가자!
그러나,
치킨을 먹고 싶었던 내 마음... 뜨끈뜨끈한 치킨... 집에 가서 씻고 금요일 밤, 와인 한 잔 따라 마시면서 치킨 먹으면 그곳은 천국이 아니던가. 엄마, 저녁에 치킨 시켜먹을까, 물었더니 엄마는 네 마음대로 하렴, 했어. 그러니 집에 일찍 가서 치킨을 먹어야 해. 그렇지만 나는 책도 사고 싶은걸. 그럼 둘다 하는건 어때? 라고 평소의 합리적인 내가 제안한다. 그러나 서점에 들러 책을 사고 집에 가면 치킨을 먹는 시간이 뒤로 늦춰진다. 나는.. 취침시간이 이르기 때문에 늦게 먹으면 곤란해. 그렇다면 치킨을 포기하자, 그리고 책을 사자. 저녁을 포기하고 책을 사고 그리고 일찍 잠에 들면, 책에 대한 욕망 해소, 간헐적 단식 성공, 다이어트로 가는 지름길! 이지 않은가. 그러나 나는 치킨을 택했다. 그것이 나의 최종 선택. 나는 이 책을 토요일이나 일요일을 이용하여 서점에 가 사가지고 오기로 한다. 흥분돼...
그렇게 집에 와 치킨을 시켜 먹으면서 우앙 맛있다, 하고는 엄마와 뉴스를 보고 수다를 떨다가 잠깐 북플을 들어갔는데, 아닛, 친애하는 ㄷ 님의 글이 올라와 있는거다. 심지어, 무려, 주제가 '내 인생의 책'이야. 아니, 우리 이런거 그냥 넘어갈 수 없잖아요? 나는 ㄷ 님의 인생책이 무엇인지 살펴본다. ㄷ 님은 뭐 하나 딱히 골라내지 못한 채로 페이퍼를 끝맺었지만, 오오, 이 책이 인생책일줄 알았는데 갈등하시네, 오오, 그 책이 리스트에 없네? 하면서, 사람은 역시 타인을 잘 알 수 없는 것이구먼, 하게 되었고, 아아, 그렇다면 나의 인생책은? 하고 내게 묻게 되었다. 그래,
나의 인생책은 무엇인가?
일전에 무인도에 책 세 권을 가져갈 수 있다면, 이라는 물음에도 답하기 힘들었는데, 나의 인생책 역시 답하기 힘들구나. 좋은 책이 뭐가 있냐 물으면 대답할 책들이 많고-나는 레미제라블을 말할 것이다- 추천해줘, 라고 누가 내게 요청한다면 또 이것저것 추천해줄 수도 있겠지만, 그러나 나의 인생책은? 물으면, 아아, 모르겠다. 심지어 내 책장에는 내가 좋아하는, 나의 소중한 한 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안에 책들이 담겨 있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겠다. 어느 한 권을 말해야 할지, 어떤 한 권을 말해야 할지. 사실, 제일 먼저 생각한 건, 당연히,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책이었다.
너무 좋아서 영어책으로도 그리고 독일어 원서로도 가지고 있는 책이다. 심지어 독일어는 읽을 줄도 모르면서 그저 가지고 있어. 어쩜 좋아. 매해 다시 읽는책. 그러나 이것을 나의 인생책이라 불러도 될까? 아아, 나는 좀더 신중하고 싶다. 그래서 나는 나의 소중한 한 칸 앞에 가 섰다. 거기에는 줌파 라히리가,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가 꽂혀 있었다. 아아,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나는 <지옥 천국>을 정말 여러번, 여러번 읽었다. 순전한 기쁨인 프라납 삼촌이 등장하는 지옥 천국은 나의 페이버릿 단편이다. 한편, [축복받은 집]에 실린 단편, <섹시>도 엄청 좋아한다. 누군가 어느 작가처럼 쓰고 싶냐고 물어보면 줌파 라히리라고 대답했던 시간들이 길었다. 아아, 어쩌면 좋아. 올리브 키터리지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이것도 재독 이상을 했다. 한 번은 다정한 친구와 같이 읽기한 책이기도 하다. 너무나 특별한 책, 읽을 때마다 감탄하는 책. 나는 올리브 키터리지가 노년에 이르러 자신의 고집을 조금 수그러뜨리고 친구 혹은 연인을 새로이 사귀게 되는 장면을 몹시 사랑한다. 무지개처럼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던 순간을- like a rainbow-, 정말, 정말 사랑한다.
모르겠다. 샤론 볼턴이 너무 좋은데 인생책으로는 아직 오르지 못하는가. 모르겠다. 컷 글라스 보울 좋아하는데 핏츠제럴드도 아닌건가. 모르겟다. 나의 독서앱 IReadItNow 를 엵고 책들의 목록을 훑는데 너무나 좋은 책들이 많지만, 인생책인가? 를 물으면 아니야, 부족해, 하게 된다. 뭔가 더 대단한 것을 위해 그 자리를 자꾸 넘기고 넘기게 되는데, 아아, 이러다 인생책은 없는게 되어버리는 건 아닐까.
ㄷ 님은 페미니즘 서적 중에서도 고르셨다. 정희진 쌤은, 시간이 갈수록 나랑 다른 부분들이 발견되긴 하지만 가장 도움을 많이 받은 여성학자다. 정희진 선생님의 글은 앞으로도 다 읽고 싶다. 비록 앞으로 읽을 글들에서도 나는 나와 의견이 다른 부분들에 대해 각오해야 겠지만, 그래도 놓치고 싶지 않다. 그렇다면, 페미니즘 책들 중에서는 인생책이라 부를 만한게 뭐가 있을까?
'레이첼 모랜'의 [페이드 포]는 밑줄긋기 공간이 없어서 다 못옮겼을만큼 밑줄이 많았다. 작가가 삶의 매순간순간을 얼마나 최선을 다해 살아왔는지 알 수 있는 책이었다. 그녀는 그녀 인생의 시간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에게 일어난 일, 그 이면에 있는 것들을 다 알아차렸다. 거기에 대해 생각하고 정리하고 그걸 글로 풀어냈다. 그만큼 글을 쓰는 과정은 아팠을 것이다. 그녀는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갔다 나와야만 했으니까. 내가 겪었던 고통을 글로 쓰다보면 그 고통의 시간을 한 번 더 살게 된다. '사유'라는 게 어떤건지 '성찰'이란게 어떤건지 알게 해주는 책이다.
여성주의 책 같이 읽기를 하며 좋은 여성주의 책들을 아주 많이 만났지만, 나는 [여자는 인질이다]를 읽으면서 가장 많이 달라진 것같다. 의식을 통째로 뒤엎어버리는 그런 느낌이었달까. 그리고 포르노에 대해 날카롭게 관찰하고 의견을 피력한 글들이 너무 좋았다. '게일 다인스'의 [포르노랜드]를 읽으면서, 포르노를 보는 남자들 뿐만이 아닌, 남자들과 어쩔 수 없이 이 세상을 함께 살아가는 여자들도 포르노를 살고(live) 있다는 처절한 현실을 알게해준 책이었다. 포르노랜드가 최근 책이라면, 안드레아 드워킨과 캐서린 매키넌의 책들도 같이 반포르노 삼종셋트라고 묶어 불러도 좋겠다. 이 책들이 진짜 너무 좋다. 페이드 포, 여자도 인질이다, 포르노랜드 는 나를 쥐고 흔들다 못해 넘어뜨리고 다시 일으켜세운 책들이었다.
'밀란 쿤데라'의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을 세 번 읽었다. 그렇다면 인생책이라 불러도 좋지 않은가? [채링크로스 84번지] 를 읽고 런던에 가 그 곳을 찾았다. 지금은 사라지고 맥도날드로 변했지만, 런던까지 가서 그 주소 앞에 서성이며, 여기가 혹시 채링크로스가 84번지의 그 서점이 아니냐고 묻게 만들었던 책이 인생책이어야 하지 않나. 순전히 쌀국수를 먹기 위해 베트남으로 떠나게 만들었던 [나는 그곳에 국수를 두고 왔네]에도 인생책이란 타이틀을 붙여줘야 하지 않나. 처음 갔던 하노이, 그리고 홀로 떠나는 처음. 나는 이 책을 들고 거리를 헤매이며 국숫집을 찾았다. 어떤 국수를 먹고 싶은지 체크해두었던 바, 읽지 못하는 베트남어를 더듬어가며, 아아 여기에 분보남보를 판다, 하고 들어가 내 인생 첫 베트남 첫 국수를 눈물나게 맛있게 먹었던 기억. 그렇다면 이 책은 나의 인생책이 되어야 하지 않나. '이광호'의 [사랑의 미래]야 말로 내 인생책이라 불러야 하지 않을까. 대한민국에 살지도 않으면서, 절판된 이 책을 읽고 싶다는 나의 SNS 를 보고 수소문해 이 책을 찾아 보내주었던 다정한 연인의 기억 때문에라도 나는 이 책을 인생책이라 불러야 하지 않나.
인생책은 무엇인가, 인생책은 한 권이어야 하나. 인생책은 몇 권을 고를 수 있나. 인생책은 그 책의 본래의 내용이 너무 좋아서 인생책이 되는가, 그 책에 담긴 나의 사연 때문에 인생책이 되는가. 아아 모르겠다 모르겠어. 나 역시 이 밤, 내 인생책을 고를 수가 없구나.
가끔 내 책들을 네이버 검색창에 넣고 검색해 리뷰들을 읽어본다. 알라딘에서도 마찬가지. 첫 책을 내고 쏟아졌던 축하 메세지와 선물 때문에 감동받아 울던 기억이 여전히 선하다. 지금은 그로부터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 검색해보았다가 한 책모임 멤버의 글을 보게 됐다. 그 날은 각자 자신이 위로를 받았던 책을 한 권씩 들고 만나는 거라 하였는데, 그 중에 한 멤버가 가지고 나온 책이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 였다. 나는 그게 몹시 좋았다. 누군가를 위로하겠어, 작정하고 쓴 글이 아니지만, 어딘가에서 내가 모르는 누군가가 내 글을 읽고 위로를 받았다니, 위로 받은 책, 이라는 주제에 들고나가다니. 아아, 인생 진짜 잘 살고 있어. 너는 글로 덕을 쌓았어, 라고 한 지인의 말이 두고두고 생각난다. 어쩌면 어딘가에서 누군가에게는 내 책도 인생책이 되어있지 않을까. 그러기엔 너무나 작고 미미하지만, 그러나 인생책의 기준이 무엇이냐에 따라 그리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으앗, 어떤게 내 인생책이지, 하고 책장 앞에 섰다가, 내가 톨스토이의 [부활]을 사둔 걸 보고 깜짝 놀랐다. 이걸 언제 샀대? 안그래도 부활도 사서 읽어봐야지 하던 참이었는데...너 왜 거기있어? 게다가 1권은 첫째줄에 2권은 둘째줄에 있다. 왜때문에 그런거야? 알 수 음슴..
이 많은 책들중에 인생책이라 꼽을만한게 없다니!! 하고 머리를 쥐어뜯다가, 그렇다면 인생책도 아닌데, 다 팔아버려도 되지 않나? 나 자신에게 물었고 또다른 나는 '그건 아니지'라고 나를 말렸다. 이쪽 나가 잘한 건지 저쪽 나가 잘한 건지 잘 모르겠다. 나야, 나랑 싸우지말자. 싸움은 싫어싫어요...
어제는 <5월의 당신은>을 오랜만에 흥얼거리다가, 어라? 이번 5월엔 이 노래를 안들은것 같네? 생각했다. 오늘은 <소중한 사람>을 흥얼거리다가, 이거 가사가 뭔데 내가 지금 생각나? 하다가 가사를 보고, 아 그래.. 했다.
그러니까 언젠가의 가을에, 지하철 안에서 통화하다가, 상대로부터 "알았어"라는 말을 듣고, 그가 보지도 않는데 환하게 웃던 생각이 났다. 너무 좋아서. 알았어, 라는 말이 너무 좋아서. 알았어, 라는 말 너무 좋지 않나. 나는 언제나 그 말을 좋아했다. 알았어, 그럴게, 그렇게 할게, 응. 이 짧은 말들은 언제나 와서 가슴에 그대로 푹 꽂혀버려 내 심장을 어택하는 너의 알았어... 오늘은 그 알았어, 가 생각나서, 그 때의 그 목소리와 말투와 우리 사이에 흐르던 분위기가 다 생각이 나서, 내가 그 때 다시 반하면서, 아아, 이러니까 내가 좋아했지, 라고 다리가 무너질 것 같았던 생각이 나서 한참을 애가 탔다. 오랜만에 만년필을 꺼내 사각사각 일기를 썼다. 알았어, 라는 말을 다시 들을 수 있게 될까?
와인을 아예 미치도록 퍼부었어야 되는데, 괜히 두 잔만 마셔가지고 감정은 이빠이 오를 대로 올라버렸어... 나는 오늘밤 잠들 수 없는 것이다.
괜찮다. 취하자, 내 감정에 취하자. 괜찮다. 오늘은 금요일이고 지금은 밤이니까.
건드리면 울어버리겠다 으르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