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데이지 밀러》는 '헨리 제임스'의 1878년 소설이다. 유럽 여성이 어떻게 말하고 어떤 행동을 해야만 예의에 어긋나지 않는지 수만개의 규칙이 있던 시절이었다. 데이지 밀러는 미국의 젊은 여성이고 스위스로 여행을 간다. 그녀는 여기저기 가보고 싶은 곳도 많고 만나고 싶은 사람도 많다. 사람들과 두루두루 친해지고 싶다. 그러나 그녀가 샤프롱도 없이 남자와 단둘이 말을 하고 산책하거나 혹은 남자 여럿과 그런 행동을 보이는 것은 사람들에게 뒷담화 거리가 된다. 그녀는 천박하고, 상종 못할 인간이 되어있다. 배우지 못하고 욕먹을 여자. 그런 평판은 그러나 데이지에게는 뭐 크게 상관이 없다. 남들이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가고 싶은 곳을 간다. '너 그러면 안돼, 남자랑 돌아다니지 말고 얼른 이 마차에 타고 나랑 함께가' 라고 오지랖을 부리는 귀부인에게 '싫다'고 말하는 여자다. 싫은데? 나 지금 이 남자랑 산책할건데?


이 평판이 데이지에게는 중요하지 않아서 크게 상관없었고 또 이 평판으로 인해 데이지가 우울했다거나 슬프다거나 그러지도 않았다. 그러나 이 평판은 데이지에게 첫 눈에 반한 '윈스턴'에게는 중요했다. 윈스턴은 데이지가 너무 좋고 마음에 들고 데이지랑 함께 있고 싶고 둘이 있고 싶은데, 자신의 '아주머니'(뭐 이모쯤 되는 것 같다)를 비롯해 친하게 지내는 귀부인들이 모두 그녀의 천박함을 욕한다. 게다가 이탈리아에서 재회한 데이지는 이탈리아 남자랑 허구한 날 돌아다녀. 윈스턴은 자신이 아닌 이탈리아 남자랑 돌아다니는 데이지를 보고는 어쩌면 저 여자는 사람들이 말한 그런 천박한 여자일런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한다. 여우의 신포도...


놀랍게도 데이지는 말라리아로 죽는다. 그녀는 사실 윈스턴에게 마음이 있었는데 딱히 윈스턴과 뭘 해보지도 못하고 그냥 열병에 걸려 죽어버려. 굳이 데이지가 윈스턴과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습니다를 바란건 아니지만 열병 걸려 죽게 만들다니, 헨리 제임스 너무해... 그리고 이 소설은 딱히 재미는 없다. 《테헤란에서 롤리타를 읽다》의 저자 '아자르 나피시'가 바깥에는 폭발이 일어나는 전쟁의 한가운데에서 데이지 밀러를 읽길래 으앗, 뭘까뭘까 하고 읽었는데, 별로 재미 없어서 당황스러웠다.

그러고보면 책을 만나는 시기도 정해져있는 것 같다. 헨리 제임스의 《데이지 밀러》를 사둔건 한참 전이었다. '블레이크 라이블리' 주연의 영화 《아델라인: 멈춰진 시간》에서 이 책을 보고 그 때 읽어보고자 사두었다. 아델라인은 책 읽는 걸 무척 좋아하는 여자인데, 그녀가 책 읽는 모습을 보고 반했던 남자가 그녀에게 만나서 꽃다발 대신 꽃 이름이 들어간 책들을 여러권 선물해주는데 그 중 하나가 데이지 밀러였던 거다.







나는 이렇게 오래전의 양반, 예의, 교양, 신분... 이런 것들로 가득찼던 배경의 소설을 읽거나 영화를 보면, 내가 과거에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사람일까에 대해 생각해보게 된다. 데이지 밀러가 살았던 시대의 나였다면, 나 역시 데이지 밀러 같았을 것 같다. 데이지 밀러는 신사들과 노는게 너무 좋다고 말한다. 아아, 젊은 시절의 나는 남자들과 노는 걸 얼마나 좋아했던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마도 그 시대에 살았다면 나 역시 교양있는 부인들로부터 욕을 디지게 먹었을 것 같다. 천박하다고. 그러나 항상 함께 놀 수 있는 신사들과(응?) 친구들은 있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동성의 친구들 중에서도 내가 신사들하고 하도 놀아제껴서 욕먹는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렇지만 그렇다해도 니가 범죄자인것도 아니고 나름 괜찮은 인간이니까, 하면서 나랑 항상 어울리고 수다 떠는 여자친구들은 있었을 것 같다. 나는 아마 사교계에 데뷔해도 월플라워 였을 것 같고 ㅋㅋㅋ 아마 아무도 춤 춰주지 않는 여자가 되어있었을 것 같긴한데, 뭐 그게 내 삶에 크게 우울함으로 작용했을 것 같진 않다. 춤은 누구랑 함께 춰서 맛이 아니라 내가 술마시고 둠칫 두둠칫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것임에...(응?)



뭐 이것도 내가 귀족이나 돈있는 집에서 태어났다는 전제 하에 그렇다는거지 사실 나는 내가 딱히 조선시대에 태어났다면 양반이었을 것 같진 않다. 뭐랄까, 딱히 양반이 나한테 어울릴 것 같진 않다. 돈이라도 있는 집안이었으면 양반을 돈으로 샀을 수도 있겠지만, 우리 아빠라면 굳이 돈주고 양반 안사고 '우리 이대로도 충분히 행복하잖아' 햇을것 같아... 아무튼 양반은....난 아니었을것 같다. 뭐, 그렇다는 거다.



데이지 밀러는 아주 얇은 책인데, 이 책이 시작하기에 앞서 <판본에 대하여>가 나온다. 잠깐 헨리 제임스가 데이지 밀러를 출간한 이후에 쓴 「바베리나 아가씨」(1884)가 언급되는데, 인용해보겠다.



헨리 제임스가 『데이지 밀러』를 출간하고 몇 년 후에 쓴 「바베리나 아가씨」(1884) 에서는, 어느 부유하고 젊은 미국인 의사가 영국 귀족 가문의 아름다운 딸에게 반하는데, 정식으로 청혼을 하기 전까지는 (심지어 청혼을 한 후에도)그녀를 제대로 알 기회가 없다는 사실에 몹시 당황한다. 마침내 한 파티에서 간신히 그녀 옆자리에 앉게 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국에서는 결혼 전에 어떻게 서로를 알게 돼서 결혼을 하나요? 도대체 그럴 기회가 없는데."

"제가 그걸 어떻게 알겠어요. 전 한 번도 결혼을 해본 적이 없는걸요."

바베리나 양이 대답했다. (p.16)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뿜었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바베리나 양 유머감각 넘나 좋네요. 읽어보고 싶은데 국내에 바베리나 아가씨는 번역된 게 없는가보다. 슬픔...



"교양이 전혀 없긴 하더군요."

윈터본이 계속해서 말했다.

"하지만 그 아가씨는 깜짝 놀랄 정도로 예뻐요. 게다가 간단히 말해서 아주 좋은 여자예요. 제가 그 사실을 믿고 있다는 증거로 저는 그 아가씨를 시옹 성에 데리고 갈 생각입니다."

"단둘이서 거기를 가겠다는 말이냐? 그건 오히려 네 생각이 그 반대라는 걸 증명해 주는구나. 하나만 물어보자. 도대체 네가 그 여자를 알게 된 지 얼마 만에 그 흥미로운 계획을 세운 거냐? 네가 이곳에 온 지 아직 스물네 시간도 안 지났는데."

"그녀를 안 지 반 시간 만이죠!" (p.81)




윈터본이여...

아니, 만난지 반시간 만에 '아주 좋은 여자'라고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그건 단지 처음부터 그녀가 무지하게 아름다웠다는 것에서 온 것이 아닌가. 예쁜 여자=좋은 여자, 이 공식을 온몸으로 체화한 사람 아닌가. 윈터본도 그냥 별다를 바 없는 평범한 남자1중에 하나였다. 다른 남자들보다 좀 더 신사답고 좀 더 잘생겼을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남자가 아닌 것은 아님에..

일전에도 한 번 썼던 것 같은데, 오래전에 봤던 미니시리즈에서 여자가 직장 선배 남자한테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다가 이미 다른 직장동료와 사귄다는 말에 실망하는 장면이 있다. 그가 사귄다는 직장동료 여성은 너무 예쁘기로 회사에 소문이 자자한 여자지만 그러나 싸가지 없기로도 마찬가지로 소문나 있었기 때문이다(실제로 싸가지가 없었는지는 초반을 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다). 그러나 직장 선배는 평소에 이상형이 '착한 여자'였기 때문에 우리의 주인공은 용기 내어 고백했던 것. 다른 남자들은 다 그 예쁜 여자를 좋아해도 이 남자는 아닐 것이다, 착한 여자를 좋아하니까, 라고 생각했는데(평소 그는 여자에게 착하다고 말했더랬다)거절 당했고, 시간이 흐른 뒤에 여자는 그에게 묻는다. 네가 사귄다는 그 여자 어디가 좋은 거냐고. 그러자 그가 답한다.


"착해서."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윈스턴이 데이지 밀러 겁나 아름답다고 미친듯이 얘기하는데 그러면서 좋은 여자라고 반시간만에 '믿고', 관광지에 '단둘이'가고자 하는 것은, 정말 그 여자가 '좋은' 여자이기 때문인가. 나는 오래전에 본 미니시리즈의 저 장면이 생각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착해서 좋아, 그 예쁜 여자가...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예쁜 여자 좋아하는 게 죄는 아니지만-우리는 누구나 다 저마다의 이상형을 품을 수 있지 않은가!- 예쁜 여자 좋아하면서 '좋은 사람'이라고 하는거(반시간 만나고 파악가능한 부분? 나는 이날까지 살아도 내가 나를 잘 모르겠는데?), 예쁜 여자 사귀면서 착해서 사귄다고 하는 거 너무... 참 너무다. 뭐 이쯤하자.




읽다가 내가 오래 반성한 장면도 있다. 스위스에서 만나 잠깐동안 알고 지냈을 뿐인데 윈스턴은 다른 도시인 제네바로 이동한다는 거다. 다음에 이탈리아에서 만나기를 기약하긴 하지만, 데이지는 그가 가는게 못내 서운하다. 그에게 무시무시한 사람이라고 말한다, 벌써 제네바로 돌아가다니. 아아, 데이지... 당신도 윈스턴과 헤어지기 싫은거구려.... 헤어지기 싫으면 어째야 한다? 헤어지기 싫다고 말해야 한다.



"마지막 순간이라니요!"

젊은 처녀는 소리쳤다.

"전 이제 시작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아예 당신을 여기 남겨 두고 혼자서 곧바로 호텔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까지 드는군요."

그러곤 10분 동안이나 그녀는 그를 끔직스러운 사람이라고 투덜거리기만 했다. 가엾은 윈터본은 완전히 어리둥절했다. 지금까지 어떤 젊은 아가씨도 그가 떠난다는 말에 이토록 동요하는 모습을 보이는 영광을 그에게 베풀어준 적이 없었던 것이다. 이후로 그의 동반자는 시옹 성의 진기한 구경거리나 호수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더 이상 관심을 두지 않았다. 대신 제네바에 있는 그 수수께끼의 미인에 대해서 공격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녀는 그가 서둘러 제내바로 돌아가려는 건 당연히 그 여자 때문이라고 여기는 모양이었다. (p.105)



아아, 데이지... 나는 당신을 존경합니다. 내게 없는 면이에요. 헤어지기 싫다고, 가지 말라고 투덜대고 화내고 애원하는 거, 나도 그렇게 살았어야 했었던걸까.... 바짓가랑이 붙들고 갈테면 나도 데려가라고 했어야 했던 것인가...

아라리..

나는 가다가 발병나라고 했지.....

아라리....









책의 마지막에는 데이지 밀러를 읽은 부인과 헨리 제임스가 주고받은 편지가 실려있다. 카데나비아에 있다는 그 부인에게 편지를 쓰면서 말미에 헨리 제임스는 이렇게 쓴다.



카데나비아에 있는 당신이 배가 아플 정도로 부럽습니다. 당신이 곧 이곳으로 돌아오시든지, 아니면 겨울이 끝날 때까지 이탈리아에 머무르시면 좋겠습니다. 새해가 지난 후에 저도 그곳으로 가서 장기 체류를 할까 생각 중이기 때문입니다. 당신이 어디 있든, 당신의 진실한 친구의 선한 의도를 믿어주십시오. H.제임스 Jr. (p.184)



아 이 편지의 마무리가 너무 좋다. 나도 저런 편지 써보고 싶다. 당신이 곧 이곳으로 오든지, 아니면 거기 좀 더 머물러 내가 가도록 할게, 나도 거기서 장기체류할게, 라고 편지 쓰고 싶다. 그 편지에 상대로부터 응답을 받고 그렇게 우리가 여기나 거기에서 만나면 얼마나 좋을까. 편지가 너무 낭만적이다. 낭만적인 편지야. 편지는 자고로 낭만적인 것인가... 나도 저런 편지 쓰고 싶어 ㅠㅠ 그리고 가고 싶어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니면 니가 오란 말야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아 저런 편지 쓰고싶다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어제 자기 전에는 에코페미니즘을 조금 읽었고 이제 47페이지다.




댓글(6)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잠자냥 2020-06-10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ㅋ 파티에서 월플라워로 있다가 혼자 술마시고 둠칫 둠칫 벽보고 춤추는 다락방님 생각하며 아침부터 웃었습니다...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0-06-10 10:15   좋아요 0 | URL
혼자서도 잘 노는 다락방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인생은 즐겁게 삽시다!!

비연 2020-06-10 10: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헨리제임스의 <데이지 밀러>는 고등학교 때 영어공부한다고 읽었던 기억이.. 그러므로 제대로 읽었을리 없다는 생각이... 락방님 페이퍼 보니 다시금 절렬히 느껴지네요 ㅠㅠㅠ 철푸닥.. 다시 읽어야겠어요 쩝

다락방 2020-06-10 10:37   좋아요 0 | URL
엄청 짧은 분량이라 금세 읽으실거에요. 찾아보니 헨리 제임스 단편집 있던데, 그 단편집에도 이 단편이 실려있더라고요. 그정도로 짧은 작품입니다.
비연님, 화이팅!
그러니까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도 화이팅 둠칫 두둠칫도 화이팅... ( ˝)

hnine 2020-06-10 12: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윈터본이여...아니, 만난지 반시간 만에 ‘아주 좋은 여자‘라고 파악할 수 있는 근거는 무엇인가.‘

--> 반시간도 길어요 ㅋㅋ

저도 데이지 밀러 읽은 기억이 나서 예전 리뷰 쓴 것 다시 읽어보니 다른 분들의 리뷰가 궁금해진다고 썼더군요.

다락방 2020-06-10 13:25   좋아요 0 | URL
반시간도 긴가요? 최소 삼십오분은 필요한 거 아닙니까! ㅋㅋㅋㅋㅋ

저 나인님 리뷰 읽고 왔는데 나인님도 별 셋 주셨네요. 저도 별 셋 구매자평 쓰려고 했었거든요. ㅋㅋㅋㅋㅋ 다른 분들 별점보니 별 셋이 많아요. 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