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 쏜살 문고
아니 에르노 지음, 윤석헌 옮김 / 민음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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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태가 불법이었던 시절에 아니 에르노는 임신을 했고 낙태를 해야 했다. 그녀의 나이 이십대초반, 대학생일 때였다. 그녀는 혹여라도 낙태해줄 의사가 있지 않을까 병원을 방문해보지만 언제나 싸늘한 시선을 받고 돌아선다. 엄마한테도 임신이 들킬까봐 초조하고 나는 어째야 하나 고민하다가, 알려진대로 뜨개질바늘을 자기가 스스로 자기 안에 넣어보기도 한다. 이내 포기하지만..


이렇게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그녀를 임신시킨 남자는 아무런 고통도 받지 않고 고민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기 자리에서 자기가 살아왔던 그대로의 삶을 여전히 그대로 살아갈 뿐. 남자와 여자가 '함께'한 섹스인데 고민과 고통은 모두 여자의 몫이라니. 게다가 육체적 정신적인 피해가 모두 온전히 여자의 몫이라니.


아니 에르노는 별로 친하지는 않지만 이미 기혼인 남자지인으로부터 혹 도움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자신의 비밀을 그에게 털어놓는다. 그는 흥미로운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며 그녀를 자기 집으로 초대해서, 너의 일에게 그녀가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며 한 여성의 이름을 알려주긴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그녀에게 섹스를 제안한다. 그로서는 너무 안전한 일이었다. '이미 임신한 여성이니' 자기가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었던 셈. 아니 에르노는 그 날의 일을 회상하며 그 남자를 딱히 원망하지는 않는다고 하는데, 나는 사실 아니 에르노를 좋아하고, 그녀의 <단순한 열정>을 매우 사랑하지만, 그러나 .. 오늘 아침까지도 내내, 아니 에르노가 그렇게까지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는 정말이지, '남자 없이 못사나?' 싶을 정도로 남자를 사랑했던 것 같다. 하아.



그녀를 도와줄 여자가 드디어, 나타나고 그녀에게 어디로 가면 수술을 (몰래) 받을 수 있는지 알려주며, 그에 해당하는 비용도 빌려준다. 그러나 그 수술은 생각만큼 잘 되지 않았고, 결국 그녀는 병원으로 실려간다.



세상은 모순으로 가득차있다.

성적으로 순결한, 더럽혀지지 않은 여자를 원하는 남자들이 많지만, 그러면서 자기들은 언제나 여자를 만나면 섹스하기를 종용한다. 섹스를 남자랑 여자랑 하는데, 아니 생각을 해봐, 늬들이 섹스하는 상대가 여잔데 어떻게 순결한 여자를 바라는거야? 대가리 텅 빈 부분? 돈주고 성을 사면서, 그러나 성을 파는 여자들을 창녀라고 욕한다. 여기에서 어떤 모순을 감지하지 못하는가? 부끄럽기 짝이 없다. 게다가 그렇게 좋다고 섹스해 놓고서는 임신을 하면 나 몰라라 한다. 낙태를 불법으로 만들어놓고는 사생아는 사생아라며 욕하고. 낙태하면 또 낙태했다고 흉보고. 오래전 읽었던 소설 중에 자신이 사랑한 여자가 일전에 낙태한 경험이 있다는 걸 알고 남자가 몹시 분노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뭐 어쩌라는건지 모르겠다. 어쩌라고? 섹스한 후에 임신하고 출산하는 것도 여자의 몫이고 임신하고 낙태하는 것도 여자의 몫이고, 여기에 들어가는 모든 육체적, 정신적 에너지도 모두 여자의 몫인데 이러거나 저러거나 다들 지랄들이여.. 임신하면 모른척하는 남자도 남자지만, 하아, 이미 임신한 여자니 콘돔없이 안전하게 섹스할 수 있을 것 같아 덤벼대는 남자는 또 세상 무슨 쓰레기여... 그러면서 또 낙태 수술은 안된대.. 세상이 대체 여자한테 어떻게 살라는건지 모르겠다.



낙태수술을 한 여자는 생각보다 많다. 낙태가 합법이 아닌데도 그렇다. 이건 무엇을 의미할까.



젊은 아니 에르노가 고민하는 내내 함께 고민했다. 영화 <그녀를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는 것>에서 낙태수술을 하고 나오면서 무너지듯 울던 여자의 모습이 내내 겹쳤다. 낙태수술 한 후에도, 심지어 수술할 때 같이 가주지도 않고 돈을 주지도 않아서 내가 대신 그 자리에 있었는데도, 그 남자랑 다시 만나던 친구도 떠올랐다.

여자들은 자신을 함부로 대한 남자들을 그리고 세상을 너무 봐주면서, 이해하면서 살았던 것 같다. 심지어 사랑까지 했어.


보통 한국 사람들에 대해 얘기할때 '한(恨)의 정서' 라고들 하는데, 나는 이 '한'이 세상 모든 여성들에게 있을 것 같다. 다들 가슴속에 홧병 품고 살고 있을것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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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unhanje 2022-10-07 06: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홧병을 품고는 사는데 부르주아적 삶을 포기도 못하죠 ㅎㅎ. 낙태를,, 제 주변에선 미혼은 아니고 기혼녀들 낙태를 몇 번 봤고 저도 따라가본 경험도 있는데 여자들은 순종적 동물들 같이 행동하는 것 같아요. 말 잘 듣는 순종적 동물,, 아니 에르노가 어떻게 살았건 느꼈건 상관없이 제가 본 바로는 그렇습니다. 전 여자들에 대해 연대의식을 버린지 오래에요. 에르노 소설을 읽진 않았지만 대충 이해는 하는 나이가 되서리.. 에르노가 분노를 느끼지 않았다면 그건 아마,, 그녀가 너무 많은 일을 겪어서가 아닐까 싶네요. 그것에 분노하기엔 그녀가 너무 많은 걸 겪고 알았기에.. 저도 별로 분노는 느끼지 않았을 거 같아요. 걍 웃기는 작자군 정도.. 그런 수작 거는 작자야 뭐 세상 살다보면 흔하게 보는 작자들이니까요.

junhanje 2022-10-07 06: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쁜 일이 너무 많으면 사소한 나쁜 일은 별로 다가오지도 않게 되죠. 슬픈 일이지만요. 그럼에도 그 작자가 그녀에게 기억에 남는 사람이 됐다면 역시 소홀히 넘기진 않았다는 거죠. 세상은 참,, 그렇게 생각하면서 떠올리겟죠. 큰 슬픔 위에 작은 슬픔,, 을 얹어주는 그 작자,, 슬픔 위에 또 슬픔,, 세상사가 그렇더란. 세상이 나쁘면 절대 나쁜 일들의 연속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