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지음, 이재룡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많은 분들이 토로하시는 것처럼 나도 맨처음 이 소설을 매우 난해하게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선과 악, 미와 추가 명확한 것이라는 제도권 교육을 받은 절대다수가 그렇듯이 무거움과 가벼움, 육체와 영혼과 같은 대립쌍들을 교차시켜 짜집기한 이 소설은 내게 적잖은 당혹감을 안겨주었고 결국은 멀리하게 했다.

그러나 평소 방대한 지식량과 깊이로 나를 압도하던 오빠께서 제일 좋아하던 소설과 소설가였기에 오기로 다시 시도를 했다. 그리고 이 소설의 무엇이 그토록 수많은 사람들을 매혹시켰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었다.

두 번째 시도는 충격과 희미한 실마리였고 세번째 시도에서야 조금씩 의미를 체득할 수 있었으니 이 소설의 난해함은 그 정도가 꽤 있는 편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유럽에서는 어려운 소설로 분류되기 보다 대중성과 작품성 그 중간 어드매쯤 자리매김하는 작품으로 스테디셀러라니 우리 나라 교육의 경직성을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될 수밖에 없다. (어디 교육분야 뿐이랴. 우리의 근현대사는 적과 동지, 선과 악의 치열한 대립구도였으니)

이 작품을 비평함에 있어 이 작품 모두를 관통할 통찰력이 나에겐 없다.  단지 많은 분들이 언급하신 가벼움과 무거움, 키치 그리고 떠오르는 대로의 단상 몇 가지를 언급할 수 있을 뿐이다.

내가 이해한 바로 이 작품 속 '존재의 가벼움'이란 의미는 이런 것이다. 존재의 무거움은 어느 분 말씀처럼 우리에게 주어진 숙명론적 존재감, 전제조건, 거기에서 파생되는 인간관계, 질서, 비극 등이다. 반면 가벼움이란 어느 한순간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는 허무한 죽음, 사건 없는 무의미한 시간들, 단단한 질서 그 사이사이에 끼여드는 허술한 틈들, 사소하나 그 사소함이 촉발할 수 있는 사건들, 거기에서 파생되는 우스꽝스러운 결과들의 희극성 등이다.

단순한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티비를 켜면 완벽에 가까운 외모를 지닌 아름다운 선남선녀들이 연기하는 비극적 드라마가 나오고 사람들에게 존재의 무거움, 삶의 진지성을 보여주고 믿게 한다. 그러나 그 반대쪽에는 사람들이 비극적 배우들과 드라마에 열광하는 그만큼의 열광으로 좋아하는 우스꽝스러운 외모와 상황을 연출하는 코미디 프로와 코미디언들이 존재한다.

어떠한 코믹한 드라마라도 결국 그들이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인생의 긍정적 즐거움과 희망이다. 그러나 코미디언들이 보여주는 코믹한 상황들은 그 완벽한 드라마적 상황들 사이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적인 실수들, 틈들, 허황됨, 우스꽝스러움, 그 희극적 요소들이다.

 이 지점에서 소설은 묻는다. 어느 것이 긍정이고 어느 것이 부정인가. 어느 것이 진실이고 어느 것이 거짓인가. 어느 것이 진짜 인간이고 어느 것이 가짜 인간인가.

많은 분들이 생뚱맞아 하고 나 자신도 그랬던 '똥' 이야기를 해보자.  똥을 긍정하는 세상은 인간의 저속함을 인정하는 세상이며  키치가 들어설 수 없는 세상이다. 똥을 부정하는 세상은 인간의 고매함만을 인정하는세상이며 키치가 지배하는 세상이다. 왜냐하면 키치란 거짓된 아름다움, 완벽성을 해치는(혹은 해친다고 간주되는) 불완전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아직 인간의 키치적 거짓됨을 모르는 아이들은 그래서 똥과 방귀, 똥꼬 이야기만 나오면 웃음을 터트리고 재밌어 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코미디 프로와 코미디언들을 비하하고 경시하는 것은 그들이 인간이 보여주기 싫어하거나 인정하기 싫어하는 인간의 다른 면들을 부각시켜서 보여주고 그것을 넘어 그것을 웃음거리로, 조롱거리로 삼기 때문이다.

흔히 고급한 코미디와 저급한 코미디를 분류하는 것은 그 코미디가 단순한 인간의 저속성, 일례로 똥과 방귀, 트림 같은 일차적 본능 부분을 건드리는가, 아니면 인간의 허위의식, 속물근성과 같은 문화적 부분을 건드리는가의 차이일 뿐이다.

그래서 쿤데라는 단순한 땅따먹기, 힘겨루기에 불과한 전쟁보다는 (왜냐면 이것은 너무도 단순하게 선과 악을 보여준다. 양육강식은 누가봐도 명백하게 나쁜 일이다) 스탈린의 아들이 똥 때문에 자살한 사건이야 말로 인간의 존재론적 문제를 건드린 것이라고 말한다. (똥은 선인가 악인가?라고 그는 묻고 있다)

인간은 먹고 똥 싸는 저속한 존재에 불과한가, 아니면 고매한 정신을 가진 진지한 존재인가? 육체적 존재인가 영혼적 존재인가? 지혜로운가 어리석은가?

그의 답은 둘 다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이 둘을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에서 인간의 존재론적 고민과 아이러니들이 생긴다. 흔히 청춘남녀들이 연애에 빠질 때 드는 의문들, 나는 그를 혹은 그녀를 육체적으로 탐닉하는 것인가 영혼으로 사랑하는 것인가 종종 의심하는 것처럼. 그리고 더 나아가서는 육체와 영혼은 무엇이며 육체와 영혼이 합일하는 사랑은 무엇이며 그 합일에 도달한 사랑조차도 때로는 불완전한 인간적 조건 때문에 균열이 생기고 이런저런 세파에 시달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아가는 것처럼.

토마스가 테레사에게 테레사를 사랑하는 것과 다른 여성들과 놀아나는 것, 두 가지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토마스가 테레사와 나누는 감정은 인간의 위대하고 진지한 측면, 사랑이며 다른 여성들과 나누는 것은 말 그대로 '놀아나는' 육체적 유희면서 세계정복인 저속한 측면이다. 토마스는 인간이 저속한 존재라는 것을 부정하지 않으며 저속함을 악이라고 생각하지도 않기 때문에  어떠한 죄의식도 느끼지 않고 느끼길 원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똥이 선인가 악인가 알 수 없는 것처럼 인간의 또다른 저속함 육체적 탐닉과 모험 또한 악이라고 단정지울 수 없기 때문이다.

또한 사랑의 다른 측면, 사랑은 한 번이며 그 한 번이 영원할 것이라는 우스꽝스러운 인간의 키치적 믿음에 (키치는 거짓된 아름다움이므로 순수하고 영원한 사랑을 찬양한다. 그 사랑은 남녀간의 사랑일 뿐만 아니라 세계에 대한 사랑, 그것이 어떤 '주의'로 체계를 갖췄을 때 더 광적이 되는 사랑이다.) 대한 의심을 토마스가 바람을 피웠던 여성 중 한 명을 우연히 만나면서 그녀와 연애감정으로 발전할 수 있었음에도 자신이 테레사의 존재감으로 인해 그 기회를 무의식적으로 저버렸음을 자각하는 부분에서 나타낸다. 토마스에게 절대적으로 순종적이고 순정적이었던 테레사조차도 다른 남자에게 연애 감정을 느끼는 순간이 묘사되는 것도 같은 이유에서이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토마스와 테레사의 서로에 대한 사랑을 거짓된 거라고 할 수 있는가?

 

이렇듯 이 소설은 우리가 기존질서 속에서 배웠던 모든 대립구도를 깨버린다. 그 기존질서란 우로 향했든 좌로 향했든 미래지향적이든 과거회귀적이든 우리에게 선과 악, 아름다움과 추함, 고귀함과 저속함, 육체와 영혼은 서로 양립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아니 더 나아가서는 선과 아름다움, 고귀함과 영혼만이 가치있는 것이라고 가르쳤으며 우리의 악과 추함, 저속함과 육체를 죄악시하게, 혹은 하찮게 여기도록 했다. 사실은 이런 단순한 논리도 틀린 것이다. 과연 무엇이 선인가 악인가란 문제는 우리가 똥이 선한가 악한가라는 문제에 부딪히는 순간 너무나 모호해져버린 것처럼 매우 모호한 경계점을 갖기 때문이다.

그래서 명확한 것을 좋아하는 정치가들, 종교인들, 주의자들은 모든 것들을 모호하게 만드는 예술을 싫어한다고 쿤데라는 말하며 톨스토이즘의 위대함을 사랑하는 동시에 톨스토이의 예술 작품 속 아이러니를 알고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으로 쿤데라의 예술론(?)을 더 자세히 알고 싶다면, 혹은 그의 소설을 더 잘 이해할 열쇠어들을 얻고 싶다면 (덤으로 카프카의 소설을 이해할 수 있는 열쇠어도) <소설의 기술>을 추천한다. <사유하는 존재의 아름다움>이 더 방대한 내용을 담고 있지만 아쉽게도 품절되었으니 아쉬운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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