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서 사는 내내 … 흑인여성은 한편으로는 인종에 대한 충성심과 다른 한편 여성으로서 느끼는 연대감 사이에서 분열을 느낀다. 이 둘 중 하나를 선택한다는 것은 자신의 자아를 분열시키고 자신을 억압하는 편을 드는 것을 의미하지만, 그녀들은 거의 언제나 여성보다는 흑인인종을 선택했다. 인종의 편을 들면서 여성으로서 자신들의 자아와 온전한 인간성을 희생한 것이다. (McKay 1992, 277-78) -p.221
집단적으로 이성애자 흑인여성은 유독 흑인 레즈비어니즘에 대해 이상스레 침묵해 왔다. 바바라 스미스는 설득력 있는 한 가지 이유를 제시한다. "이성애 특권은 흑인여성이 누릴 수 있는 유일한 특권이다. 우리 중 그 누구도 인종이나 성에 따른 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우리들 거의 모두가 계급특권을 누리지 못한다. '동성애자가 아니라서 똑바른 처지'를 유지하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댈 수 있는 최후의 보루다"(Smith 1982b, 171). 백인 페미니스트들이 여성으로서 자신이 겪은 피해를 규명하면서도 인종차별주의로 부여되는 특권을 무시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흑인남성이 인종차별주의를 비난하면서도 성차별주의를 별로 반대하지 않았던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 이성애 흑인여성도 인종억압, 젠더억압을 인식하면서도 레즈비언, 게이, 양성애자에게 고통을 가할 수 있다. p.223-224
인종단결을 초점으로 보면, 힐은 증언대에 서서 학대를 일삼는 흑인남성에 대한 흑인 "가족의 비밀"을 누설한 셈이다. 많은 흑인남성과 흑인여성이 보기에, 힐은 "더러운 세탁물"을 공공연히 방송에 내보냄으로써 흑인으로서 그녀의 주장이 지닌 진정성을 떨어뜨렸다. 어떤 사람은 토마스가 성희롱을 했다고 하더라도 힐은 흑인남성에 대한 연대심을 갖고서 입을 다물어야 했다고 주장한다. 문화비평가 리사 존스는 흑인들이 흔하게 보인 반응을 이렇게 지적한다. "텔레비젼에 나온 힐의 얼굴보다 그녀에게 일어났던 일이 더 강력한 메시지를 전해주었다. 말한다고 보상받는 것이 아니다. 성희롱을 당한 여성은 이중적 피해자가 되며 목소리를 내는 비판적 흑인여성은 여전히 흑인인종의 배신자로 낙인찍힌다."(Jones 1994, 120) -p.224
국민학교(그렇다, 나는 국민학교를 다녔다) 6학년 때 다니던 교회에서 어린이예배 반주자를 1년간 했었다. 중학교 2학년까지 나는 꽤 신실한 크리스천이'었'다. 나름 큰 규모의 교회였고, 무슨 행사인지 기억이 잘 나지 않지만 어떤 행사를 할 때는 어른 예배 반주자와 함께 행사 반주자를 같이 한 적이 있었다. 내가 맡은 건 피아노였고 어른 반주자가 맡은건 전자 오르간이었다. 그 뒤로는 공중 목용탕을 가도 아는척 하는 어른 분들이 꽤 많았다. 그전부터 반주자여서 또래 아이들에 비해 나를 아는 아이가 많은 편이었는데, 이젠 동네 어른들도 나를 아는거였다. 인생 뭘까.. 아, 그런데 그 얘기를 하려는 게 아니고.
반주자였던 만큼 성가대 연습에도 계속 나가 성가연습의 반주를 해야했다. 일요일 오후 예배가 끝나면 남아서 성가대 연습을 해야했는데, 성가대 지휘를 맡은 남자 집사님은 본인이 극본을 써서 어린이 연극을 만들 정도의 '나름의' 실력이 있는 사람이었지만, 아이들을 성추행했다. 그 당시에는 그게 '성추행'이라는 용어를 붙여 부를 수 있는건지도 몰랐다. 어쨌든 국민학교 아이들의 볼에 자꾸 뽀뽀를 하는거였다. 아이들은 당연히 싫어했고.
그 날도 마찬가지. 연습에 앞서 가장 앞에 앉았던 4학년 여자아이에게 집사님은 뽀뽀를 했다. 그 여자아이는 그게 너무 싫어서 하지말라고 소리를 지르고 볼을 닦으며 울었다. 나는 피아노 의자에 앉아있다가 벌떡 일어나 그 아이의 가방을 챙겼다.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끌고 나와 아이의 손에 가방을 쥐어주었다. 그리고 말했다.
"집에 가."
아이는 가방을 들고 울면서 집에 갔고, 나는 다시 피아노 의자로 돌아가 앉았다. 그 날 연습이 끝나고 집사님은 나를 불러 앉혀놓고 더럽게 혼냈다. 싸가지 없다고, 버릇 없다고, 예뻐서 그런건데 그걸 애를 돌려보내냐고. 나는 거기에 대응하지 못하고 울었다. 엉엉 울었다. 콧물까지 날 정도로 엉엉 울었다. 그런 후에 바로 집에 갈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나는 반주자였고, 다음주 예배 반주를 위해 항상 남자 전도사님을 만나 다음주 찬송을 의논하고 가야했다. 그렇게 울면서 전도사님께 가서 다음주 찬송을 골라달라 했다. 전도사님은 너 왜 우냐고 말을 해보라고 했지만, 나는 끝내 말하지 못했다. 그 일을 부모님께도 말하지 못했고 교회의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다. 오늘 이 일을 생각하면서, '그런데 말한다고 뭐가 달라졌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주가 지나 성가대 지휘자인 집사님은 학년별로 상담을 하겠다고 했다. 6학년은 나를 포함해 세명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나는 그 때 집사님께 '아이들 예뻐한다고 그런식으로 표현하지 마시라'고 말했다. 집사님은 알겠다고 하셨다.
나는 중2때까지 교회를 다니다가 그 뒤로 다니지 않고 있다. 교회를 꼴도 보기가 싫어졌다.
몇해전 일이다. 아마 이 일은 전에도 언급한 적 있을지 모르겠는데, 회사 내에서 임원1이 여직원의 볼에 뽀뽀를 했다. 다른 부서에서 일어난 일이었고 나는 보지 못했는데 내 귀에 그 일이 들려왔다. 나는 그 부서의 여자과장에게 '그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게 임원에게 얘기를 하라'고 했지만, 여자과장은 '그건 당사자가 거절을 똑바로 했으면 될 일이다'라는 답을 들었다. 나는 다른 부서에서 일어난 일이라 내가 나서는게 오지랖일것 같아 그 부서에 말한 거였는데, 안되겠다 싶었다. 나는 그 부서로 가 더 높은 임원실에 들어가 임원2를 만났다. 그리고 가해자임원과 직급있는 여자들 다 불러달라 말했다. 임원2는 놀라서 너 왜그러냐고 하며 다 불러모았다. 나는 거기서 말했다. 오늘 가해자임원이 여직원을 성추행하는 일이 일어났다. 나는 지금 이 자리에서 다시는 이 일이 일어나지 않을거라는 약속을 반드시 받아야겠다, 만약 이 일이 또 일어난다면 나는 바로 보쓰에게 가 얘기해 저 임원의 직업을 잃게할 것이다, 고 말했다. 임원2는 놀라서 가해자임원에게 사실이냐 물었고, 가해자 임원은 죄송하다고 다시는그러지 않겠다고 했다. 그간 가해자 임원의 이런 성추행은 계속 있어왔고, 그때마다 여직원들이 '하지마세요'라고 했지만, 가해자 임원은 '장난이다'라고 했던 터다. 그렇다면 그 '장난'을 왜, 남자 직원에게는 하지 않는가. 왜 그 '장난'은 보쓰의 딸에게는 하지 않는가?
시간이 흐른 후 피해자는 나에게 말했다. 나를 원망했노라고. 괜히 내가 그 일을 얘기해서 자기는 계속 사무실에서 일해야 하는데 분위기 불편해졌다고. 한참 후에야 '만약 그때 그걸 말해주지 않았다면 나는 계속 당했겠구나'라는 생각을 하게되긴 했지만, 처음엔 자신의 성추행 피해 사실을 알려 분위기를 흐린 것에 대해 나를 원망했노라고, 피해자는 내게 말했다. 그때 내가 얼마나 혼란스러웠는지를 기억한다. 이 일은 아직까지도 내게 혼란으로 남아 있다. 나는 성추행 피해 당사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이 일을 그저 바라보기만 해야 했던걸까? 이 일은 오지랖이었던 걸까?? 그리고, 그 일이 공론화되어 사무실 분위기가 흐려지고 어색해졌다면, 그건 그 일을 공론화한 내 잘못인걸까? 애초에 성추행을 하는 가해자가 없었다면, 가해자가 성추행을 하지 않았다면 사무실 분위기는 계속 좋지 않았을까? 나는 좋은 사무실 분위기를 위해 입을 닥쳐야 했고, 피해자는 계속 피해를 당해야 했을까? 계속 좋은 분위기의 사무실에서 일하기 위해서? 누군가의 피해를 가져가면서 얻는 평화란, 평화일까?
이런 일은 이렇게 주변에서 누구에게나 일어난다. 최근에 일어난 부산시장 오거돈의 일도 마찬가지. 피해자는 혹시라도 며칠 후에 있을 선거에 영향을 줄까봐 자신의 피해 사실을 공론화하는 것에 대해 참아야 했다. 한 여성이 성폭행의 피해자가 됐다는 건, 일단 '대의'를 위해서라면 닥쳐야 할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성폭행의 피해는 그렇게 뒤로 미뤄도 되는 것인가?
SNS 에서 레즈비언 여성이 고추 달린 트랜스 남성에게 성폭행 당한 사실을 공론화 했다가 뭇매를 맞은 일도 있었다. '트랜스젠더 혐오자'로 낙인 찍힌 피해자는, 그 일을 왜 공론화해서 트랜스젠더에 대한 나쁜 인식을 주느냐고 공격받았다. 이 사건에서 압박을 받고 사라져야 했던건 피해 여성이었다. 성폭행 피해자는 이 여성이었는데, 사라지는 것 역시 피해자의 몫이었다. 퀴어, 성소수자에 대한 나쁜 인식을 바깥으로 드러내면 안되는데, 피해자가 그걸 드러내버렸기 때문이다. 조직의 안위와 이미지를 위해 성폭행 피해자는 역시 성폭행 피해 사실에 입을 다물어야 하는가? 여성이 당한 성폭행 피해는 이렇게 늘 뒤로 미뤄도 되는 것인가? 좀 참았다가 나중으로 미뤄야할 것인가?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 페미니즘 사상》에서 이 모든 일들에 대한 언급한다. 여성이 인권을 생각하면 어김없이 나올 수밖에 없는 여성의 성적 대상화와 여성의 대표성 그리고 성매매와 포르노까지 모든 것을 언급하고 있다. 이 모든 일을 내가 여자로 태어나 살아오며 익히 보아왔던 또 경험했던 일이기 때문에 그리고 그간 여성주의책을 읽어왔기 때문에 이해할 수 있는걸까? 위의 인용문에서처럼,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 집단 내에서 흑인여성이 흑인남성에게 성폭행 당할 경우 그것을 공론화하는 것에 대한 압박 그리고 갈등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백인남성이 흑인여성을 강간하는 것은 흔한 일이었지만 흑인남성이 흑인여성을 강간하는 것도 빈번하게 발생했던 일이다. 그러나 흑인남성이 흑인여성에 대해 성범죄를 저지르는 것은, 흑인여성이 입밖에 내어서는 안된다는 무언의 압박이 발생한다. 우리는 인종이 같고, 그러므로 한 가족인데 그것을 입밖에 내서 되겠느냐는 것. 흑인여성을 강간하는 건 백인남성, 흑인남성, 모두에게 있는 일인데 그러나 그런 일을 저지르는 건 백인남성으로만 드러나야 했다. 내부에서 일어난 일에 대해서는 쉬쉬해야 하는 것. 여성의 성폭행 피해는 이렇게 '조직을 위해' 그리고 '대의를 위해' 감춰져야 하고, 뒤로 미뤄야 하고, 참아야 하는 일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그렇다면 여성은 도대체 언제 피해를 당한 일을 공론화하고 정당한 보상을 받을 수 있는가. 가해자에게 도대체 언제 정당한 처벌이 내려지게 되는가. 왜 여성은 어느 집단에 어떤 식으로 속해도 뒤로 밀쳐지게 되는가. 진보 집단 내에서도, 성소수자 집단 내에서도, 인종 집단 내에서도, 회사라는 집단 내에서도, 왜 여성은 뒤로 물러서야 하는가.
흑인여성들은 알고 있었다. 흑인 남성들도 백인 남성들과 마찬가지로 자신들을 '여성으로서' 괴롭힌다는 것을. 흑인여성들에게 있었던, 그러니까 나에게도 없고 백인여성들에게도 없었던 '다른 표현'은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였다. 블루스라는 음악 장르를 알고 있었지만, 그것이 옛날부터 흑인 여성들에게 그런 식의 작용을 하는건지 몰랐던 터라 이 책을 읽으면서 너무 좋고 짜릿했다. 이 책장을 넘기는 일은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해하지 못할 것도 없었다. 흑인 여성으로 살아오면서 겪어야 했던 일들은, 인종적인 면에서는 나랑 달랐을지언정 '여성으로서'는 공감할 수밖에 없는 것들이었다. 흑인여성은 인종으로도 젠더로도 가장 '나중'인 집단이었다. 그러니 '패트리샤 힐 콜린스'가 대부분 흑인 여성들의 입을 빌어 인용문을 가져오는 것은 당위성을 갖는다. 내가 <알쓸신잡>이란 프로그램에 남성 패널들만 나오는 걸 싫어했던 이유와 통한다. 남성들에게만 발언하게 하면 그 후에 인용되는 것도 남성들의 발언이다. 패트리샤 힐 콜린스는 흑인여성들의 말, 흑인 여성들의 책, 흑인 여성들의 노래를 가져와 흑인 페미니즘 사상을 말한다.
일부 흑인여성이 서로 맞물려 작동하는 여러 억압에 수반되는 성정치를 비판했지만, 흑인과 백인의 남성성을 둘러싼 지배적인 관념을 수용하는 흑인남성을 직접적으로 비판했던 흑인여성은 극소수였다(Wallace 1978). 1992년에 애니타 힐이 클래런스 토마스의 성회롱을 공개석상에서 고발했던 기념비적 사건이 일어나기 전까지, 흑인여성이 오랫동안 흑인 남성에게 "변화"를 요구해 온 통로는 블루스 전통이었다. 과거부터 현재까지 흑인여성은 블루스를 통해서 흑인남성에게 새로운 방식으로 관계를 맺어야 한다고 촉구했다. <괜찮은 여자, 괜찮은 남자>라는 노래에서 아레타 프랭클린(1967)은 여성은 장난감이 아니라 남자와 똑같은 피와 살을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면서, 여성과 남성이 동등한 인간이라는 서저너 트루스의 주장을 내세운다. "남자들 세상"에서 살아가는 그녀는 여성을 이용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식으로 남자임을 "증명"하지 말라고 당부한다. 프랭클린은 남자가 함께 있는 한, 그의 존중을 받았으면 좋겠다고 노래한다. 그녀의 입장은 분명하다. 만약 그가 "긴 밤을 함께 보낼 괜찮은 여자"를 찾는다면, 그도 역시 "긴 밤을 함께 보낼 괜찮은 남자"여야 한다는 것이다. 프랭클린은 지배적인 성정치에서 말하는 "괜찮은 남자"가 되기 위해서 "남자들 세상"이 되어야만 한다는 생각을 거부하라고 촉구한다. 흑인여성을 존중하고 "긴 밤을 함께 보낼 남자"라면, 관계에 충실하고 경제적으로 탄탄하고 성적으로 적극적인 남성이라면, "괜찮은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말이다. -p.269
사실 블루스를 잘 알지 못해서 이 책속에 인용되는 노래들도 내가 아는 노래들이 없다. 흑인여성 가수라고 했을 때 나는 비욘세밖에 떠오르질 않네. 이 책속에 인용되는 가수들에 대해서 어떤 가수들은 이름은 들어보았지만 사실 노래는 잘 모른다. 흑인 감독 '스파이크 리'도 이 책속에서 언급되는데, 스파이크 리 감독 영화중에 [정글 피버]를 보았었고, 당연히 영화속 장면이 떠올랐다. 흑인 남주가 백인 여주랑 사랑에 빠졌는데, 백인 여주의 아버지는 그 사실에 크게 노여워하며 혁대로 딸을 때리는 거다. 내가 이걸 아주 오래전에 보았는데 그 장면이 너무 인상깊었다. 내가 그렇게나 놀랐던 건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에 대해 내가 잘 알지 못했기 때문이란 생각이, 지금은 든다.
책을 읽으면서 내가 아는 흑인 여성의 영혼 담긴 노래라고는 'harlem blues'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역시 '스파이크 리'감독의 영화이고 내가 이 영화를 보진 않았기 때문에(굿 다운로드가 되지 않는 작품이다 ㅠㅠ), 이 노래가 어떤 상황에서 불려진 건지는 모르겠고, 아무튼 그런데 내가 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너무 좋아하는 노래다. 이 노래만 반복해 듣기도 정말이지 여러번 했더랬다.
노래 너무 좋지 않나요? 목소리가 정말이지... ㅠㅠ
《흑인 페미니즘 사상》은 총 520 페이지의 책이고 나는 오늘 아침 출근길에 269쪽까지 읽었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멤버들 중 한 명은 이미 완독했고, 한 명은 300 페이지 넘겨서를 읽는 중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번 달에는 모두가 완독하기를 목표로 달리고 있는데, 이 책 완독 가능할것 같다. 너무 재미있다! 이걸 재미있다고 표현하는 건 적절한 표현이 아닌 것 같긴 하지만, 정말이지 무슨 말을 하는지 다 알겠어서 막 뭔가 흑흑 ㅠㅠ 하는 기분이 되어버리는 거다. 진짜 책 읽는 거 너무 좋다. 진짜 좋아. 여러분 책을 읽자. 너무 좋아요. 책 읽는 거 책 사는 거 너무 좋아서 오늘 나 책 겁나 많이 올거다. 어제 많이 샀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책 만세다 진짜로. 회사 임원이 내가 항상 책 들고 다니는 거 보고 '책 많이 읽는 여자 싫어'라고 했었는데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는 책 많이 읽는 여자 싫어하는 남자가 진짜 재수없다.
그럼 이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