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에노 지즈코는 이 책에서 초반에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언급하는데, 이 부분에서는 참 여러가지 장면들이 머릿속에 스쳤다.
얼마전에
티비 채널을 돌리다가 <어서와 한국은 처음이지>라는 프로그램을 보는데, 한국 영화에 관심 많은 유럽 남자가 한국에 와
몇 년째 살면서 자기가 모은 블루레이 타이틀을 자신의 집에 온 손님에게 자랑하는 장면이었다. 그의 집은 살기에 좋아보였고 게다가
그가 모은 블루레이는 꽤 많은 양이었다. 영화를 좋아하고 관심있다는 사람답게 충실히 모은것일테다.
그전에 유럽에서 아이를 데리고 온 백인남자들은 거실과 방이 여러개 딸린 숙소에 묵었다. 아이가 있어서 필요한 공간이었겠지만, 그렇게 넓은 숙소를 가질 수 있다니.
사실
이 프로를 잘 보는 편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이 어떤 모습으로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이 백인남자들이 한국에
잠시 들르러 왔든 혹은 일을 하러 와서 오래 거주하는 중이든, 그들이 힘들게 사는 걸로는 보이질 않았다. 실제로 내가 근무하는 회사의 공장에서는
외국인 근로자들이 근무한다. 그들중에 아무도 백인은 없다. 한국에 와 일을 하며 먹고 사는 사람들을 죄다 외국인 노동자일텐데
그런데 왜 외국인 노동자 라고 하면 유색인종이 바로 떠오르는걸까. 일전에 다녔던 회사에서도 외국인 노동자들이 공장에 근무했는데,
그들과 몇시간 함께 근무했던 아르바이트생이 그런 말을 했다. "그 사람들이 한국에 취직해서 가장 먼저 배우는 말이 '때리지마세요'
래요."
이 '때리지 마세요'란 말을 가장먼저 배운다는 외국인 노동자의 모습은 머릿속에 자연스레 유색인종으로
떠오른다. 백인이 아니라. 이십년전 편의점에서 일할 때 백인 남자들이 공사판에서 일하는 걸 보긴 했는데, 그들은 러시아인들이었다.
아직도 기억나는 건 그들이 일하다 크게 다쳐 팔의 살이 패이고 피가 철철 났는데 병원을 찾는대신 편의점에 들러 보드카를 한 병
사서는 벌컥벌컥 마시는 거였다. 그들은 어떤 집에 살까. 일을 마친후 어떤 집으로 돌아갈까.
물론 잘사는 유색인도 있을 것이고 못사는
백인도 있을 테지만, 텔레비젼에서 보여주는 장면들중에 아주 많은 퍼센테이지로 백인들은 좋은집에 잘 살고 유색인들은 자신의 나라에서
어떤 배움을 가졌든 이 나라에 와서는 힘겹게 일해야 하는 장면들이었다.
그런것들을 생각하고 있던 이 때, 우에노 지즈코의 이 책을 읽었고, 우에노 지즈코는 마침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가져와 '동양'과 '서양' 그리고 타자화에 대해 얘기한다.
상대방을 이해 불가능한 존재-즉, 이방인, 이물질, 이교도-로 만들어 '우리들'로부터 추방하는 양식(이것을 '타자화'라고 한다)에는 인종화와 젠더화의 두 가지가 있으며 이 두 가지 사이에는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에드워드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에서 지적한다. 즉, '동양(오리엔트)'은 '여성'으로 대체하여 이해할 수가 있다. 여기서 말하는 '오리엔트'란 '이방異邦'의 다른 말이며 '오리엔탈리즘'이란 다른 사회를 타자화하는 양식을 가리킨다.
사이드는
오리엔탈리즘을 '동양이란 무엇인가에 관한 서양의 지식'이라고 간결하게 정의했다. 오리엔탈리즘이란 동양이란 무엇인가, 무엇이어야
하는가, 무엇이었으면 하는가에 관한 서양인의 망상의 다른 이름인 것이다. 따라서 오리엔탈리즘에 대해 안다고 해서 동양을 알게 되는
것은 아니다. 알게 되는 것은 오로지 동양에 관한 서양인의 머릿속일 뿐이다. (p.47)
고등학교 음악 시간에 음악선생님은 남자였는데, 오페라 <나비부인>에 대해 굉장히 낭만적으로 감탄하며 설명해준 적이 있다. 그 때 그 오페라에 나왔던 음악도 틀어주었는데 그건 기억나지 않고, 그 오페라를 한 번도 보지 않고 나는 뭔가 '낭만적이다'라는 것만 기억하고 있던 바, 우에노 지즈코의 날카로운 지적에 크- 그것이 이런 것이었구나 했다. 그리고 당시 음악선생님이 남자라는 것이 떠오르며, 그 남자는 당시에 백인 남성에게 이입하고 있었던건가...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것이었다.
옥시덴트Occident(서양) 남성에게 있어서 이렇게나 '편리한' 망상도 없다. 상대가 이해 불가능한 타자이며 매혹적인 쾌락의 원천이면서 위협적인 요소를 전혀 가지지 않는 무력한 존재. 유혹하는 이로 등장하여 스스로 몸을 내어줄 뿐만 아니라 자신이 떠난 뒤에도 원한은 커녕 연모의 정을 잊지 않는 존재. '내가 버린 여자'에 대한 일말의 죄책감마저도 그녀가 가진 사랑의 크기에 의해 정화되어버린다-이렇게나 '서양 남성'의 자존심을 만족시켜주는 이야기가 또 있을까. '그런 여자가 있을 리 없다!'는 목소리는 서양인의 거대한 망상 앞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지배적인 집단이 타자의 현실을 보지 않기 위해 만든 장치가 바로 오리엔탈리즘이기 때문에 아무리 '일본 여자는 진짜로는 이러이러해'하고 말해도 그 목소리는 도달되지 않는다. 저속하게 말해, 오리엔탈리즘이란 '서양인 남성의 마스터베이션 재료'임에도 불구하고 이런 '포르노'를 보며 박수갈채를 보내는 동양인 청중의 속내를 알 수가 없다. 나는 <나비 부인>을 볼 때마다 배알이 뒤틀려 기분 좋게 앉아 있을 수가 없다. (p.48)
'내가 버린 여자'가 여전히 나를 기다리며 사랑한다는 '망상'에 대해서는, 위의 구절을 읽으면서, 나는 일전에 보았던 영화,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 떠올랐다. 소년은 동성인 어른 남자에 대해 성적으로 끌리고 있는데 동정이었고, 그러면서 또래의 소녀를 만나 섹스를 한다. 소녀는 당연히 소년과 연인사이가 될 줄 알았지? 그런데 소년은 이 소녀와 그렇게 몇 번 자고서는 자신이 끌리는 어른 남자에게 가버리는 것이다. 섹스란 걸 일단 해보기 위해 소녀를 이용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짜증났는데, 더 짜증난 건 그 다음이었다. 소녀는 소년이 자신을 버리고 어른 남자를 선택했다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너를 좋아해'이러고 있는 거다. 이거 보면서 와, 남자들 머릿속에서 이상적인 여자란 '내가 버렸어도 나를 좋아하는 여자'같은 것인가, 생각하며 딥빡이 왔었던 거다. 그런데 이런 건 이미 오래전에, 나비부인에서 백남들이 가졌던 거네. 하하하하하하하하하. 우에노 지즈코의 배알이 뒤틀림, 제가 잘 알겠습니다.
여러가지 책들을 가져오며 인용해서 몇몇 책들을 장바구니에 담았는데, 몇몇 책들은 국내에 아직 번역된 게 없기도 했다.
우선 '사이코 다마키'의 《지속 가능한 삶을 위한 라캉》(2006)은 '일본에서 나온 책 중에서 가장 쉽게 라캉을 이해할 수 있는 책'이라고 자평하던데, 사이코 다마키를 검색해보면 이 책은 번역서가 없다.
위에 인용하며 예를 들었던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도 절판이다.
'사노 요코'의 《나의 어머니 시즈코상》은 있다.
'이브 세즈윅'의 《남성 간 유대》 궁금한데 번역서 없다.
이 책의 옮긴이 '나일등'은 책 말미의 <옮긴이의 말>에서 '책 전체를 부드럽게 익어나갈 수 있도록' 원서의 7페이지에 해당하는 참고문헌 목록을 삭제했고 중요한 것만 본문에 병기하였다고 하는데, 하아, 나는 궁금한데... ㅠㅠ 왜 그런 일을 ㅠㅠ
하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