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에 치킨을 시켜두고 와인을 마시면서 텔레비젼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볼 게 없었다. 엄마는 '네가 좋아하는 세계여행 프로그램이나 보자' 라고 했고, 나는 <걸어서 세계속으로>대신 <세계견문록 아틀라스>를 선택했다. 먹는 거 보고 싶은데 뭐 있을까 고르다보니 '국가비'가 '페루맛기행'을 했단다. 사실 이거 예전에 한 번 본건데, 그래도 이거 보자 엄마, 하고는 페루 맛기행을 틀어두었다. 국가비는 쉐프이고 요리를 좋아하고 먹는 걸 좋아한다고 했다. 그리고 페루의 전통 음식점에 들러 페루 사람들이 권하는 음식을 먹는다. 총 3부작이었는데 엄마와 내가 처음으로 본 건 3부였고, 거기에서는 아주 통통한 애벌레를 먹는 장면이 나왔다. 꿈틀꿈틀 살아있는 애벌레를 기름을 두른 팬에 튀기는 거였다.


이 장면의 모든 게 끔찍했다. 커다란 애벌레도 싫고, 꿈틀꿈틀 움직이는 것도 싫고, 그걸 뜨거운 기름에 넣고 튀기다니, 애벌레한테 대체 왜이러는가 싶었다. 엄마랑 나는 신음소리를 내며 끔찍하다고 했다.


으앗, 끔찍해, 저런것까지 먹으면서 살아야해? 라고 투덜거리는 내 앞에는 치킨이 놓여있었다.



그 회차를 마치고 선택한 2부였는지 1부였는지에서는, 하아, 기니피그를 구워 먹는 게 나왔다. 기니피그를 통째로 구워서 기니피그 형태가 그대로 있었다. 마치 생쥐같기도 하고 토끼같기도 한 기니피그를, 페루 사람들은 길렀다가 먹는다고 했다. 먹기 위해 기르는 거였다. 아니, 자기가 길러놓고 어떻게 그걸 구워 먹을 수가 있어. 통째로 구워진 기니피그를 앞에 두고 국가비는 좀 망설였지만, 이내 고기 냄새도 나지 않고 먹을만하다고 했다.


엄마, 저렇게 통째로 그 모양이 그대로 보이는 걸 대체 어떻게 먹어. 그렇지만 또 먹다보면 고기 맛있다 할지도 모르지..



라고 말하는 내 앞에는 치킨이 놓여있었다. 닭을 튀긴거였다. 닭을 죽이고 털을 뽑아 뜨거운 기름에 넣고 튀긴 치킨. 나는 닭을 죽여 만든 치킨을 먹으면서 저기 저나라의 기니피그를, 애벌레를 먹는 게 끔찍하다고 말하고 있었다. 그러면서 술안주로 치킨을 먹고 있었던 거다.



페루의 시장에서는 소의 혀를, 불알을, 심장을 팔고 있었다. 이야, 인간들 진짜 별 걸 다 먹는다, 하면서, 나는 치킨을 먹고 있었다.




나는 뭐야?

나는 도대체 뭐야?

내가 어떻게 감히, 애벌레를 먹는게 끔찍하다고 말할 수 있어? 기니피그를 먹는 게 끔찍하다고 말하는 게 나한테 가당키나 해? 닭튀김을 먹고 있으면서?

나는 뭐야?



'멜라니 조이'는 닭튀김을 먹으면서 기니피그 먹는 걸 끔찍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인식' 문제라고 말한다.




우리가 쇠고기와 개고기에 대해 이처럼 완연히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이런 질문들에 대한 답을 한마디로 요약할 수 있다. 바로 '인식(perception)'이다. 우리가 서로 다른 종류의 고기에 대해 상이한 반응을 보이는 까닭은 그것들 간에 실질적인 차이가 있어서가 아니라 우리가 달리 인식하기 때문이다. (p.13)


















이 책을 사둔지 오래였는데 읽기를 주저했다. 조너선 사프란 포어의 책도 역시 사둔지 오래인데 저 멀리 밀쳐두다가 중고로 내놨다. 육식의 성정치를 읽고 싶은 마음 그만큼 읽기 싫은 마음이 있어서 아직 사지도 않았다. 그렇다. 나는 이것들의 내용을 짐작하고 있었다. 짐작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제대로'알기 싫었다. 아는 것은 고통이고, 알게된 후에 그 고통을 감당할 자신이 없었다. '알아, 아는데, 알아서 알기 싫어' 라는 마음이 있었던거다.


이 책의 저자는 놀랍게도 이런 나의 마음까지도 간파했다. 짐작하지만 알기 싫지, 그러니 고기를 먹어도 되는 이유들에 대해 합리화 하고만 싶지, 하고 자꾸 나를 쿡쿡 찌른다. 이 책에서만큼은 그렇게 찌를 때마다 어김없이 아팠고, 여기저기 찔리고 말았다. 기니피그를 어떻게 먹냐고 야유하면서 나는 닭을 뜯고 있었다. 그뿐인가, 며칠전에는 양꼬치도 먹었는걸. 양도 먹고 닭도 먹고 돼지와 소 먹기를 사랑하면서, 그런데 왜 기니피그는 안된다고 하는가. 기니피그를 먹는다면 '덜 도덕적'인가. 나는 기니피그랑 애벌레를 먹지 않으니 그들보다 뭔가 더 나은 것인가?


그럴 리 없잖아?



그러나 어느 수준에서는 우리도 진실을 알고 있다. 식육 생산이 깔끔하지도 유쾌하지도 않은 사업이라는 것을 안다. 다만, 그게 어느 정도인지는 알고 싶지 않다. 고기가 동물에게서 나오는 줄은 알지만 동물이 고기가 되기까지의 단계들에 대해서는 짚어 보려 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물을 먹으면서 그 행위가 선택의 결과라는 사실조차 생각하려 들지 않는 수가 많다. 이처럼 우리가 어느 수준에서는 불편한 진실을 의식하지만 동시에 다른 수준에서는 의식을 못하는 일이 가능할 뿐 아니라 불가피하도록 조직되어 있는 게 바로 폭력적 이데올로기다. '알지 못하면서 아는' 이 같은 현상은 모든 폭력적 이데올로기에서 공통적으로 볼 수 있다. 바로 이것이 육식주의의 요체다.

나쁜 것은 보지도, 듣지도, 말하지도 않는다는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무언의 계약이 이런 폭력적 이데올로기들에 내재한다. 물론 축산업계도 자기들의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하지만, 그 일이 쉬워지도록 우리 스스로가 돕고 있다는 얘기다. 그들이 보지 말라고 하면 우리는 고개를 돌린다. 우리 눈에 보이지 않는 수십억 마리의 동물이 야외의 평화로운 농장에서 산다고 그들은 말하는데,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 소리임에도 우리는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처럼 행동하는 까닭은 우리 대부분이 의식의 어느 차원에서는 정말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이다. (p.95)



그렇다. 나는 어느 정도 알고 있다고 생각하면서 더 알기를 원하지 않았다. 진실을 애써 보려 하지 않았다. 들여다보면 내가 불편할까봐 그랬다. 그래서 애써 고기를 먹는 나를 합리화했다. 침묵은 억압하는 쪽의 편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랬다. 폭력에 눈감았다. 계속 고기를 먹고 있는 나인채로, 불편함을 알고 싶지 않았다.


나는 어느 부분에서 분명한 약자이다. 여자라는 입장에서 그렇고 그래서 평등해야 한다며 페미니즘을 주장한다.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니, 평등주의자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너는 성차별주의자야? 라고 반문할 수 있다면, 나에게도 역시 그런 질문이 되돌아올 수 있었다.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니, 그렇다면 너는 육식주의자야?


성차별주의자냐는 물음에 대부분이 아니라고 펄쩍 뛰는것처럼, 나 역시 '육식주의자라니,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야!'라고 펄쩍 뛰겠지만, 그러나, 육식주의자가 아니라면, 나는 대체 뭐란 말인가. 침묵하면서, 사정을 들여다보지 않으면서, 알려 하지 않으면서 동물에 대한 폭력에 눈 감고 있는, 뒤돌아 서 있는 나는, 그렇다면 대체 뭐란 말인가. 이런 내가 육식주의자가 아니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나? 아니, 나는 고기를 먹기는 하지만 육식주의자는 아니야, 라고 말할 수 있나? 이건 마치 나는 성평등을 주장하진 않지만 성차별주의자는 아니야, 하는 것고 다름없잖아? 내가 그들과 다를 게 뭐지?

페미니스트가 아니라면 성차별주의자다, 라고 말할 수 있다면 채식주의자가 아니라면 육식주의자다, 라는 것에도 역시 동의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고기 먹는 일을 비윤리적이라고 믿는 사람을 채식주의자라고 한다면, 고기를 먹는 일이 윤리에 어긋나지 않는다고 믿는 사람은 뭐라고 불러야 할까? 채식주의자가 고기를 먹지 않기로 한 사람이라면, 고기를 먹는 쪽을 선택한 사람은 무엇이냐는 얘기다.

현재 우리는 채식주의자가 아닌 사람을 이를 때 '고기 먹는 사람(meat eater, 한자로는 '육식자[肉食者]'라 할 수 있겠다.-옮긴이)'이라는 말을 쓴다. 한데 이 용어는 과연 정확한가? 이미 확인한 바와 같이 채식주의자는 단순히 '식물(植物)을 먹는 사람(plant eater)'이 아니다. 식물만을 먹는 것은 신념체계에 바탕을 둔 '행동양식'이다. '채식주의자'라는 용어는 핵심적 신념체계가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정확하게 반영한다. '주의자'라는 접미사는 일정한 주의, 즉 일련의 원칙을 주장하고 지지하며 실천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고기 먹는 사람'이라는 말은 육류 소비 행위와 그 행위자를 분리한다. 고기 먹는 일이 당사자의 신념이나 가치관과는 무관한 듯이 말이다. 다시 말해, 고기를 먹는 사람은 신념 체계의 '바깥에서' 그것과 무관하게 행동하고 있다고 암시한다. 하지만 고기를 먹는 일이 진정 신념체계와는 별개의 행위일까? 돼지는 먹고 개는 먹지 않는 게 우리에게 동물을 먹는 일에 관한 신념체계가 없기 때문인가?

산업화한 세계의 대부분에서 육식은 불가피한 일이 아니라 선택이다. 생존은 물론이고 건강에도 고기는 필수적이 아니다. 수백만명의 건강하고 장수한 채식주의자들이 이를 증명했다. 우리가 동물을 먹는 것은 단지 늘 그래왔기 때문이며, 그 맛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대부분이 동물이란 먹도록 되어 있는 게 아니냐, 즉 '원래 그런 것' 아니냐고 생각하면서 먹는다.

우리는 고기 먹는 일과 채식주의를 각기 다른 관점에서 본다. 채식주의에 대해서는, 동물과 세상과 우리 자신에 대한 일련의 가정들을 기초로 한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식에 대해서는 당연한 것, '자연스러운' 행위, 언제나 그래 왔고 앞으로도 항상 그럴 것으로 본다. 그래서 아무런 자의식 없이, 왜 그러는지 이유도 생각하지 않으면서 고기를 먹는다. 그 행위의 근저에 있는 신념체계가 우리에게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보이지 않는 이 신념체계를 나는 '육식주의(carnism)' 라고 부른다(carnism은 저자가 만들어낸 용어다-옮긴이).

육식주의는 특정 동물들을 먹는 일이 윤리적이며 적절하다고 생각하는 신념체계다. 육식주의자(carnist), 즉 고기를 먹는 사람은 육식동물(carnivore)과 다르다. 육식동물은 생존하기 위해 육식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육식주의자는 또 잡식동물(omnivore)이라고만 할 수도 없다. 인간을 포함한 잡식동물은 식물과 육류를 모두 섭취할 수 있는 생리적 능력을 지닌 동물이다. 그러나 '육식동물'과 마찬가지로 '잡식동물'이라는 용어도 개체의 생물학적 특징만을 기술하지 철학적 선택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육식주의자는 필요에 의해서가 아니라 선택에 따라 고기를 먹는데, 선택은 항상 신념에서 비롯된다. (p.35-37)



나는 아니라고 하고 싶지만, 육식주의자였다. 그리고 육식주의자다. 이것은 내 인식에 따른 것이었고 또한 내 신념에 따른 것이었다. 어떤 동물을 먹는 것은 끔찍하지만, 그러나 어떤 동물은 '자연스럽게' 먹어도 된다고 생각해서 먹는 것. 선택에 따라 어떤 고기를 먹는 나는 육식주의자였다.




나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나마 주변에 반려견,반려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이 많아 '싫어한다'고 말하는 것에서는 나아졌지만, 나는 어떤 동물이든 나와 함께 사는 것을 선택하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내가 앞으로 누군가와 함께 산다면, 그것이 연인이든 친구든, 공동체를 이루든 동거든, 그 사람 역시 어떤 동물과도 함께 살지 않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동물들이 내 집안에서 여기저기 뛰어 다니고 털을 떨어뜨리고 나에게 그 몸뚱이를 비비는 것은 정말이지 생각하고 싶지 않다. 고양이랑 함께 사는 친구네 집에 가면 고양이가 나에게 올까봐 더럭 겁이 나는 사람이 나란 사람이다. 동물을 사랑하는 사람들을 자주 목격해 나도 이제는 길고양이에게 소세지를 챙겼다 주는 사람이 되었지만(이마저도 그것이 길고양이에게 좋은 게 아니라고 해서 안하고 있다), 기본적으로는 동물을 좋아하지 않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해서 내가 동물의 고통을 짐작조차 못하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걸 알기 때문에 더 같이 살기를 꺼려하는 지점도 분명히 있다. 낚싯바늘이 붕어의 입에 꽂히는 걸 어릴 때부터 자주 봐왔는데(아빠가 낚시를 너무 좋아하셨다), 그 때마다 저 붕어의 입은 저 바늘이 뚫고 가 얼마나 아팠을까를 생각했다. 키우던 병아리가 닭이 되는 시점에 죽었을 때 아빠가 뜨거운 물에 넣었다 털을 뽑는 걸 보고는 거의 기절할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가 먹는 닭은 이런 과정을 거쳐 내게 오는 것인가, 아무리 죽었다한들 뜨거운 물에 담가지는 것인가. 동물 학대 영상은 차마 보지 못하고, 얘기로만 들어도 너무 끔찍하다. 인간이 어떻게 다른 생명에게 그토록 가혹하고 잔인할 수 있단 말인가. 이수정 교수님은 일전에 [동백꽃 필무렵]에 대해 얘기하시면서, 어릴 적에 동물을 잔인하게 학대하는 아이가 있다면 반드시 병원에 데리고 가 상담을 받아야 한다, 그래야 그 아이가 앞으로 범죄자가 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했다. 동물학대를 그냥 넘겨서는 안된다는 것. 그렇다면, 내가 그렇게 동물학대를 끔찍하게 여기면서, 내가 고기를 먹는 것은 과연 '괜찮은' 것이 되는가.



'멜라니 조이'는 우리가 진실에 눈을 감고자 하는 것은 우리가 동물의 고통을 짐작하고 공감할 수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진실을 아는 순간 우리는 고통스러워질테니까. 그러니 자기합리화로 애써 눈을 돌리며 어떤 동물들을 먹는 것을 선택하는 것이라고. 그리고 이 책에 나오는 동물들이 고기가 되는 과정을 읽다보니, 그 과정이, 이미 짐작했다 하더라도, 얼마나 폭력적이었는지를 알겠다. 나는 그 폭력과 학대에 가담한 사람이었다. 동물을 때리고 가두고 고통을 주는 모든 순간들이 나를 위한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허락하고 있었다. 그 개별적 존재들에 대한 고통에 더해, 어미와 자식을 떨어뜨리는 고통까지 더했다. 우유를 먹을 때 우리는 기꺼이 어미와 자식을 떼어놓는 고통을 그들에게 주고 있었다.




소들은 본디 길게는 1년까지 새끼에게 젖을 먹이면서 대단히 친밀하게 지낸다. 그러나 낙농공장 에서는 보통 송아지를 생후 몇 시간 만에 어미에게서 떼어 놓는다. 젖을 인간의 몫으로 돌리기 위해서다. 송아지가 어미 소 눈앞에서 끌려갈 경우, 어미는 흥분하여 큰소리로 울어댄다. 그래서 어미를 자극하지 않기 위해 다른 장소로 데리고 가 젖을 짜고, 그 사이에 송아지를 끌어가기도 한다. (p.82)



이 지점에 대해서는 이미 샬롯 퍼킨스 길먼이 [허랜드]에서 언급한 적이 있다. 이상한 걸 이상하다고 먼저 샬롯 퍼킨스 길먼이 말했더랬다.




"우리는 고기는 물론이고 우유를 얻기 위해 소를 키우거든요. 소의 우유는 식단에서 빠질 수 없는 필수 음식이죠. 우유를 모아서 유통하는 사업의 규모도 상당하고요."

그녀들은 여전히 어리둥절해 하고 있는 것 같았다. 나는 내가 그린 소를 가리켰다. "농부들이 소의 젖을 짭니다." 그러고는 우유 통과 의자를 그리고 몸짓으로 소 젖을 짜는 모습을 재연해 보였다. "그러고 나면 우유 배달원이 도시로 가져와 운반하지요. 모두가 아침이면 집 앞에 놓인 우유를 받아볼 수 있답니다."

소멜이 진지하게 물었다. "소는 새끼가 없나요?" (허랜드, 샬롯 퍼킨스 길먼, p.88)







동물들이 학대되는 과정, 죽어가는 과정을 맞닥뜨리면서 이제 나는 고민하기 시작한다. 궁극적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은 채식주의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즐겁게 먹고 마시고 싶은 사람이다. 그렇다면 나는 이런 나와 어떻게 타협해야 할까. 당장 내가 좋아하는 음식들만 머릿속에 떠올려도 죄다 고기들이었다. 하다못해 쌀국수를 먹으려고 해도 그 안에 고기가 들어 있었다. 나는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을까. 나는 먹는 일에 있어서 스트레스를 받고 싶지 않았다. 게다가 채식주의자들로부터 채식주의를 해야 한다는 압박도 받고 싶지 않았다. 그렇지만 육식주의를 멈춰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다. 이런 내가 뭘 어떻게 선택할 수 있을까.



나는 좀 줄여나가는 걸로 일단 선택하기로 했다. 오늘 점심은 무얼먹을까, 고민하고 떠오른 게 고기가 들어간 음식이었다면, 한 번 더 생각해보자고. 그러면 내가 일곱번 고기 먹는 걸 네 번으로 그리고 세 번으로 줄일 수도 있을 것이다. 게다가 혼자 먹는 밥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기는 좀 더 쉬울 것이다. 누군가와 함께 먹는 자리라면 메뉴 선택에 조금 더 스트레스 받을 수도 있겠지만, 혼자 먹는 자리라면 아마 좀 더 쉽겠지. 혼자 먹을 때는 가급적 고기가 들어가지 않는 메뉴로 선택하자. 선뜻 그런 메뉴를 떠올릴 수 없어서 오늘 아침 출근길에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는데 차돌된장찌개도 탈락, 김치찌개에도 돼지고기에서 탈락, 순대국도 탈락, 뼈해장국 탈락, 쌀국수 탈락... 죄다 탈락이네. 쌀국수 먹을 때는 아마 주문전에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고기 빼고 주세요, 라고. 물론 육수는 고기 육수겠지만.. 그러다 떠오른 게 콩나물국밥이었다. 그래, 콩나물국밥이 있다. 하루는 콩나물국밥으로 된다, 그러나 다음은? 생각하다 보면 하나씩 떠오르겠지. 줄여가보자. 줄여나가 보도록 하자. 그리고 줄이는 것만으로도 이미 학대받고 폭력에 노출된 동물들의 개체를 줄이는 데 도움이 될거라고, 멜라니 조이는 말하고 있다. 나는 힘을 얻는다.




동물성 식품을 일절 먹지 않는 게 이상적이기는 하지만, 먹는 양을 줄이기만 해도 동물과 자신에게 상당한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예를 들어, 한 달에 한두 차례 고기를 먹는 사람은 매일 먹는 사람 보다 훨신 적은 수의 동물을 소비한다. 이것은 확실히 동물들에게 도움이 된다. 동시에 당신 자신에게도 유익하다. 가치관과 행동이 전보다 훨씬 조화를 이루는 걸 느낄 테니까. (p.202)



나는 폭력이 싫다. 폭력적인 것과 먼 삶을 살겠다는 내 가치관과 행동이 조화를 이루려면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나는 동물들의 고통을 짐작한다. 그러므로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나는 단지 인간에게 고기를 제공하기 위해 태어나고 살아가는 동물들의 삶이 부조리하고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나는 동물들의 존재 의미가 자신들의 존재 그 자체에 있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육식에서 멀어질 필요가 있다. 아직 '채식주의자가 되겠다'고 말할 수 없는 스스로의 한계를 느끼지만, 할 수 있는 만큼을 하면서 살아가겠다.




이 책에는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책이 언급되는데, 그 내용이 좋아서 읽고 싶어졌다. 내 책장 아직 읽지 않은 책들중에 트라우마가 있다는 걸 아는 나는, 얼른 가서 책을 꺼내들고 이 트라우마가 그 트라우마인가, 그러니까 주디스 허먼의 트라우마인가를 확인해 보았다. 맞았다. 와- 읽고 싶은 책을 미리 준비해둔 나란 녀자.. 역시 책은 일단 사두고 볼 일이다.


















인식에서의 이런 차이점들은 우리의 ‘스키마(schema, 圖式)‘ 때문이다. 스키마란 우리의 신념과 생각, 인식, 경험을 구조화하는-그리고 역으로 그것들에 의해 형성되는 -심리적 틀을 이른다. 스키마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정보를 자동적으로 정리하고 해석한다. 예컨대 ‘간호사‘라는 단어를 들으면 아마도 흰 가운을 입고 병원에서 일하는 여성을 떠올릴 것이다. 간호사 중에는 남자도 있고 흰 가운을 안 입는 사람도 있으며 병원 밖에서 일하는 사람이 적잖음에도 불구하고, 다양한 환경에서 여러 유형의 간호사들을 자주 접하지 않는 한 우리의 스키마는 이런 일반화된 이미지를 고수한다. 일반화는 스키마가 자기 고유의 기능을 해낸 결과다. 우리에게 끊임없이 다가드는 엄청나게 다양한 자극들을 검토하고 해석한 뒤 일반적 범주(category)들에 나누어 넣는 일 말이다. 스키마는 요컨대 정신적 분류체계다.
- P16

우리는 동물을 포함한 모든 대상에 관해 스키마를 갖고 있다. 가령 동물은 포식동물과 그 먹이가 되는 동물, 유해동물, 애완동물, 또는 식용동물 따위로 분류된다. 우리가 특정 동물을 어떻게 분류하느냐에 따라 우리와 그것의 관계-사냥할지, 도망칠지,박멸할지,사랑할지,아니면 먹을지-가 결정된다. 이 범주들 사이에 중복이 있을 수도 있다(포식동물의 먹이인 동시에 우리의 식용동물일 수 있다). 그러나 고기와 관련해 생각하는 한 대부분의 동물은 식용이거나 아니거나 둘 중 하나다. - P16

어떤 면에서, 채식주의가 육식주의보다 먼저 이름을 얻은 것은 당연하다. 주류에서 벗어난 이데올로기들은 알아보기가 더 쉬우니까. 그러나 육식주의보다 채식주의에 먼저 이름이 붙은 데는 보다 중요한 또 하나의 이유가 있다. 확고히 들어선 이데올로기가 그 상태를 유지하는 주된 방법은 제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이다. 그리고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남아 있는 주된 방법은 이름 없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름을 붙이지 않으면 그것에 대해 말할 수 없고, 말할 수 없으면 의문이나 이의를 제기할 수도 없으므로. - P40

우리는 사회의 주류를 이루는 생활방식이 보편적 가치를 반영한다고 보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가 보통 또는 정상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다수의 신념과 행동양식에 지나지 않는다.
예를 들면, 과학혁명 이전에 유럽의 주류를 이룬 신념 중에는 하늘이 지구를 에워싸고 도는 천구(天球)들로 이루어졌으며 지구는 우주의 고귀한 중심이라는 믿음이 포함되었다. 이 믿음은 너무나 확고해서 코페르니쿠스나 그 후의 갈릴레오처럼 반대 주장을 펴려면 죽음을 무릅써야 했다. 그러니 우리가 이르는 바 주류라는 것은 이데올로기의 다른 이름-지극히 광범하게 퍼지고 확고히 자리 잡아서 그 가정과 관행들이 상식으로 여겨지는 이데올로기를 지칭하는 다른 방식-일 뿐이다. 그것은 의견이 아니라 사실로 간주되고, 그 관행은 선택되는 게 아니라 주어진 것으로 여겨진다. 즉 규범이며, ‘원래 그런 것‘이다. 육식주의가 지금까지 이름을 얻지 못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P38

이데올로기가 확고히 자리 잡았을 때는 눈에 보이지 않게 마련이다. 그 한 예가 가부장제다. 이는 남성성을 여성성보다 더 가치 있게 여기고 여성보다 남성이 사회적 권력을 많이 갖게 만드는 이데올로기다. - P39

채식주의자들은 늘 자신의 선택에 대해 설명해야 하고, 먹는 음식을 옹호해야 하며, 다른 사람이 불편해하는 데 대해 사과해야 한다. 사람들은 고정관념으로 그들을 보면서 히피나 섭식장애자로 규정하는가 하면, 심지어 반인간적인 사람으로 여기기도 한다. 채식주의자가 가죽 제품을 걸치면 위선자 소리를 듣고, 일절 착용하지 않으면 순수주의자나 극단주의자로 치부된다. 이처럼 그들의 깊은 감수성은 육식주의 세상의 온갖 편견과 도발에 끊임없이 부대끼고 상처받는다. 육식주의에 순응하여 가장 저항이 적은 길로 가기를 거부하고 소수자로 사는 일은 무척이나 힘들다. - P146

궁극적으로, 증언하는 일에는 어느 한쪽을 편드는 용기가 필요하다. 대규모의 폭력 앞에서 우리는 불가피하게 희생자 아니면 가해자의 역할을 맡게 된다. 주디스 허먼은 모든 방관자는 행동을 하거나 하지 않음으로써 결국 한쪽 편을 들 수밖에 없으며, 도덕적 중립이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노벨 평화상 수상자이다 유대인 대학살의 생존자인 엘리 위젤(Elie Wiesel)은 이렇게 지적한다. "중립은 압제자를 돕지 절대로 희생자를 돕지 않는다. 침묵은 괴롭히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결코 괴롭힘을 당하는 자에게 용기를 주지 않는다." 증언하는 행동을 통해 우리는 주어진 역할에 안주하지 않고 스스로 역할을 선택할 수 있게 된다. 희생자와 함께 서기를 택한 사람들이 고통을 받게 될지라도, 허먼이 말하듯이 그들에게 "더 이상의 영광은 없다." - P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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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12-16 1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으면 한동안은 고기를 멀리하게 되더라고요. 채식과 관련한 책 중 이 책이 저를 가장 오래 반육식주의자로 만들었던 것 같아요. 휴.... 그러나 그것은 결국 사회생활하는 동안 꺾이고 말았습니다. -_-;;;

우리나라처럼 경직된 사회에서는 회사에 채식주의자가 있다는 건 다른 누군가를 불편하게 만드는 행동이더라고요. 저 사람 때문에 회식 메뉴도 마음대로 못 정하고, 점심 때도 눈치봐야 하고 등등. 다들 무언의 압박! 페미니즘처럼 채식주의는 이 사회에서 누군가를 여러 가지로 불편하게 만들기에 환영받지 못하는 것 같아요. 그러나 그럼에도 그게 옳다고 생각하면 가아지요.그 불편함이 세상을 좀 더 좋게 만든다면야..... 그러나 저도 다시 고기를 먹고 있어서... 채식주의자의 길은 너무나 힘드네요. 하하하;;;

고기 먹고 싶을 때 가끔 이 말을 떠올립니다. 미셸 투르니에 <외면일기>에 나왔던 표현 같은데, 그의 접시에 담긴 비프스테이크를 바라보며 한 채식주의자가 이렇게 말했답니다. ˝당신은 상처를 먹는군요.˝

다락방 2019-12-16 12:13   좋아요 1 | URL
다른 책을 더 안읽어도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이 책은 강력했어요. 굳이 알고 싶지 않아 외면했는데 이렇게 알게 되어버리고 말았네요. 저 역시 채식주의자가 있다고 하면 메뉴 선정할 때 스트레스를 받는 편이었거든요. 너 때문에 이것도 못먹고 저것도 피해야 하고.. 하면서요. 이 책 읽으면서 그건 제가 사회에 페미니스트로 존재하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다수에게 불편한 존재. 그러나 저는 제가 옳다고 믿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고요.

저는 잠자냥 님처럼 반육식주의자로 지내지는 못할 것 같아요. 그러니까 아주 그렇게 되지는 못할것 같고, 그러나 인지하는 만큼 지금보다 좀 더 멀어지는 삶을 사는 쪽으로 방향을 돌릴 수는 있다고 생각해요. 시간이 지나 또 희미해질지도 모르지만 그 때는 육식의 성정치를 사서 읽어보면... ( ˝)

저는 지독한 육식주의자여서 채식주의자들을 되게 불편해하는 사람이었는데요, 이제는 그 신념에 동의하는 사람 정도로 저를 조절할 수 있는 정도까지는 온 것 같아요. 그래도 갈 길이 멀죠. 아무튼 학대와 폭력을 좀 더 줄이는데 영향을 미치는 사람이 되고 싶어요. 머릿속에서는 완전히 멀어지라고 말하고 있는데 저는 스테이크의 맛을 아는 사람이라 너무 괴롭네요 ㅠㅠ

2019-12-16 14: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6 15: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6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12-17 08: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단발머리 2019-12-16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하이치킨버거랑 만두, 치킨 때문에 완벽한 채식주의자가 될수는 없겠지만
삼겹살과 스테이크, 삼계탕은 조금씩 줄여가고 있어요, 저는요.
우유랑 달걀이 최우선 과제인데 그건 아직 성장기 아롱이 때문에 자꾸 미뤄지네요 ㅠㅠ
쉽지 않은 일이고. 맞아요, 많은 사람들이 불편해할 수 일이기는 해요. 하지만 사회가 변하고 있으니까 그것도 좀 나아지지 않을까 싶어요.
중요한 건 제 자신의 실천인데, 저도 <육식의 성정치> 읽고 한 두주 열심히 실천하다가.... 에궁...

다락방 2019-12-17 08:05   좋아요 0 | URL
저도 저 스스로를 채식주의자로 만들지는 못할것 같고요, 갑자기 채식주의자가 되는 것도 저한테는 너무 힘들 것 같아서,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고통스러웠음에도 불구하고, 천천히 할 수 있는만큼만 하자, 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이 책 읽다 보면 소는 소대로, 닭은 닭대로, 돼지는 돼지대로, 계란은 계란대로 못먹겠는데 말이죠 ㅠㅠ
저는 그나마 우유는 안먹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우유는 제가 소화를 못시켜서..
아무튼 혼자 먹는 점심에는 항상 고민을 해서 메뉴를 선정해야겠어요. 어제도 고민하다가 마라탕 먹었고, 오늘은 콩나물국밥 쪽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른 메뉴는 더 뭐가 있는지 차근차근 봐야겠어요. 저는 최소한 ‘혼자 있을 때만이라도‘ 고기를 먹지 말자, 라고는 생각하고 있는데, 그래도 스테이크가 포기가 안될것 같아요. 저는 혼자 먹는 스테이크를 너무 좋아해서 ㅠㅠ

저도 육식의 성정치 읽고 싶으면서도 계속 구매를 망설이는 게, 그거 읽고 나면 또 후폭풍이 장난 아닐까봐..

육식의 성정치 아직 읽지도 않았지만, 이 책만 읽고서도 채식주의자와 페미니스트를 따로 떼놓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어휴...

clavis 2019-12-17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갑지기 든 생각인데, 논술보는 친구들이 락방님 글을 많이 읽으면 좋을 것 같아요! 좋은 글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12-17 14:17   좋아요 1 | URL
아니 클래비스님 무슨 말씀을 그렇게 하셔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저는 논술과 거리가 먼 사람이고 스스로도 논리적이지 못하다고 생각해왔는데 갑자기 논술 보는 친구들이 읽어야 한다 하시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너무 감동이네요. 오늘의 감동 스티커 드립니다. 클래비스님은 항상 저를 너무나 좋게 봐주시지만 아무튼 오늘의 감동 ♡

심술 2019-12-17 16: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디선가 읽었는데 앞으로 생명공학이 조금만 더 발달하면
세포분열 기술로 고기를 인공생산할 수 있다고 하네요.

동물 죽이지 않고서도 안심,등심,삼겹살,닭다리를 실험실에서 만들어내게 된다고요.

그 때가 오면 맘놓고 죄책감 없이 스테이크와 삼계탕을 먹게 되겠죠.

다락방 2019-12-17 16:38   좋아요 0 | URL
그 때가 빨리 와서 스테이크 좀 자주 먹고 싶네요 ㅠㅠ
전 지금 간짜장이 너무 먹고싶어서 .. 내일은 간짜장 먹을건데, 그런데 고기를 빼달라고 할까, 그 정도쯤은 그냥 허락할까 엄청 고민중이에요. 어차피 소스에 들어있는건데 뭘 빼달라고 해, 그냥 먹자.. 로 기울고 있긴 하지만.. 하아- 간짜장이 너무 먹고싶어요 엉엉 ㅠㅠ

Jeanne_Hebuterne 2019-12-22 04: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락방님, 고양이들과 함께 살다가 보니 채식주의까지는 아니지만 고기를 확 줄였는데요, 이 글 반가워요. 오랜만에 와도 등대처럼 늘 있는 다락방님 서재도 좋고요.
주변환경도 한몫 한 것 같아요, 제가 고기를 줄이게 된 건. 대체품이 있다는 것, 같은 지점을 지향하는 사람들이 곁에 있다는 것, 선택지가 다양하다는 것 등의 환경의 역할도 있어요. 유제품을 넣지 않는 음식, 동물실험을 하지 않은 화장품, 내가 장악할 수 있는 정도의 식단이요.
네,, 전 스테이크도 먹고, 생 굴도 먹고, 연어도 먹고, 하프앤 하프를 커피에 곧잘 넣어 먹는 사람이지만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뉴요커에서 했던 말, 요즘 사람들은 고기를 너무 자주 많이 먹는다, 이 말이 엑셀이 되었달까요.
타자의 고통을 내가 감수한다는 그런 문제로 식단과 동물실험, 동물보호 문제를 생각중인 요즘이어요.

다락방 2019-12-22 17:29   좋아요 0 | URL
쟌님, 저는 그래서 궁극적으로 나아갈방향은 채식이 아닌가 합니다만, 그러나 제가 너무 약하고 간사한 인간인지라 제가 거기까지 닿을 수는 없겠다는 생각을 해요. 이 책을 읽으면서 충분히 고통스러웠음에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삼겹살 먹고싶다는 욕망은 불쑥 튀어 나오거든요. 그래서 이 글에 쓴것처럼, 줄이는 것으로 방향을 잡아보고자 해요. 의식적으로 혼자 먹는 식사에서는 고기메뉴를 좀 삼가해볼 예정입니다. 그정도쯤은 조금의 노력으로도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요. 조너선 사프란 포어가 뉴요커에서 했다는 말은 저를 겨냥한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제가 너무 고기를 많이 먹어온 게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 아예 안먹는 건 아니더라도 조금 줄이는 것으 해볼만하지 않은가, 그래야하지 않은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한 곳에 오래 있으면요, 쟌님, 좋은게, 오랜만에 오는 누구와도 다시 만날 수 있다는 거에요. 이렇게 쟌님이 오시지 않았습니까!

noomy 2019-12-24 12: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혼이 듬뿍(?) 느껴지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저는 예전에 피터 싱어의 ‘동물 해방‘을 읽고 의식과 영혼에 큰 균열이 간 후로 나름 채식과 절식을 하려고... 하려고... 하려고... 매 찰나 노력하는 중입니다.-_-;; 마치 죽비를 든 싱어 형님이 떠오르는 그의 글은 ‘고기를 먹는 이유는 단지 고기 맛을 즐기기 때문‘이라며 그렇게 비효율적이고 비윤리적인 육식을 꼭 해야 하냐며 어제도 식탁 위 제육볶음으로 가는 저의 손끝을 사정없이 내리 치십니다. 아~ 정말 미칠 듯이 힘듭니다. 이놈의 식탐, 육식... 인식과 실천의 공극은 짧을수록 좋다지만 이 문제는 죽기 전까지 실천해야 할 일이니 조금 느긋하게 천천히 같이 갑시다~^^ 기회가 되면 저 책도 한번 읽어볼게요. 그나저나 클린미트는 언제쯤 실용화가 될까요?

다락방 2019-12-24 12:24   좋아요 0 | URL
조금 느긋하게 천천히 가야 저도 엇나가지 않게 잘 갈 수 있을 것 같아서 일단 해볼 수 있는 것들을 해보려고 합니다. 이를테면 며칠전에 콩나물국밥집에 가서는 수란을 주는데 안먹었어요, 하고 바로 반납했습니다. 만약 제가 반납하지 않고 그대로 식탁에 둔다면 어차피 그것은 소비되는 것일테니까요. 소비를 줄여야 결국 학대되는 동물들이 줄어들테니, 아예 식용되기 전에 삼가야 할 것 같아서요. 어제는 돼지고기 김치찌개 집에 가서 ‘고기 빼고‘ 달라고 했습니다. 덕분에 두부랑 김치를 더 많이 넣어주셨어요. 하하하하.

저는 제가 삼시세끼 매번 다 잘 지킬 수는 없다고 생각해서 지금은 일단 혼자 식사할 때만이라도 고기를 먹지 말자고 생각하고 있어요. 엊그제는 징버거버가 너무 먹고 싶었지만 꾹 참고 대신 진미채김밥을 사먹었습니다. 극히 미미하겠지만, 그래도 제가 혼자 먹는 밥에서라도 소비를 줄이면 어떻게든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저도 천천히 꾸준히 가려고 해요. 기운냅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