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몬 베유'는 아우슈비츠 생존자이면서 여성이다. 그녀는 홀로코스트기념재단의 회장을 맡았으며, 여성으로 살면서 프랑스에서 보건부 장관으로 임명되기도 했다. 이 책,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은 그런 그녀가 자신이 가지고 있는 그 많은 정체성을 대변해 연설한 기록들을 싣고 있다.
이 책이 이번 9월의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이기 때문에, 나는 얼른 이 책의 <3부 여성해방을 위한 투쟁>과 <4부 더 나은 사회를 위한 투쟁>을 읽고 싶다. 얼른 내가 생각하는 본문으로 나아가고 싶은 마음이 커서, 이 책의 목차를 들여다보면서, 1,2부를 나중으로 미루고 3,4부를 먼저 읽을까, 에 대해서도 고민했다. 그러나 1,2부를 미뤄둔다면 아마도 읽지 않고 넘길 확률이 클 것 같아, 차근차근 순서대로 읽기로 했다.
1943년 9월 독일 점령이 시작되면서 체포되는 친구들이 생겨났습니다. 학교를 떠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숨어 지내다 열흘 뒤 가족과 함께 체포되었습니다. 드랑시에 잠시 억류되어 있다가, 목적지도 알지 못한 채 가축 수송용 열차에 실려 아우슈비츠로, 보다 정확히는 비르케나우로 끌려갔습니다. 몇 시간 뒤 우리는 열차를 타고 떠났던 모든 이들은 이미 가스실에서 죽임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p.53)
그녀는 2003년 3월 11의 연설에서 자신의 경험에 대해 말한다.
자신이 저지른 잘못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유대인이라는 이유만으로 가축 수송용 열차에 실려가고, 그리고 그 뒤에 죽음이 찾아온다는 걸 알게 된 사람은 어떤 마음으로 세상을 살아갈 수 있을까. 거기에서 살아남는다는 건 어떤 의미일까. 살아남는다는 것, 같은 민족을 잃고 친구를 잃고 가족을 잃고 살아남는다는 것.
매 연설에서 시몬 베유는 이제 그 당시의 생존자들이 차츰 사라지고 있다는 사실에 대해 언급한다. 지금 살아서 그것을 증명하는 이들이 끊임없이 말하지 않는한, 그 일은 묻혀질 수도 있을테니까. 그렇게 그녀는 연설하고 연설하고 또 연설한다.
600만 명의 유대인들은 학살당했고, 역사에 이 페이지는 쓰였으며, 그것은 절대 지워져서는 안 됩니다.
그렇다면 증인들에게 육성으로 이야기를 듣고, 그들과 직접 만나 솟아오르는 감정을 이제 곧 더 이상 느낄 수 없게 된다면, 우리는 역사와 역사가들에게 무엇을 기대할 수 있을까요? (p.76)
이 책의 51페이지에는 '포그롬' 이란 단어가 언급된다. 아니, 이 단어는 내가 《페미사이드》에서 보았던 단어가 아닌가!
유럽의 유대인 대학살 의지와 그 실행은 인류사에서 영원한 단절로 남을 것입니다. 이 죽음의 이데올로기, 이 대학살에 대한 의지는 홀로코스트가 일어나기 전 수 세기 동안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와 종교재판, 게토로의 격리, 포그롬을 정당화한 종교적 불관용과 증오를 통해 매우 광범위하게 유지되어온 반유대주의 전통에서 그 뿌리를 찾을 수 있습니다. (p.51-52)
포그롬:인종이나 종교를 이유로 행해지는 조직적인 박해와 학살을 의미하는 러시아어로, 특히 권력의 묵인 아래 행해진 유대인에 대한 약탈 및 대량 학살을 가리킨다. (p.51 각주)
시몬 베유의 연설에서는 유대인 대학살을 다룬 예술 작품에 대한 언급이 간혹 보이는데, 시몬 베유가 그중 성공적이라 생각하는 건, '아트 슈피겔만'의 《쥐》였다.
제가 생각하기에 성공을 거둔 도적적인 작품으로서 아트 슈피겔만의 만화 『쥐』를 언급하고 싶습니다. 자기 자신의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작가의 통찰력과 감수성은 대중문화 중에서 가장 접근이 쉽고 오락적인 매개체를 이용하여 홀로코스트를 동물의 세계에 겹치는 과감한 시도를 가능하게 했습니다. 예술, 픽션, 구전 역사, 민속학의 교차로에 있는 만화 『쥐』는 수용소에 갇힌 영혼의 깊은 공포를 성공적으로 보여주고 유대인 대학살 사건에 비극적인 성격을 부여한 작품입니다. (p.42)
『쥐』 라면, 오만년전에 1권을 읽었던 것 같은데, 시몬 베유의 언급이라니, 다시 한 번 읽어봐야겠다.
지금은 이 책의 초반이라서 2002년과 2003년에 그녀가 연설한 연설문들을 읽고 있다. 아침 출근길에 그녀가 2002년에 작성한 연설문에 대해 읽으면서, 2002년에 나는 무얼 했던가, 생각해 보았다. 2002년, 그 때 아마 지금의 회사에 입사를 했던 것 같다.
이곳에서의 지금의 삶과 다른 곳에서의 다른 시기의 삶을 비교하는 건 딱히 유의미한 건 아니지만, 시간이 모두에게 각자 다르게 흘러가고 있음에 대해 생각했다. 그런 한편, 아우슈비츠에서 가족을 잃고 살아남아 다른 사람들에게 그 잔인한 역사의 증거를 보여주려 하는 사람이라는 게 새삼 위대해 보였다. 이 사람은 어떤 운명을 타고난걸까. 어떤 운명을 타고나서 이런 일을 겪고, 살아서 그걸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고, 옳은 방향을 가자고 얘기를 할 수 있는걸까. 그 삶만으로도 벅찬데, 나중에는 프랑스의 장관이 되어서 베유법을 만들어낸다. 한 인간의 삶이 어떡하면 이토록 꽉 채워질 수 있을까. 가끔 나는 운명론자가 되는데, 이럴 때 그렇다. 시몬 베유는 그런 운명으로 태어난 게 아닐까. 어떤 일들을 겪고 살아남아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증거하고 정의로운 쪽에 힘이 실리도록 하는 역할을 부여받은 게 아닐까.
나치의 유대인 학살이야 모르는 사람들이 없겠지만, 그걸 이렇게 생존자의 입으로 듣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책장이 쉽게 넘어가질 않아, 이 책을 내가 과연 다 읽을 수 있을까 벅차기까지 하다.
그러나 내가 이 책을 읽는 것은 매우 잘하는 일이란 생각이 들고, 그래서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를 잘했다고 또 생각했다. 나는 지금 내가 서있는 곳까지 왔고, 여기까지 오기에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가 큰 도움이 되었다. 만약 이 같이읽기가 아니었다면 나는 어디쯤에 서 있게 됐을까?
9월이 다가기 전에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을 다 읽도록 해야겠다.
자, 같이 읽는 여러분, 힘내세요!! 빠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