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가기 전날밤, 짐을 챙기다가 마침 분리수거를 하는 날이라는 게 생각나 부랴부랴 분리수거할 것들을 챙겼다. 잠깐 쓰레기를 버리러 다녀오는 것이니 핸드폰은 두고 갔다. 엄마, 분리수거 하고 올게, 말하고 현관문을 열고 나간 뒤에 엘리베이터를 탔는데 얼마 안내려가 덜컹, 멈춰버리고 말았다. 엘리베이터의 숫자는 1을 가리키고 있었지만 내가 볼 수 있는 건 시꺼먼 벽이었다. 아마도 층과 층 사이에 걸려 멈춘 것 같았다. 나는 핸드폰도 없는데..
일단 엘리베이터의 비상벨을 눌렀는데 경비아저씨가 응답하셨다. 제가 지금 엘리베이터에 갇혔어요, 핸드폰도 없어요, 라고 말씀드렸다. 경비아저씨는 급히 119에 연락하겠다 하시며 응답을 끊으셨다. 그리고는 또다른 사람에게 연결이 되었는데 엘리베이터 업체인지 어디인지 모르겠더라. 보이는 일련번호를 일러달라 얘기하길래 이게 맞냐며 보이는 번호를 알려주었다, 그리고 내가 갇혀있다고 이 사람에게도 알렸다. 잠시후 경비아저씨로부터 비상벨로 연락이 왔다. 119 불렀으니 곧 올거에요, 당황하지 마세요 곧 올거에요, 라고 말씀하셨다. 알겠다고 답한 뒤에 '엄마한테 말해달라 할까' 하다가, 그건 좀 더 기다려보자 생각했다. 엄마가 발 동동구르고 걱정할 게 눈여 보여서.
119에 신고를 했고 올거라 했으니 나는 그분들이 올 거라는 걸 알고 있었고 또 내가 여기에서 나갈 수 있을 거라는 걸 의심하진 않았다. 다만 그게 '언제'일지를 몰라, 그건 좀 답답했다. 금세 오겠지, 내가 살아나가는 건 너무 자명한 사실이야, 그치만 언제? 오는 건 금세라 해도 만약 이 문을 여는 게 시간이 걸린다면... 하는데까지 생각이 미치자, '나오기 전에 화장실 갔다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더라. 만약 하염없이 지체되는데 내가 화장실이 급하다면... 아아 너무 끔찍한 거다.
얼마나 기다렸을까, 바깥이 웅성웅성했고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바깥에서 왔으니 걱정말라고 안에 몇 명 있느냐고 물었다. 한 명이요, 저 혼자에요! 말했다. 잠시후 어렴풋이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엄마가 맞나? 나는 크게 "엄마?" 하고 불러보았다.
"응, 엄마 여기있어!"
하는데, 그 때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나는 무섭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엄마가 여기있다고 말하는 순간 찡- 하는 게.. 야, 내가 나이가 몇인데, 다 큰 여자는 울지 않아. 곧 119 구급대원 분들이 나를 꺼내줄텐데 다 큰 여자가 거기서 울고 있으면 안된다, 눈물을 삼켰다. 엘리베이터 회사가 어떻게 돼요? 바깥에서 누군가 물었는데 쉽게 눈에 띄질 않더라. 그러다가 긴 영어를 보고 이건가 싶었을 때 바깥에서 혹시 ***** 에요? 물었고, 나는 그렇다고 답했다. 그렇게 또 얼마간을 웅성웅성 부스럭부스럭 문을 여는 조치가 취해지는 것 같더니 드디어 문이 열렸다. 문이 열렸는데, 바로 바깥으로 나갈 수가 없게끔 엘리베이터와 바닥 사이에는 거리가 좀 있었다. 좀 아찔했어. 이걸 그냥 걸어나갈 수도 없고, 내가 신고 있는 건 쪼리인데.. 폴짝 뛰어야 하나..망설이면서 이 재활용 쓰레기들을 들고 뛰어야 하나 갈팡질팡 하는데, 구급대원 분들이 '사람 먼저 나와야 돼요, 사람 먼저' 이러면서 양쪽에 서시더니 자신들의 손을 잡으라고 하셨다. 나는 그렇게 두 분의 손을 양쪽에 잡고 폴짝 뛰어내려서 무사히 나올 수 있었다. 나와서는 연신 감사하다며 그 분들에게 인사했고, 엄마도 옆에서 덩달아 감사하다고 몇 번이나 인사하셨다. 그리고 아무렇지도 않게 임무를 마치기 위해 재활용을 하려 가려는데, 밖에서 이 과정을 기다리고 계시던 주민분들이 놀랐을텐데 청심환이라도 먹으라고 하더라. 나는 괜찮아요, 엄마 분리수거 하고 올게~ 하고 가서 아무렇지도 않게 분리수거를 했는데, 집에 돌아와 침대에 앉으니 손이 덜덜덜 떨렸다.
여름 휴가로 지난 8월에 뉴욕에 갔을 때에는 시카고에서 총기난사 사건이 일어났었다. 시카고와 뉴욕의 거리를 알지 못하는 엄마는 아아 미국이라는데, 미국가 있는 딸을 걱정하셨다. 뉴욕과 시카고가 거리가 있다한들 나였어도 그곳에 있을 누군가를 걱정했을 터.
이번에 엘리베이터 사건을 겪으면서, 어떤 위험들이 어떻게 나를 빗겨가고 또 어떤 위험들이 나를 찾아드는걸까, 에 대해 생각했다. 엘리베이터 사고처럼 나는 다른 어떤 이들에게 알게 모르게 빚을 지고 살고 있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런 한편 내 삶은 언제 어디서 끝나게 될 수도 있는 것이겠구나, 생각을 했고. 내가 금세 나갈것 같으니 걱정하지 않게끔 엄마에게 이 소식을 알리지 말자고 생각한 건 내 실수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와서 나를 꺼내줄 거라는 걸 확신했지만, 그 짧은 시간동안 사람의 운명이란 것에 대해 생각했다. 어떤 위험들이 이 순간에도 나를
빗겨가고 있지만 또 어떤 것들이 나를 찾아들지도 몰라.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야할까. 즐겁게, 신나게 사는 것 말고도 무언가
더 해야하지 않을까. 살아있는 동안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일들을 향해 움직이고 행동하는 것들도 필요하지만, 사랑하는 사람들과
충분히 사랑하면서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랑을 더 마음껏 표현해야지, 라는 생각.
한 점 아쉬움이 남지 않도록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고 싶다.
사랑은 모든 것의 답이 되는 것도 아니고 항상 답이 되는 것도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하며 살아야지. 최선을 다해서, 열심히.
힘껏.
내가 사랑받고 있구나, 라는 걸 느낄 수 있게끔 사랑해야지.
뉴욕에 머무르던 그 때, 같이 갔던 동행과 총기 사고에 대해 얘기했었다. 자신이 불이익을 당했다고 생각하는 건 총기사고의 용의자들 뿐만이 아닐텐데, 차별과 억압을 더 크게 느끼는 건 여자들이 강할텐데, 그런데 왜 총기사고를 저질렀다는 여자는 좀처럼 없을까? 총기 소유가 허가된 나라에서 사는 건 여자나 남자나 마찬가지인데, 이민자나 히스패닉으로부터 자신들이 무언가 뺏긴다고 생각한다면 그 생각도 남자만 하는 건 아닐텐데. 남자로부터 억압당한다는 생각을 여자도 하고 있는데 왜 여자로부터 무시당한다고 남자들은 여자를 죽일까? 왜 같은 나라에서 살면서 총기사고를 저지르는 건 다 남자인걸까, 에 대해 동행과 의문을 가졌던거다. 시카고에 총기사고 있었다고 우리 가족들이 나 걱정했네, 라고 동행과 얘기하면서, 그런데 왜 총기사고는 항상 남자들이 일으키는걸까,하니 동행 역시 '그러게, 항상 남자들이었네' 라고 말했다.
그리고 시사인을 읽었다. 나처럼 생각하는 사람이 나뿐만은 아니었다.
<범인은 왜 항상 남자인가>
빗겨가는 것들이 있고 닥쳐오는 것들이 있다지만, 변화가 온다면 막을 수 있는 것들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변화를 가져오는 건 묻는 것에서 시작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