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본성이 오만한 사람이다. 베이스가 오만이야. 어제 아침에도 친구와 이에 관해 얘기했지만, 본성이 오만한 자인데 가끔 겸손을 배울 때가 있다. 수시로 겸손을 배워서, '아아 내가 오만했구나 이렇게 오늘도 겸손을 배운다' 하지만, 허구헌날 그 겸손을 배우다가만 끝난다.


이 책을 읽기 전의 나는 오만했는데, 내가 오만했다는 사실을 또 잊고 있었다. 주변 사람들로부터 이 책이 그리고 이 저자가 매우 좋다는 얘기를 익히 들어왔지만, 사실 이 저자와 이 책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렇게 책을 펼쳐서 언제나 그렇듯이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읽었다. 작가소개에서 그가 서울대를 나오고 현재 변호사이며 장애인이라는 걸 알게 됐다. 아, 그런 사람이구나.



그렇게 책을 읽으면서, 초반부터 참 좋구나, 읽으면서 60쪽쯤 읽었을 때였나, 왈칵 눈물이 차올랐다. 특별한 이야기는 아무것도 없었다. 보통의 사람들이 하는 일반적인 이야기들로 가득했다. 그러니까 내가 다 아는 이야기, 내가 늘 생각하는 이야기, 내가 늘 말하는 이야기들 이었다. 특별할 건 아무것도 없었는데, 그저 부끄러웠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책날개의 작가소개를 읽고 넘겼다고 생각해왔지만, 사실은 오만한 나를 무시하고 넘어가려 했구나, 라고. 이 책을 읽으면서야 비로소 나 역시도 '오, 장애인인데 (장애를 극복하고) 서울대도 가고 변호사도 했구나, 치열하게 살았네' 라는 생각을 했다는 걸 자각했다. 내가 그랬다. 그가 서울대를 나온 것 그리고 변호사를 하게된 것에 '장애인인데도 불구하고' 를 가지고 있었구나. 내가 그랬다.



이 책에서도 언급하는 것처럼, 약자의 편에 서고자 말하고 그들을 위해 행동하자고 말하면서 그러나 내 안에 약자에 대한 혐오감과 얕봄이 있었던 게 아닌가. 오늘날의 나를 미래의 내가 후회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말과 행동에 있어서 언제나 부끄럽지 않을지 물어본다고 하지만, 실상 실격당한 자들을 위해 내가 구체적으로 무언가를 질문한 적이 있던가. 나 역시 시혜적인 시선으로 그들을 바라보고 있었던 게 아닌가.



책을 읽는 일은 이래서 좋고 이래서 필요하다. 나는 자꾸 내 본성대로 돌아오려는 인간이지만, 이렇게 책을 읽을 때마다 아니야, 라고 나를 채찍질할 수 있다. 아니야, 겸손해져, 겸손해져, 겸손해져야해. 내가 아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 나의 옳음이 모두의 옳음이 아닐 수도 있다는 것을 언제나 책이 알려주곤 한다.



이 책은 모두가 말하는 것처럼 좋은 책이었다. 생각할 거리가 얼마나 많은지, 인용문을 가져오자면 페이퍼가 아주 길어질 것이다. 그러나 내게는 아쉬운 지점도 있다. 이건 저자의 성격이나 성향에 관한 것이니 그것이 '단점'이 될 수는 없겠지만, 또 독자로서 작가에게 갖는 아쉬움과도 거리가 좀 있지만, 나는 이 책이 그리고 이 저자가 지나치게 선하다고 생각한다. 정치적으로 옳은(politically correct)것을 지향하는 것이야 아마 대개의 사람들이 그렇겠지만, 그리고 선한 것은 나쁜 것이 아니지만, 뭐랄까, 이렇게까지 선할 필요는 없잖아, 라는 생각이 들어버리는 거다. 사회학과에 들어가 공부를 하면 모두들 이렇게 깊게 생각할 수 있는걸까, 싶을 만큼 저자의 사고는 매우 깊었고 그래서 내가 이렇게 좋은 책을 읽을 수 있는 것이겠지만, 너무 선하다. 이것은, 노파심에 다시 말하지만, 단점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내가 느끼는 다른 인간의 선함에 대한 아쉬움이다. 나는 기본적으로 인간은 선하다고 믿고 인간이 인간을 결국 구원할 수밖에 없다고 믿는 사람이지만, 그래도 이렇게 선한 건 좀 .. 음.. 답답하단 말이야.




인상적인 구절들을 밑에 밑줄긋기로 올릴테지만, 그중 가장 인상적인 건 누군가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얘기였다. 좋아하는 '이유'에 대한 것.



예를 들어 현오는 X라는 축구팀을 아주 좋아하는데, 그 이유가 X팀이 실력은 별 볼 일 없어도 경기 중에 절대로 반칙을 하지 않고, 늘 상대팀과 팬들을 존중하며, 주어진 조건하에서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라고 해보자. 현오는 자신이 X 축구팀을 좋아하고 응원하는 이유인 그 태도를 삶의 다른 영역에서도 가급적 일관되게 유지하려 할 것이다. 티 나지 않아도 작은 일에 최선을 다하고, 수는 고득점을 맞거나 최고 연봉을 받지 못해도 반칙을 하지 않고, 자신을 지지해주는 사람을 배신하지 않는 삶에 무게를 두는 식으로 말이다. 이렇게 현오는 세상에 관한 여러 가치관, 대응 방식, 태도를 가능한 한 일관성 있게 유지하면서 자기 서사self-narrative를 만든다.

물론 이런 태도가 본래 불공정을 싫어하고 성과보다는 과정에 중심을 두는 타고난 성격이나 기질에서 비롯한 것이니 삶의 모든 면에서 같은 태도가 나오는 것은 당연한 일 아니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그런 면이 분명히 있을 것이다. 하지만 철학자 데이빌 벨레만J. David Velleman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가 과거 인생을 돌아보며 구축한 가상의fictional 자아는 그 이야기의 일관성, 통합성을 유지하기 위해 미래의 우리 선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우리가 스스로 만든 자기 서사의 신뢰성을 위해 그에 맞춰서 행동하고 살아간다면, 가상으로만 존재하던 자아는 실재reality 가 된다. 현오는 자신의 아들이 컨닝을 해서라도 좋은 대학에 합격하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조금은 가지고 있었지만, X팀을 좋아하면서 자신이 일관되게 유지해온 특정한 가치관, 지향, 삶의 태도와 그에 근거해 지금까지 만들어온 이야기(자기 서사) 때문에 절대로 아들의 컨닝을 허용하지 않는 사람이 (실제로) 된다.

이런 자기 서사 만들기는 별 생각 없이 선택하고 행동한 것들을 시간이 흐른 뒤에 돌아보며 진행되기도 한다. 나는 장애를 중심에 놓고 내 삶의 이야기를 만드는 경향이 있다. 내가 연극을 좋아하고, 괴물이 등장하는 영화를 즐겨 보고, 2006년 가을쯤 누군가에게 사랑에 빠져 있던 이유는 내 장애와 아무런 관련이 없거나 관련이 있다 해도 아주 적을 수 있다. 그럼에도 나는 내 삶을 돌아보면서 그렇게 일어났던 개별 사건들을 장애와 관련된 것으로 '해석'한다(연극을 좋아하는 건 어차피 장애인으로서 이질적인 시선을 받는 처지라면 그 삶을 주체적으로 관객의 시선 앞에 두고 싶기 때문이다 등등). 이런 해석을 통해 내 인생에 등장했던 각각의 순간들, 사소하거나 중요했던 하루하루를 커다란 의미의 줄기 아래 재배치하여 나만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간다. 이 인생 이야기는 앞으로 내가 취할 선택들에도 영향을 미칠 것이다. (p.180-182)




위의 글에 동의하면서 나는 엉뚱하게도 내가 좋아하는 '제이슨 스타뎀'과 '안젤리나 졸리'가 생각났다. 나에게는 멘토도 없고 딱히 누군가를 멘토로 삼고 싶은 생각도 없으며 누군가의 빠가 되는 성질도 내게는 없다. 워낙에 티비를 잘 보지 않아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좋아하는 연예인이랄 것도 딱히 없다. 그런데 제이슨 스타뎀과 안젤리나 졸리는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또 오래 좋아하고 있다. 제이슨 스타뎀에 대해서라면 영화에서 다른 등장인물에게 다치지 않았냐고 묻는 장면에서 좋아지기 시작했다. 내가 완전 쑝 가는 장면이었지. 오래전에 알라디너들을 오프라인에서 만날 때면 왜 안젤리나 졸리를 좋아하냐는 물음을 받곤 했다. 그 때마다 '강해보여서', '남자가 없어도 저 혼자 잘나고 잘 살 것 같아서' 라는 답을 했더랬다.


내가 누군가를 싫어하는지가 나를 말해줄 수 있겠지만, 누군가를 좋아하는지도 나를 말해줄 수 있는 것일테다. 현실속 내가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이미지로 판단하는 영화배우들이기 때문에 나는 어떤 점들을 딱히 좋아한다, 그 점에 끌렸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제이슨 스타뎀의 약자를 보호하려 하는 강인함, 안젤리나 졸리의 저 혼자 잘난 강인함. 나는 그런 것들에 끌리고 그런 것들에 끌린다는 건, 필연적으로 내가 그런 사람이 되고 싶어하는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한결같이 나는 쭉, 강함을, 강인함을 보고 있구나.


이것이 나의 결핍이요 이상이구나. 나는 쭉 강인함을 목표로 살고 있었던 거야. 그리고 앞으로도 그렇겠구나. 내가 어떤 이미지로 누구를 좋아하느냐가 바로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말해주는 것이겠구나, 내가 살고자 하는 방향을 가리키는 것이겠구나. 내가 약자를 보호하는 강인한 매력에 끌려 제이슨 스타뎀을, 스스로의 강함이라는 매력에 끌려 안젤리나 졸리를 좋아하는 것은, 나만의 인생 이야기를 써나가는데 어떤 줄기로 배치가 되는 것이겠구나. 어떤 배우를 좋아하는가는 나의 인생에 있어서 그렇게 큰 일은 아니겠지만, 그 배우들을 '왜'좋아하는 지는 큰 축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나처럼 내가 그들을 왜 좋아하는지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는 내가 살아가는 방향을 가리키고 있는 것일테니까. 바로 그 지점들이 내 안에 있어서 나를 형성하고, 나를 형성하는 또 다른 것들과 한데 묶이고 섞이고 엉켜서 지금의 내가 되었겠구나. 내가 현실에서 누군가를 좋아하고 사랑할 때는 '왜' 사랑하는지 구체적인 이유를 댈 수 없을 때가 많지만, 이 책에서 저자가 언급한 것처럼 어떤 팀을 좋아하고 어떤 배우를 좋아할 때 그 이유를 명확하게 댈 수 있는 지점은 나를 말해줄 수 있는 것 같다. 지금의 나는, 그런 내가 걸어와 쌓아둔 모습일테다.





어제는 다정한 알라디너를 만났다. 오래 이곳에서 알고 지냈던 친구.

그 친구는 나의 글을 아주 오래전부터 보아왔는데, 내가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부터 내 글에 좋아요와 댓글이 확 줄어든 것에 대해 언급했다. 내 눈에도 보였으니 네 눈에도 보였겠지? 친구는 내게 물었다.


나는 그렇다고 했다. 페미니즘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상한 댓글들도 많이 달려서 지금은 비로그인 댓글 막아둔 상태고, 친구취소를 한 사람들도 있고, 그리고 무엇보다 좋아요와 댓글의 수가 현저히 줄어들었다, 고. 나를 오래 보아온 친구들 또 알아왔던 친구들은 시간이 갈수록 나의 글쓰기가 더 좋아진다고 말하지만, 그러나 내 글의 좋아요 갯수는 이제 아주 적다고. 예전의 나는 대부분이 좋아하는 글을 써서 좋아요를 잔뜩 받는 알라디너였는데, 지금은 어느 한 쪽의 편을 드는 사람이 되어버려서, 좋아요 갯수에 대해서는 버리고 가야할 것 같아, 라고 나는 말했다. 왜냐하면, 이제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까. 그러자 친구는 내게 말했다.


"돌아갈 수 없지, 너는 이제 너무 멀리왔지."

"응, 나 너무 멀리 왔지."




지금의 내가, 너무 멀리와버린 내가,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도 돌아갈 마음도 없는 내가, 내가 바랐던 나일 것이다. 내가 추구했던 나, 내가 되고자 했던 나. 나는 결국 이 방향으로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아마 그 방향으로 계속 걸을테고. 그러고보면 참 한결같았다. 오래전부터 글에 대한 대화를 지인들과 나눌 때면 '모두가 읽고 좋아할만한 베스트셀러를 쓰기 보다는 소수라도 나를 찾는 고정적인 사람들이 있는 글을 쓰고 싶다'고 했었는데, 나는 결국 내가 원하는 대로 살고있는 것 같다. 그러고보면 참 뭐랄까, 잘 살아... 나는 내가 썩 마음에 든다. 오늘 먹겠다고 어제 앙버터 사서 사무실에 둔 것도 너무 마음에 들어. 어제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텀블러에 뜨거운 아메리카노를 사와서 앙버터랑 먹고 있으니, 크- 이 순간이 천국이다. 만세!!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을 이번 9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로 선정해놓고서는, 시몬 베유 책 세 권 쓸어담아 버린 나도 너무 멋지다. 일단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시몬 베유의 나의 투쟁을 읽을 생각이지만, 얇은 시몬 베유로 기초를 다지고 가야지. 아, 너무 멋져. 난 다 계획이 있구나..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막간 공지를 하자면, 10월-11월에는 보부아르의 《제2의 성》을 시도할 계획이고, 11월에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계속했던 회원들과 만남을 가질 예정이다. 일단 참석이 확정된 멤버는, 꾸준히 참여해주고 계신 쟝쟝님과 블랙겟타님. 아 진짜 이 두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너무 좋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속도는 다르지만 계속 꾸준히 자신들의 속도로 따라오고 계신다. 진짜 좋아합니다. 그리고 나랑 같이 열심히 페미니즘 책 읽고 글 써주고 계시는 단발머리님. 사랑합니다. 나의 구원... ♡



목요일이고, 오늘 핫요가 갈까 말까, 왜냐면 어제 친구 만나고 늦게 들어가서 오늘 피곤해... 가지말까? 앙버터와 커피를 마시고 있고, 책 읽는 거 글 쓰는 거 너무 좋다고 진짜 오천번쯤 생각하고 있다. 으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제이슨 스타뎀과 안젤리나 졸리 너무 좋아! 꺅 >.<





우리가 오믈렛을 좋아한다고 해서 오믈렛이 우리에게 반응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내가 누군가에게 이끌릴 때 그 사람이 나에게 긍정적인 신호로 반응한다면 우리는 더더욱 그에게 이끌리고, 내가 더 크게 이끌리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상대방도 나에게 더 강하게 이끌린다. 이처럼 서로의 반응에 반응하면서 반응은 더더욱 크게 확장되고, 각자의 반응이 향하는 방향은 이제 나하로 수렴된다. 이러한 인간적 상호작용의 특징을 성에 한정할 필요는 없다. - P68

2014년 서울변방연극제에 오른 연극 <독립사건>은 짧고 코믹하지만 의미심장한 상황을 설정한 작품이다. 공연이 시작하면 무대 위에 휠체어를 탄 여성 물리학 교수가 등장한다. 천재 물리학자인 이 교수는 아직 그 존재가 이론적으로만 가정되는 자기단극자라는 입자를 찾기 위해 평생을 연구하지만 실패한다. 그녀는 자신이 생각하는 이론이 완전하지 않다는 좌절감에 자살을 결심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자살하기 직전, 사람들이 결국 자신이 "장애를 비관하여" 죽었다고 평가할까 봐 걱정한다. - P82

저는 생각랬습니다. 내가 자살로 생을 마감한다면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나의 명성과 부, 학자로서의 업적, 나를 존경하는 제자들, 내 저서들 ……. 이런 것과 상관없이 사람들은 생각할 것입니다. 아무리 교수라도 장애를 극복해낼 수는 없구나. 그리고 신문과 찌라시들은 이렇게 말할 겁니다. "명문대 장애인 교수, 장애를 비관하여 자살." 똑똑히 들으세요. 제가 자살하는 이유는 나의 장애, 내 몸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나는 이 고층 빌딩 위에서 나체로 자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내 알몸을 보고 사람들은 내가 내 몸에 대해 어떤 열등감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는 것, 나체로 서 있는 사실을 전혀 불안해하고 있지 않다는 걸 알게 되길 바라면서. - P82

뉴욕대 로스쿨 교수 켄지 요시노Kenji Yoshino는 현대 사회에서 장애인, 소수 인종, 성적 소수자 등을 대놓고 차별하고 배제하는 일은 많이 없어졌지만, 이 사람들에게 주류 집단에 동화同化되기를 요구하는 이른바 ‘커버린covering‘ 압력이 존재한다고 지적한다. 커버링은 말하자면, 자신이 가진 비주류적인 특성을 ‘티 내지 말라‘는 요구다. 여성을 차별하지는 않지만 여성의 몸이 가진 특별한 상황(생리나 출산 등)을 티내지 말 것을 암묵적, 명시적으로 요구하는 조직 문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지만 장애로 인한 특성을 숨기기를 원하는 사회 분위기 같은 것이 그 예다. 켄지 요시노는 커버링에 대한 법적인 대응 방법을 고민하면서, 그중 하나로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reasonforcing conversation‘를 제안한다. 나는 이것으로 개인의 고유성을 무시하는 법체계를 다소나마 개선할 제도적 해결책을 모색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 P199

어려운 말처럼 들리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는 간단한 개념이다. 한마디로 "네가 가진 장애, 성별 등을 티 내지 말라"고 커버링을 요구하는 쪽에서, 왜 그것을 티 내면 안 되는지 엄밀한 논리적 근거를 제시하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는 보청기를 좀 가려줬으면 좋겠어요"라고 어떤 부서의 과장이 청각장애인 부서원에게 지시했을 때, (보통은 과장의 지시에 군말 없이 따르겠지만)왜 그래야 하느냐고 물어보면 아마 "사내 분위기에 위하감을 주니까"라거나 "고객들이 불편해하니까"등의 막연한 이유를 들 것이다. ‘주류‘에 있는 사람들은 어떤 요구를 할 때 그 이유를 제대로 설명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원래 여기서는 이렇게 해"라고 말하면 그만인 경우가 많다. - P200

하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에서는 다수자의 입장에서 아무리 당연해 보이는 이야기라도 그것을 말한 ‘주류 집단‘ 쪽에서 그 말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를 철저히 제시해야 하는데, 켄지 요시노는 법이 이를 강제하거나유도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내가 고등학교에 다닐 무렵까지 선생님들은 추운 겨울에도 교복 위에 겉옷을 못 입게 하거나 머리를 마음대로 기르거나 묶지 못하게 했다. 여기에 반감을 가진 아이가 문제를 제기하면 "너는 꼭 그렇게 하지 말라는데도 머리를 그런 스타일로 길러야겠어?"라는 질책이 돌아왔다.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원칙은 우리에게 이 질문을 뒤바꾸라고 요구한다. 즉 선생님이 학생의 질문에 답하라는 것이다.
"도대체 선생님한테는 내 머리 스타일이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 P200

활동지원서비스를 받고 싶은 장애인이 의학적으로 보았을 때 팔과 다리를 어느 정도 사용할 수 있어 밥을 먹거나 용변을 처리하는 일 정도는 가능하다고 하자. 그렇지만 그는 "머리에 제품을 바르고 넥타이에 짙은 회색 슈트를 입고 외출하고 싶어서"활동지원인을 신청했다. 그의 손과 발은 넥타이를 맬 정도의 작업을 하기에는 장애가 심하다. 법은 의사와 국민연금공단의 입을 빌려 다음과 같이 물을 것이다.
"아니, 왜 꼭 그렇게 넥타이에 슈트를 고집하십니까? 그 정도에 활동지원인을 제공하기는 어렵지요."
하지만 ‘논리적 근거를 강제하는 대화‘의 원칙에 따라 우리는 질문을 바꿔야 한다.
"왜 활동지원인 보조를 받아 넥타이를 매고 슈트를 입겠다는 게 국민연금공단에게 그렇게 문제가 됩니까?" - P201

‘장애 극복‘, ‘불굴의 의지‘ 같은 말은 작은 사회적 성취를 이룬 장애인을 언론이 보도할 때 사용하는 대표적인 수식어이다(그렇기 때문에 앞서 보았듯이 정신장애인이나 중증 발달장애인은 ‘장애 극복‘의 주인공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긍정적으로 살아라‘, ‘희망적으로 생각하라‘며 현실을 넘어설 것을 강요하고, 나아가 장애인에게 희망의 아이콘이 되어줄 것을 주문하기도 한다. 팔다리가 업이 태어나 세계를 돌아다니며 ‘동기 부여‘ 전문가로 활동하는 호주의 장애인 닉 부이치치Nick Vuijicic 같은 인물이 그 대표적인 예다. 그러나 아무리 낙관적이고 강인한 정신을 가진 이라도 횡단보도를 건널 수 없고, 화장실을 가지 못한다면 삶에 ‘동기 부여‘를 하기란 불가능하다. 하루종일 오줌을 참으면서 희망을 가질 수는 없다. 오줌을 참을 때 필요한 건 희망이 아니라 화장실이다. - P211

"우리나라에서는 너희가 버스랑 지하철을 못 타잖아. 이게 당연한 걸까?" 라고 물었다.
"장애인이니까 못 타죠."
어느덧 호기심이 사라진 시큰둥안 대답으로 아이들이 맞섰다.
"버스는 대중교통이잖아. 장애인은 대중이 아니야?"
"……."
"대중교통이면 휠체어를 탄 사람이든 목발을 짚은 사람이든 모두 탈 수 있도록 만들어야 하는 거 아닐까?"
일본은 돈이 많아서 그런 게 아니냐는 ‘현실주의자‘의 반론도 나왔었을 법하지만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어쨌든 10대의 장애 청소년들에게 그 말은 꽤나 타당하게 들렸던 것 같다. 우리는 별 이견을 제시하지 않았다. 나는 이 대화를 한동안은 떠올리지 않았다. 그러다 대학에 갈 무렵 ‘장애인은 대중이 아니야?‘라는 의문이 슬며시 다시 떠올랐다. 어떤 생각은 순식간에 마음 전체를 점령하지 않는다. 도덕 시간에 선생님이 꺼낸 말도 그 시기 우리 사회 여러 곳에 은밀하게 자리 잡은 채 때를 기다리던 어떤 생각의 일부였다. - P216

아이들이 별 반응을 못하자, 선생님은 수업 내용으로 돌아가면서 이렇게 덧붙였다.
"너희가 버스를 못 타는 게 너희 잘못은 아니야."
특정한 세계관은 내밀하고 조용히 세상에 퍼져가다 어느 시점에 이르면 권리의 언어로 결정結晶되어 사람들의 말에 담긴다. 말은 흐르고 흘러 눈앞에 등장하고, 몸에 감촉되는 ‘물질‘이 된다. - P217

장애인들은 상징적인 헌법 소송을 제기하고, 거리로 나와 휠체어를 서로 연결해 서울의 시내버스를 점거하고, 지하철 선로에 휠체어를 묶어 전동차를 세웠다. 급진적이고 과격한 방식에 시민들은 충격을 받았고 비난과 욕설을 퍼부었다. TV에 나오는 장애인을 보며 불쌍하다고 집을 열던 사람들이 그들에게는 ‘병신‘이라며 비난을 퍼부었다. 이동권운동의 가장 전면에 나섰던 중증 장애인 교육기관 노들장애인야간학교의 교장 박경석은 그날 현장에서 이렇게 말했다. - P228

좋습니다. 우리는 병신입니다. 그러나 당당한 병신으로 살고 싶습니다. 30년 동안 집구석에서 갇혀 지냈다고 아무리 말해도 안 들어주더니, 자신들이 당장 30분 늦으니까 저렇게 욕을 하는군요. 이제 그 병신들에게도 인간으로서의 최소한의 권리가 있다는 것을 알려줍시다. 당당한 병신으로 살아봅시다. - P228

장애인이 자신의 이동할 권리를 발명하고, 이를 법제도에 진입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이동해서 거리로 나와야 했던 것이다. 이는 권리가 법제도 안에서 국가권력의 힘을 통해 인정되어야만 실질적 의미를 갖는 것은 아님을 보여준다. 권리를 만들어가는 과정 자체, 자신의 신체나 정신 혹은 처한 사회적 상황의 문제를 권리의 언어로 표현하고 집단적으로 공유하고 법제도 안으로 진입시켜 실질적인 힘을 갖도록 정치적, 도덕적, 헌법적 의미를 부여하는 활동 자체가 ‘잘못된 삶‘들의 존엄성이 사회적으로 승인되는 과정이다. - P231

그러나 단지 페티시즘에 그친다면 그 욕망은 꽤나 자극적일지언정 우리를 개별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 이끌지는 않는다. 김원영의 다리에 매력을 느끼는 사람은 나와 비슷한 다리를 가진 사람을 만나면 그저 욕망의 대상을 교체하면 그만이다. 우리의 ‘몸‘을 상대방이 열망하기를 바라는 마음에는 몸을 가진 존재 그대로, 개별자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욕망이 내재해 있다. 타인의 몸에 대한 욕망에서 출발하는 일은 자연스럽고 문제될 것이 없다. 중요한 것은 거기서 출발해 그 욕망이 어디로 나아가는가이다. 몸에서 시작해 그 몸을 가진 개별자에 대한 사랑으로 에로스가 확장될 때 그것은 우리가 닿고자 하는 ‘사랑‘의 이상에 가까워질 것이다. - P267

우리가 누군가를 바라볼 때는 그 사람과 함께한 모든 순간에서 그가 보여준 미세한 떨림과 다양한 표정, 긴장했을 때 움츠러들던 어깨, 해질 녘 그림자가 진 옆 얼굴, 지쳤을 때의 목소리, 들떴을 때면 쭉 펴지던 목선, 자기가 좋아하는 물건을 힘껏 들어 올릴 때의 팔뚝 등이 하나로 밀도 있게 통합되어 그 사람의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 이미지는 지금 바로 이 시점에 내 눈에 들어오는 그 사람의 이미지에 덧씌워진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콩깍지‘는 어쩌면 알 수 없는 비합리적 힘에 도취된 상태가 아니라, 오랜 시간 섬세하게 분별한 그 사람의 미적 요소들이 완전하게 통홥된, 그 사람의 초상화가 주는 아름다움을 말하는지도 모른다. - P276

장애인의 신체에 부여된 아름다움, 즉 일종의 ‘숭고미‘에 대한 관심은 ‘타자‘의 숭고함에 대한 관조와 사색의 과정이다. 관조가 가능하려면, 그 대상이 내 삶 안으로 들어오는 것을 절대로 허락해서는 안 된다. 닉 부이치치의 이야기에 감동하고, 아이들에게 그의 이야기를 마치 위인전을 읽히듯 전하는 사람들도 장애 아동을 위한 특수학교 설립에는 반대한다. 교회에서 단체로 봉사활동을 가고, 어려운 이웃을 위해 후원금을 내는 사람들도 자기 윗집에 장애인이 이사 오는 것은 반대한다. 이들이 장애인의 신체에서 어떤 아름다움을 느낀다면, 그런 종류의 미적 경험은 그 대상이 전적으로 ‘타자‘일 때에만 가치를 지니는 것이다. 나의 삶과 무관한 장애인의 신체, 주름지고 지혜가 가득한 노인의 얼굴, 아침 일찍 출근해 거리를 청소하는 노동자의 땀방울 같은 것. 타자를 미적으로 숭배하는 태도는 자기기만을 불러온다. - P261

아름답다고 생각하지만 그것이 내 삶으로 들어올 때면, 그것을 거부하고자 하는 충동이 우리를 괴롭힌다.
- P262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단발머리 2019-09-05 20: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너무 사랑스러운 글이네요. 여기 저기 뭉클한 지점이 있어 비도 오는데 마음이 더 촉촉해 지는 것 같아요.


지금의 내가, 너무 멀리와버린 내가, 그러나 다시 돌아갈 수도 돌아갈 마음도 없는 내가, 내가 바랐던 나일 것이다. 내가 추구했던 나, 내가 되고자 했던 나. 나는 결국 이 방향으로 올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또 아마 그 방향으로 계속 걸을테고.


우리 삶이 가끔은 우리의 예상과 달라서 당황스러울 때도 조금 걱정스러울때도 있지만, 바랬던 자신의 모습을 찾은 다락방님을 응원합니다. 너무 멋지고 너무 근사하고.... 폼 납니다^^

다락방 2019-09-06 16:59   좋아요 0 | URL
아이고, 단발머리님. 이렇게 아름다운 댓글이라니요. 단발머리님이 알라딘에 계셔서 제가 얼마나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도 함께 해주셔서 참 감사드리고 말이죠. 우리 계속 열심히 합시다.

결국 사람은 자기가 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 같아요. 순간 순간 더 끌렸던 작은 선택들이 모이고 모여서 지금의 내가 된 것이겠지요. 그것이 자기 삶의 방향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제가 단발머리님과 좋은 친구가 된 것 역시, 제 순간의 선택들이 모여 만든 현명한 결정이었다고 보여집니다. 헤헷 :)

공쟝쟝 2019-09-06 20: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정말 좋아요! ( 근데 좋아하는 책은 닳아질까봐 다 안읽고 아껴두는 타입) 그래서 읽다 말앗지롱요~!
다락방님이 매번 겸손을 되뇌이신다는 말이 왤케 귀엽죠???ㅋㅋ 그리구 저는 다락방님이 페미니즘 글 올리기 시작한 무렵부터 글을 봐와서 이처럼 핵인싸(!!)신지는 몰랐지만, 더할나위 없이 솔직하고 때로는 흥분(!)하는 글들 정말 좋아합니다! (읽는 소수)
마지막으로 갑자기 제 아이디 나와서 깜놀!!!!ㅋㅋㅋㅋㅋㅋ 11월에 만나요~ 히힛

다락방 2019-09-09 15:46   좋아요 0 | URL
핵인싸라니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뭔가 저랑 좀 동떨어진 단어 같네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제가 또 흥분하면 대마왕 아니겠습니까. 흥분이 바로 저를 말하는 것이지요. ㅎㅎ

11월에 만나요, 우리. 만나서 실컷 먹고 마시도록 합시다! 꺅 >.<

2019-09-08 15: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9-09 15:46   URL
비밀 댓글입니다.

블랙겟타 2019-09-10 1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꽤 예전부터 눈팅족으로서 다락방님 글을 같은데.. 하지만 그때는 북플자체를 거의 안 들어올때라 기억이 잘.. (죄죄송함니다ㅠ)
오히려 집중(?)해서 본것은 페미니즘대한 글을 쓰기 시작할때려나요.. 그 소수중에 저도 한명이 되겠네요. (๑◔‿◔๑)

아! 맞다 그리고요. 어제 학교도서관에 <여자는 인질이다>책 반납하려고 있었는데 반납된 책 쌓인곳에 『독서 공감, 사람을 읽다』가(두둥!) 보이더라구요. ‘어떤 훌륭한 학생이 빌린거야?’ 라고 잠시 생각했었네요
( ˃̶᷇ ‧̫ ˂̶᷆ )

다락방 2019-09-10 11:29   좋아요 1 | URL
아니, 그게 왜 죄송합니까, 블랙겟타님! ㅎㅎ

도서관 반납된 책 중에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가 있었다니, 아아.. 정말이지 훌륭한 도서관이요 훌륭한 대출자였습니다. 누가 그렇게 훌륭한 책을 읽고 반납했을까요? (읽고... 반납한 거 맞겠죠? ㅎㅎ)

자자, 9월 도서는 준비해두셨습니까? 저는 연휴부터 읽을까 생각했는데, 그렇게 될지는 잘 모르겠어요. 제 마음은 저도 모르니까요... 하하하하하. 빨리 읽어서 9월 도서도 9월 안에 마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블랙겟타 2019-09-10 21:41   좋아요 0 | URL
9월도서는 아직 못샀는데여.. ㅠ 추석지나고 신청하려구요. 그래도 학교도서관에 빌릴수는 있을 것 같아서 추석동안 우선 빌려서 읽어볼 예정입니다! (๑•̀ㅂ•́)و✧
네! 저도 9월안에 읽을수있도록 ^^

허랜드는 도서관에두 없구 오늘 서점 갔는데도 없었는데요. 추석지나구 알라딘에서 사서 읽을꺼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