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주에는 몹시 바쁘고 지쳤더랬다. 8월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인 《시녀이야기》는 이미 다 읽고 글도 썼지만, 《허랜드》는 읽으려고 펼쳐 들고 다 읽지 못하고 있었다. 물론 두 권중 한 권만 읽어도 되는거였지만 나는 둘 다 읽고 싶었어.. 분량도 적고 재미있기도 해서 시작하자마자 다 읽을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지난주에는 정말이지 책을 전혀 읽을 수 없는 고된 날들의 연속이었다.
다행스럽게도 8/31 이 토요일이라, 아침에 일어나 밥을 먹고 허랜드를 마저 읽기 시작했다. 결국 다 읽었고, 8월을 넘기지 않고 감상도 써냈다(허랜드 감상은 여기 ☞ https://blog.aladin.co.kr/fallen77/11065933). 해야한다고 생각해서 해버리는 나, 얼마나 멋진지.. 나는 나에게 감탄하고 반했다. 만세! 짱이야!!
감상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허랜드>가 끝나면 나오는 아주 짧은 단편 <누런 벽지>는 정말 대단하다! 어제 이 단편을 읽었다는 친구와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우와, 우리는 서로 정말 대단한 작품이다, 천재다 천재 이러면서 감탄에 감탄을 거듭하였어. 허랜드 책 있지만 아직 읽지 않은 분들이라면, <누런 벽지> 만큼은 놓치지 마시라고 말씁드립니다. 아주 짧은 단편이지만 매우 충격적인 단편이지요. 여러분, 누런 벽지를 읽자, 샬롯 퍼킨스 길먼을 읽자!!
아무튼 그런 지친 일상을 보내고 주말에 늘어져 있는데 넷플릭스에서는 내가 관심있어할 거라며 영화 《폴링 인 러브》가 등록되었다고 알려줬다. 아니, 폴링 인 러브라고?? 오만년전에, 꼬꼬마 시절에 주말의 명화로 보았던, 그 작품? 언제고 다시 보고 싶었지만 도무지 볼 기회가 없었던 '메릴 스트립'과 '로버트 드니로' 주연의 그 영화가 넷플릭스에 등록된거야? 꺅>.< 어릴 때가 아니라 이렇게 어른이 되어서 보는 그 영화는 어떨까, 좋았어, 주말엔 이걸 보는거야!
하고 들어가 보았더니 응?? 그게 아니네?????
그게 아니면 그냥 넘겨도 되는 것이거늘, 그냥 넘기려고 했건만, 아니, 뭐라고? 인테리어 ... 호텔 수리?
직장도 잃고 사랑도 잃고 새로 시작하는 삶에 대한 거야 너무나 뻔한 이야기지만 그게 호텔 수리이며 인테리어 하는 남자랑 같이 DIY ... 아, 좋다, 보자! 나는 그렇게 이 영화를 보게 되었다.
메릴 스트립 주연의 영화는 Fallin in Love 였는데, 이 영화의 제목은 자세히 보니 Falling Inn Love 더라.
'가브리엘'은 자기한테 샐러드만 먹이려는 애인한테 빡쳤는데 직장은 말도 없이 문을 닫아 일자리를 잃게 됐다. 집에서 술마시고 하릴없이 소파에 앉았다가 뉴질랜드 시골의 호텔을 분양한다는 광고를 보게 되고 거기에 신청을 하는데, 덜컥, 당첨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무료로 주는 거래... 그렇게 그녀는 열다섯시간 비행기를 타고 뉴질랜드에 도착해서는 또 몇 시간 버스를 타고 쑥쑥 들어가서 뉴질랜드의 시골에 도착한다. 아아, 버스도 잘 안다니는 시골인 것이야. 그렇게 캐리어를 끌고 걷고 또 걸어 호텔 앞에 도착하는데, 호텔은 광고에서 보여준대로 근사하지 않았고, 곧 쓰러질 것 같은 모습인거다. 아아.. 이걸 어쩌나, 하다가 마침 그녀의 직업이 설계이기도 했던 터라, 좋다, 고쳐 쓰자, 하면서 호텔 수리에 들어간다.
이 작은 시골마을은 마을 사람들이 서로가 서로를 잘 알고 지내고 있는데, 게다가 동네도 작아서, 여기서 마주치던 사람을 저기서도 마주치고, 저 사람과 이 사람이 모두 친구고, 마을에 화재가 나면 동네 사람들 모두가 소방관이 되는 곳이다. 여기에서 그녀는 '제이크'라는 남자와 자꾸 마주치게 된다. 사람들은 제이크가 뛰어난 수리업자 라며 그와 함께 하라고 했지만, 그녀는 아니야 괜찮아, 라며 혼자 고치려고 했고, 그러나 이 낯선 곳에서 고칠게 너무나 많고 힘든 그녀는 아파... 감기에 걸린다.
재미있는 지점은, 그녀가 재채기를 했을 뿐인데 주변 사람들 모두가 아프냐고 물어본다는 것. 아니야, 아프지 않아, 라고 했지만 그녀는 결국 감기에 걸리는데, 아직 수도관을 제대로 고치지 못해서 물도 잘 안나오고 그래서 뜨거운 물도 마실 수 없어 끙끙 앓는데, 마을 사람들이 약속이나 한듯이 차례로 찾아온다.
꽃집의 사장님은 전기포트를 가져오고, 제이크는 수리할 새로운 수도관을 가져오고, 까페 사장님은 꿀을 가져오고.. 다들 이렇게 그녀가 감기를 떨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거다.
사실 이 장면은 굉장히 복잡한 마음이 들게 했는데, 나의 경우 이렇게 예정에도 없이 마을 사람들이 찾아온다면, 몸도 아파 지치는데, 너무 짜증이 날 것 같은 거다. 왜 찾아와, 귀찮아.. 다들 가.. 왜들그래 ㅠㅠ 하는 마음이 되었을 것 같은데, 그러나 와서는 다들 내가 더 빨리 나을 수 있도록 마음을 담아 도와주는 거다. 뜨거운 물을 끓여주고 차를 타주고 수도관을 고쳐주고.. 이런 일들이 너무 고마운거다. 나는 그저 그들이 제공해주는 뜨거운 차나 마시면서 누워서 한 숨 푹 자면 되는 거다. 게다가 나 혼자이고 아직 완성된 집도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다 할 수가 없잖아. 그런데 이런 미완성의 공간에 와주고 도움을 주다니 너무 고마운 거다. 그래서 참 복잡한 마음이 되었지. 그렇게 막 오지마, 그런데 와줘서 고마워.. 이런 기분...
몸이 다 낫고 가브리엘은 제이크에게 호텔 수리를 같이 하자고 한다. 같이 해서 공동 소유로 하고 나오는 수익은 반씩 나누기로. 그렇게 같이 수리를 하는데, 하하하하, 네 뭐, 그렇습니다.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삶에 대해 조금씩 알게 되면서 또 호감도 키우게 되고... 그렇게 되는데, 그러다가 영화에는 갈등이 찾아오죠.
가브리엘은 호텔 수리가 끝나면 다시 자신이 속한 미국으로 갈 생각이었고, 제이크는 단순히 자신이 사업상의 파트너였다는 것이 서운해서 투닥투닥 서로에게 심한 말을 하며 다투게 되는 거다. 수리가 거의 다 된 호텔에서 맥주 한 잔 하려던 그들은 그렇게 다투는 바람에 맥주도 못마시고 각자의 공간에 머무르게 되는데, 가브리엘을 미안한 마음에 그에게 사과를 하는 문자메세지를 보내려고 한다.
제이크는 제이크대로 심란해서 가브리엘에게 문자메세지를 보내려고 핸드폰을 들고 창을 열었는데, 오, 상대가 메세지를 작성중이라는 게 보인다.
저 말줄임표.. 아이폰 쓰는 사람들 뭔지 알죠. 후훗.
자신이 메세지를 작성하려다가 상대가 메세지를 작성중인걸 알게 된 제이크는 가만히, 그녀가 하는 말을 기다린다. 무슨 말을 할까, 그렇게 기다리고 있는데, 가브리엘은 메세지를 다 작성해놓고서는 전송을 누르지 못하고 지워버린다.
제이크가 보는 화면에서 말줄임표는 그렇게 사라진다.
이에, 제이크가 메세지를 보내려고 작성한다.
아니야, 다시 보내는 게 좋을거야, 마음 먹고 갈등하던 가브리엘은 그렇게 핸드폰을 보다가, 상대가 메세지를 작성중이라는 걸 알게된다. 당신은 내게 무슨 말을 할건가요?
저렇게 입술을 꼭 깨물고 기다리고 있다. 말을 하라, 제이크여, 말을 해!
그러나 제이크도 다 적어놓고서는 보내지 못하고 지워버린다.
그리고 이렇게 끙끙... 고민에 고민에 고민에 고민에.......
아아, 성인 여자와 남자여, 할 말을 왜 뒤로 감추는가. 왜 상대에게 메세지를 보내려다 마는가.
제목도 기억이 안나느 아주 오래전에 보았던 영화(어쩌면 드라마)에서는 상대와 통화하기 위해 집으로 전화를 하는 장면이 나온다. 세 번 울렸다가 끊으면 내가 하는 거니까 니가 받아, 같은 암호를 정해서는 약속 장소를 정하고 만나야 했다.
한번씩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떨리는 마음, 그대이길 바라며 수화길 들지...
삐삐가 나오고서는 음성메세지를 남길 수 있었고, 호출을 할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사랑의 방식도 점점 변하게 되는데, 이제는 이렇게 문자메세지를 통해 마음을 전할 수가 있다.
크-
문자메세지..
문자메세지..
현대인들이라면 문자메세지로 설레이는 일 다들 경험해보지 않았습니까.
아아 저때의 제이크와 가브리엘은 정말 어떤 마음이었을까. 상대가 메세지를 작성중인 걸 보면서 얼마나 쿵쿵 거렸을까. 내가 저 장면 보다가 마음이 막 거시기해져서, 한 때 나를 설레이게 했던 사람과의 문자메세지 창을 열어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쩌면 상대가 나에게 메세지를 작성중인 게 아닐까, 그렇게 썼다 지웠다 하는 게 아닐까, 그러면 나도 저렇게 상대가 메세지를 작성중이라는 말줄임표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이 영화 자체는 그냥 누구나 짐작 가능한 뻔한 로맨스인데, 저 문자메세지 창의 말줄임표를 보는 장면이 마음을 너무 후벼팠다. 좀처럼 잊혀지지가 않아. 오늘는 또 괜히 '혹시라도 네가 들여다본다면 말줄임표를 볼 수 있게 되기를' 같은 말랑말랑한 마음을 안고서 혼자 메세지도 작성해 보았다. 그렇지만, 물론, 보내지 않았다. 우연이 기적처럼 작용해 그 때 문자메세지 대화창을 열었다면 아마 상대는 말줄임표를 볼 수 있었겠지. 이 사람이 뭘 찍고 있나, 들여다보다가 이내 말줄임표가 사라지는 것도 볼 수 있었을 거다.
오만년전에 '다니엘 글라타우어'의 《새벽 세시, 바람이 부나요?》읽고나서 이메일 보내고 싶어서 몸을 막 뒤틀게 됐는데, 이걸 보고나니 문자메세지 대화창의 말줄임표를 보고 싶은 욕망에 숨이 막힌다. 심장이 벌렁거려. 아흑.
그러나 이 영화에서 사랑의 수단은 그저 문자메세지로 끝나지 않는다. 이 오래된 호텔을 수리하는 과정에서 벽 안에 숨겨진 러브레터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 가브리엘과 제이크는 하루 휴가를 내 경치 좋은 해변에 소풍을 가서는, 벽에서 발견한 오래된 편지를 읽어주기 시작한다. 남자가 보낸 건 제이크가 읽고 여자가 보낸 건 가브리엘이 읽는데, 이렇게 서로가 서로에게 러브레터를 읽어주는 시간, 세상 낭만적인 시간. 이 편지는 아마도 1차대전이 한창일 때 전장에 나가있던 남자와 그를 기다리는 여자 사이에 오고갔던 편지들이었던 것 같다. 오래된 편지, 그 안에 드러나는 절절한 사랑, 그 편지로 인한 로맨틱한 감정과 낭만적인 분위기.
사랑을 편지로 표현하는 것의 장점은 바로 이것이 아닌가 싶다. 휘발되지 않고 간직할 수 있는 것. 책상 서랍에 고이 넣어둘 수도 있고 벽장 안에 숨길 수도 있다. 이렇게 오래오래 그 감정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도 읽을 수가 있어. 그 편지를 읽으면 그 때의 감정이 어떤건지 일 년이 지난 후에도, 십 년이 지난 후에도 알 수 있잖아. 편지는 너무 완벽한 사랑의 수단이 아닙니까...
그들은 호텔을 완성한다. 뉴질랜드 저기 저 시골에 작은 호텔을 마련해두었다. 작고 아름답고 평화로운 곳.
시골에서 살고 싶다는 로망 같은 건 없지만, 이 호텔을 보는데, 여기서 살고 싶다. 침실 창문을 열면 아름다운 풍경이 보이는 곳에서 살고 싶다. 현관을 나서면 나무들이 잔뜩인 곳에서 살고 싶다. 뉴질랜드의 한적한 시골 마을에서 여유롭게 살아볼 수 있는 때가 내게도 올까? 이렇게 전망 좋고 아름다운 곳에서 내 인생의 어느 한 부분만큼을 살아볼 수 있을까? 이런데서 평생 살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도 않아. 어느 정도는, 어느 시간만큼은 살아보고 싶어지는 거다. 그러면 너무 좋지 않을까. 저 침실 테라스의 의자에 앉아서 멍때리고 있어도 인생은 행복으로 충만할 것 같아. 크-
오늘 아침 친구와 문자메세지를 주고 받았다. 운좋게도, 나 역시 친구의 말줄임표를 볼 수 있었다. 낭만적이야..
나는 매시간 메세지를 작성중이다.
점심은 순대국밥 먹어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