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겨드랑이털과 눈썹 왁싱을 해본 적이 있다. 특히나 겨드랑이털의 경우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고, 그 날 친구를 만나서는 '다시는 안할거야, 내가 이 짓을 왜 하고 있어' 라며 부르르 떨었더랬다. 이 아픈걸 왜 해야하나. 왁싱으로 털을 제거한 후의 겨드랑이는 매끈했다. 매끈하고 깔끔했고 금세 털이 솟아나지도 않았다. 그런 며칠을 보내고나니, 그 고통은 감당할 수 있는 것으로 변해있었고, 나는 어리석게도 다음에 또 왁싱을 하러 갔다. 그리고 또 아파하면서 '제기랄, 조금만 이 아픔을 견디면 매끈한 겨드랑이를 가질 수 있어' 라며 참았다.


대체, 나는 그 고통을 참고 매끄러운 겨드랑이를 가지는 것을 왜 원했던가. 그게 나에게 왜 필요했을까.


자, 조금 더 솔직해보자. 내가 왁싱을 왜 했나, 뭣 때문에 했나. 매끄러운 겨드랑이를 왜 만들었나. 평소에 겨드랑이 털 제모를 하지 않다가 하게 되면 가끔 면도기로 밀곤 했다. 그런 내가 왜, 굳이 샵을 찾아가서 왁싱까지 하며 눈물을 찔끔 흘렸는가.


내가 그 때 남자를 만나러 갈 게 아니었다면 그 고통을 겪을 생각을 했을까?

고통은 겪을 가치가 있었다. 그 앞에서 팔을 들어올리는 것에 망설임이나 주저함이 없었으니까. 하아- (한숨 한 번 쉬고..)



그렇지만 보지털이라면 얘기가 달랐다. 브라질리언 왁싱은 도무지 시도할 엄두가 안났다. 아마 사람마다 생각하는 게 다르고 자기의 한계가 다르겠지만, 브라질리언 왁싱은 내 상식선을 넘어가는 일이었다. 일전에도 여동생과 브라질리언 왁싱에 관해 얘기하면서 여동생이 '언니, 그건 미성년의 성기잖아?' 라고 얘기한 적이 있었는데, 나 역시 그렇게 생각했다. 다 자란 성인이 털이 나는 것은 자연스러운 것인데, 왜 굳이 그걸 없애서 다 자라지 않은 아이의 모습으로 돌아가야 하는지, 그것이 너무 기이한거다. 겨드랑이털은 밀어놓고 나는 그러나 보지털에 대해서는 '그래도 그건 아닌 것 같아'로 생각했었는데, 이런 생각 자체가 모순인건 아닐까. 왜 어떤 털은 되고 어떤 털은 안되는가. 이 털은 선을 넘고 저 털은 선을 넘지 않는다는 생각 자체가 이상하지 않은가. 왜 나는 겨털을 밀면서 보지털은 안되지, 라고 생각했나.



나는 브라질리언 제모와 처녀모 제모가 불편했다. 여성에게 털이 없어야 한다는 규범이 도를 넘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 자신이 거기 동참하고 있으면서 화를 낼 수 있겠는가? 그게 핵심이었다. 열두살짜리 딸에게 면도기를 사주는 것과 제모 숍을 예약해주는 것 사이에 어떤 차이가 있단 말인가? 다리털이나 겨드랑이털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음모만은 여성적이고 용인 가능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p.210)





어느날 나는 《버자이너 모놀로그》를 읽었고, 필연적으로 이런 구절을 만난다.

















거기 있는 털, 그걸 음모라고 그러나, 그걸 좋아하지 않으면 거기도 사랑할 수 없어. 대부분의 사람들이 다 거기 있는 털을 좋아하지 않아. 내 전 남편은, 남편이라고는 그 사람밖에 없었지만, 내 털을 혐오했어. 그게 비비 꼬여 있어서 더럽다고 하더군. 그래서 거기 있는 털을 밀 수밖에 없었지. 남자들 수염 깎듯이 나도 거기 털을 밀어버려야 했어. 어떡해? 싫다는데!

털을 밀어버리니까 우습더라고. 맨숭맨숭한 언덕배기 같은 것이 꼭 어린 계집아이의 거시기 같았지. 그런데 그게 그 남자를 흥분시키나봐. 우리가 섹스를 할 때 내 보지는, 아마 남자들 턱수염을 비벼대는 것 같았을 거야. 자기가 비벼대기는 좋았을지 몰라도 난 끔찍하게 아팠어. 꼭 모기에 물린 곳을 긁어대는 꼴이었지. 불이 나는 것처럼 화끈화끈거렸어. 섹스를 하고 난 후면 여기저기 빨갛게 부풀어올랐지. - 버자이너 모놀로그 中



《여자다운 게 어딨어》의 저자 '에머 오툴'은 자신의 몸에 난 털들을 제모하지 않기로 결심한다. 겨드랑이털을 무성히 기르면서, 그러나 그 털이 보이게 옷을 입는 것을 쉽게 하지는 못했다. 털을 면도하지 않았다는 것을 밖으로 알리지는 못하는 긴 시간이 흐르고, 그것을 드러낼 수 있었을 때는 모두가 자신을 손가락질하고 수근댔다. 그녀는 털을 면도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강간하겠다는 협박 메일까지도 받는다. 그렇게 털을 기른채 살다가 이제 그녀는 다른 여자들처럼 온 몸의 털을 싹 다 밀어보기로 한다. 브라질리언 왁싱까지 포함해서.



다음은 외음부였다.

외음부.

외음부.

오 씨발 신이시여.

에이샤는 위쪽 음모를 제거할 수 있도록 배를 위로 잡아당겨 피부를 팽팽하게 만들라고 했다. 그는 이윽고 뜨거운 왁스를 내 몸에 붙이고 충분히 굳을 때까지 토닥였다. 그러고는 왁스를 떼어냈다. 산 채로 가죽이 벗겨지는 느낌이었다. "하느님 맙소사!" 나는 비명을 질렀다. 에이샤는 다시 "흠흠" 소리를 냈다. '알아요, 고통스럽죠?'로 번역되는 이 소리는 아마 연대의 표현으로 해석되어야 마땅하겠으나, 지금 내 상황에서는 내가 직전에 보인 자만심을 놀리는 게 아닌지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키니라인 구역은 나쁘지 않았지만 대음순 부위는 고문이었다. 피부를 팽팽하게 당길 수가 없어서 왁스를 그냥 떼어내야 했다. 타는 것처럼 찢어지는 감각이 내 몸에서 가장 민감한 부위를 집어삼켰다. 겨우 숨을 고르고 있을 때, 에이샤가 타액과 싸우며 말했다. "고통을 참아낼 가치가 있을 거예요." 세상의 어떤 것이 이런 고통을 참아낼 가치가 있단 말인가? 그러나 의혹을 제기할 시간은 없었다. 에이샤가 이번엔 반대쪽에서 왁스를 떼어냈기 때문이다. 나는 너무나 고통스러운 나머지 미치광이처럼 웃으며 소리를 질렀다. "여자들은 정말 용감해요! 우린 정말 용감 하다고!" (p.366-367)



나 역시 묻고 싶다. 이만한 고통을 참아낼 가치가, 대체 어디에 있는가. 세상의 어떤 것이 이런 고통을 참아내도록 한단 말인가. 왜 그 고통을 참아가면서 아이같은, 자라지 않은 보지를 만들어야 하는가. 에머 오툴 역시 그것이 어른의 것이 아님을 인지한다.



마침내 나는 방 안 거울 앞에 서서 팔을 벌리고 외음부를 드러냈다. 모든 부위가 붉게 달아오르고 화끈거렸다는 걸 무시하면, 내 몸이 이런 모습이었던 건 열세살 때가 마지막이었다. 허벅지 사이의 접힌 조개껍질 같은 분홍빛 피부는 매우 아이 같고 매우 연약해 보였다. (p.367-368)




며칠전에 여자1과 브라질리언 왁싱에 대해 얘기를 나누었다. 여자1의 친구가 브라질리언 왁싱을 정기적으로 받고 있는데, 그것은 '위생' 때문이라는 거였다. 위생. 위생 뭘까? 계속해서 제모하는 삶을 살고 있는 여성들은 자꾸만 위생 때문이라며 자기합리화를 한다. 나 이거 자기 만족이야, 내가 이게 편해, 털을 미는 게 깔끔하잖아, 라고. 어떤 상황을 오래 지속하고 있을 때 그것이 잘못된 것이라는 말을 듣는 것은 당연히 기분 나쁘다. 게다가 그걸 인정하는 것은 더더욱. 그래서 우리는 자꾸만 자기 변명, 자기 합리화로 숨는다.

그러나 위생. 정말 위생 때문인가.



위생이란 자신의 신체를 청결하고 건강하게 유지하는 것 아닌가. 여성의 다리털은 남성의 다리털보다 결코 덜 위생적이지 않다. 체모가 비위생적이라는 주장은 곧 우리 사회에서 대다수의 남성이 항상 지저분하게 박테리아를 달고 다닌다는 주장과 같다.

우리의 다리털에 배설물이 덕지덕지 묻어 있거나 겨드랑이털에 치명적인 바이러스가 거주하는 것은 아니다. 진짜로 위생이 문제라면 나날이 많은 화학물질과 박테리아를 묻히고 다니는 머리털부터 밀어버려야 할 것이다. 아니면 세균이 득실대는 손을 잘라야 할 것이다(조금 불편하리라는 것은 인정한다). 여성의 체모에 불결한 요소는 없으며, 여성이 체모를 제거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이든 간에, 건강이나 위생과 관련이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p.211-212)



만약 체모가 실제로 체취와 땀을 증가시킨다고 치더라도, 여성이 지구상에서 자기 존재의 후각적 증거를 완전히 지워야 할 당위성은 어디 있는가? 설령 체모가 실제로 사람들의 체취를 증가시킨다고 치더라도, 남성의 체취는 용인되는 반면 여성의 체취는 용납 불가능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성의 신체가 이렇게 많은 난처함과 수치스러움에 둘러싸여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여자도 사람이다(이게 급진적 페미니스트의 생각이라는 것, 나도 안다). 여자도 털이 난다. 여자도 땀이 난다. 여기에 잘못된 것은 하나도 없다. 잘못된 것은 우리가 타고난 신체에 대해 수치심을 느끼도록 길들여졌다는 것, 그리고 그 때문에 우리의 건강과 행복이 공격받고 있다는 것이다. (p.212-213)



손을 잘라버려야 할거라는 건 너무 나간것 같지만.

내가 여행을 앞두고 수영복을 챙기면서 겨털을 제모하지 않겠다고 하자, 여자2가 내게 그랬다.


"악, 너무 지저분해. 네 털이 빠져서 수영장 물에 떠있을 거 생각하면 너무 더럽잖아."


그래서 내가 그랬다.


"나는 털 빠지면 안돼? 수영장의 그 많은 남자들은 아무도 제모 안해서 죄다 빠지는데? 나 혼자 수영장물 깨끗하게 쓰면 뭐해? 남자들 털이 다 빠지는데?"


그러자 여자2가 헉, 소리를 냈다.


"맞네. 남자들은 아무도 겨털 안밀고 오는데..."




이 책이 처음에 마케팅을 어떻게 한건지 모르겠지만, 당시에 내가 이 책을 사둘 때에는 '제모를 선택하지 않은 발랄한 페미니스트의 에세이' 정도로만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 책은 단순히 제모하지 않은 여성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제모를 선택하지 않기로 결심하기 전과 또 행동하고 난 후의 이야기는 이 책의 극히 일부일 뿐이다. 에머 오툴은 이 책에서 자본주의와 언어에 대해서도 얘기한다. 강간은 말할 것도 없고, 철학자들의 얘기도 수시로 등장한다. 18살에는 여성혐오의 꼭대기에 있었던 자신의 경험을 반성하며, 그 후에 공정하지 않고 공평하지도 않은 것들을 인식하고 스스로 바꿔나가고자 애쓴다.


에머 오툴은 자신이 젠더 퀴어라고 밝힌다. 동성과도 이성과도 연애를 하는데, 자신을 양성애자로 규정하고 싶진 않다고. 그녀는 삭발도 했었고 겨드랑이를 비롯해 다리털까지도 제모하지 않았다. 집에 가면 가사노동에 전혀 신경을 안쓰는 아빠와 오빠에게 잔소리를 퍼부었고, 그런 그녀를 오빠의 친구는 '쟤 남자친구는 있냐'며 혀를 차곤 했다. 남자들이 생각하는 여자의 최고 가치는 '남자친구의 유무'인가보다. 남자친구를 사귀지 않는 상태의 여자는 가치없고 초라하며, 남자친구를 사귀는 여자는 예쁘고 아름다운 여자.


그런 그녀지만 강간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섹스를 하기로 한 남자가 지독하게 괴롭혔던 것. 전희 없이 쑤셔넣기로도 괴로웠는데 콘돔을 안쓰겟다고 우기기까지 했다. 결국 콘돔을 끼기는 했는데, 아무런 상의없이 항문에 삽입을 한다.



"씨발,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는 거야?"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물었다. "너야말로 뭘 하는 건데?" 그가 말했다. "여자 젖꼭지를 뒤틀고 때리다가 갑자기 항문에 넣다니 말이 돼?" 나는 가까스로 목소리를 냈다. "콘돔 때문이야." 그가 말했다."콘돔을 끼고 하면 사정을 못한다고." 나는 최대한 숙녀다운 말투로, 그러나 출판사에서 편집할 게 분명한 어휘를 사용해서, 그쪽의 사정능력은 내가 알 바 아니라고 말했다. 방패처럼 내민 베개 뒤에 숨어 화를 내는 내 모습에 그는 당황한 듯했다. 내가 합의 없는 항문성교를 즐길 거라고 추측한 이유가 도대체 뭐냐고 묻자, 그는 대답했다. "다른 여자들은 좋아하던데." 그리고 덧붙였다. "너도 딱 날라리 같아서 좋아할 줄 알았는데, 침대에선 형편없네."

다른 여자들은 좋아한다고? 아니, 아니다. 절대 좋아할 리 없다. 여성의 몸은 그런 식으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여자들이 포르노 배우처럼 윤활유도 없는 항문성교를 좋아할 수 있다면 남자들은 전부 제임스 본드처럼 차를 몰 수 있을 거다.

말이 난 김에 덧붙이자면, 그후로 사흘 동안 대변을 볼 때마다 피가 났다. 연극은 2주 동안 상영되었고, 나는 그 행복한 항문 강간마 씨와 매일 상당한 시간을 함께 보내야 했다. 그는 아직도 종종 페이스북에서 내게 친구 신청을 한다. 나는 거절한다. (p.276-277)



콘돔을 끼면 사정을 못하는 건 남자지만, 그래서 합의 없이 강제적으로 항문에 삽입을 시도했지만, 그러나 그 남자는 여자에게 '침대에서 형편없다'고 말한다. 세상 찌질한 새끼... 얼마나 많은 여자들이 침대에서 형편없는 여자가 되지 않으려고 싫은 것들을 참아내고 견디고 있는가. 에머 오툴도 싫었지만 견뎌냈던 적에 대해 이 책에서 언급하는데, 하아- 이 부분을 읽는데 나라고 자유로울 수 없었다. 아마 남자와 연애를 하는, 했던 여성이라면 그런 경험은 누구나 있지 않을까. 싫었지만 상대가 좋아하기 때문에 억지로 해야만 했던 것들, 좋지 않았지만 좋은 척 했던 시간들. 지금 돌이켜보면 '내가 그 때 그건 정말 싫었는데' 하게 되는 것들이 있다. 그런데 했어. 내가 왜 그러고 살아야 했을까. 왜 내게 그런 시간이 있었을까. 사실은 어느 순간들에는 '내가 지금 뭐하고 있는 거고, 이 남자는 지금 뭐하고 있는거냐' 하는 생각을 섹스 중에 하기도 했다. 어떤 이와의 섹스는 후회만 찾아와. 나의 여자친구들은 '지가 되게 잘하는 줄 알아' 라는 말을 수시로 했고, '남편과 섹스하는 거 한 번도 좋았던 적 없어' 라고 말한 친구도 있다. 에머 오툴도 이 책을 통해 얘기하는데, 여자들은 성적 쾌감에 있어서도 항상 상대를 우선시한다. 마치 자신의 쾌감은 언제나 뒷전이라는 듯이. 속쓰려...




책 전체에 밑줄 긋고 싶었다. 밑에 인용해두겠지만, 다들 이 책을 읽어봤으면 좋겠다. 나는 단지 털과 섹스만 가져왔지만, 작가가 역할 놀이에 대해 그리고 언어에 대해 말하는 것도 아주 좋다. 깊이 생각하고 또 행동으로 옮기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며 또 얼마나 좋은가. 이미 자신을 페미니스트라고 확신하는 사람이라면 처음부터 끝까지 모르는 내용은 하나도 없지만, 그러나 이 책을 통하여 다시 한 번 알아채는 것은 분명 기운 나는 일이다.



다른 책들에 대한 언급도 수시로 나오는데, 일단 이 책.


이 책이 다루지 안은 것에 대해서도 간략히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책은 남녀의 두뇌 차이에 관한 과학서적이 아니다. 해당 주제에 대해서는 시중에 훌륭한 책이 여럿 나와 있는데, 특히 리스 엘리엇Lise Eliot의 『파란색 뇌, 분홍색 뇌』Blue Brain, Pink Brain 와 코딜리아 파인Cordelia Fine의 『젠더, 만들어진 성』Delusions oif Gender 을 추천하고 싶다. 두권 모두 신경학 분야에서 박사학위를 딴 여성 저자가 철저한 연구를 바탕으로 쓴 재미있는 책이다. (p.14)
















위에 14페이지 읽다가 얼른 내 책장으로 갔다. 분명히 코딜리아 파인의 책이 내 책장에 있었던 것 같아서. 아니나다를까, 예쁘게 꽂혀있었다. 읽지는 않았다는 말이다. 후훗. 그래도 있으니까 기분이가 좋군. 음화화화핫. 찾아보니 리스 엘리엇의 책은 아직 번역된 게 없는가 보다. 코딜리아 파인의 『젠더, 만들어진 성』은 여성주의 책 같이읽기 도서로 선정해도 좋을 것 같다.


주디스 버틀러도 수시로 등장한다. 버틀러는 싫든 좋든 한 번쯤 읽어봐야 하는 게 아닐까.
















이만 총총.



그러나 원피스를 입기 위해 야생동물 같은 다리를 가려줄 깨끗한 스타밍과 흉포한 겨드랑이를 가려줄 카디건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지금, 나는 의복의 자유가 얼마나 허상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피부를 드러낼 자유가 있었지만, 규범에 맞는 여성적 의상을 입을 때 드러나는 나의 신체 부위들은 '여성화'되었을 경우에만 노출에 적합하다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여성화 과정에는 종종 돈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미용산업의 주머니를 내 돈과 시간으로 배불려야 했다는 말이다. 만약 내가 여성화에 순응하지 않은 신체 부위를 노출한다면-가령 크롭톱 아래로 드러난 배가 충분히 날씬하지 않다거나 치마 아래로 뻗은 다리에 털이 숭숭 나 있다거나-나는 사회적 맹비난과 개인적 수치심으로 이중의 불쾌감을 겪어야 할 것이다.
여성성은 여성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p.226-227)


나는 왜 스스로를 굶기고 있었을까? 자기 자신에게 굶주림을 강요하는 것은 외부자의 시선으로 보면 신체에 대한 자기학대와 다름없다. 만약 내가 반년 동안 매일 1,000칼로리 이하만을 섭취한 것이-그래서 월경이 끊기고, 손발이 파래지고, 두피보다 학교 점퍼 어깨에 붙은 머ㅣㄹ카락이 더 많아진 것이- 우리 부모님 탓으로 보였다면, 학교 선생님들은 아마 사회복지사에게 연락했을 것이다. 명백히 학대이기 대문이다. 그렇다면 개인주의를 기반으로 굴러가는 우리 사회에서 스스로 굶기를 선택하는 것은 자기혐오나 자해와 동등하다고 간주할 수 있을 것이다. - P15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아리스토텔레스는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그 자체를 위해 욕망할 수 있는 것은 행복이 유일하다고 주장한다. 왜 돈을 벌고 싶냐는 질문에 누군가는 "다이아몬드를 사고 싶어서요"라고 대답할 것이다. 다이아몬드를 사고 싶은 이유를 물으면 "아름다우니까요"라는 대답이, 아름다워지고 싶은 이유를 물으면 "날 행복하게 해주니까요"라는 대답이 돌아올 수 있다. 그러나 왜 행복해지고 싶냐는 질문은 말이 되지 않는다. 행복은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다른 무엇이 아니라 온전히 그 자체를 위해 욕망할 수 있는 유일한 것이 바로 행복이다. - P16

나느 ‘여자애‘나 ‘여자‘라는 단어는 모욕으로, ‘남자‘라는 단어는 칭찬으로 쓰이는 것을 들었다. 섹스 파트너가 여러명인 여자를 일컫는 단어는 헤픈 년, 걸레, 잡년, 문란한 여자, 흘리고 다니는 여자, 끼 부리는 여자, 헐렁한 년, 쉬운 여자, 갈보, 화냥년, 창녀를 비롯해 수도 없이 많았으나 섹스 파트너가 많은 남자를 칭하는 단어는 ‘바람둥이‘ 뿐으로, 어쩐 일인지 항상 유머러스한 업적을 암시하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주 나쁜 말, 최고로 심한 욕설이 ‘보지년‘cunt임을 알게 되었다. 나는 여성의 성적 행동과 신체를 남성의 그것들과 다르게, 즉 열등하게 일컫는 법을 배웠다. - P24

오랫동안 자각하지 못했지만, 계속되는 어른들의 외모 칭찬은 내게 분명히 스며들었다. 그로써 나는 남들이 내 가치를 평가하는 방식으로 나 자신의 가치를 평가하는 법을 배웠다. 예쁨과 소녀다움에 기반을 둔 가치를. 더 나이가 들면서 나는 칭찬을 선뜻 받아들이는 법 또한 배웠다. 나아가 이런 관심을 갈망하기 시작했다. 나 자신에게 만족하려면 외모에 대한 칭찬이 필요했으므로, 칭찬을 얻어낼 수 있는 행동에 착수했다. 두말할 것 없이 패션, 화장, 다이어트, 몸치장에 관련된 행동들이었다. - P37

나는 내 생각과 행동에 영향을 미치는 보다 큰 사회구조를 인식하기 시작했다. 10년이 넘는 시간에 걸쳐 나는 마침내, 열등한 사회적 지위에 놓여 있으면서도 아주 예쁜 신발을 신을 수 있다는 데에서 행복감을 얻는 것을 거부하는 법을 배웠다. 나 자신과 세계에 더 많은 것을 요구하는 법을 배웠다. 그다음 10년 동안 나는 젠더 연기를 다르게 해보기 시작했고, 과거 나의 행동들이 내 선택에 의한 것이 아니라 내가 평생 리허설을 해온 연기에 불과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읊어온 반페미니스트적 대사들이 내가 스스로의 논리로 생각해낸 게 아니라 가부장제에서 요긴하게 써먹는 단골 대사들에 지나지 않았음을 깨달았을 때, 나는 부끄러웠고 그만큼 화가 났다. - P83

남성과 여성 사이에 신체적 차이가 있긴 하지만, 문화가 발전하면서 이러한 차이들의 의미는 뿌리째 달라졌다. 그럼에도 남녀는 여전히 사회에서 전혀 다른 역할을 맡는다. 쌘드라 벰은 역사상 처음으로 남녀가 거의 모든 일에서 똑같이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시대가 왔음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많은 기관들이 부모 노릇과 직장생활을 병행하기를 몹시 어렵게 만들어놓았다는 사실을 지적하며, 이 역설 뒤에 숨은 역사와 전통을 설명한다. 임신의 주체는 여성이며 육아 역시 전통적으로 여성의 일로 여겨져왔기 때문에, 노동시장을 떠나야 하는 것은 항상 여성이다. 벰이 보기에 이는 여성과 남성의 능력이 아니라 권력, 역사, 전통의 문제다.
아직도 재생산 기능이 있는 신체를 지닌 여성들이 공적 영역에서 배제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사람들을 전문용어로 멍청이라고 부른다. - P170

쎄미포르노 출판물의 (대다수가 남성인) 편집자, 사진가, 주주 들은 자신의 신체적 편안함이나 자유를 위해서가 아니라 남성들의 성적 쾌락을 위해 가슴을 노출한 젊은 여자들의 사진을 팔아서 부를 쌓았다.
이처럼 말도 안 되는 이유로 묵직한 정치적 금기가 덧붙은 여성의 몸은 사업가들의 수익을 올려주는 상품이 된다. 상업화를 통해 금기는 강화되고, 여성이 남성만큼 신체의 자유를 누리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아직 어리고 가치관이 확립되지 않은 남성들은 벗은 여성의 사진들을 구매하면서 여성의 신체가 돈을 내고 소비할 수 있는 상품이라는 것을 배운다. 이미 꽤 명백해던 권력 역학은 갈수록 강화된다. - P181

많은 친구들이 브라질리언 왁싱과 할리우드 왁싱을 받고 자신의 은밀한 곳이 포르노에 나올 만큼 얼마나 근사하게 바뀌었는지, 남자친구의 반응이 얼마나 뜨거웠는지, 그 감촉이 얼마나 사랑스럽고 부드러운지 자랑했다. 그래서 나도 예약을 했다. 그래야만 할 것 같았다.
통화 중 그 얘기를 꺼내자 엄마는 이렇게 물었다.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니?"나는 대답했다. "다른 애들도 다 하니까요." 그러자 엄마가 말했다. "얘, 다른 사람들이 절벽에서 떨어지면 너도 따라 떨어질 거니?" 나는 다섯살 때부터 나를 격파해온 엄마의 논리에 또 한번 패배하여, 제모 숍에 전화해서 예약을 취소했다. 그러자 순식간에 기분이 좋아졌다. 나는 사실 브라질리언 왁싱을 받고 싶은 마음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마음속 깊숙한 곳에서는 내 음모에 아무런 문제도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수많은 친구들이 음모를 역겨운 것으로 취급하자 압박을 받았던 것이다. 그뿐이었다. - P208

머리로는 학부생 때부터 구조와 행위주체 개념을 이해하고 있었지만, 면도를 그만둔다는 결정을 내린 뒤 나는 처음으로 사회적으로 조건화된 젠더 행동을 선택한다는 것이 얼마나 복잡한 것인지 실감했다. 나는 결코 면도하기로 ‘선택‘한 적이 없었다. 내가 열세살 무렵 다리를 난도질 하기 시작한 까닭은 그것이 당시 내가 절박하게 꿈꾸던 여성성으로의 도약을 의미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는 겨드랑이에 털이 좀 났으면 하는 바람을 담아 겨드랑이에 면도기를 들이대기도 했다. 내가 성인으로 지내는 인생 내내 다리와 겨드랑이를 아이처럼 매끈하게 유지하려 노력할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업었다. 나는 소녀였고, 어른이 되면 성인 여성들이 으레 그러듯 면도를 할 터였다. - P222

그러나 원피스를 입기 위해 야생동물 같은 다리를 가려줄 깨끗한 스타밍과 흉포한 겨드랑이를 가려줄 카디건을 찾아 고군분투하는 지금, 나는 의복의 자유가 얼마나 허상이었는지 느낄 수 있었다. 내게는 피부를 드러낼 자유가 있었지만, 규범에 맞는 여성적 의상을 입을 때 드러나는 나의 신체 부위들은 ‘여성화‘되었을 경우에만 노출에 적합하다고 평가받았다. 그리고 여성화 과정에는 종종 돈과 시간을 들여야 했다-미용산업의 주머니를 내 돈과 시간으로 배불려야 했다는 말이다. 만약 내가 여성화에 순응하지 않은 신체 부위를 노출한다면-가령 크롭톱 아래로 드러난 배가 충분히 날씬하지 않다거나 치마 아래로 뻗은 다리에 털이 숭숭 나 있다거나-나는 사회적 맹비난과 개인적 수치심으로 이중의 불쾌감을 겪어야 할 것이다.
여성성은 여성이 갖고 있는 것이 아니라, 여성이 구매해야 하는 것이다. - P226

자본주의 체제는 우리에게 여성성은 우리가 구매해야 하는 것이라고, 남성과의 차이를 과장하는 방향으로 몸치장을 하지 않으면 올바르게 성별화될 수 없다고, 여성성이라는 임의적 개념에 맞춰 스스로를 부호화하지 않으면 여성적일 수 없다고 가르친다. 그러면서 동시에 선택의 주체는 우리라고 세뇌시킨다. 나는 체모를 기르기 시작한 뒤에야, 몸의 문제에서 내게는 조금도 선택권이 없었음을 깨달았다. - P227

언어를 변화시키면 가능성과 자유가 태어난다. 차별적인 세계관이 더는 당연하게 여겨지지 않는다. 예컨대 이사장을 ‘they‘라고 칭하면, 현실적으로 남자가 그 자리에 앉을 가능성이 더 높긴 해도, 이사장이 여성일 수 있는 언어적 공간이 만들어지는 셈이다. 내가 돌보는 어린아이를 ‘they‘라고 칭하면 그 아이에게는 어린 나이부터 기대되는 성역할 바깥에서 행동할 수 있는 자유가 주어진다. 내가 데이트하는 사람을 ‘they‘라고 칭하면 사람들은 더이상 내가 이성애자인지 동성애자인지 추측할 수 없을 것이고, 성소수자들에게는 다양한 기회가 주어진다. - P266

돌이켜보면 내 행동의 바탕에는 내 쾌락이 상대의 쾌락만큼 중요하지 않다는 믿음이 깔려 있었다. 미디어, 포르노, 심지어는 의학 및 과학 문헌에서 남녀의 성적 쾌락을 묘사할 때 취하는 태도를 감안하면 놀랄 일은 아니다. 1장에서 적었듯 여성들에게 남성의 승인을 갈망하는 경향, 자기 자신의 필요를 남성보다 적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음을 염두에 두면 당연한 일이기도 하다. 그래도 나는 나 자신이 부끄럽다. 현실세계에서는 과격한 평등주의자인 내가 어째서 침실에서는 순종적으로 되는 걸까? - P295

강간은 이 스펙트럼의 가장 추한 극단이지만, 합의된 섹스에서도 두 사람이 서로 다른 것을 원할 경우 자신의 쾌감을 위해 상대의 불쾌감을 무시하는 일은 흔하다. 상대가 거절 의사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는 것이 핑계가 된다. 여성이 자신의 쾌락을 상대의 쾌락보다 덜 중요한 것으로 간주하는 문화에서 섹스는 결국 남성이 원하는 행위의 모방으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문제는 그 행위가 폭력적인 포르노와 여성의 성기능에 대한 보편적 무지에 뿌리를 두고 있다는 것이다. - P296

진실을 말하자면, 나는 점잖은 페미니스트 앞에서는 인정하지 않을 성적 판타지와 이상성욕 들을 품고 있다. 그러나 흥미롭게도 특별히 노력하거나 의도하지 않았는데도 나이가 들고 전보다 정치화되면서 내 욕망은 조금씩 변화하는 중이다. - P298

살면서 유일하게 평등에 대해 생각하지 않아도 되는 순간이 있다면, 널따랗고 탄력 좋은 침대 위에 아름다운 몸과 더불어 누워 있는 순간일 것이다. 그런데, 페미니스트인 내가 연인들에게 몸을 결박당하고 말 못할 행위의 대상이 되는 걸 즐겨도 괜찮은 걸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이 "당연히 괜찮다"라고 생각해왔다. 그러나 날이 갈수록 확신이 없어진다. 성에 대한 이분법적 이해(남/여, 톱/보텀, ‘돔/써브 등)는 사회의 불평등한 권력관계에 명백히 관련되어 있기 때문이다. 침실에서 일어나는 일이 사회적 현실과는 별개라고-주종관계에 기반을 둔 섹스는 가부장제의 산물도, 가부장제의 생산자도 아니라고-주장하는 사람들의 논거에는 논리도 설득력도 부족하다. 나는 믿고 싶다. 정말로 그렇ㄱ ㅔ믿고 싶다. 그러나 불가능하다. 섹스는 성별화된 사회의 일부이며 강력한 힘을 지니기에, 우리가 젠더 역할을 수행하는 방식에 막강한 영향을 미친다. - P302

젊은 여성들은 섹스 및 포르노 업계에 걸맞은 미학의 의상을 입도록 조건화되지만, 강간이라도 당하면 그런 옷을 입은 게 잘못이라고 책임을 뒤집어쓴다. 여성들은 자신의 신체를 혐오하고 상대의 성적 쾌락에 우선적인 가치를 두면서도 성적으로 해방되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표면상으로는 누구든 좋은 사람과 섹스를 할 자유가 있지만(‘능력남‘ 대신 ‘창녀‘ 소리를 듣는 것에 개의치 않는다면), 우리가 성해방을 수행하는 의상과 안무는 우리의 성숙한 신체를 수치스러운 상징으로 바꿔놓으며, 최악의 경우에는 우리를 폄하하고 상처를 입힌다. - P306

우리 여성들이 성역할을 수행하는 데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싶고 또한 그들에게서 사랑을 돌려받고 싶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아주 크다. 이 동기는 손가락질을 받아선 안 된다.
내가 이 이야기를 하는 또다른 이유는 다르게 행동하는 것이 감정적으로 고통스러울 수 있다는 걸 말해주고 싶어서다. 때때로 사랑하는 사람들을 불편하거나 화나게 만들지 않고서 성역할을 벗어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갈등을 일으키지 않고는 세상을 바꿀 수 없다. 그러니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예측 가능한 갈등에 맞설 전략을 세워두는 편이 좋다. 솔직히 말하면 ‘예전의‘ 당신을 더 좋아했던 사람들에게 상처를 주거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고서 성역할을 다르게 수행할 방법은 없다. - P350

긍적적인 면은, 과거와 달리 화장을 하면 더 예뻐 보인다는 미적 판단에서 벗어났다는 점이었다. 이건 놀라운 일이었다. 과거에 나는 매일 화장을 했으며, 어느 시점에는 화장을 하지 않고서는 집 밖으로 한발짝도 나갈 수 없다고 느끼기까지 했다. 그러나 지금은 거울을 보고 불그스레한 피부를 보면 내가 내 피부의 부드러움과 생명력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깨닫는다. 이제는 피부를 빈틈없이 완전무결한 베이지색으로 물들이고 속눈썹을 검게 칠하는 것이 꺼려졌다. 전과 달리 화장은 미모를 향상시키는 게 아니라 한낱 변화를 낳는 행위로 느껴졌다. 화장을 한 나는 더 예뻐진 것이 아니라 그냥 달라진 것이었다. - P372

그러나 모든 것을 아우르는 슬픈 진실은, 음부가 가렵고 아침을 먹을 시간이 사라졌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하루 이틀 간의 정신적 적응기가 지나고 나니 규범에 맞는 성별화된 의상을 입은 덕분에 일상이 너무나도 수월해졌다는 것이다. - P373

할리우드 제모의 경험이 내게 남긴 유산은 여성의 미용 의례 가운데 제모야말로 미친 짓이라는 확신이었다. 막 털을 뽑은 닭 같은 모습에서 벗어나자 사흘간으 피부가 매끈했지만, 그다음엔 발진이 돋기 시작했다. 곧 외음부 전체가 작고 성난 뾰루지로 뒤덮였다. 걸을 때마다 피부가 가려웠고, 캐나다에서 새 직장을 구한 첫주 동안 나는 주기적으로 화장실에 숨어들어 외음부를 벅벅 긁어야 했다. 저녁에 집에 돌아오면 팬티를 벗어던지고 옴 붙은 딱한 짐승을 찬물로 다독이곤 했다. 할리우드 제모를 받은 다른 여자들에게 혹시 비슷한 증상이 있었느냐고 묻자, 몇명은 아무렇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 털이 다시 날 때는 원래 그래." 뭐라고? 이 미친듯한 가려움과 흉측한 발진이 음모 제모의 평범한 부작용으로 받아들여진다고? 세상에 체모보다 발진을 더 섹시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겠는가? 우리가 언제부터 수두성애자들의 사회에서 살고 있었는가? - P373

우리가 무력한 행동체계에 갇혀 있는 이유는 우리의 생각, 느낌, 행동이 미묘하게 강암적인 체제(구조)의 산물임에도 우리가 그것들을 선택(행위주체)으로 경험하기 때문이다. - P3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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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19-07-09 1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털털하게 살자구요. 하하하

다락방 2019-07-09 11:08   좋아요 0 | URL
좋아요, 털털하게!!

단발머리 2019-07-09 11:14   좋아요 0 | URL
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하! 저두요!!!!

심술 2019-07-09 14: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브라질리안 제모가 그런 거군요. 방금 알았네요.

지금까지는 1)브라질에서 대대손손 이어온 전통 제모법 내지는 브라질 누군가가 발명한 제모법

이나

2)브라질에서만 나는 동식물을 원료로 삼아 만든 제모약을 써서 털 없애는 법

이라고 막연하게 생각만 할 뿐
정작 어떤 건지 찾아볼 만큼 궁금한 적이 전혀 없었거든요.

헐리우드 제모라는 건 첨 들어보는데 이름만 들어도 대충 짐작이 가네요.

그러고 보니 어느 여성이 쓴 글이 하나 기억나네요.
어디서 읽었는지는 잊었는데
‘내가 속옷 때문에 불편하다고 하자 누가 추천해서 남자 속옷을 입어 보라 해서 해봤는데 아주 편했다.
나는 여자로 태어난 죄로 비싸고 불편한 속옷만 입어 온 지난 세월이 억울했다.
아울러 못 한 게 아니라 싸고 편하게 여자속옷도 만들 수 있으면서도 안 한 속옷회사에 화가 났다.‘
는 거였죠.

그거 읽고 여자들은 정말 별별 작은 일에서부터 쓸데없는 괴로움을 겪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다락방 2019-07-09 15:04   좋아요 0 | URL
왜 고통을 참아가면서까지 제모를 해야하는걸까요. 아 너무 짜증나요. 에머 오툴도 제모하지 않기로 결심은 했지만, 제모하지 않은 겨드랑이를 보이지 않으려고 애쓰거든요. 자유롭게 옷을 입지 못하는거죠. 저도 제모하지 않으면서 겨드랑이 가리고 다니는 건, 도대체 제모하는 것과 무슨 차이가 있나 싶기도 해요. 여자들만 있는 곳에 가도 다들 제모하고 있는데 저 혼자 안한걸 알면 거기에서 자연스레 아무렇지도 않은 듯 드러내기가 쉽지는 않더라고요. 도대체 얼마나 오랫동안 우리는 제모 압박을 받고 살아왔나 싶더라고요. 어휴, 지쳐요 정말.


저도 남자 속옷 입고 다니는데 세상 편해요. 다시 여자 속옷으로 돌아갈 수가 없습니다.... 인생........

심술 2019-07-10 16:33   좋아요 0 | URL
아, 락방님도 남자속옷 입으시는군요.

방금 휴대전화로 문자 왔는데 락방님이 보내신 책 오늘 안으로 온다고 하네요.

번번이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7-10 20:38   좋아요 0 | URL
재미있게 읽으셔요! :)

심술 2019-07-11 14:07   좋아요 0 | URL
그럴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