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제는 오후에 커피를 마셨는데도 마시면서 잠이 쏟아졌다. 집에 가 저녁을 배터지게 실컷 먹고(이제 안그럴거야, 소식할거야), 침대에 앉아 잠깐 책을 읽고 꾸벅꾸벅 졸다 잤다. 그렇게 꿈을 꾸었는데,


꿈에 나는 독일에 있었다.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독일에서 나는 불법체류자였는지 아무튼 정체는 알 수 없지만 머무를 곳도 없고 떠돌아야 하는 매우 가난한 사람이었다. 이런 나를 어느 가족이 재워주려 했지만, 그 주인집이 그 사실을 알고는 나를 내쫓았고 그렇게 나는 쫓겨나서 또 도망을 다니다가 일본으로 가게 됐다.

일본 역시 한 번도 가본 적 없는 곳이었는데, 어쨌든 일본의 가난한 마을에서 나쁜 장교가 가난한 아이들을 괴롭히고 있었다. 나 역시 거기에서 가난한 아이들중 한 명이었는데, 우리들은 먹을 것도 없고 머무를 곳도 없고 돌보아줄 사람도 없는 매우 좋지 않은 환경 속에 지내고 있었다. 근데 이 나쁜 장교가 어른이면서 우리를 괴롭히는 거다. 우리 가난한 아이들 무리는 이 어른 한 명이 시키는대로 해야만 했는데, 그러다가 이 나쁜 어른이 매우 어린 여자아이에게 더러운 짓을 시키려는 걸 보고 참을 수 없어진 아이 1이 불편한 감정을 표현했고, 나는 이에 힘입어 장교에게 개겨버렸.... 그러자 장교는 몹시 화를 내며 우리 모두에게 폭력을 쓰려고 하는데, 한 명 두명 아이들 모두가 한꺼번에 반항을 해서 갑자기 이 인간이 두려움에 액체가 되어 비이커 같은 용기 속으로 쏙 들어가 버린거다. 우리는 이 액체를 없애면 이 사람 자체가 없어진다는 걸, 즉 살인이라는 걸 알고 망설였다.



이 액체를 쏟아버리는 건 살인이야. 살인은 해서는 안될짓이지.

그렇지만 이 사람이 다시 살아나면 또 우리를 이렇게 괴롭힐거야. 그것도 안돼.



이렇게 우리 여러명은 쪼그리고 앉아 고민과 의논을 거듭하다가, 내가 말했다.



"지금 아무도 보는 사람 없으니까 하수도에 쏟아 버리자. 그리고 여기 있는 우리들만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으면 돼. 그러면 아무도 몰라."



아이들은 모두 그러자고 했고, 나는 그 액체를 하수도에 쏟아버렸다. 액체는 흩어지며 존재를 감췄고, 그렇게 나는 꿈속에서 살인을 했다.




자고 일어나서 대체 내가 왜 이런 꿈을 꾼건가, 이 꿈이 말하고자 하는 바가 무엇인가 곰곰 생각했다. 아침을 배불리 먹으면서도 대체 왜 이런 꿈을 꾼걸까 계속 생각했다. 이 가난한 환경, 집도 없고 도망다녀야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왜 꿈에 뜬금없이 이런 내용이 나오는가. 나에게 무엇을 말하고자 함인가...


도무지 알 수 없었던 나는 그렇게 출근준비를 마치고 지하철역에 도착해 자리에 앉아, 읽던 책을 마저 읽기 위해 꺼냈다. 그러자 앗! 내가 왜 그 꿈을 꿨는지 알 수 있게 되었다. 내가 어제 읽다 잠든 책은 이것이었다.



















아아, 이거구나, 이거였어. 제목 그대로 가난한 사람들이 나오는 이야기를 읽다 잠들었더니, 꿈속에서 내가 세상 가난한 사람이 되어 쫓기고 있었고 폭력에 노출되었고 공격 당하고 있었다. 멸시와 폭력이 바로 내 앞에 다가왔는데, 그건 내가 가난하기 때문이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또예프스끼'의 《가난한 사람들》에는 정말 아주 가난한 사람들이 나온다. 관청의 서기로 일하면서 사생활도 제대로 보장되지 않는 집에 세들어 사는 대머리 중년의 남자 '마까르 알렉세예비치'는 바로 앞 집에 사는 먼 친척이자 역시 지독하게 가난한 젊은 여자 '바르바라 알렉세예브나'와 애정을 주고 받으며 지낸다. 이 책은 서로간에 주고받는 편지로 구성되어져 있는데, 사실 이 둘의 관계가 어떤 관계인지를 잘 모르겠다. 간혹 편지에서 알렉세예비치는 상대를 '딸처럼 사랑한다'고 하는데, 그런 문장을 제외하고는 마치 연인을 대하듯 뜨거운 애정이 절절하게 넘치는 거다. 뭐여, 연애감정 가진건데 딸처럼 사랑한다고 자기 최면 거는건가.. 모르겠다. 알렉세예브나 역시 그에게 애정을 가지고 있어서 그의 편지에 답장도 하고 그를 생각하는 마음이 간절하고 그에게 집에 들르라고도 자주 청하고, 뭐 여튼 그들은 서로가 서로밖에 없다고 생각하는 돈독한 관계속에 서로를 의지하는데, 그런데 둘다 너무나 가난한거다. 말그대로 찢어지게 가난해서, 알렉세에비치는, 신발 밑창도 떨어질랑말랑하고 옷의 단추 역시 실에 간신히 매달려있는 상태다. 알렉세에브나는 삯바느질로 돈을 버는데, 역시 너무너무 가난해서, 몸이 약한데다 일까지 하다보니 또 몸이 아프고, 그런 상황에서도 이들은 서로를 생각하며 서로에게 사탕을 보내고 용돈도 보내고 그런다. 자기들 먹고 살 돈도 없어 집세도 밀리면서, 그런데도 서로에게 돈을 보내.. 아아, 인간이여.


게다가 이 가난한 남녀가 사는 동네는 역시 이들처럼 가난한 사람들이 잔뜩 살고 있는데, 제 코가 석 자인 알렉세예비치는, 다른 사람들의 사정을 듣고 '나보다 더 딱하다', '나보다 더 안됐다' 이러면서 그들을 동정하고 자신이 가진 돈을 탈탈 털어주고 막 그런다..


하아-


이들은 서로 책도 빌려주지만, 알렉세예비치는 책을 읽어본 적이 없고 교육을 받지도 못했으나 알렉세예브나는 책을 많이 읽었던 사람이라 책을 읽고난 후의 감상을 주고 받을 때 너무 감상 달라버리고..



돈이 없어도 너무 없어서 알렉세예비치는 돈을 빌리려고도 해보지만, 그에게 담보가 없다는 걸 뻔히 아는 사람들이 그에게 돈을 빌려줄 리가 없다. 그는 가난하고 가난하고 또 가난해서, 월급까지 가불한 상태이지만 이 가난은 끝이 없고, 어떻게 이보다 더 가난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가난의 나락으로 떨어지고 또 떨어진다. 그런데 그의 주변에는, 그러니까 그가 세들어 살고 있는 다른 집의 사람들 역시 너무 가난해서 오죽하면 알렉세예비치에게 돈을 빌리러 오기도 해. 그렇지만 그는 가진 게 없고.. 사정 들어보면 너무 딱해서 빌려주고 싶은데 자기 주머니에도 땡전 한 푼 없고.. 어쩌다 조금이라도, 아주 조금이라도 있으면 그걸 빌려줘야 하고...




그러니 그는 가끔 이 비참함과 슬픔에 술에 취해 사고를 치기도 하고, 이로서 알렉세예브나를 비롯해 직장 동료들을 실망시키기도 한다. 그나마 일자리가 있다는 것만이 그에게는 한줄기 희망인데, 그런데 그가 어느날 아주 중요한 서류를 정서하다 한 줄을 빼먹는 실수를 하게 된다. 이 일로 그는 관청의 '각하' 앞에 불려가 크게 혼나게 되는데, 아아, 비참함은 이럴 때 '어디, 한 번 날잡아보자' 하고 폭풍처럼 밀려들어.




그런데 그때, 바로 그때, 지금 생각해도 펜을 그러쥘 힘조차 없을 정도로 부끄러운 일이 벌어지고 말았어요. 저의 단추가, 가느다란 실에 간신히 매달려 있던 망할 놈의 단추가 갑자기 실을 끊고 툭 떨어지더니 바닥으로 튀어 버린 겁니다. (아마 제가 저도 모르게 잡아당겼던 모양입니다.) 떨어진 단추는 소리를 내며 굴러가더니 그 저주받을 단추는 곧장, 그야말로 곧장 각하의 발을 향해 가는 것이었습니다. 모두들 침묵하고 있는 사이에 말입니다! 제가 각하께 대답하려던 모든 것을, 즉 변명과 사죄를 단추가 대신한 셈이었죠! 결과는 끔찍했습니다. 각하가 저의 겉모습과 의복에 주의를 기울이게 되셨으니까요. 저는 거울 속에서 보았던 제 모습을 떠올렸습니다. 저는 단추를 잡으려고 뛰었습니다! 얼마나 어리석은 짓이란 말입니까! 몸을 굽혀 단추를 집으려는데 단추가 구르고 돌고 하는 바람에 잡을 수가 없었습니다. 한마디로 대단히 민첩한 행동을 구경시켜 드린 거죠, 헛헛. <이젠 끝장이구나!> 싶더군요. 자존심은 구겨질 대로 구겨지고 저라는 사람은 완전히 파멸된 것이었습니다! (p.184-185)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가뜩이나 초라한 행색이고 그걸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았는데, 특히나 자기 겉모습으로 자기를 판단해 직장에서 쫓겨날까봐 쫄고 있었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 단추가 떨어져 가장 높은 상관 앞으로 굴러가버린다. 그렇게 비참한 모습일 때 가장 비참한 모습으로 타인에게 들켜버리고야 마는 것. 아아, 그 자존심은 대체 어떻게 해야 한단 말인가. 온전히 시선이 비참한 내게로 향하는 그 순간. 그 마음을 대체 어째야 한단 말인가. 누추한 옷차림에서 떨어진 단추, 그것이 가장 호화롭고 높은 사람 앞으로 굴러가버려. 아아, 인생이란 무엇입니까. 대체 가난이란 무엇이란 말입니까. 그는 이제 자신의 직장생활이 완전히 끝났음을 직감한다. 그의 모습에 놀란 각하에게, 그의 상관은 '월급을 충분히 주는데도' 왜저러는지 모르겠다고 말한다. 그 충분은... 누가 말하는 충분인가요?




각하는 다른 모든 직원들을 내보내고 알렉세예비치만 남겨둔다.



「자, 그럼.」각하께서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빨리 이거나 다시 쓰게. 제부쉬낀, 이리 가까이 오게. 이번에는 실수 없이 다시 정서하게. 그리고 말이야 ……」각하께서는 다른 사람들을 보시며 지시를 내린 다음 물러가게 하셨습니다. 그들이 물러가자마자 각하께서는 얼른 지갑을 꺼내시더니 1백 루블짜리 지폐를 한 장 빼셨습니다. 「자, 이거 받게.」각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이것뿐일세. 성의로 알고 받아 두게.」 그러고는 그것을 제 손에 쥐어 주셨습니다. 나의 천사여, 저는 몸을 부르르 떨었습니다. 저의 온 영혼이 전율을 느꼈습니다. 그 순간 저는 어떻게 됐었나 봅니다. 각하의 손을 잡으려 했으니까요. 각하는 얼굴이 빨개지시더니-소중한 나의 사람이여, 저는 지금 한 치의 거짓 없이 말씀드리고 있습니다-저처럼 미천한 사람의 손을 잡고 흔드셨습니다. 정말로 제 손을 잡고 흔드셨다고요. 마치 가까운 사람에게 그러시듯, 당신과 비슷한 서열의 장군에게 하시듯 제게 그렇게 대해 주셨어요. 「자, 이제 가보게.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게 다일세 ……. 더 이상 실수는 저지르지 말게. 이번 실수는 덮어 두겠네.」 (p.186-187)



각하가 한 번에 갑작스레 주게 된 돈 1백 루블은 큰 돈이다. 알렉세예비치가 머무르는 곳의 집세는 7루블. 그것도 못내서 집주인에게 멸시를 받고 있는데, 각하가 척, 내어준 돈은 1백 루블. 그는 일단 그 중에서 20루블을 집주인에게 건네고, 35루블은 알렉세예브나에게 준다. 신발도 새로 사서 신을 예정이고 반드시 새 옷도 사서 옷차림도 단정히할 참이다. 그 돈은 그를 살 수 있게 해주었고, 버티게 해주었고, 숨을 쉴 수 있게 해주었다. 그러나,


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누군가는 1루블도 안되는 돈을 빌리러 오는데(굶어 죽을까봐), 누구는 그냥 탁, 꺼내어 줄 수 있는 돈이 100 루블이라니. 너무, 너무 이상하지 않습니까. 왜 성실히 일하는데 한 달에 7루블 되는 집세를 낼 수가 없습니까. 왜 열심히 일하는데 밑창이 떨어진 신발을 신고 다녀야 합니까. 이상하지 않습니까.




저는 오늘 아침에 예멜리얀 이바노비치, 악센찌 미하일로비치와 함께 각하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바렌까, 각하는 저 한 사람에게만 자비를 베푸신 것이 아니더군요. 저 한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푸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선량한 마음은 세상이 다 알고 있더군요. 꽤 여러 사람이 그분의 공덕을 찬양하며 감사의 눈물을 흘리고 있대요. 고아도 한 명 데려다 키우셨는데 안 해준 거 없이 다 해주시고, 각하의 휘하에서 특수 임무를 맡았던 고명한 관리에게 시집까지 보내셨다는군요. 어떤 가ㅗ부의 아들은 사무실에 취직시켜 주시고, 그 밖에도 그분이 베푼 은혜는 끝이 없어요. (p.190-191)




나는 너무 이상한거다. 물론 각하가 돈이 없는 사람들에게 베푸는 삶을 사는 것은 매우 칭찬받을 일이다. 자신이 가진 게 많다고 해서 모두가 베푸는 삶을 살 수 있는 건 아니니까. 그렇지만, 왜 누군가는 그렇게 끊임없이 베풀 수 있을 정도의 돈을 가지고 있는데, 왜 누군가는 당장 주머니에 한 푼도 없어 나가서 구걸을 해야 하는걸까. 그것은, 너무너무 이상하지 않나요? 왜 누군가의 지갑에는 1백루블이 그냥 늘상 들어있고, 누군가는 1루블도 없어 빌리러 다녀야 하는가. 왜, 왜?!




소설의 끝에 이르면서 알렉세예비치의 비참함은 조금 상황이 나아지는 듯하다. 누군가 그에게 부업을 가져다준 것. 정서를 해주고 돈을 받을 수 있는 세컨잡이 생긴 셈이다. 그는 지금보다 조금쯤은 더 여유로운 삶을 살 수 있을 것 같다. 그 소식이 마냥 기쁜데, 알렉세예브나 역시 가난에 허덕이고 허덕이고 허덕이고 또 허덕이다가, 그녀에게 청혼한 부잣집 늙은 남자에게 예스를 말한다. 그 부잣집 늙은 남자는 그동안 그녀를 지켜봐왔므여 품행이 단정한 걸 알고 있다고, 자기랑 결혼하면 지금처럼 마르고 병약한 모습에서 통통하게 살찐 모습으로 바꿔줄 수 있다고 말한다. 이 가난이 지독하게 끔찍했던 알렉세예브나는 자신의 미래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해 하면서도, 이게 답이구나 싶어서 결국 그와의 결혼을 결심하게 된다.




제가 당신이 베푸신 일은 아무리 큰돈으로도 보답할 수 없는 것이라고 했더니, 그는 헛소리라며 제 말을 막았습니다. 소설에나 나오는 얘기라고, 제가 아직 어려서 시 나부랭이나 읽고 하는 소리라고, 소설이 어린 처녀들을 망치고 있다고, 책이 그들의 도덕성을 해치고 있다고, 그래서 자기는 어떤 책이든 쳐다도 안 본다고 말했습니다. 자기만큼 나이를 먹은 뒤에 그때 가서 사람에 대해 언급을 하라고 제게 충고도 했습니다. 「그때가 되면,」그는 덧붙였습니다. 「사람에 대해 알게 될 거요.」그는 자기 청혼에 대해 심사숙고하라고 말했습니다. 그렇게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제가 경솔한 행동을 하면 자기 기분이 안좋을 거라며, 경솔함과 열정은 경험 없는 젊은이들을 망치는 지름길이라고도 했습니다. 그리고 저의 긍정적인 대답을 간절히 바란다고 덧붙였죠. 그렇지 못한 경우엔 모스끄바에 사는 어떤 상인의 딸과 결혼을 하게 될 것이라는 얘기도 했습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조카에게서 상속권을 박탈하기로 맹세했으니 결혼을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이었죠. 그는 사탕이나 사 먹으라며 제 손에 억지로 5백 루블을 쥐어 주었습니다. 또 시골에 가면 제가 잘 부풀어오른 빵처럼 통통해지고 그의 품에서 배를 두드리며 유복하게 살 수 있을 거라고 말했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지금 할 일이 태산이라 하루 종일 돌아다녀야 하지만, 그 와중에 짬을 내어 제게 달려온 것이라고 하더니 마침내 가버렸습니다. (p.202)




그녀에게 청혼한 남자는 어린 니가 시 나부랭이나 읽어서 철이 없다고 말하고, 신중하게 생각하라고 말한다. 경솔한 행동을 하면 안된다고. 그러니까 그의말은 즉, 자신과의 결혼을 허락하면 그것은 신중한 것이고, 노(NO!) 라고 말하면 경솔하다는 것. 야, 이게 무슨 청혼이야 써글놈아. 가스라이팅 오지고요. 돈 있다고 돈 쥐어 주면서 빨리 결정해, 나 바빠~ 이러고 가버리는 늙은 새끼.. 벌써부터 그녀가 이 결혼을 하게 되면 얼마나 고생할지 뻔히 보이는구먼. 아아, 여자여, 그가 답이 아니다...


책이 도덕성을 망치고 있다니, 소설이 어린 처녀들을 망치다니.

이보시게, 책이나 읽고 말하시게.

소설 나부랭이나 읽는 나의 도덕성이 비꼬프 당신보다 오천 배는 더 나을것 같구려.




저는 당신께 조언도 구하지 않고 결정을 내렸습니다. 혼자 생각하고 싶어서요. 제 결정은 변하지 않을 겁니다. 저는 가능한 한 빨리 이 결정을 비꼬프 씨에게 알리겠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빨리 대답하라고 재촉하고 있으니까요. 그는 지급을 요하는 일로 하루 속히 시골로 돌아가야 하기 때문에, 사소한 일로 중요한 일을 더는 미룰 수 없다고 말합니다. 신성하고 헤아리기 어려운 하느님이 정하신 운명의 굴레에서 제가 행복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오직 하느님만 아시겠지요. 하지만 제 마음은 이미 정해졌습니다. 비꼬프 씨를 착하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더군요. 그는 저를 존중해 줄 겁니다. 어쩌면 저 또한 그를 존경하게 되겠죠. 이제 저희가 결혼하는 데 있어서 더 뭘 바라겠습니까? (p.203-204)




가난에 치인 사람이 더이상 가난하기를 원치 않아 하게 되는 결정이니, 다른 사람은 그녀에게 뭐라 할 수 없다. 그녀의 지금까지 삶은 매우 힘들었고, 이제 이 늙은 남자랑 결혼하고 나면 더이상 돈걱정은 하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이 사람이 정말 좋은 사람인지에 대한 확신은 없지만, 그래도 돈 걱정 없이 살 수 있다면 그게 어딘가.


그래서 사람은 극한 상황에서의 결정을 피해야 하는 거다. 가난에 너무 깊이 빠져있어, 가난에서 벗어나는 거 말고는 다른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이 결정이 가져올 앞으로의 다른 어떤 일을 어떻게 생각하라 할 수 있겠는가. 모든 걸 다 따져보고 싶지만, 그녀에게 모든 건 그저 가난이었는걸. 그러나 여기, 독자로서, 제삼자의 입장으로서 내가 보자면, 그는 결혼해서 살기에 좋은 남자가 아니다. 자기에게 결혼해달라 청하면서 바쁘다, 빨리 결정해라 재촉하고, 경솔하지 마라, 자신이 이미 위에 놓여서 얘기하는데, 어떻게 이런 남자가 좋은 남편이 될 수 있을까. 그녀는 그와 결혼하기로 결심하지만, 그러나, 결혼을 앞두고 그가 앞으로 어떤 남편이 될지 아아, 나는 너무나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친애하는 마까르 알렉세에비치!

부디 지금 당장 보석 세공인에게 가셔서 진주와 에메랄드가 박힌 귀고리는 만들지 말라고 말씀해 주세요. 비꼬프 씨가 너무 사치스럽고 돈이 많이 들어간다고 하더군요. 그는 요즘 돈을 너무 많이 쓴다면서, 제가 그의 돈을 다 털어 간다고 화를 내고 있어요. 어제는 만약 미리 이럴 줄 알았다면, 이렇게 지출이 많을 줄 알았다면 아예 처음부터 연락을 취하지도 않았을 거라고까지 하더군요. 또 하객도 없을 거고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떠날 거니까 저더러 춤추고 즐길 생각은 꿈도 꾸지 말라며, 우리는 잔치를 치르는 것이 아니라고 못을 박더군요. 어쩌면 말을 그렇게 하죠! 이러저러한 것이 필요하다고 한 게 저였던가요, 하느님이 보고 계십니다. 비꼬프 씨가 직접 주문한 거였다고요. 하지만 저는 말대꾸도 한마디 못했습니다. 그는 다혈질이에요. 저는 이제 어떻게 되는 거죠! (p.210)




결혼할 남자의 집으로 갔지만 모든 하인들은 그녀의 눈에 띄지 않았고, 그녀는 바쁜 일정을 혼자 소화해내야 했고, 그러니 보석 세공인에게 가야하는 것도 알렉세예비치에게 편지로 부탁한다. 이게 무슨 상황이야. 게다가 통통하게 살찌게 해줄게, 라고 그녀를 지켜보고 그녀의 집까지 찾아와 청혼한 주제에, 너 왜그렇게 돈 많이 써, 돈 쓸줄 알았으면 청혼 안하는건데, 이 따위 소리나 지껄이고 있다. 주문도 지가 해놓고서... 개놈이여.....

알렉세예브나는 하나의 곤경을 피하려다가 다른 난관을 맞닥뜨린 것 같다.



이게 바로 가난이 주는 형벌인가. 가난한 사람에게 선택의 권리가 없다. 가난한 사람이 하는 선택이 과연 본인의 의지로 본인의 행복을 위한 선택인걸까. 가난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게되는 것이 그 사람에게 행복을 가져다줄까? 그 사람에게 다른 불행이 찾아왔을 때, '그건 너의 선택이었잖아!' 라고 말해도 될까?

알렉세예브나가 가난하지 않았다면 저 부자 쫌팽이의 청혼을 받지도 않았을거고, 그 청혼에 예스를 말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가난은 종종 다른 불행을 불러와. 아아, 도스또예프스키여, 어쩌면 이렇게 가난한 사람들에 대해 잘도 써냈단 말입니까. 비참함이 비참함을 가져오고 비참함과 친구하고 비참함과 짝을 이루는 이런 이야기라니...




슬프다.

슬픔의 새드니스.

가난이 가져오는 이 슬픔.

가난이 가져오는 선택 아닌 선택.




아이참.

글 짧게 쓸 생각이었는데 또 쓰다보니 길어져버렸구먼 ㅠㅠ 나는 대체 왜이럴까 ㅠ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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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9-05-08 1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5-08 11: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잠자냥 2019-05-08 1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도스토예프스키는 구질구질한 가난도 어쩜 그리 구질하게 잘 묘사하는지 감탄이 나오던 작품입니다. ㅎㅎ

다락방 2019-05-08 13:02   좋아요 0 | URL
읽으면서 계속 아이고 너무 가난하잖아 ㅠㅠ 진짜로 가난한 사람들 얘기 써놨잖아 ㅠㅠ 했어요. 이야 진짜 기가 막히게 글을 잘쓰는 것입니다!!!

단발머리 2019-05-08 15: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술가가 분명해요, 다락방님은요.
국가와 대륙을 초월하는 이 스펙터클한 꿈의 대향연!!

다락방 2019-05-08 17:56   좋아요 0 | URL
전 커서 뭐가 되려고 이러는걸까요, 단발머리님? (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hnine 2019-05-08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등학교때 삼중당 문고판으로 읽었어요.
이렇게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에 사랑은 무슨 사랑, 이러면서 시시하다 코웃음치며 읽기 시작했다가 마지막엔 먹고 살기도 힘든 상황, 구질구질한 상황이라는 것이 사랑이 시작되는데 아무 상관없구나 감동했다가, 그런데 지속하는데 걸림돌이 되기도 하는구나, 그래서 너무 슬프다 생각했었어요.
이거 지금쯤 한번 다시 읽어봐야하는 소설이네요. 덕분에 생각났어요. 고맙습니다~

다락방 2019-05-08 17:58   좋아요 0 | URL
저는 삼중당 문고판으로 [카인의 후예]를 읽었던 것 같은데(맞는지 모르겠어요) 카인의 후예 내용이 전혀 생각나지 않네요. 아마도 중학교때 읽었던 것 같은데..

와, 정말이지 구질구질한 가난에 대해서 지독하게도 잘 묘사해서 비참의 바닥까지 내려갔다 왔어요. 돈이 없어도 너무 없는 사람들이 서로 더 어렵다고 사정 얘기하는 걸 듣노라면 너무 힘들더라고요. 그런 반면에 큰 돈을 팍팍 꺼내 쓸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나인님, 지금 다시 읽으면 또다른 느낌일 것 같아요. 읽고나면 후기 적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