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처: 한겨레)

“정치권력보다 오만가능성 적다”
“기업권력 자제력 잃었다”
 
고명섭 기자  김경호 기자
 

사회=논쟁 촉발의 계기가 된 ‘기업사회론’의 논지를 먼저 분명하게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김동춘=기업사회란 세 가지 차원에서 이야기될 수 있다. 첫째, 기업권력이 정치권력이나 법·행정을 압도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둘째, 기업이 아닌 사회조직이 기업을 모델로 하여 조직되는 사회다. 과거에 군사사회가 군대를 모델로 삼아 공장이나 학교를 조직했던 것처럼 기업사회에서는 사회의 모든 조직이 기업을 모델로 한다. 셋째, 기업의 문화나 시장논리가 다른 문화의 가치를 압도하고 모든 사회구성원이 종업원과 소비자로 지칭되는 사회가 기업사회다. 한국은 1990년대 초반부터 기업사회로 전환되기 시작해 97년 외환위기 이후 그 전환이 급속하게 이루어졌다고 본다.

공병호=사회를 표층과 심층으로 나눠본다면, 김 교수가 말씀하신 기업사회는 표층적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 표층적 현상의 옳고 그름을 이야기하기 전에 심층의 변화를 따져봐야 한다. 1990년 사회주의권 붕괴와 글로벌 자본주의화라는 심층적 변환이 있었다. 냉전의 시대로부터 세계화의 시대로 바뀐 것이다. 오늘날 지구촌 모든 사람들이 경험하는 것이고, 한국도 여기서 예외가 아니다. 특히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큰 변화를 겪었다. 그런 심층적 변화가 표면에 드러난 것이 기업사회론에서 말하는 현상일 것이다.

사회=김 교수는 기업사회 특징의 하나로 정치·사회가 기업활동을 통제하기보다는 기업에 봉사하는 구실을 하는 것을 꼽았는데….

김동춘=우리 사회에서 ‘규제’라는 말이 쓰이는 방식을 보면, 부정적인 의미가 강하다. ‘규제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식이다. 그러나 규제를 그렇게만 봐선 안 된다. 자본주의 시장경제를 규제 없이 그대로 놔두면 필연적으로 약육강식의 사회가 된다. 사회공동체의 처지에서 보면 규제는 반드시 있어야 한다. 내 경우를 말하면, 1990년대 세계화 담론이 등장했을 때 한동안 ‘기업에 국경이 없다’는 이야기에 동조했다. 그런데 미국에서 1년 남짓 공부하면서 미국 기업들이 미국이라는 국가의 울타리 없이 성장하지 못한다는 걸 똑똑히 보았다. 한국도 마찬가지다. 한국이라는 국가, 국민, 교육제도, 한국어 등의 인프라 없이는 대기업이 대기업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글로벌 기업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도 한국이라는 국가적 인프라가 없으면 안 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사회가 기업의 발목을 잡는다는 말이 횡행한다. 불필요한 통제는 좋지 않지만, 국가의 개입은 당연히 필요한 것이다. 미국에서조차 국가 개입이 있다. 반사회적인 행동을 한 기업을 처벌하는 것조차 규제나 통제로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 어느 일간지에 대학교수가 삼성이 8000억원 내놨으니 이제 발목잡지 말라는 주장을 폈다. 이런 생각이 문제다. 사회가 기업에 봉사해야 한다는 발상이다.

공병호=중요한 것은 국민, 서민이 잘살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물질이 전부는 아니지만, 보통의 서민들에게 가장 화급한 것이 물질적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이다. 물질의 풍요를 위해 정치와 정부가 적극적으로 치어리더, 유인자 구실을 해야 한다. 정치나 사회가 기업에 봉사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물질의 풍요를 생산하는 것이 기업이라는 사실에 있다. 일반 국민에게 풍요를 주기 때문에 기업을 돕는 것이다. 우리만 그렇게 하는 것이 아니고 전 세계 모든 국가들이 그런 경쟁을 하고 있다.

김동춘=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해주는 게 정치의 가장 중요한 일인 건 사실이고, 그래서 정치가 나서서 기업투자도 장려한다. 문제는 법을 어겨가면서까지 기업에 특혜를 주는 것이다. 예를 들어, 지난해 이건희 삼성 회장 소환이 국회에서 문제가 됐을 때, ‘우리가 이건희 회장 소환할 자격이 있느냐’ 그런 말들이 (정치권에서) 나왔다. 이렇게 국회의 정당한 활동까지 축소시키는 게 문제다. 얼마 전 법무부 장관이 ‘기업하기 좋은 나라’ 발언을 했다. 법무부 장관이면 법이 우선이고 질서를 바로잡는 게 우선인데, 잘못 가고 있는 것이다.

공병호=정부가 법집행을 할 때 가장 중요한 건 공정성이다. 위법한 행위는 명백하게 (처벌)해야 한다. 제가 주장하는 것은 합법적 절차에 따른 정치의 역할이지, 특정 기업에 특혜를 주는 행위를 하라는 것이 아니다. 대통령이 사면권을 남발해 기업주의 편의를 봐주는 것, 나는 그런 건 납득하기 어렵다. 법집행은 공정해야 하고 불법행위와는 선을 그어야 한다.

사회=자유경쟁에 맡겨둘 경우 강자만이 살아남는데, 정부나 국가가 개입해야 하는 것 아닌가.

공병호=국가가 앞장서서 재분배정책을 펴고 세금 부담을 높이고 규제를 강화하는 것은 20세기에 이미 다 써본 정책이다. 지금은 자본이 무한 자유를 누리는 시대다. 세계의 규칙을 만들 힘이 우리에겐 없다. 우리는 규칙을 따라갈 수밖에 없다. 자본거래에 막대한 세금을 매기면 자본이 들어오지 않는다. 국가가 보호하려고 했던 서민이 결과적으로 더 어렵게 되는 것이다. 재분배정책은 항상 의외의 결과를 낳고 만다.

김동춘=무한대에 가까운 자본자유, 기업자유 시대라고 하지만, 세계 전체로 보면 서민의 삶의 조건이 하향평준화하고 있다. 세계화 상황에서 복지국가 독일이 위기라는 건 인정하지만, 그렇다고 사회시스템 작동을 개입 없이 내버려 두면 안 된다. 타협의 접점을 마련해야 한다. 규제를 풀면 (외국)자본이 들어온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규제를 철폐하더라도 한국의 인프라나 다른 여건이 매력 있어야 들어오지 규제만 푼다고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탈규제보다 인프라가 중요하다. 규제만이 문제라면 삼성이 왜 유럽에 투자를 하겠나.

사회=김 교수가 글에서 ‘기업 파업’ 이야기를 했는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병호=20대 때부터 기업하는 사람들을 옆에서 지켜본 경험으로 말하면, 그들은 대단히 개인주의적인 사람들이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이 모여서 깃발 들고 파업하겠다고 협박할 수는 있겠지만, 실제로 자본파업하는 건 불가능하다. 파업하자마자 다른 기업이 그 자리에 달려들게 돼 있다.

김동춘=공장이전이란 방식의 기업파업은 있을 수 있다. 기업들이 투자를 회피하거나 공장을 국외로 이전함으로써 사회적 압력을 행사하는 실례가 있다. 스웨덴도 그런 경험이 있다.

공병호=나는 기업가를 자유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독점 유혹이 강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공정거래위가 활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기업 내부로 들어가보면, 그들의 심리는 매일 전전긍긍이고 노심초사다. 소비자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언제 밀려날지 알 수 없다. 삼성공화국이라고 하지만 그건 말이 안 된다. 사업하는 사람들에게 소비자가 엄청난 권력이다. 경제적으로 비합리적인 행위를 지속할 수 없다. 고객에게 구애해야 하는데, 그런 비합리적인 일을 계속할 수 없다. 그들은 불안하고 취약하다.

김동춘=나도 그런 점에서 기업권력을 정치권력과 같은 것으로 보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기업이 시장을 통제하려는 욕망이 있고, 일정한 수준에서 자제력을 발휘해야 할 시점이 있는데 그게 안 될 때, 다시 말해 과도하게 상황을 장악하려고 할 때 공화국이라는 표현에 맞는 상태가 나타난다고 본다. 예를 들어, 삼성이 공정거래위 조사를 방해하려 한다든지, 언론의 논조를 장악하려 한다든지 정권을 입맛에 맞게 창출하려 하는 것은 정당한 선을 넘은 상태다. 이런 상태를 두고 사람들이 삼성공화국이라고 부르는 것이다. 결국 사회가 견제해야 하는데, 기업의 권력에 비해 사회의 견제력이 너무 약하다.

공병호=자제력을 잃었을 때 그런 오명을 덮어쓸 수 있다는 말씀으로 이해하겠다. 힘이라는 것은 스스로 제어하는 것이 정말 어렵다. 그러나 정치권력과 경제권력은 차이가 있다. 강조하고 싶은 건 사업하는 사람들의 절망적 상황, 벼랑끝에 서 있는 상황을 한국 사회가 좀더 따뜻한 눈길로 봐줬으면 하는 것이다. 기업가들은 선하게 행동하지 않으면 오래 버틸 수 없다. 그런 면에서 오만해질 가능성은 정치권력보다 훨씬 적다. 오만해지면 소비자로부터 멀어진다. 경제권력은 생각하는 것보다 오만한 행동을 할 가능성이 적다.

정리 고명섭 기자 michael@hani.co.kr
사진 김경호 기자 jijae@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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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02-20 1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부의 규제, 세계의 규칙에 대한 공병호 소장의 극단적 태도에 대해서, 김동춘 교수는 "규제 보다 인프라가 중요하다."며 적절히 대응합니다. 공화국에 소비자 권력으로 맞서는 공 소장의 동문서답이 우습군요.

여울 2007-02-20 1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네요. 공 소장의 식견이 의심스럽네요. 인문학적 소양의 깊이?도 말입니다. 논쟁이랄 것 까지 없는 싱거움이 보입니다.

마법천자문 2007-02-20 17: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겨레 너무하는 거 아닌가? 아무리 부를 사람이 없어도 그렇지 공병호라니.. ㅎㅎ
 

(출처 http://en.wikipedia.org/)

Alexander Gavrilovich Shliapnikov (1885~1937)

was a Russian communist, trade union leader and skilled metalworker.
러시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조합 지도자, 숙련된 금속노동자였다.

Shliapnikov was born in Murom, Russia to a poor family of the Old Believer religion. His father died when he was a small child. Shliapnikov began factory work at age thirteen and became a revolutionary at age sixteen. He joined the Bolsheviks in 1903. He was arrested and imprisoned at various times for his radical political activities, including his involvement in the 1905 revolution. Shliapnikov left Russia in 1908 and continued his revolutionary activities in Western Europe, where he also worked in factories and was a devoted trade unionist.
그는 러시아 무롬(Murom, Russia)의 가난한 구교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그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죽었다. 그는 13살 부터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으며, 16살에 혁명가가 되었다. 그는 1903년에 볼셰비끼(Bolsheviks)에 가입했고, 1905년 혁명에 연루된 것을 포함해, 그의 급진적인 정치활동 때문에 수차례 체포와 투옥을 당했다. 그는 1908년에 러시아를 떠나 서유럽에서 혁명활동을 계속했고, 거기서에서도 그는 공장에 다니며 노동조합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Shliapnikov returned to Russia in 1916. He, Vyacheslav Molotov, and Petr Zalutskii were the senior Bolsheviks in Petrograd at the time of the February Revolution in 1917. More prominent figures such as Lenin, Zinoviev, Kamenev and Stalin were abroad or in Siberian exile when the February Revolution began. In 1917, Shliapnikov became a member of the Executive Committee of the Petrograd Soviet of Workers' and Soldiers' Deputies. He also was elected to chairmanship of the Petrograd Metalworkers' Union and later of the All-Russian Metalworkers' Union. He led negotiations of a wage agreement between Petrograd metalworkers and factory owners in 1917.
그는 1916년 러시아로 돌아왔다. 그와 몰로또프(Vyacheslav Molotov), 짤루스끼(Petr Zalutskii)는 1917년 2월 혁명 당시만 해도 뻬뜨로그라드에서 고참 볼셰비끼 당원이었다. 레닌(Lenin), 지노비예프(Zinoviev), 까메네프(Kamenev), 스딸린(Stalin)과 같은 더 유명한 인물들은 2월 혁명 당시 해외에 있거나 시베리아 유형에 처해있었다. 1917년 그는 뻬뜨로그라드 노동자 병사 소비에뜨 최고위원이 된다. 그는 또한 뻬뜨로그라드 금속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되며, 후에 전(全)러시아 금속 노동조합의 위원장이 된다. 그는 뻬뜨로그라드 금속 노동자들과 공장 소유주 사이에서 임금 협상을 이끌었다.

Following the October revolution and the Bolshevik seizure of power, Shliapnikov was appointed Commissar of Labor. Lenin called for a Bolshevik dictatorship, which was opposed by some Bolsheviks. Shliapnikov supported a coalition government composed of left socialist parties, but he did not resign his post in the government, as some other Bolsheviks did. He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vacuating industry from Petrograd, as the Germans approached in 1918. As Commissar of Labor, he helped draft important directives on workers' control of industry and nationalization of industry and he staffed government bureaucracies with staff from trade unions. In the summer of 1918, he went to the south of Russia on a mission to gather food for the population of the Bolshevik-controlled cities of central Russia.
이어진 10월 혁명과 볼셰비끼의 집권에서, 그는 노동인민위원으로 지명(was appointed)되었다. 레닌은 몇몇 볼셰비끼들이 반대했던 독재를 요구했다. 그는 좌파 사회주의 정당들로 구성된 연합 정부를 지지했다. 그러나 그는 다른 볼셰비끼들이 그러했듯이, 노동인민위원직을 사임하지는 않았다. 그는 1918년 독일군이 공격할 때, 뻬뜨로그라드 산업시설을 소개하는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노동인민위원으로서, 그는 산업에 대한 노동자 통제와 산업의 국유화에 대한 중요한 방향을 이끌었고, 노동조합 지도자와 정부 관료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수행했다. 1918년 여름, 그는 볼셰비끼에 의해 통제되는 중앙 러시아 도시의 인민들을 위해 식량을 징발하러 남부 러시아로 향했다.

In fall 1918 and continuing into early-1919, Shliapnikov served as Chairman of the 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of the Caspian-Caucasian Front in the Russian Civil War. He also served in the Revolutionary Military Council of the Western Front during the Civil War. During the Civil War, Shliapnikov began to criticize the increasing tendency of the Russian Communist Party and Soviet government to rely on authoritarian measures to enforce policies towards industry and industrial workers. To Shliapnikov, denial of workers' right to participate in economic decision-making was a step away from the goals of the 1917 revolution.
1918년 가을부터 1919년 초까지, 그는 러시아 내전(Russian Civil War)에서 Caspian-Caucasian 전선과 서부 전선의 혁명군사위원회에서 일했다. 내전 도중, 그는 러시아 공산당과 소비에트 정부가 노동자들에게 정책을 강제하기 위해 권위적인 수단에 의존하는 경향이 증가한다고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에게, 경제를 결정하는데 있어서의 노동자들의 참여권이 거절되는 것은 1917년 혁명의 목표와는 거리가 있어보였다.

Shliapnikov became leader of the Workers' Opposition movement inside the Russian Communist Party. Alexandra Kollontai was a mentor and advocate of the group, which was composed of leaders of trade unions and industry who were all former industrial workers, usually metalworkers. This movement advocated the role of workers, organized in trade unions, in managing the economy and the political party. The Russian Communist Party leaders succeeded in suppressing the Workers' Opposition and in 1921-1922 finally subordinated trade union leadership to the Party. In 1921, Shliapnikov was forced out of his elected post as chairman of the Metalworkers' Union.
그는 러시아 공산당 내에서 노동자 반대파 운동(Workers' Opposition movement)의 지도자가 되었다. 꼴론타이(Alexandra Kollontai)가 모두가 (금속)노동자 출신인 노동조합의 지도자들로 구성된 노동자 반대파 운동의 조언자이자 격려자였다. 이 운동은 경제와 당에서 노동조합으로 조직된 노동자들의 역할을 지지했다. 러시아 공산당의 지도자들은 노동자 반대파들을  억누르는데 성공했고, 1921~1922년 사이에 마침내 노동조합 지도자들을 당에 복종시켰다. 1921년에 그는 금속 노동조합 위원장 직위를 박탈당했다.

In 1922, Shliapnikov and some others from within and outside the Workers' Opposition, including Alexandra Kollontai, presented an appeal, called the Letter of the Twenty-Two, to the Communist International Executive, requesting that the Comintern help heal a "rift" within the Russian Communist Party between Party leaders and workers. Party leaders and Party-controlled media condemned the appeal. Two of the signatories of the appeal were expelled from the Party, but Shliapnikov, Kollontai, and Sergei Medvedev narrowly escaped expulsion.
1922년 그와 꼴론타이를 포함한 노동자 반대파 운동 안밖의 몇몇은 공산주의자 국제 위원회에 러시아 공산당에서 지도자들과 노동자들 사이의 균열을 치료해줄 것을 요청하는, '22인의 편지(the Letter of the Twenty-Two)'라고 불리어진 소원을 제출했다.(present an appeal) 당의 지도자들과 당에 의해서 통제된 언론은 이 소원을 비난했다. 이에 서명한 사람 중 2명이 당으로 부터 축출되었다. 그러나, 쉴라프니꼬프, 꼴론타이, 메베데프(Sergei Medvedev)는 가까스로 제명(expulsion)을 피했다.

Shliapnikov turned to writing his memoirs and held jobs in metals import and economic planning institutions. The Party Central Control Commission investigated him and Sergei Medvedev in 1926 and in 1930 for alleged factionalism in connection with the formation of oppositionist groups among workers in Baku and Omsk. In 1930, the Party Politburo forced Shliapnikov to publish a public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in writing his memoirs of the revolution. This was not the same as a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committed by him since the revolution.
그는 금속을 수입하고 경제 계획을 세우는 위원회에서 활동하며 회고록을 쓰기 시작했다. 당의 중앙위원회는 1926년과 1930년, 바쿠와 옴스크(Baku and Omsk)의 노동자들 사이에서 반대파가 형성되었던 것과 관련하여 분파주의로 그와 메베데프를 조사했다. 1930년 당 정치국은 혁명에 대한 회고록에서 그의 정치적 오류를 공공연히 시인한 것에 대해 그를 처벌하기로 했다. This was not the same as a confession of political errors committed by him since the revolution.

Shliapnikov was expelled from the Communist Party in 1933 and imprisoned in 1935 for fabricated political crimes. Charged under Article 58 of the Soviet Criminal Code, he did not confess guilt, nor did he implicate others. Nevertheless, he was found guilty, based on others' testimony, and he was executed on the 2 September 1937, during the Terror.
그는 1933년에 공산당으로 부터 축출되었고, 1935년 조작된(fabricated) 정치 범죄로 투옥되었다. 소비에뜨 형법(the Soviet Criminal Code) 58조에 의해 기소되었지만, 그는 유죄임을 시인하지 않았으며, 다른 이들을 연루시키지지도 않았다. 하지만, 그는 다른 이들의 증언에 의해 유죄로 결정되었고, 1937년 10월 2일에 사형되었다.

Shliapnikov was posthumously rehabilitated and restored to membership in the Communist Party in 1988.
그는 죽은 뒤에 복권되었고, 1988년 공산당에 의해서 명예가 회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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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완종 <10월 혁명사>)

1920년 노동조합 논쟁

- 뜨로쯔끼 <노동조합의 역할과 과제> : 노동조합 군사화, 지도부 교체
- 9차 당대회: 노동자 반대파(쉴라쁘니꼬프)에서 생산과 분배 등 경제영역의 모든 권리와 기능이 당연히 노동조합에 넘겨져야 한다고 주장, 뻬뜨로그라드 당 조직 뜨로쯔끼 비판, 민주집중파 테제(부하린, 라린, 쁘레오브라줸스끼) 제출
- 모스끄바 당 위원회 반박, 10인 강령(레닌, 스딸린, 까메네프, 지노비예프, 똠스끼, 깔리닌, 루주딱) 제출
- 뜨로쯔끼 입장 철회, 노동조합의 국가화 '정도'만을 논의
- 10차 당대회: 10인 강령, 부하린 + 뜨로쯔끼 초안, 노동자 반대파 토론 / 신경제정책 실시로 토론 무산
- 11차 당대회: 꼬민테른 집행위원회에 소원

노동자 반대파

- 선거에 의한 지도기관의 구성, 당 업무 및 쏘비에뜨 업무의 지방조직으로의 이관, 지방조직의 통제와 지도에 대한 모든 당원의 복종, 해당 선거민들의 동정에 관한 간부의 정기보고, 당내 비판의 자유 보장, 당 지도기관의 노동자화, 구성원의 정기적 교체
- 레닌: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시대에 강제성을 거부하는 것은 미친 짓이오. 여기서 행정과 사업에의 관료주의적 접근은 필수적이오."
- 뜨로쯔끼: "그러한 방식의 운영은 비효율적이며, 경제적 측면에서 일을 모두 망쳐버리기 때문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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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출처 : 로쟈 > 박노자의 '진짜 사회주의'

온라인 한겨레에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박노자 글방을 들르게 됐다. 최근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을 놓고 프레시안에서 벌어진 논쟁을 정리해두려다가 여유를 못 내고 있었는데('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문제'가 정해놓은 제목이다) 마침 그와 관련한 '만감'이 있기에 옮겨온다. '진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필자의 '사회주의'관을 내비치고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가 '당신들의 러시아'인지라 박노자 교수의 러시아 이야기는 챙겨두게 된다. 원문에 오타가 여럿 되기에 교정해두었다.

박노자 글방(07. 02. 07) '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에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서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면은,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이 '만감'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07. 02. 19.

P.S. 단순하게 말하면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라는 대비 속에서 '트로츠키주의'와 '슬랴프니코프주의'의 차이를 읽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차이/대비는 제목에서 암시되는바, '사회주의 vs 진짜 사회주의'의 구도로 정식화될 수도 있겠고. 의미심장한 멘트는 맨마지막 문장이다.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필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러한 비극적 운명까지도 '진짜 사회주의'의 구성적 요건이 아닐까, 로 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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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프레시안)

"지금 '역사의 먼지' 속으로 사라져야 할 것은 무엇인가"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 기고] 21세기, 왜 트로츠키를 기억하는가?

2007-02-05 오전 9:01:41

정성진 교수의 새 저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출판사 펴냄)를 둘러싸고 트로츠키가 한국 사회에 주는 현재적 의미를 묻는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장석준 진보정치연구소 연구기획국장은 정 교수의 저서에 대한 평가에 앞서 트로츠키의 삶과 사상이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주는 현재적 의미가 무엇인지를 짚는 기고를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편집자>

"너희는 이제부터 영원히, 너희가 비롯된 곳으로 돌아가라, 역사의 먼지 속으로!" 지금으로부터 90년 전, 세계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의 승리를 앞두고, 혁명에 반대하며 소비에트 회의장에서 퇴장하는 온건파 사회주의자를 향해 이렇게 장엄한 외침을 남긴 사람이 있었다. 하지만, 그 사람은 지금도 '역사의 먼지' 속으로 돌아가길 거부한다. 아니, 우리가 그를 그렇게 보낼 수가 없다. 그는 바로 레온 트로츠키다.

지금 우리가 트로츠키를 돌아봐야 할 이유

최근에 그의 이름을 불러내 마르크스와 나란히 세운 책이 나왔다.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그것이다. 요즘 그 책에 대한 서평 탓에 좀 떠들썩한 것으로 안다. 나는 책을 아직 꼼꼼히 검토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책에 대해 직접 언급하거나 논쟁에 뛰어들 처지도 아니고, 그럴 의도도 없다. 다만, 1917년 10월 혁명이 아흔 돌을 맞는 올해에 트로츠키를 다시 불러내는 두툼한 분량의 책이 국내 저자의 손으로 나왔다는 것은 일단 의미가 적지 않은 일일 것이다. 이 책을 훑어보면서 한 가지 짚고 넘어갈 일이 더 생각났다. 바로 아무도 주목하지는 않았지만 지난 2006년이 1956년으로부터 50주년이 되는 해였다는 사실이다. 1956년은 어떤 해인가? 1956년 2월 25일 새벽, 소련 공산당 제20차 당 대회의 폐막을 앞두고 갑자기 대회장이 봉쇄한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예정에 없던 보고서를 읽기 시작했다. 장장 일곱 시간에 걸쳐 계속 소개된 보고서의 내용은, 3년 전 죽은 스탈린 대원수의, '전 세계 노동계급의 영도자'라 불리던 그 사람의 (사실은 그 개인만이 아니라 그의 일파와 그 체제의) 죄상이었다. 같은 해 10월에는 또 무슨 일이 있었던가? 제20차 당 대회의 스탈린 비판이 새로운 시대의 개막 선언인 줄 잘못 이해한 헝가리 민중이 그로부터 39년 전 10월의 러시아 민중과 똑같은 포즈로 역사의 무대 위에 나섰다. 그리고 이들에게 '사회주의 조국'은 탱크로 대답했다. 이른바 '노동자 국가'에서 일어난 노동자·민중의 봉기, 헝가리 혁명이었다.

사회주의 조국의 탱크에 유린당한 헝가리 민중을 보며 가슴이 찢어진 서유럽 사회주의자는 결국 1956년 말부터 공산당을 집단으로 탈당하기 시작한다. 이들이 이른바 '신좌파'들이다. 그리고 이들은 이미 20년 전에 연초에 있었던 흐루시초프의 지루한 연설보다 더 정확히 소련 '사회주의'의 문제를 꿰뚫고 또 한 번의 혁명의 필요성을 강조한 사람을 재발견한다. 착잡하지만, 작정하고 낸 그 책의 제목도 다시금 곱씹어보지 않을 수 없다, <배반당한 혁명>(김성훈 옮김, 갈무리 펴냄)이 그것이다. (편집자 : 트로츠키는 1929년 스탈린으로부터 추방당한 후, 암살 위협을 피해가며 터키, 프랑스 등을 전전하며 1936년 이 책을 완성한다. 1937년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은 결국 1940년 트로츠키가 멕시코에서 비극적으로 암살당하는 결정적 계기가 된다.)

바로 이 1956년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작년에 '스탈린주의 대 제국주의'의 구도가 여전히 남아 있는 이 한반도에서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와 연관된 여러 가지 사건들이 있었다. 왕년에 미국과 소련이 벌이던 핵무기 개발 경쟁 비슷한 일이 재연됐고, 남한의 좌파정당이 북한 정권과의 관계 문제로 홍역을 앓았다 (아니, 지금도 와병 중이다). 이때마다 내가 주문처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름이 바로 '트로츠키'였다. 1917년의 승리를 통해 한 세기를 뛰어넘어 우리에게 직접 말을 걸어올 뿐만 아니라, 1956년의 패배를 통해 여전히 우리와 동시대인인 저 트로츠키 말이다. 그리고 그가 반백의 나이에 망명지에서 새롭게 시작한 투쟁을 새삼 다시 돌아보았다.

"관료주의적 전제체제는 소비에트 민주주의로 대체되어야 한다. 비판의 자유를 회복시키고 진정으로 자유로운 선거를 하는 것이 나라의 발전을 위해 필수적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를 비롯한 소비에트 내 정당의 자유로운 활동의 회복, 그리고 노동조합의 부활을 의미한다. 산업 활동에 민주주의를 도입해야 한다. 이것은 근로 대중의 이해에 들어맞도록 기존 계획을 근본적으로 수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경제문제를 자유롭게 논의함으로써 관료주의적 오류와 좌충우돌 때문에 생겨나는 비용 전체를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소비에트 궁전, 새로운 극장, 전시용 지하철 등 실속은 없으면서 비용만 많이 드는 사업들은 순위에서 노동자 주택단지 건설에 밀려날 것이다. (…) 군대 내의 계급은 즉시 철폐될 것이다. 훈장의 번쩍거리는 쇳조각은 용광로 속에 던져질 것이다." (<배반당한 혁명> 중)

이 짧은 문장이, 지금 이 사회에서 똑같이 '좌파'라고 불리는 사람들 안에서도, 어떤 이들에게는 미래의 절실한 과제일 수 있는가 하면, 또 다른 어떤 이들에게는 '종파주의'의 딱지를 붙일 이유가 될 수 있다. 거의 한 세기 전에 쓰인 글월이 아직도 이렇게 격한 찬반 대결을 낳는다면, 이런 현상을 '동시대성'의 징표로 보아도 크게 무리는 아닐 것이다. 그렇다. 아직도 이렇게 치열한 논란을 불러일으키는 꼭 그만큼 트로츠키는 21세기의 우리에게 여전히 현재적이다.

하지만, 트로츠키주의자이기를 사양하는 이유

그럼 이 시대의 좌파는 '트로츠키주의자'가 되어야 할까? 뒤늦게라도 트로츠키'주의'를 내세우는 정치운동을 만들어야 하냐고 묻는다면, 나는 "그건 아니다," 이렇게 답하겠다. 트로츠키주의는 우리의 '교과서'가 아닐 뿐더러, 우리에게 새삼 또 다른 교과서가 필요한 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사실 역사 속 혁명 사상의 '위대함'은 그것의 '해방을 지향하는 힘'에서 나온다. 가령, 우리에게 레닌이 필요하다면, 그것은 혁명의 공식과 상투어로부터 우리를 해방하기 위해서다. 레닌이 그랬던 것처럼 그 잡동사니를 헤치고 혁명의 '정치'를 만들어내기 위해서다. 한데, 그 '레닌'이라는 이름을 앞에 내건 '레닌주의'는 정작 또 다른 공식과 상투어로 변질하곤 했다.

트로츠키의 경우 이 반전은 좀 더 희극적인 양상을 띠었다. 한평생을 역사에 대한 진지한 응시와 현실에 대한 창조적인 돌출로 일관했던 트로츠키 자신과는 정반대로, 트로츠키주의의 역사는 지루하고 번잡한 교리 문답과 스콜라적 논쟁의 역사였다. 그리고 그 한계를 돌파하기에는 자기만족적이기만 했던 소규모 정파들의 가족 멜로 드라마였다. 지금도 '위키피디아(www.wikipedia.org)'에 들어가서 영어로 '트로츠키주의(Trotskyism)'를 검색해보면 나라마다 족히 열 개 아니 스무 개는 넘는 무수한 트로츠키주의 정파를 찾아낼 수 있다. 얼마나 많은지, 그들이 애초에 도대체 무슨 이유로 갈라져서 지금은 서로 어떤 심오한 차이를 갖는지조차 확인하기 쉽지 않다.

우리가 굳이 이런 역사까지 외국 것을 수입해서 반복할 필요가 있겠는가. 그것이야말로 '역사의 먼지' 속으로 돌아가야 할 것들 중의 하나일 뿐 아닐까.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게 '트로츠키주의자'라는 간판을 내건 이론가나 활동가의 무리는 아니라는 말이다. 오히려 지금 필요한 것은 이런 것일 테다. 지금 우리에게는 한 나라 안에만 붙잡힌 시각으로는 그 한 나라의 변화마저 이뤄낼 수 없다는 각성과 한반도 안에 존재하는 이른바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와 모순을 돌파하려는 용기가 필요하다. 한동안 우리는 그 각성과 용기를 일깨우는 상징으로, 평생을 현실의 문제에 대한 각성과 그것을 극복하려는 용기로 일관했던 트로츠키, 그를 잊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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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로츠키주의가 죽어야 트로츠키가 산다" 
[이재영 기고]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읽고
 

2007-01-29 오전 10:40:13    

책읽기는 즐거워도 책에 대한 글쓰기는 즐겁지 않다. 글쓰기를 작정하고 책을 드는 순간부터 책읽기가 숙제가 되어 버리니, 소란스런 지하철이나 쾌적한 화장실에서 가끔 책 꺼내 보는 소소한 재미는 사라지고, 책상 위에 책 펴두고 밑줄 긋는 고역이 시작된다. 더군다나 나처럼 게으른 사람에게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펴냄) 같이 두툼하고 묵직한 책은 제대로 읽는 데만 족히 반년이 걸릴 거리이다. 언론 편집인의 시간관념이 그런 '긴 시간'을 용납할 리 만무하다. 그래서 이 글은 어쩔 수 없이, '서평'이 아닌 '책 소개'를 겸한 개인적 '단상'이다.

경제사상사에 대한 고급 읽을거리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첫 번째 장점은 그 필자가 한국 사람이라는 점이다. 그간 한국에 트로츠키주의를 소개한 이들은 크리스 하먼, 토니 클리프, 알렉스 캘리니코스 같이 영국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모두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 당원이라는 공통점이 있다. 영국 SWP 당원에게 트로츠키가 갖는 오늘날의 의미는 한국과는 다를 수밖에 없다. 그간 이렇게 영국 SWP 당원의 눈으로 해석된 트로츠키를 소개받아 온 한국의 독자들에게는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은 반가울 수밖에 없다. 정성진의 책은 그간 공간적, 시간적 번역을 따로 해야 했던 독자의 수고를 덜어 준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또 다른 장점은 이 책이 (제목과는 다르게) 트로츠키에 시선을 온전히 고정하지 않은 데서 비롯된다. 이 책(1~3부)은 경제사상사에 대한 국내외의 최신 해석을 종횡무진 다루고 있다. 리카도, 마르크스, 제2인터내셔널, 레닌, 월러스틴, 브레너, 네그리는 물론 장상환(경상대 교수), 이병천(강원대 교수), 신정완(성공회대 교수)도 언급된다. 19세기 이래 정치ㆍ사회 운동의 이론적 토대가 됐던 경제이론을 비판적으로 일별하고 있는 셈이다. 저자가 이 책을 "대학 학부 수준에서 정치경제학 기초를 이수한 이들이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의 쟁점들을 공부하는 '고급 정치경제학' 과정 또는 대학원 수준의 '마르크스주의 연구' 과정의 교재"로 권하는 자신감은 여기서 비롯된다. (책 제목만 보고 한국 경제에 대한 정치한 트로츠키주의적 해석을 기대했던 이라면 실망할 수도 있겠다. 부지런한 독자라면, 이 책을 읽은 후 '영구군비경제론'이나 '장기파동론'의 방법 틀을 이용해 한국 경제를 분석한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한국경제>(책갈피 펴냄)를 읽어볼 필요가 있다.)

한국 사회가 계승할 트로츠키주의?

총 4부로 구성된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본격적으로 트로츠키가 언급되는 것은 맨 마지막 제4부의 네 장이다. 물론 여기서 언급되는 트로츠키의 사상은 '트로츠키주의'의 눈으로 해석된 것이다. 이를 위해 정성진은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1917년에 태어나 2000년에 사망한 토니 클리프의 생애를 되짚는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영국 SWP의 창당을 주도한 클리프는 20세기 트로츠키 추종자의 투쟁과 분열의 핵심에 서 있었던 사람이다. 정성진은 클리프의 생애를 통해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의 이론과 실천을 일별함으로써 이른바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계승해야 할 트로츠키주의를 도출해 낸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마지막 장(15장) '21세기 사회주의와 참여계획경제를 위하여'에서는 이렇게 도출된 트로츠키주의에 기반을 둔 사회주의 대안 경제의 가능성이 제시된다. 눈치 빠른 독자라면 짐작했겠지만 이 '참여계획경제'는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김익희 옮김, 북로드 펴냄) 등의 논의에서 따온 것이다. 정성진은 이 15장에서 최근의 참여계획경제의 논의에는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사회주의적 비전이 아닌) 스탈린주의적 편향이 엿보인다고 비판하고 있다. 사실 이런 식의 비판은 책 전체에 걸쳐서 한결같이 보이는데 이 중에는 현실과 맞지 않는 과장이 적지 않아 눈에 거슬리곤 한다. 그 중 몇 개만 살펴보자.

예를 들어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는 (…) 차베스가 제창한 21세기 사회주의"이고 그로 말미암아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언급은 영국 SWP와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의 사회주의자들 안에서나 그렇지 세계 진보 운동의 최근의 현실과는 동떨어진 상황 파악이다.

다음과 같은 언급은 또 어떤가? "스탈린주의는 청산되기는커녕 알튀세르주의, 포스트모더니즘, 사회민주주의, 시장사회주의, 자율주의 등 '포스트스탈린주의' 경향으로 변이되면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 진보 학계의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다." 이런 식의 인식도 자의적이다.

바로 정성진이 그렇게 적대시하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 더구나 비판을 받는 대상이 이미 '~주의'라는 관념에서 자유로운 상황에서 온갖 흐름에 대해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 식의 비판이 얼마나 힘을 발휘할지도 의심스럽다.

'계획경제' 집착한 스탈린의 재탕?

물론 진보학자들이 거시적 변혁 전망을 보이지 못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비판은 타당하다. 민주노동당의 대표적 이론가 장상환은 이렇게 고백한 적이 있다.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의 한계가 명확하다. 정확한 정보 수집의 불가능과 동기 유발의 어려움, 개인의 개성적 발전의 저해 등의 문제가 있는 것이다." 이런 장상환의 '솔직한' 고백에는 사회주의를 일종의 경제학적 계산 가능성으로 치환하려는 욕망이 보인다. 즉 여러 가지 불확실성이 제거된 계획경제만 가능하다면 사회주의가 가능할 텐데, 하는 식의 아쉬움 말이다. 이런 점에서는 정성진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그의 다음과 같은 언급을 살펴보자.

"정보화의 핵심인 네트워크 경제의 발전에 따라 아래로부터 참여 계획의 실행 가능성이 20세기보다 오히려 더 높아졌다(11장)."
"가령 모든 기업의 재무제표를 사이트에 공개하는 것을 의무화한다면, 이를 수집 분석해 전국적 및 전 세계적 규모에서 생산과 투자를 계획적으로 조절할 수 있다(15장)."

이런 정성진의 언급은 무척 당혹스럽다. 그가 되살리려고 하는 트로츠키뿐만 아니라 역사 속 대다수 사회주의자는 계산 가능성과 같은 요소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다. 그들은 사회주의를 가능하게 하는 경제적 배경, 그 배경 속에서 사회주의를 실현하는 데 앞장설 정치적 주체의 역동적 형성을 사회주의의 요체라고 보았다. 바로 이 역동적인 흐름을 계산을 통한 계획경제의 실현과 같은 식으로 곡해한 것이 바로 스탈린주의가 아닌가?

사실 이것은 스탈린에게만 책임을 물을 일도 아니다. 트로츠키 역시 정성진이 '경제주의'로 후퇴했다며 비판한 레닌의 신경제정책(1921년)의 필요성에 공감했다. 당시 트로츠키가 신경제정책을 "퇴각이되 항복은 아니"라며 과도 단계로 인정하고, 그 과도기가 "한 세기 또는 반세기 동안 계속될 것"으로 예측한 것은 널리 알려진 일이다. (스탈린이 아니라) 레닌과 트로츠키 역시 신경제정책은 어쩔 수 없이 채택해야 할 것이었다. 트로츠키는 정성진이 얘기하는 '트로츠키주의'와는 다르다.

이런 맥락을 염두에 두면 정성진의 책 곳곳에서는 (그가 그토록 비판하는) '스탈린주의'적 문법이 보인다.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배분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신속할 수 있다. (…) 참여계획경제에서는 (…) 귀결될 것이다(15장)." 트로츠키의 경제 이론대로 따르면 다 해결되고, 잘 될 것이다? 이 인용문의 '트로츠키'를 '스탈린'으로만 한 번 바꿔보라. 스탈린이 그토록 강조했던 '국가사회주의만 되면 모든 것이 다 자동으로 해결이 될 것이다'라는 인식과 무엇이 다른가? 매사가 그리 잘 풀린다면 도대체 무슨 걱정이 있겠는가? 이 정도로는 21세기 한국 사회 진보 이론의 대안이 될 수 없다.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에게 묻는다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더 언급하자. 정성진은 이 책의 원고를 '다함께'에 보내 조언을 구했다고 한다. IS 경향의 사회주의자로 구성된 다함께는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다. 나는 한국에서 이들이 과연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 그들이 트로츠키를 잘 알고 자주 인용하는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들이 중요한 정치 일정 때마다 트로츠키가 살아 있었더라면 비판을 넘어 혐오해 마지않았을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리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레닌, 스탈린보다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다. 또 현실 정치인으로서 트로츠키는 노동조합과 노동자 평의회의 자율성에 반하는 결정과 실천을 했다. 내가 굳이 트로츠키의 과거를 끄집어내는 것은 걸출한 혁명가였던 그를 비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트로츠키주의' 교과서의 문구를 신봉하는 것보다는 트로츠키의 실천적 굴절을 연구하는 것이 트로츠키가 꿈꾸었던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살려내는 바른 방법이라고 주장하기 위해서다. 정성진의 이 노작을 끙끙대며 읽은 후, 마음 한 칸이 개운치 않은 것은 과연 나 혼자뿐일까? 

이재영/민주노동당 前 정책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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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심사인가?"
[이정구 반론] 이재영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서평에 부쳐

2007-01-31 오전 9:27:21

정성진 경상대학교 교수가 펴낸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도서출판 한울 펴냄)는 근래 보기 드물게 마르크스주의를 정면으로 다루는 책이다. 정 교수는 그간 마르크스주의자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해오면서 특히 트로츠키를 매개로 마르크스주의의 재구성을 꾀하고, 21세기 사회주의의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이 책은 이런 정 교수의 최근 고민이 집대성된 것이다.

지난 29일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이 책의 장점을 인정하면서도 트로츠키주의를 지렛대로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하려는 그의 노력에 회의적인 시선을 보냈다. 정 교수도 트로츠키주의를 '만능'으로 보는 오류를 보이고 있으며, 그런 식으로는 새로운 진보 이론을 구축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 이 전 실장의 서평에 대해 민주노동당 당원 이정구 씨가 반론을 보내왔다. 이 씨는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모임인 다함께의 회원이기도 하다. 이 씨는 "이 서평이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하고 있다"며 조목조목 이 전 실장을 반박한다.

<프레시안>은 정 교수의 새로운 책에서 촉발된 이번 논쟁이 한국의 새로운 진보 담론과 한국 사회의 대안을 모색하는 유의미한 토론으로 전개되길 바라며 이 씨의 반론을 소개한다. 앞으로도 생산적인 논쟁이 이어질 경우 계속 소개할 예정이다. <편집자>

정성진의 책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서평 형식으로 쓴 이재영의 글은 매우 유감스럽게도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 편파적이고 부당한 깎아내리기, '아니면 말고'식의 억측으로 가득 차 있다. 먼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부터 살펴보자.

이재영은 "'아래로부터'를 더 많이 강조한 트로츠키는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의 반란을 진압한 당사자"라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 당시 트로츠키는 우랄산맥 지방에 출타 중이었고, 그곳에서 곧바로 모스크바로 가서 제10차 당대회에 참가했다. 진압 책임자는 서부전선 담당 적군 사령관 미하일 투하체프스키였다. 심지어 그 당시 트로츠키의 직책은 군사 분야의 지도력을 갖고 있는 적군 사령관이 아니라 당의 전쟁문제 정치위원이었다.

1917년 10월 혁명 당시 혁명의 최정예 부대였던 크론시타트 수병과 1921년의 수병은 계급 구성이 달랐다. 1917년의 수병은 농민의 가장 선진적인 부분과 페트로그라드의 공업 노동자로 구성돼 있었고 내전 동안 혁명을 방어하며 전투를 이끌었기 때문에 대부분 죽거나 부상당했다. 반면 1921년의 수병은 새로 징집된 농민 신병이었다. 1921년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은 반혁명 위협이 사라진 뒤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었다.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를 제거하자고 주장하는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요구는 반혁명 세력의 복귀를 부르는 신호나 다름없었기에, 볼셰비키가 이를 들어줄 수는 없었다. 더욱이 백군과 제국주의 열강의 지배계급들은 크론슈타트 수병들의 반란을 반혁명의 발판으로 여기고 있던 참이었다. 따라서, 이런 상황에서 벌어진 크론슈타트 수병 반란을 진압한 것은 '아래로부터' 사회주의 노동자 혁명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비극적 결정이었고 불가피한 폭력이었다.

사회주의는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

그러나 이재영의 억측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는 "포스트모더니즘, 시장사회주의 역시 트로츠키주의와 연관성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다"고 단언하지만 그 근거는 제시하지 않는다. 그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주의"라고 낙인을 찍는다고 힐난하지만 오히려 그런 식의 근거 없는 비난과 낙인 찍기는 그 자신에게 더 어울리는 듯하다.

이재영의 서평은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를 관통하고 있는 일관된 문제의식을 포착하지 못했다. 그 동안 스탈린주의(NL과 PD)와 각종 포스트스탈린주의(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 등)에 맞서 트로츠키를 지렛대로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전통을 새로운 대안으로 구체화하려는 그의 노력을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정성진의 이와 같은 문제의식과 논의 과정, 그리고 잠정적 결론에 동의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정성진의 노력에 대한 객관적 평가가 있어야 하는데, 이재영이 찾아낸 이 책의 장점이라곤 "한국 사람이 쓴 트로츠키에 대한 책"이라는 점이다. 그의 글을 따라가며 반박해보자.

이재영은 "세계 진보진영의 화두가 (…) 사회주의"라는 '상황 판단'은 영국 사회주의노동자당(SWP)과 긴밀한 연관을 맺은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 안에서나 그렇다고 치부한다. 그렇다면 그도 언급했듯이,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또 세계사회포럼에서 가장 인기 있는 주제 중 하나가 바로 대안 사회를 논의하는 주제라는 점은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이재영은 정성진이 참여계획경제에 대한 논의를 마이클 앨버트의 <파레콘>에서 가져왔다고 폄하하고 싶겠지만, 앨버트 또한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세계적으로 이름 있는 논객 중의 한 사람이다. 1999년 시애틀 시위 이래로 전 세계적으로 확산됐던 반자본주의 운동과 남미의 반란에 고무된 사람들은 오직 IS만이 아니었다. 다양성이 그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생태주의자들, 노조원들, 자율주의자들 등이 반자본주의 운동에 동참했고, 또 남미의 격변에서 영감과 용기를 얻었다. 이런 운동의 성과 덕분에 세계 진보진영은 자본주의 체제와 시장경제가 아닌 대안을 모색하기에 이른 것이다. 심지어 한국에서도 옛 소련식 '국가사회주의'의 오류와 서구 사회민주주의의 한계를 넘어서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표방하며 민주노동당이 등장했다. 물론 '민주적 사회주의'의 내용에 대한 이해는 저마다 다르지만, 한국 사회의 대안 사회 모델 중의 하나로 사회주의가 거론되고 있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계획경제의 가능성 모색해야

이재영이 계획경제의 불가능성을 반박하는 정성진의 주장을 1930년대의 사회주의 계산 논쟁과 비교하고 더 나아가 이와는 무관한 1921년의 신경제정책과 연결시키는 것을 보면 어이가 없을 뿐이다. 이재영은 규모가 크고 복잡한 경제에서는 계획이 불가능하다는 장상환의 지적을 긍정적으로 인용하고 있는데, 사실 정성진은 바로 이런 입장을 비판하기 위해 최근 세계 진보진영에서 논의되는 앨버트나 팻 데바인 등의 참여계획경제를 원용하고 있다.

자본주의가 자원의 효율적인 배분을 이루지 못하는 이른바 '시장의 실패'는 진보진영에 속하는 많은 사람에게 분명한 사실이다. 그 때문에 생산과 투자를 전국적으로 또 전 세계적으로 계획하는 일이 가능한지 아닌지, 또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 조정 메커니즘은 어떨지를 논의하는 것은 대안 사회를 모색하는 사람들의 주요 관심사이고 연구 대상이다. 또 참여계획경제 논의는 적어도 시장과 계획의 결합이나 시장의 활용을 담고 있는 시장사회주의와는 그 지향점이 다르다.

이재영은 시장이냐 계획이냐 하는 논의에서 불쑥 사회 변화의 주체 문제를 끄집어내고는 정성진을 스탈린주의자와 다를 바 없다고 비난한다. 그런데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어느 곳에서도 노동자 계급의 자기해방 투쟁이 없는 계획경제의 청사진만으로 사회주의가 가능하다는 주장을 펴고 있지 않다.더욱이 이재영은 스탈린식 "계획경제의 실현"을 레닌과 트로츠키도 공유하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그 근거로 신경제정책을 들고 있다. 즉 레닌과 트로츠키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인 신경제정책을 정성진이 경제주의라고 비판했으니, 트로츠키 자신과 정성진이 말하는 트로츠키주의는 다르다는 것이다. 이재영의 논법은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고 논의해야 한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전형이다. 그러나 이것은 마치 사람이 죽은 뒤 앙상한 뼈만 남은 것을 두고 '같은 뼈조각이니 사람과 원숭이가 같다'고 말하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노동자 국가가 안팎으로 불리한 조건에서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타협한 신경제정책을 스탈린주의 관료들이 권력을 장악한 채 위로부터 내리는 일방적 지시에 따른 '계획' 경제(사실 계획경제라기보다는 지령경제라는 말이 더 맞다)와 같다고 말할 수 있을까?

트로츠키에게도 약점과 실수가 있었고 또 1956년 헝가리혁명에 대한 소련의 진압을 옹호하거나 1989년 톈안먼 항쟁을 진압한 중국 지배자들을 옹호한 일부 트로츠키주의자들도 있었다. 하지만 국제 노동계급의 아래로부터 자기해방이라는 고전적 마르크스주의 정수를 보존하고 후대 사회변혁 운동가들에게 전수하려 한다는 점에서 트로츠키와 정성진은 근본적으로 일치한다.

함께 한미 FTA 반대하는 게 뭐가 문제인가?

한편, 이재영은 "한국을 대표하는 트로츠키주의자들의 단체인 '다함께'가 "북한의 현실 사회주의를 무비판적으로 추종하는 이들과 어울린다(연대?)는 추문이 계속 들"린다며 다함께가 "트로츠키의 주장을 제대로 실천하고 있는지 의문스럽다"고 주장했다. 이재영은 진지하지 못하게 "추문" 운운함으로써 마치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면서도 이를 간접화법으로 표현해 '아니면 말고'식의 태도를 보이고 있다.

다함께가 북한을 사회주의가 아닌 국가자본주의라고 주장한다는 사실과 북한 지배자들의 억압에 반대하고 탈북자들을 환영한다는 사실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남한의 범자민통 동지들은 대체로 한미 자유무역협정(FTA)에 반대하고 피착취·피억압 대중의 민주적 권리를 옹호하며 사회 변화를 위해 투쟁하는 우리 운동의 일부다. 다함께가 이들의 전략과 사상에는 동의하지 않으면서도 이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다. 그런 점에서 다함께는, 이재영의 주장과 달리, 트로츠키가 말한 공동전선 정신에 부합하는 활동을 펼치고 있는 셈이다. 오히려 정치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공공연히 드러내지 않고 뒤에서 쑥덕공론을 펼치거나 지지하고 연대해야 할 운동을 그 지도 세력의 정치사상을 핑계되며 지지하지 않는 종파주의가 진정한 문제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대한 이재영의 서평은 비판이 아니라 근거 없는 중상과 비방일 뿐이다. 물론 진보진영 내부에도 다양한 차이들, 상충되는 정치적 노선들이 존재하며, 이들 간의 비판과 토론은 역사의 진보를 앞당기는 것으로 존중되고 고무되어야 한다. 하지만 이재영 씨의 서평은 이와 같은 진보진영 내부의 정치적 입장의 차이에 대한 이해와 존중에 기초한 비판이 아니라, 다른 입장에 대해서는 무조건 재부터 뿌려놓고 보자는 식의 비방으로 일관되어 있는데, 이는 진보진영에서 지켜야 할 최소한의 금도를 저버린 것이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가 입장이야 어떻든 우리나라 진보 학계에서 정말 오랜 만에 나온, 또 오랜 기간 숙성된 역작임은 이재영도 부인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재영은 이 노작을 비판하려면 우선 시간을 갖고 책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이 순서였을 것이다. 그리고 난 다음 비판을 할지라도, 지금 이 서평처럼 자신이 지지하지도 않는 트로츠키의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며 너스레를 떨 것이 아니라, 자신이 속한 사회민주주의 혹은 케인스주의의 입장에서 '다함께'에 대해서든 정성진에 대해서든 인식과 대안에서의 차이와 논리적 비판을 분명하게 제기했더라면, 21세기 우리나라 진보의 대안 모색을 위한 토론의 발전에 약간이라도 기여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정구 / 민주노동당 당원ㆍ다함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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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하나…훈고학은 이제 그만"
[반론] 한국의 트로츠키주의자들에게 묻는다

2007-02-06 오전 9:50:37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출판사 펴냄)를 둘러싸고 한국 사회에서 오늘날 트로츠키가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에 대한 토론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에는 민주노동당의 정책실장을 지낸 이재영 씨와 국내의 대표적인 트로츠키주의자 단체 '다함께'의 이정구 씨가 한 차례씩 주고받은 논전도 포함되어 있었다.

이번에 이재영 씨가 다시 재반론을 <프레시안>에 보내왔다. 그는 이번 글에서 "이정구 씨의 반론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오류와 근거 없는 논리적 비약이 많다"며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좀 더 솔직하게 담았다. 그는 "지금 우리에게 트로츠키, 레닌, 마르크스로 거슬러 올라가는 훈고학이 과연 필요한가"라는 질문도 던지고 있다.

<프레시안>은 트로츠키의 한국적 수용을 둘러싼 이번 논란이 현재 한국 진보 세력이 안고 있는 여러 가지 문제를 가감없이 보여주는 한 지표라고 판단해 기고문을 소개한다. <편집자>

민주주의 없는 사회주의는 없다

'다함께'의 이정구는 내가, 트로츠키가 크론시타트 반란을 파괴했다고 비판한 것이 "러시아 혁명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한다. 사실 러시아 혁명을 잘 알지는 못한다. 잘 모르는 내가 알고, 잘 아는 그가 모르는 사실 몇 가지만 확인하자.

이정구는 크론시타트 진압 당시 트로츠키가 외지에 출타 중이었으며, 군사령관이 아니라 '당 전쟁 정치위원'이었다고 변명한다. 이런 논리대로라면 내전을 승리로 이끈 트로츠키의 업적 역시 대부분의 전투 현장에 없었다는 이유로 무시되어야 한다. 반란이 진압되기 며칠 전인 3월 5일, 트로츠키는 국방 인민위원 자격으로 크론시타트 수병들에게 무조건 항복을 통첩했는데, 이 일도 타자병이나 전신병의 책임이지 트로츠키의 책임이 아니라고 구차하게 변명해 보라. 내가 알고 싶은 것은 1980년 5월에 전두환이 어디에 있었는가가 아니다. 나는 혁명가 트로츠키가 무엇을 했는가를 묻고 있다.

이정구는 '트로츠키가 진압하지 않은' 크론시타트 반란을 달가워하지도 않는다. 안타깝지 않은가? 트로츠키가 현장에 있었다면, 더 많은 치적을 쌓았을 텐데. 이정구는 반란이 "노동자와 농민의 이해관계가 충돌하면서 벌어진 사건"이고, 반란자들이 "소비에트 내에서 볼셰비키의 제거를 주장"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한다.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도 거짓이다. 그 해 2월 페테르스부르크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 이에 볼셰비키 사병 당원의 3분의 1이 공식 탈당하여 봉기에 동참했다.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것도 거짓이다. 그런 유언비어는 국외에서 밀류코프(Miljukov)가 만들어낸 것이고, 반란자들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의 연장선에서 "소비에트에서의 선거"를 주장했다. 이정구의 러시아 혁명 얘기는 역사 날조다. 이정구는 "크론시타트 수병 반란을 두고 이재영이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운운하는 것은 트로츠키의 ABC에 동의하는 것은 고사하고 이해조차 하지 못한다는 증거"라고 주장한다. 크론시타트 수병들은, 노동자 파업을 봉쇄한 계엄령 철폐, 사회주의자 석방, 집회의 권리, 무엇보다도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를 요구로 내걸었다. 이게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가 아니면 도대체 무엇인가?

나는 '트로츠키의 ABC'는 잘 모르지만, 민주주의나 사회주의는 조금 안다. 그래서 노동조합에 대한 트로츠키의 입장이 맘에 들지 않는다.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하면서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어떻게 만들겠다는 것인지…. 노동조합의 자주성은 자신이 권력을 가졌는지 그렇지 않는지에 따라 다르게 이야기할 대상이 아니다.

"소비에트 러시아 노동계급의 생산적 산업조직은 매우 큰 과제를 짊어지고 있다. 어떠한 과제일까? 그것은 물론 노동의 이익을 대표하여 국가와 투쟁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제휴하여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실현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의 조합은 원칙적으로 새로운 조직이며, 종래의 노동조합과 다를 뿐 아니라 부르주아 사회의 혁명적 노동조합과도 다르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중)

혁명과 내전기의 상황에서 볼셰비키와 트로츠키가 옳았는가, 노동자 반대파가 옳았는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발달한 현대 민주주의의 관점에서 그리고 우리가 만들고 싶은 민주주의의 최고양식으로서의 사회주의의 차원에서 당시 레닌이나 트로츠키가 한 일은 카니발리즘에 가깝다. 그래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던 것이다.

"인민위원 지배 타도! 권력 인수 당시 공산당은 노동자들에게 모든 것을 약속했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을 보고 있는가? 3년 전 우리는 '당신들이 원할 때는 언제라도 당신들의 대표를 소환할 수 있고 당신들은 새로 소비에트 선거를 할 수 있다'고 들었다. 그래서 우리가 크론시타트에서 당으로부터의 압력이 없는 새 선거를 요구했을 때 새로 부상한 트레포프 트로츠키는 이렇게 명령했다. 총알을 아끼지 말라!"

민주주의에 대한 트로츠키주의자들의 천박한 태도는 차베스에 대한 돈독한 애정으로도 확인된다. "21세기 사회주의를 주창한 차베스의 인기가 전 세계적으로 높은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그가 인기 있는 이유를 알고 싶기보다는 그가 입법권까지 독점한 것이 걱정된다. '사회주의'나 '반미'를 내걸었다고 열광할 필요는 없다. 그런 군부 쿠데타 정치인은 나세르 이래 수없이 많았다. 국유화나 미국과의 긴장이라면 단연 박정희를 꼽는 것이 옳다. 차베스의 실험은 페론보다 훨씬 덜 진지해 보인다.

딱지 붙이기는 이제 그만!

이정구는 "이재영은 (…)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야합이라도 한 듯하게 말"했다고 타박한다. 그런데 바로 몇 줄 아래에서는 "이들과 함께 연대하여 투쟁하는 게 무슨 잘못일까?"라고 반문한다. '야합'이든 '연대'든, 했다는 말인가 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이재영의 다함께 비판에는 안타깝게도 (…) 분파주의가 엿보인다"고? 다함께가 당당하고 분파적이지 않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 아닌가?

지금 필요한 것은 "국내외 보수언론조차 (…) 트로츠키주의의 영향력이 확대되고 있음을 보도"했다고 뿌듯해 하는 것이 아니다. 무엇을 통해 그것을 이루었는가를 스스로 되짚어 보는 것이다. 어쨌거나 한국 트로츠키주의자들이 그 조상의 비극을 피할 수 있을 테니, 다행스럽다.

물론 다함께는 옳다. 옳기 때문에 옳다. 옳은 조직이 하는 일이므로 누구와 놀든 그것 역시 옳다.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의 정성진 역시 충실한 트로츠키주의자로서 다함께의 이 같은 철학 방법을 따른다. 정성진이 포스트모더니즘, 자율주의, 케인스주의가 청산되지 않은 포스트스탈린주의라 규정할 때 그런 방법론이 가장 빛을 발한다. 왜 포스트모더니즘이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의 역사를 논하면서도 스탈린에 반대한 트로츠키의 투쟁에 대해서는 한 마디 언급도 없다. (…) 포스트모더니즘 마르크스 경제학은 스탈린주의를 고전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에 포함시키는데, 나는 이것 역시 잘못되었다고 생각한다." 단지 이것뿐이다. 올바른 트로츠키주의가 스탈린주의는 마르크스주의가 아니라 했는데, 포스트모더니즘은 스탈린주의를 마르크스주의로 인정했으므로 포스트스탈린주의다! 자율주의는 왜 또 포스트스탈린주의일까? 이정구는 "정 교수의 책을 조금만 훑어 보아도 (…) 풍부한 논거에 입각한 논리적 비판을 하고 있음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이라고 안내해주는데, 그곳 어디에서도 자율주의와 스탈린주의의 관계에 대해 단 한 줄도 설명돼 있지 않다. 케인스주의에 대해 정성진은 이렇게 말한다. "진보 진영의 케인스주의로의 경도는 (…) 우리나라 진보 진영의 스탈린주의적 뿌리와도 무관하지 않다. (…) 스탈린주의 코민테른이 반파시즘 인민전선 전술을 채택하면서 케인스와 같은 개량주의 경제학에 대한 비판을 자제하고 이들과의 연합을 도모했던 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이런 논박은 모리스 돕이 케인스 비판에 비적극적이었던 데 대한 증명일 수는 있지만, 장상환, 신정완, 이병천 등 한국의 '케인스주의자'를 비판하는 논거는 못 된다. 대입논술에서 이런 주장은 '논리 비약, 논거 부적절'이라 채점한다.

훈고학은 더 이상 필요 없다

나는 트로츠키 같은 사람들이 서로 교류하고 투쟁하는 당대 혁명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생각한다. 반면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 그런데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는 생산민주주의를 주장한 노동자 반대파에 대항하여 '지령 관료제'를 옹호하였고, 노동조합을 군대처럼 통제하기를 희망했다. 나는 그것을 보고, '트로츠키주의자'는 그것을 보지 않는다.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 고르바쵸프가 내건 "다시 레닌에게로 돌아가자"는 구호가 이 경향의 시초이다. 모든 죄과를 스탈린에게 뒤집어씌우고, 최후의 보루를 지키고자 했던 이 발상은 마르크스 이래의 후계자들에게서 오도(誤導)와 왜곡보다는 계승이 더 많이 발견됨에 따라 스탈린에서 레닌으로, 레닌에서 마르크스로 후퇴를 거듭하다 결국 파산하고 만다. 우리는 이와 같은 경향에 아직도 둘러싸여 있다. 기존 사회주의 실패의 책임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고 추정되는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의존, 청년 마르크스와 후기 마르크스를 대립시키고 후기 마르크스를 취사선택하는 알튀세르의 방식, 그리고 유행하는 외래 사조(思潮)를 직수입하는 한국 진보진영의 천박한 상업주의. 그러나 우리의 실패가 상당 부분, 현실 적합성에 대한 주체적 검증 없는 차용(借用)에서 비롯되었다는 점, 더욱 중요하게는 진보사상 또는 진보운동이라는 것이 특정 사상가 개인의 문제라기보다는 분리 곤란한 게슈탈트적(Gestalt的) 거대한 총체라는 점을 되짚어 볼 때, 특정한 이론적 권위로의 도피는 잠시의 모면책일 수는 있어도 진보사상 본래의 목적인 대중 조직, 국가 운영에 기여하기는 어렵다.

"모건 스탠리의 2004년 4월 26일 민주노동당 방문도 그런 분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이 만남에서 이재영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은 당이 직면하게 될 두 가지 시험대, 즉 시장과 대중 투쟁에 대한 개량주의자의 본심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그는 '국유화 계획'을 묻는 모건 스탠리의 물음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이 없다'고 답변했다." (김인식, 『다함께』 30호, 2004)

개악보다 개량을 좋아한다는 점에서 나는 분명히 '개량주의자'다. 그런데 민주노동당이 2004년 4월에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다함께는 그 때 '특정 기업에 대한 국유화 계획'을 가지고 있었는가? 현재는 있는가? 다함께는 개량주의자인가? 국유화는 카페 혁명가의 낭만이다. 혁명을 준비하는 정당의 정책실장이라면 어떤 이유로, 어떤 기업을, 어떤 시기에, 어떤 방법을 통해 국유화할 것인가를 고민해야지, 국유화를 되풀이하는 데 멈춰서는 안 된다. 그의 책상 위에는 국유화 법률 공포안과 재정 충당 계획, 정치적 경제적 프로세스가 갖추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2004년의 민주노동당은 그런 것을 가지고 있지 않았고, 가질 필요도 없는 당이었다.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렇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와 공산주의에 있어 우리는 실천의 문제에서 이론상의 문제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앉았기 때문이다. 민주노동당이 집권하여 대한민국을 개조할 날이 멀지 않을 수 있지만, 그것은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

유물론은 다른 철학 체계들과는 달리 결코 자기완결적일 수 없다. 그것은 세상의 모든 부분을 다루는 여러 과학들과의 연결에 의해서만 비로소 실현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그리스 철학자들이 세계에 대해 놀라울 정도로 정확한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고대 그리스의 과학과 물질 생산의 후진성은 그리스 철학을 명민한 추측으로서만 긍정하게 한다. 마찬가지로 19세기와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역시 진보적 원칙과 몇 가지 과학적 발견의 '절대적 구성'일 뿐이다. 19세기와 20세기의 유물론은, 유물론의 내용을 채울 과학이 충분치 않았다는 점에서, 그리고 그나마 성과조차 제대로 흡수하지 못했다는 점에서 유물론 실현의 관념적 과도기였다.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

후진사회주의 체제가 붕괴한 21세기에 이르러서야 마르크스주의의 얼굴을 덮고 있던 카리스마 가면이 벗겨졌다. 이제야 비로소 우리가 그것에 접근하고, 객관적으로 이해하고, 이용할 수 있는 길이 열렸다. 그러나 다함께처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Return to Marx)"가 바른 길은 아닐 듯 하다. 마르크스로의 복귀 또는 그의 수많은 문헌에서 그럼직한 무엇인가를 찾아내는 것은 고순도의 결정을 얻기 위해 알코올 램프의 불꽃을 돋우는 아편쟁이의 모습에 가깝다. 그런 짓은 마르크스 훈고학(Marxolgy)이지, 마르크스주의(Marxism)가 아니다. 체제가, 매순간마다 재생산되는 물질과 의식의 최후 종합이라는 점에서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의 이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땅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는 것과 땅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사실 모두를 안다.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S. J. Gould)는 진리를 찾는 도상에서 인류가 지표 삼을 수 있는 가장 강력하고 적절한 가르침으로 코코란 선장의 말을 인용한다. "아직 멀었다."

이재영 / 레디앙 기획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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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낡은 '사민주의' 비행기로는 절대로 날 수 없어"
[이정구 재반론] 지금 진보 세력에게는 무엇이 필요한가?

2007-02-12 오전 9:14:17

정성진 경상대 교수(경제학)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 출간을 계기로 트로츠키가 21세기 한국의 진보 세력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논란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6일 소개된 이재영 전 민주노동당 정책실장의 반론에 대해 '다함께'의 이정구 씨가 재반론을 보내왔다.

이 씨는 "이재영 위원이 낡은 마르크스주의(트로츠키주의)에서 벗어나자고 하면서 정작 본인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며 한국 진보 세력의 혁신은 마르크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로 이어지는 전통적 마르크스주의의 부활을 통해 가능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편집자>

누가 역사를 날조하는가?

이재영은 내가 "역사 날조"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한다. 누가 그런지 크론시타트 반란 문제부터 살펴보자. 1921년 크론시타트 반란과 그 진압은 우익, 자유주의자, 사회민주주자, 아나키스트들이 애호하는 쟁점이다. 이 사건이 볼셰비키가 자기 자신의 지지자를 공격한 대표적 사례이자 러시아 혁명의 정당성에 의문을 제기하고 레닌ㆍ트로츠키 정치와 스탈린 공포정치의 연속성 명제를 가장 잘 뒷받침해 주는 호재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재영은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농민 신병'이라서 반란이 일어났다는 말은 거짓"이라고 단정한다. 그러나 크론시타트 반란자들 대부분이 '농민 신병'이라고 말한 것은 실은 크론시타트 반란 연구의 고전인 <1921년 크론시타트>의 저자이자 반란군에 호의적인 아나키스트 역사가 폴 아브리치였다. 최근 소련 붕괴 후 공개된 비밀문서도 이 통설의 타당성을 입증하고 있다.

이재영은 크론시타트 반란 직전인 "2월 페트로그라드에서는 푸틸로프 공장을 비롯한 노동자 파업이 줄을 이었고,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은 파업 노동자들과 연계하며 그들의 요구 사항을 봉기에 내걸었다"고 주장하면서 크론시타트 반란을 마치 '제3의 노동자 혁명'처럼 미화하는데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 아브리치에 따르면, 크론시타트 반란이 일어났을 때는 페트로그라드의 파업은 마무리되고 있었고, 노동자들은 반란을 지지하기는커녕 반란 진압에 동조했다. 최근 공개된 러시아 문서도 크론시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이 반란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인 사실을 확인하고 있다. 사실, 내전 말기에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인 것은 주로 식량 부족 때문이었는데, 이들이 식량 배급을 더욱 악화시킬 게 뻔한 '곡물 징발 중단'을 요구했던 크론시타트 반란을 지지할 리는 만무하지 않은가? 이와 관련해, 이재영은 당시 "'노동자 반대파'들이 트로츠키를 짜르 시대 반동 장군이었던 트레포프에 견주어 비아냥댔다"면서, 그 증거로 "총알을 아끼지 말라" 운운한 <크론시타트에 관한 진실>을 인용한다. 그런데 이재영은 그 인용문을 쓴 것은 '노동자 반대파'가 아니라 크론시타트 반란 지도부인 '임시군사혁명위원회'인 것 정도는 알고나 인용했어야 했다. 이재영은 자신이 크론시타트 반란군과 함께 노동자 민주주의의 구현체로 애지중지하는 '노동자 반대파'조차 크론시타트 반란 사태가 터지자 당시 10차 당대회에 참석했던 '좌익공산주의' 등 다른 반대파들과 함께 투하체프스키의 진압 부대에 자원 입대했다는 사실 역시 알고 있어야 했다.

이재영은 또, "크론시타트 반란자들이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를 주장했다"는 내 주장도 "거짓"이며 "역사 날조"라고 공격한다. 하지만 볼셰비키와 공산당에 호의적일 리 만무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도 반란군이 "경제 개혁 이외에도 '볼셰비키 없는 소비에트'와 (…) 공산당 독재의 종식 (…) 등을 요구했다"고 서술한다. 실제로, 반란군은 군대, 공장 등에서 볼셰비키 기구들을 폐지하라고 요구했고, 당시 크론시타트 함대에 있던 볼셰비키 정치위원 등 수백 명을 체포 구금했다. 물론 반란군이 내건 15개 강령에 "소비에트 선거"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이것이 그 반란군들이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는 되지 못한다. 어떤 초보 운동가도 어떤 조직이나 운동의 정치적 성격을 그들이 내건 슬로건만을 갖고 판단하지 않는다. 진지한 역사가는 박정희와 공화당이 "한국적 민주주의" 기치를 내걸었다고 해서 그들을 민주주의자라고 보지 않는다. 크론시타트 반란은 다름 아닌 그 크론시타트 기지의 노동자들조차 반대했던 반란이고, 1920년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에 맞서 당시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가장 강력하게 옹호했던 '노동자 반대파'까지 무력 진압에 동참한 반란이다. 그런데 그 반란을 도대체 무슨 근거로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향한 '제3의 노동자혁명'이라고 할 수 있을까? 이재영의 주장처럼 크론시타트 반란군이 "자유로운 소비에트 선거"와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를 요구하고 실현하려 했다면, 도대체 왜 서방 제국주의 열강들, 로마노프 왕조의 복귀를 노리는 러시아 왕당파들, 자본가들의 자유주의 정당인 입헌민주당, 멘셰비키와 사회혁명당 등이 모두 크론시타트 반란을 지지했을까? 그들이 언제부터 "아래로부터의 사회주의" 지지자들이 된 것일까?

이재영의 주장은 이처럼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 맥락에서 이해하지 않고 따로 떼어내 그 자체로만 파악하려는 역사적 추상주의의 발로다. 예컨대 이재영은 내전 시기 트로츠키가 제기했던 노동자의 군대화나 노동조합의 국가기관화 주장과 관련해 이 주장이 제기된 역사적 맥락은 고려하지 않고, 당시 출판된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의 구절(트로츠키 자신은 곧 자기비판을 하며 이 주장을 철회했다)을 인용하면서 마치 트로츠키가 내내 "노동조합의 자주성을 부정"한 사람인 양 암시한다.

비판 대상에 대한 무지

이재영은 트로츠키가 1920년대 스탈린주의 관료에 맞서 당내 민주주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부활을 위해 투쟁하고 1936년 <배반당한 혁명>에서는 다당제를 주장한 사실(이는 정성진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 잘 서술되어 있다)은 피해 간다.

다함께는 물론 정성진도 트로츠키 사상의 적잖은 부분에 대해, 또 다양한 트로츠키주의자들에 대해 비판을 제기할 뿐만 아니라 현재 같이 뜻을 같이하고 있는 '국제사회주의자(IS)' 경향의 이론과 정치에 대해서도 중요한 쟁점들을 제기하고 있다. 이재영은 이 역시 전혀 "보지 않는다". 이재영의 억측과는 반대로 "흠집 없는 권위로의 도피"만큼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먼 것은 없다. 다함께는 이재영이 주장하듯이 우리와 다른 정치적 입장들에 대해 "트로츠키주의가 아니기 때문에 옳지 않다"고 결코 매도하지 않는다. 예컨대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그가 21세기 사회주의의 대안 구상을 위해 중요한 자원으로 고려하는 참여계획경제의 세 가지 모델('파레콘', '협상조절', '노동시간 모델')이 모두 트로츠키주의에 대해 적대적임에도 그들로부터 배울 것은 배운다. 또, 같은 책에서 정성진은 때로 다함께보다 더 나아가, 소련 국가자본주의론의 이론적 발전을 위해 심지어 알튀세르주의자로부터도 수용할 것은 수용한다.

정성진과 다함께는 북한의 사회 체제를 노동자 권력과 혁명으로 타도되어야 할 국가자본주의적 착취, 억압 체제로 규정하지만, 남한의 주체사상파가 북한 체제를 지지한다고 해서 이들을 이재영처럼 하나의 적으로 대하는 종파적 태도를 취하지 않는다. 그러기는커녕, 이들이 반신자유주의, 반제국주의, 반전 투쟁에 적극 참여하는 한 이들과도 연대한다.

이재영은 "다함께 같은 자칭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스탈린주의'에 대항하여 투쟁한 망명객 시절의 언행에 더욱 주목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정성진은 <마르크스와 트로츠키>에서 트로츠키 사상의 정수는 1906년에 발표한 영구혁명론에 있는가 하면, "망명객 시절", 즉 1930년대의 "언행" 중에도 '관료적으로 퇴보한 노동자국가'론이나 섣부른 제4인터내셔널 창건과 같은 오류들이 적잖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재영은 "스탈린주의라 불리는 체제의 이론적 기초와 정치적 토대의 상당 부분은 트로츠키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것이다"라는 자유주의자들과 일부 아나키스트들의 주장을 반복한다. 그런데 정성진이 각종 자료와 논거를 동원해서 비판하고 있는 대상은 바로 이와 같은 종류의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마르크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과 스탈린주의 간의 연속성 명제이다. 1989~91년 붕괴된 현실 사회주의의 실체가 사회주의가 아니라 자본주의의 변형인 관료적 국가자본주의일 뿐임을 논증하는 작업은 정성진의 책이나 다함께의 이론적 작업의 핵심적 부분인데, 이재영은 이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고는 사회주의 실험의 역사적 실패를 이유로 "실존하는 구체에서 검증되지 않은 추상으로 내려 앉았다"고 주장한다.

정성진이 옛 소련의 국가자본주의적 본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매개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과 스탈린주의 간의 질적 단절을 논증하려는 시도, 그리고 이를 기초로 21세기 조건에서 고전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창조적 발전과 한국적 착근을 모색하는 것에 대해 사회민주주의자인 이재영은 물론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왜 어떤 점에서 동의하지 않는지를 논리적으로 근거를 대며 지적해야지, 이런 시도와 모색이 마치 존재하지도 않았던 것처럼 애써 간과하며 논쟁을 원점으로 되돌려서는 우리 진보 진영의 이론과 정치의 발전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분파주의

한편, 이재영이 다함께와 범자민통의 "야합" 또는 "연대" 운운하면서, 다함께가 당당하다면 "'주사파와 어울려 논다'는 지적에 그저 '그렇다' 라고만 답하면 되는 것"이라고 다그친다. 그러나 이재영이 인용했듯이, 나는 지난번 글에서 다함께가 범자민통 동지들과 "함께 연대해서 투쟁하는 것은 전혀 잘못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했다. 광범한 대중운동을 건설하려면 자신과 이데올로기가 다른 사람들과도 기꺼이 함께 행동할 수 있어야 한다. 이것이 '야합'이라면 다함께는 '야합'을 결코 마다하지 않을 것이다.

분파주의에 눈이 멀어 연대와 투쟁의 대의를 종파적으로 외면하는 것은 다함께의 정치와 거리가 멀다. 게다가 다함께는 민주노동당 선거에서 범PD 계열일지라도 지난해 하반기 이래 최대 쟁점인 북핵과 일심회 사건과 사회연대전략 문제에서 우리가 보기에 올바른 입장을 취하는 사람이면 그를 지지했고, 민주노총과 현 금속선거에서는 NL계열이 아니라 노동자의힘 등 옛 PD계열 내 좌파를 지지하고 있다.

이재영이 다함께의 정치를 "마르크스로 돌아가자"는 "마르크스 훈고학"이라고 딱지를 붙이는 것은 번지수를 잘못 찾아도 한참 잘못 찾은 것이다. 다함께 신문이나 사이트를 잠깐 둘러보아도 다함께가 "마르크스 훈고학"자들이기는커녕 '지금 여기에서' 구체적인 정세 분석과 반전ㆍ반제국주의ㆍ반자본주의 투쟁에 헌신하는 투사들임을 금방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재영 자신이 경멸해마지 않는 "마르크스 훈고학"도 이재영처럼 "아래로부터 사회주의"를 지지하는 척하면서도 역사와 사상을 그 전체 역사적 맥락 및 진화 과정 속에서 판단하지 못하고, 뻔히 보이는 것조차 보지 않고, 자기 맘에 드는 것만 골라 보고, 그것도 멋대로 날조해서 진보를 호도하는 사람들을 교정하기 위해서는 때로 유용하다.

낡은 사회민주주의

이재영은 "우리는 마르크스주의라는 지평에서 이륙을 위한 가속을 시작해야 한다. (…) 우리의 이륙이 성공했을 때 그 비행기에 어떤 이름이 새겨질지를 알 필요는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이재영의 문제의식을 추적하다 보면 이재영이 타고 있는 '비행기'의 이름을 짐작할 수 있다. 이재영은 "지난 150여 년을 거슬러 반추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말했지만, 지난 역사를 돌아보면 이 비행기의 이름은 분명히 사회민주주의다.

이는 이재영이 민주노동당의 집권이 "겨우 한두 걸음을 내딛는 것이지 사회주의나 공산주의로의 대장정이 아니다"라거나, 국유화 계획을 "앞으로 오랫동안 가질 필요도 없다"는 말에서 분명히 확인된다. "낡은 마르크스주의에서 벗어나자"며 이재영이 제시한 것은 전혀 새롭지 않은 사회민주주의행 비행기 티켓이다. 그러기에 이재영에게는 "요즘 세계 진보 진영의 화두"로 "사회주의라는 단어가 다시 인구에 회자하고 있다"는 정성진의 지적이 "현실과 동떨어진 상황 파악"처럼 "눈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이재영은 글 끝 부분에서 "무엇이 혁명을 배반케 했는가?"하고 자문하고 그 답은 "세상에 대한 무지, 무엇보다도 자신의 무지에 대한 무지"라고 주장하고, "우리는 사회혁명을 이룰 정보와 지식, 확신과 권위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 우리의 어림과 나약함, 무지를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에서 이재영은 고전 마르크스주의 유물론적 방법을 버리고 계급투쟁과 역사 발전을 지식의 문제로 환원하는 관념론을 채택했음이 분명히 확인된다. 이재영이 이륙을 시도하고 있다는 그 개량주의적 관념론의 비행기는 이미 지난 20세기 동안 무수히 되풀이된 이륙 실험에서 형편없이 실패한 바 있다.

이재영이 글 끝 부분에서 "아직도 멀었다"며 일갈하며 자신의 "무지"를 시인한 것이 진심이라면, 그 이륙은커녕 추락할 것이 뻔한 고물 비행기에 동승하라고 어쭙잖은 말장난과 거짓말로 호객하는 짓은 당장 그만 두고, 먼저 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역사에 대한 자신의 "무지"부터 깨쳐야 할 것이다.

이정구 / 다함께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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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b 2007-02-15 18: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주의에 대한 입장을 제외한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이재영 씨가 진지하지 못한 것 같다. 왜 자신들이 사회민주주의자 라고 직접 말하지 않고, 사회주의는 아니다 라고 말하려는거지?

마법천자문 2007-02-15 19: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트로츠키의 몇몇 책들은 읽어볼 가치가 있겠지만 '트로츠키주의자' 가 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sb 2007-02-15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반갑습니다. 저 역시 트로츠키는 중요한 열쇠 중 하나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런 점에서, 정성진 교수의 책은 - 그가 트로츠키주의자 이든 아니든 - 한국 사회에서 트로츠키에 대한 연구 성과가 축적되는 것으로 환영하고 싶습니다. 이재영씨가 좀 더 책 소개에 충실했다면, 프레시안에서 기대했던 좋은 논쟁이 되었을 수도 있었는데 아쉽네요.
 

(출처: 정책브리핑)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이 권언유착 청산했다”
최영재 교수, 언론재단·언론정보학회 토론회 발제


2003년 참여정부 출범 이후 추진된 정책홍보시스템이 해방 이후 지속돼온 권언유착 관계를 획기적으로 청산했다는 평가가 나왔다. 최영재 한림대 언론정부학부 교수는 6일 오후 서울 프레스센터에서 한국언론재단과 한국언론정보학회가 공동 주최한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 평가와 과제’ 토론회에서 “참여정부(2003년~2007년)가 기획, 시행한 언론홍보 제도는 여러 가지 의미에서 정부-언론관계 역사에 ‘주요 사건’으로 기록될 만하다”면서 이같이 평가했다.

최 교수는 “변화의 크기로 보면 해방 이후 정부와 언론의 거리가 참여정부에서처럼 명실공히 ‘상호독립’이 가능한 거리로 유지된 적이 없었다”며 “이로써 과거의 권언유착관계는 획기적으로 청산됐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날 ‘참여정부 홍보·언론시스템 평가와 과제’란 발제를 통해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의 큰 방향을 △정책정보를 일반 국민에게 노출시키는 ‘개방성’ △언론사 간 차별을 허용치 않는 ‘공평성’ △오보 등에 시스템적으로 신속하게 대응하는 ‘체계성’이라고 요약했다. 또 “개방형 국정홍보 시스템은 전반적으로 민주적 정부와 민주적 언론제도를 정착시켜 선진국의 모델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제도적 정당성과 전향성을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고 호평했다.

최 교수는 “그럼에도 도입 초기부터 개방형 국정홍보 시스템을 ‘언론통제적 수단’으로 보는 비판적 시각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고, 현행 홍보 시스템 하에서도 결과적으로 정부와 정부 정책에 적대적인 기사들이 여전히 생산되고 있기 때문에 새로운 홍보시스템마저 제도적 정당성을 의심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정책홍보시스템은 국민 직접 커뮤니케이션 정책(Going Public)”

최 교수는 참여정부 언론홍보정책의 특징을 △ 건강한 긴장관계로 대표되는 보수언론과의 관계 △ 신문법과 오보 대응 등에서 나타난 사회책임주의 언론개혁 △ 브리핑 제도와 기자실 개방으로 요약되는 개방형 홍보-취재시스템 △ 국정브리핑과 청와대브리핑을 통한 국민 직접 커뮤니케이션 정책(Going Public)이라고 정리했다.

이어 “Going Public이란 정파적이고 공격적인 언론의 통로를 피해 직접 국민에게 정책정보를 제공하고 국민과 대화하는 새로운 언론정책의 형태”라고 설명했다. 최 교수는 현 정부가 개방형 정책홍보시스템을 추진한 배경과 관련, “언론이 정부의 정책정보, 국정상황에 대한 정보를 국민들에게 전달하는 미디어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그는 미국의 예를 들어 “참여정부에서는 미국에서 대통령 취임 초기 약 100일간 지속되는 밀월(honeymoon) 기간을 찾아볼 수 없었다”며 “오히려 언론은 2003년 취임 초 밀월기간 동안 대통령에 대한 공격을 그 이후 기간보다 더욱 심하게 했다”고 현 정부가 처한 언론상황을 묘사했다. 최 교수는 구체적으로 2003년 노무현 대통령 취임 초기 조선일보와 한겨레 기사를 분석한 결과, 대통령에 대한 우호적인 기사는 조선일보가 25건 중 한 건, 한겨레는 10건 중에 한 건에 불과했다고 말했다.

최 교수는 이날 지난해 7월 중순부터 한 달간 정부 6개부처(통일부 행자부 교육부 외교부 재경부 산자부) 출입기자 63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국정홍보시스템 도입 이후의 취재보도관행 변화에 대한 설문조사와 심층인터뷰, 조사기간 중 보도된 신문기사 분석 결과를 소개했다. 조사결과에 따르면 기자들은 브리핑제 도입과 기자실 개방, 오보대응시스템 등에 대해서는 평균 점수 이상으로 ‘바람직하다’(5점 척도에서 3.5~4점 사이)고 응답했다. 반면 정책홍보관실 신설은 그저 그렇다(3점)는 평가를 받았다.

출입기자들 “시스템 자체는 긍정적이나 운영만족도는 떨어져”

최 교수는 “그러나 기자들은 개방형 정책홍보시스템의 실제 운용에 대해서는 모든 분야에 대해 평균 점수 이하의 불만족을 나타냈다며 이는 제도 도입 취지와는 달리 운영상의 문제가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고 볼 수 있다”고 지적했다. 이어 “정부 부처관련 기사에 대한 내용을 분석한 결과 75%에 달하는 기사가 관급기사로 채워졌다”며 “이것은 기자들이 개방형 홍보시스템 도입 이후 공식 채널의 취재경로가 증가했다고 대답한 것과 일맥상통한다”고 평가했다.

분석대상 기사를 다시 긍정 부정 중립으로 분류한 결과 개방형 홍보제도 아래서 공식적인 채널을 이용한 기사는 긍정적인 기사보다도 부정적인 기사가 3대1 정도 많은 것으로 나타났는데 “이는 언론보도가 대체적으로 긍정보다 부정이 많은 경향을 반영하는 동시에 새로운 제도의 공개성과 투명성 구조 자체만으로 긍정적인 뉴스를 이끌어내는 데에는 한계가 있음을 시사한다”고 최 교수는 분석했다.

그는 “결과적으로 기자들은 참여정부의 정책홍보시스템에 대해 제도로서의 규범성에 대해서는 긍정적으로 평가한 반면, 만족도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평가를 내렸다”며 “단적으로 브리핑은 많은데 기사거리가 없다는 말로 요약할 수 있다”고 지적했다.

최 교수는 대안으로 △브리핑제도의 내실화 △오보대응은 하되 언론자유 신장 차원에서 접근 △부처 홍보평가제도를 현실에 맞게 개선 △부처의 홍보 자율성 확보 △취재원과 기자 간의 공감대 형성 △부처 장관의 목소리를 제대로 반영할 수 있는 전문적인 대변인제 운영 △광고회사의 매체전략과 유사한 효율적인 매체관리 전략 수립 △선택과 집중에 의한 이슈관리 전략 수립 등을 제시했다.

안차수 교수 “언론오보대응에 긍정적인 옵션도 고려해야”

최 교수의 발제에 대해 토론자로 참석한 안차수 경남대 교수는 “새로운 정책홍보시스템의 목표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며 “비정상적인 관행을 바로잡기 위한 것인지, 아니면 광의의 의미에서 대국민 정책서비스를 강화하겠다는 것인지에 대한 목표가 분명해야 한다”고 말했다. 안 교수는 “목표에 따라 성과에 대한 평가도 달라질 수 있다”며 “언론 오보대응에 있어서도 법적소송이나 반론청구와 같은 위협적 수단 외에 긍정적인 옵션들을 함께 고려해볼만하다”고 제안했다.

정연우 세명대 교수는 “홍보는 의지만 갖고 되는 것은 아니다”며 “현실을 감안한 전략을 세울 필요가 있다”고 지적했다. 또 “홍보관의 역할에 한계가 있었다”며 “일정한 적응기간이 필요하며 시스템 정착시기를 앞당기기 위한 노력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정 교수는 이어 “홍보시스템 자체의 필요성을 홍보하는 것도 중요하다”며 정책발표 시에는 면밀하고 신중한 검토를 거친 후 발표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서강수 홍보분석관 “정책홍보시스템은 완료형 아닌 진행형”

세번째 토론자로 나선 서강수 국정홍보처 홍보분석관은 “정책홍보시스템에 대한 토론회는 처음인 것 같다”며 “홍보시스템에 대한 홍보부족을 지적하는 발언에 공감한다”고 말문을 열었다. 서 분석관은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이 탄생한 배경으로 △정치·사회적인 환경변화 △민주화로 인한 국민들의 참여욕구 증가 △공공영역에 대한 국민들의 관심 증가 등을 꼽고 “정부는 닫힌 정부가 아닌 열린 정부를 지향하는 있으며 수평적이고 쌍방향적인 소통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는 “정부는 정책을 만들어 국민에게 설명하는 과정까지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며 “참여정부 정책홍보시스템은 완성된 것이 아니라 발전시켜 나가고 있는 과정에 있다”고 강조했다.

이수범 교수 “정책에 대한 정확한 진단 가능한 평가지수 개발해야”

이수범 인천대 교수는 최영재 교수의 발제와 관련 “정부와 언론 간의 관계가 좋지 않아 개방형 정책홍보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은 측면이 있는 것은 아닌지에 대한 고찰이 필요하다”며 “(정부 홍보시스템을 평가하면서) 지나치게 대언론관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고 말했다.

이 교수는 끝으로 “이 정도 평가를 많이 하는 단계에 왔으면 현 정책에 대한 정확한 진단이 가능한 평가지수 정도는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이영태 (medialyt@korea.kr) | 등록일 : 2007.0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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