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로쟈 > 박노자의 '진짜 사회주의'
온라인 한겨레에 들어갔다가 오랜만에 박노자 글방을 들르게 됐다. 최근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한울, 2006)을 놓고 프레시안에서 벌어진 논쟁을 정리해두려다가 여유를 못 내고 있었는데('트로츠키와 크론슈타트 문제'가 정해놓은 제목이다) 마침 그와 관련한 '만감'이 있기에 옮겨온다. '진짜 사회주의란 무엇인가'를 다루면서 필자의 '사회주의'관을 내비치고 있다. 다른 자리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내가 읽고 싶은 책 중의 하나가 '당신들의 러시아'인지라 박노자 교수의 러시아 이야기는 챙겨두게 된다. 원문에 오타가 여럿 되기에 교정해두었다.
박노자 글방(07. 02. 07) '진짜 사회주의'란 과연 무엇인가? 슬랴프니코프 vs 트로츠키
요즘 여유가 생길 때마다 정성진 교수의 <마르크스와 트로츠키>라는 신간을 흥미롭게 읽고 있습니다. 그걸 읽으면서 반갑게 느껴지는 측면은, 정 교수께서 자신을 "트로츠키주의자"로 정의하시면서도 일단 트로츠키의 모든 사상과 모든 행동을 무조건적으로 옹호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레닌이나 트로츠키를 "무오류의 교황"처럼 만드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야만적인 현실을 역시 꽤나 야만적인 방법들을 동원해 타개하려 했던 그들의 자기 모순 투성이의 진정한 모습을 복원하는 것이지 않습니까?
레닌과 트로츠키가 잘한 부분 - 예컨대 처음에 멘세비키들이 추진했던 "소비에트식 노동자 민주주의"를 받아들여 "노동자의 생산 과정 통제"를 적어도 이론상 수용한 것 - 도 배워야 하지만, 그들이 잘못한 부분들을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습니까? 예컨대 정 교수께서 1920년에 트로츠키가 주장했던 "노동의 군사화" 프로젝트가 하나의 오류이었음을 매우 옳게 지적하시더랍니다(445-446쪽).
물론 "전시 공산주의의 불가피한 상황의 영향", "레닌, 부하린 등 다수의 볼세비키 지도자들이 가졌던 비슷한 차원의 착각" 등의 여러 가지 단서를 달면서 말씀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단순히 "오류의 지적"에 머무르지 않고 트로츠키와 레닌 등이 왜 그러한 종류의 오류를 범했는지를 한번 깊이 고심해보고, 그 당시에 이와 같은 오류를 바로 잡으려는 세력들이 있었는지를 알아봐야 하지 않습니까?
왜 "노동자의 민주주의"를 이론상으로 주장했던 트로츠키가, 노조를 국가기관으로 만들어 그 노조를 통해 노동자들을 징집하여 군대식으로 "사회주의 건설의 요충지"에 배치하려 했을까요? 노동자 출신의 노동 운동가 같으면 '징집'되어 가족과 헤어져 어디론가 끌려가는 노동자의 심정을 이해해서라도 진시황의 부역 노동 징발을 방불케 하는 이러한 이야기를 안할 터인데, 트로츠키가 왜 이러한 프로젝트에 매력을 느꼈을까요? 단순히 국방부 장관이라는 벼슬의 포획력일까요?
물론 국방부 장관으로서 가지게 돼 있는 "행정 편의주의"란 부분도 있었는데, 여기에서 러시아 노동 운동의 한 가지 비극적인 파행을 보게 되기도 합니다. "노동자 정당"을 이끌었던 트로츠키나 레닌,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스탈린 등이 과연 하루라도 "노동"해본 적이 있었나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1980년대식의 유행어로, 다들 "학출 군단"이었지요. 그들 중에서는 가방끈이 가장 짧은 스탈린이라 해도, 그래도 신학 대학을 좀 다녀본 사람이었고 그루지아어로 꽤나 괜찮다는 시 몇 편을 잡지에 싣는 등 "문단 데뷰"까지 했었지요.
상트-페테르부르크 제국대학의 법대를 나와 변호사로 일해본 레닌 정도면은, 형님이 황제 암살 음모 혐의로 사형집행돼서 그렇지 사실 마음만 먹었다면 출세를 크게 할 수 있는 "먹물"의 대열에 속했어요. 고급학력이 하도 보편화된 지금에 와서는 "문단 데뷰"나 "변호사 경력"은 별 것처럼 안보이지만, 인구의 70%가 아예 글을 몰랐던 100년 전의 러시아에서는 레닌/트로츠키와 일반 공장 노동자 사이의 '사회적인 거리'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었어요. 서로 다른 세상에서 살았던 것이지요.
글쎄, 1920년대의 조선에서 고급 한문 문장을 잘 구사했던 조공의 최초 책임비서 (1925년) 김재봉선생과 일선 노동자의 "관계"의 형태를 생각해보시기를. 그러니까 레닌의 "직업적 혁명가 지도하의 전위당" 이론은 운동판에서의 "학출 군단"의 헤게모니를 정당화하는 이야기로 보이는 측면도 있었고, 그들의 "지도, 계몽"에 피로를 느꼈던 많은 일선 노동자 활동가들이 차라리 조직 형태가 조금 더 느슨한 멘세비키 쪽을 택하기도 했었어요.
일찍부터 현장 활동을 한 일도 별로 없이 노동자들을 "조직, 지도"해온 트로츠키 같은 "고급 학출"에게는, 노동자들을 군대처럼 대오로 세워 노동 현장에 투입하겠다는 생각이 꽤 쉽게 들 수 있었어요. 즉, 그의 "노동의 군사화" 망상의 근원을, 실제로 자본주의적 사회의 불평등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 운동판의 정치 역학에서도 찾아볼 수 있지요. 참, 지금의 한국의 운동판은 좀 달라졌나요?
그러면, 이 망상에 맞선 이들은 누구였을까요? 1921년3월의 소련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의 '노동 군사화'에 반대한 '노동자 반대파'의 지도자는 슬랴프니코프(Шляпников, Александр Гаврилович, 1885-1937)이었지요(*이 '만감' 덕분에 처음 알게 된 이름이다). 최종 학력은 보통학교 3학년 퇴학, 12살부터의 공장 노동, 1890년대 후반에 노동자 파업 주도, 현장 운동하다가 1901년에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908년 해외 망명과 프랑스에서의 생활....
레닌과 트로츠키는 해외에서 독일 사민당의 후원금을 받거나 "문필 노동"으로 생계를 꾸렸지만 슬랴프니코프는 프랑스의 금속 공장에서 노동을 하다가 거기에서도 노동 운동의 현장 지도자가 됐지요. 그가 1918년부터 인민위원 (장관) 등을 역임했지만 늘 노동자의 작업복을 입고 다녔답니다. 그리고 당과 국가에서 "벼슬"하는 동시에 러시아 전국 금속노조의 집행위원을 하는 등 "현장"의 정서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지요.
그가 공산당의 제10차대회에서 트로츠키와 레닌에거 "지금 우리가 노동자의 독재 아닌 당의 독재를 겪게 되는 감이다"라고 일갈하고 "당의 관료화 위험"에 대해 - 트로츠키보다 훨씬 일찌기! - 경고하고 당과 국가 관료들을 일정 기간의 만료 이후에 다시 공장의 현장으로 보내고 현장 노동자들을 관료를 채용하는 방안을 제시하고, 그리고 공장에 대한 관리권과 소비예트 공화국 공업 전체에 대한 관리, 감독권을 노조에게 이양할 것을 요구했었지요. 노동자의 민주주의라면 노조로 조직된 노동자들이 경제를 관리해야 하지 않습니까?
즉,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 그렇게 됐다면 그나마 소비예트 민주주의를 건질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학출" 출신의 고급 "직업 혁명가"들은 어찌 보통학교 출신의 노동자들의 감독을 달게 받겠습니까? 레닌이 슬랴프니코프에게 "신디칼리즘"같은 딱지를 붙였고, 당 대회는 슬랴프니코프와 그 동지들의 주장을 부결한데다 아예 당내의 "종파 활동"을 금지시키고 말았습니다. 그후로는 일선 노동자보다 당 관료들이 당의 주인이 되고 말았지요. 트로츠키가 1923년에 정신을 차려 당의 관료화 위험을 눈을 떴을 때, 이미 다 늦었어요...
그런데, 우리 주위에 "트로츠키주의자"들을 많이 볼 수 있어도 "슬랴프니코프주의자"들은 별로 없어요. "진정한 노동자 민주주의"를 갈구했던 보통 학교 출신의 슬랴프니코프는, 그렇게 매력적으로 안보이나요?
슬랴프니코프: 그는 1920년대에 혁명사에 대한 좋은 책을 꽤 썼어요 (물론 국내에서 소개된 것은 하나도 없고요). 그리고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07. 02. 19.
P.S. 단순하게 말하면 "트로츠키는 노조를 국가기관화하려 했던 반면, 슬랴프니코프는 국가를 노조의 감독하에 두려 했었지요"라는 대비 속에서 '트로츠키주의'와 '슬랴프니코프주의'의 차이를 읽어볼 수 있겠다. 그리고 이 차이/대비는 제목에서 암시되는바, '사회주의 vs 진짜 사회주의'의 구도로 정식화될 수도 있겠고. 의미심장한 멘트는 맨마지막 문장이다. "제대로 된 혁명가들이 다 그랬듯이 결국 스탈린에게 총살을 당하고 말았지요." 필자의 의도인지는 모르겠지만 내게는 그러한 비극적 운명까지도 '진짜 사회주의'의 구성적 요건이 아닐까, 로 읽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