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로 읽는 세기말의 역사 - 밀레니엄총서 1
신채호 지음 / 바다출판사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가수는 오랜만에 들고온 앨범에서 노래했다. “언제나 영화처럼.” 지금은 끊임없이 반복되던 이 구절 외의 다른 가사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가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노래는 끝나기 마련이다. 사실 언제나 영화처럼살고 싶다는 꿈은 영화도 노래처럼 결국은 끝나고 만다는 사실에 기반해있다. 내게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영화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떠나지 못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그냥 그런 영화다.

 

이 책에는 아주 오래전 극장에 그렇게 끝까지 앉아 모든 게 다 끝나고 환해지는 조명에 서둘러 눈물을 훔쳐야 했던 추억의 명화들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에 관해 말하지만, 영화평론서가 아니다. 사실 난 영화평론가가 쓴 영화평론들은 별로 재미가 없다. 그들은 영화의 여러 장치, 각본의 꼼꼼함, 배우들의 연기에 관해 평하고, 때로는 친분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뒷얘기들을 전한다. 이 책에 그런 얘기는 없다. 심지어 어떨 때 영화란 그저 얘기의 삽화일 뿐이다.

 

또 영화평론들은 스포일러거나 반대로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 역력하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영화평론은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하지만, 그 짜고치는 고스톱판에 엉덩이를 밀어넣으려면 영화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면 안된다.

 

이 책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CF성 평론이 아니다. 때로는 스포일러일 수는 있어도 간략한 줄거리만을 전한다. 결코 영화에 대해 주제넘게 떠들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평론가들의 몫일 뿐그저 영화가 보여준 만큼을 갖고 세상의 얘기를 전한다. 이 책은 역사책이다. 열한개의 영화가 다루어지고, 그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역사를 담담하고 간결하게, 하지만 깊이있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푸른연>, <로메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포레스트 검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간디>, <더 파워 오브 원>,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인도차이나>, <오피셜 스토리>.

 

<포레스트 검프>를 제외하고는 다 묵직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후까시 잡기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와 달리 얘기가 꼬여있지 않고, 말하는 바가 명확한 영화들이다. 지배와 착취, 그리고 그로 인한 희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얘기들이다. 이런 숙연한 영화들을 떠올린다면, “언제나 영화처럼이라고 노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말한다. “영화는 끝났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

 

<파워 오브 원>은 주인공이 아프리카너는 아니지만, 어쨌든 백인이라는 당시 나름대로의 삐딱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참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수용소에서주인공 PK의 지휘에 맞춰 수천명의 흑인들이 노래하는 씬은 지금도 마음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아쌈멤마 얌멤메 아쌈멤마 얌멤메, 림보람보 림보람보 아리예 아리예뭐 이런 가사의 그 노래는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 자체로 영혼의 울림이었다. 영화는 PK가 옥스포드대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흑인해방운동에 뛰어든다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이 책은 그 이후 만델라의 당선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고단한 역사를 돌아본다. 역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지만, 그 영화의 시작 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영국인과 아프리카너’, 서로 다른 두 백인 집단 간의 갈등에 대해 들어본 바도 없었는데, 이 책은 그 갈등의 역사적 기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초기 팽창과정과의 연관 속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들은 종종 십여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노인이 된다. 이 책은 그 건너뛴 십여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인도차이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 밥티스트 옆에 있던 갓난 아이 에티엔느는 다섯살 때 할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가는데, 10년 후 다 큰 청년이 되어 등장한다. 그리고는 제네바 협정에 베트민 정부 대표로 온 생모 까미유를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않는다. 이 책의 지은이는 영화에서 건너뛰어버린 시절의 살아있는 역사를 들려준다. 나치 독일에 유린당한 주권과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끈질긴 저항을 펼쳤던 프랑스라 할지라도, 2차대전 종전 이후까지 인도차이나에서는 여전히 제국주의의 면모를 바꾸지 않았다. 마치 오늘날의 이스라엘처럼 당시의 프랑스는 자신의 피해에 민감하고, 가해에 무감한 양심마비 제국주의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더러운 전쟁을 중지하라는 시위가 벌어졌고,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최후 결전에서 아작이 나고 베트민에 항복하고 만다.  

 

한편, 1950년대 말 흐루시초프 시대에 기숙사 생활을 하던 세 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얘기로 시작하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20년 정도의 세월을 건너뛰고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중년을 맞이하는 지를 보여준다. 일찌감치 사람좋은 농부와 결혼했던 이는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젊은 시절 수영영웅이었던 남편은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미혼모였던 이는 신분상승의 바늘구멍을 뚫고 공장의 관리자가 된다. 영화에서 생략된 이후의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의 시기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환멸의 연속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부업을 해야 했고, 결근이 잦았으며, 근무를 땡땡이치고 상점에 갔다. 모든 소비재가 부족했지만, 보드카는 언제나 풍족했고 알콜 중독이 큰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이 깝깝한 사회주의 혁명의 후퇴 과정을 지은이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이 책만 봤다. 원래 한 챕터만 보려고 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반나절만에 다 봤다. 마침 몇몇 영화들은 영화음악 씨디를 갖고 있어서,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포레스트 검프>를 틀어놓고 그 영화와 관련된 역사얘기를 보니, 영화도, 음악도, 글도 근사했다. 그러고 보니 괜찮은 올드팝들로 채워져있는 <포레스트 검프> 씨디는 아주 오래동안 듣지 않았었다. 5년 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었는데, 그 때 운전할 때 들었던 음악이었다. 영화음악 씨디가 없는 경우에는 비슷한 분위기의 음악을 들었다. <천지인>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읽었는데, 역시나,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장인 <오피셜 스토리>를 읽을 때에는다소 뜬금없긴 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 아마도;;) 스페인어 씨디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틀어놓았다.

 

어제, 그제, 연이틀 술먹고, 오늘은 반나절 동안 이 책만 봤다. 한량같이 지내는 와중에 이 책이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1998년에 출판된 책이고, 제목도 근시안적이기 이를 데 없는 세기말의 역사고, 별로 잘 팔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 알맹이는 꽉 차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죽음과 사랑, 억압과 희망의 20세기 이야기인데, 이 부제가 책 내용을 더 잘 반영하는 것 같다. 지은이가 뭐하시는 분인 지 모르겠지만, 부디 다른 영화 얘기들도 좀 이렇게 써주시라겉만 삐까리번쩍한 영화평론들은 이제 쫌 짜증나고 지겹다        (2006. 11.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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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7-05-14 14: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쌈멤마 얌멤메 아쌈멤마 얌멤메, 림보람보 림보람보 아리예 아리예”??
에로이카 님 기억력이 참 비상하군요.
영화 <파워 오브 원> <모스크바는 눈물을...> 등 저도 재밌게 본 영화들이네요.
저자 이름 보고 다짜고짜, '단재 신채호 선생이 영화 이야기를?' 했다니까요.
리뷰 제목 심플하면서도 좋습니다.^^

waits 2007-05-15 01: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와 무관하게 "언제나 영화처럼" 시절 전인권의 풋풋함이 새삼 아련하게 떠오르네요.
책 읽으시면서 나름 분위기 많이 잡으신 것 같은...^^ 재밌게 생긴 책 알려주셔서 감사!

에로이카 2007-05-15 1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기억력이 비상한 게 아니라, 그 노래가 너무 좋아서 OST를 구입해서 갖고 있거든요. 그 노래 제목이 Rainmaker였나 뭐 그랬어요. 그 노래가 참 좋기도 했지만, 수많은 흑인 수용자들을 백인 꼬마가 지휘하는 모습을 그렇게 마음 편하게 받아들일 수만은 없었어요. 그래도 좋은 영화이지요. 심플은 무슨요... 저도 로드무비님처럼 담백하면서 울림이 있는 글을 쓰고 싶은데.. 잘 안 되네요.

나어릴때님.. 내가 좋아하는 전인권은 딱 고 때까지인 것 같아요. 노래에 한해서는... 하긴 다른 것들 때문에 좋아했던 것은 아니고 노래 때문에 좋아했던 거니까... ㅎㅎ 읽는 책에 따라 다르긴 한데, 이런 책 읽을 때에는 음악도 들어야지요... 꼴에 폼생폼사거든요.. ㅋㅋ
 
대안없는 자본주의
요아힘 히르쉬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발전국가 이후 한국의 국가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은 국가에 대한 근본적, 이론적 고찰들을 살펴보게 하였다. 봅 제솝의 최근 저작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제솝의 전략관계적 국가이론, 슘페터적 근로 탈민족 체제 (SWPR), 지식기반경제 (KBE) 등에 대한 그의 통찰에 무척 감탄하였다. 물론 약간의 불만과 의구심도 동반되었다. 나의 독서는 보통 아주 훌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책에서의 주장이 주로 의지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을 찾아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예외도 있다. 맑스의 <<자본>>이나 <<요강>>을 읽고서는 그럴 수 없었다.) 제솝을 읽으면서, 그의 주장이 명시적, 암묵적으로 요아힘 히르쉬 (Joachim Hirsch)의 국가이론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솝이나 히르쉬 모두 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맑스주의적 국가 이론의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사람들이다 (난 이런 종류의 미련한 인간들이 좋다).

 

그러나 나의 히르쉬 독서는 아주 짧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1995년 이후 영어로 번역 출판된 히르쉬의 논문은 다섯 개 정도밖에 없었다. 이 책 <<대안없는 자본주의>>도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책은 원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국내에서는 1996년에야 번역 출판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 어떤 첨단 이론이 아니라, 히르쉬의 최근 논의들과 그가 70년대에 참여했던 서독 국가도출논쟁 간의 매개고리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만족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번역의 탓이 크다), 상당히 괜찮은 책이었다.

 

이 책은 조절이론의 틀을 통해 본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1부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정치를 살펴보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나의 본 관심은 1부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맑스주의 국가이론과 조절이론 양자를 지은이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둘을 비판적으로 화해시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화를 시도했던 1부보다는 68 혁명의 잔상과 89년 동구 몰락으로 인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 속에서 좌파 정치를 사고하는 2부가 훨씬 더 재미있고, 오늘날 이 남한 땅에서 당적 실천을 고민하는 좌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더 많았다. 사실 2부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한 권 떠올랐다. 알렉스 칼리니코스의 <<역사의 복수>>. 지금 책의 내용은 거의 잊어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책을 들춰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떠올렸던 것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나팔소리로 정점에 달했던 신자유주의적 반동과 잡다한 포스트주의들에 맞서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적 실천을 옹호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히르쉬는 자신의 사상에 투철하면서도, 자신이 참여했던 국가도출논쟁(177)과 조절이론(1 2)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난 보통 싸움을 걸기 위해 하는 비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책의 뉘앙스가 들어가 있는 자아비판을, 그것이 아니라면 내부자의 비판을 신뢰한다. 히르쉬는 이러한 성찰적 비판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한다 (1 3, 4, 5, 6, 7, 8). 90년에 출판된 책이기 때문에 그닥 새로운 내용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맑스주의와 조절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국가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기본을 확인하다는 차원에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책 출판 이후에도 아주 최근까지 독일어로 출간된 히르쉬의 책들이 상당히 많다. 경쟁국가 (der nationale Wettbewerbsstaat), 글로벌리제이션, 유물론적 국가이론 등에 관한 책들인데, 누가 좀 다 번역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번역은 별로 안 좋다. 특히, 1, 2, 3장은 참 안 좋다. 역자가 연관이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즐겨 쓰는데, 이게 도대체 뭘 뜻하는 지 전혀 감이 안 온다. 94-95쪽에는 사회화 연관”, “행위연관”, “제도화 연관”, “조직 연관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108-9쪽에는 축적연관”, “조절연관”, “재생산연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옮긴이가 영어로든 독일어로든 이게 뭘 뜻하는 지 주를 달았어야 할 것 같다. 맞춤법도 몇 곳 틀렸고, “내전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을 시민전쟁으로 번역한다든가, 영어로는 “gentrification”인 것을 지주화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v/c (100)라고 했는데, c/v라고 해야 한다. 번역이 이처럼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영어로도 번역 안 된 책을 한국어로 읽게 해준 출판사와 옮긴이에게는 감사한다. 그런데 이왕 번역출판할 거면 신경 좀 더 쓰시지명예회복을 위해 히르쉬의 최근 책들을 번역해서 내는 것은 어떠실지…?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1. 쏠 피치오토, 존 홀로웨이 엮음, <<국가와 자본>> (청사).

2. 김호기, 김영범, 김정훈 엮음, <<포스트포드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미래>> (한울)에 실린 히르쉬의 글 두 개.

3. 요아힘 히르쉬, “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 비정부기구와 국가의 국제화”. <<월간 사회운동>> 2005 5, 6 (http://journal.pssp.org/bbs/view.php?board=journal&id=1250).

 

 

Ps.

꽤 오랜 동안 난 스스로를 온건한 사민주의자로 생각했었다. 또 요즘같은 세상에 내용없이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가르는 것은 넌센스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분법을 견지하는 이들은 어느 편에 서건 간에 보통의 경우, 스웨덴 모델과 러시아 모델을 대립시키기 일쑤였다. 100여년 전 각 나라에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되었던 상황이 자기가 살아 있을 동안, 혹은 죽은 다음이라도 언제건 (어쨌든 미래에 이 한국에서) 일어날 것처럼 떠드는 것도 못 마땅했다. 그랬는데, 이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전깃불이 빤짝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길지만 인용한다.

 

역사는 이성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력 수준을 기초로 해서도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적 수단들인 정당, 국가, 관료제 등을 유지시키고도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다 [번역 참 맘에 안 든다].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관계와 지배관계를 변혁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생산, 지배관계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제도적 형태들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방적 사회변혁은 혁명가의 지도나 국가 폭력에 의해서는 관철될 수 없다. 국가에 의해 사회가 해방될 수 있다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지배기구로서의 국가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중심 또는 근원이 아니라 단지 표상이다. 국가 정치가 해방으로의 발전을 지원하거나 용이하게는 할 수 있지만 그 토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164).

 

이런 말을 비단 히르쉬만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발리바르도 내가 그의 글을 챙겨보던 옛날에 이런 말을 했을터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 구절을 읽다가 온건한 사민주의자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 규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 나는 왜 사민주의자인가?

: 사민주의자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강요되는 세상에서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데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에 헛된 공상에 기반한 말장난일 뿐이다.

 

이것이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다. 그러다 이 구절을 읽으며 퍼뜩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1.       사회민주주의자에게는 좌파 정당의 국가권력 획득이 목표이다.

2.       사회주의자에게 좌파 정당의 국가권력 획득은 결코 목표가 아니라, 좌파 정치를 위한 기본이다. 이는 해방으로의 발전을 지원하거나 용이하게는 할 수 있지만 그 토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3.       그 토대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이 두었던 무리수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부르주아 반혁명의 방지라는 미명 하에 (물론 난 그들의 충심을 믿는다) 노동자당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착취했던 역사의 시작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한시적으로 도입된 것이었지만, 고난의 행군 끝에 도달한 곳은 이제 쫌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야만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혁명 경로는 짜르 치하의 야만에서 스탈린 치하의 야만으로, 그리고 마피아의 야만으로의 긴 노정이었다.

 

만약 남한의 좌파들이 혁명 / 개량, 폭력 / 비폭력, 러시아 / 스웨덴의 이분법에 의지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구분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 별로 없겠지하긴 말은 쉽지만, 그것을 내용있는 실천으로 바꿔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서평 쓰다가 든 딴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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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피드림~ 2007-03-13 1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너무 어려워요! 에로이카님은 소설은 안 읽으시나요?^^;;;

에로이카 2007-03-14 0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punk님, 제가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본답니다. ^^ 소설 예전에 전철 타고 다닐 때는 많이 읽었는데... 그러고 보니 참 불공평한 것 같네요.. 저는 punk님 서재 가서 재미있는 것도 많이 보고 그러는데, 제 서재에는 그렇게 재미있는 것도 없고... 쩝... 앞으로 노력하겠습니다.. 언제고 소설 다시 볼 날이 오겠지요..

allnaru님, 반갑습니다... 저기 가라타니 고진의 책이 책꽂이에 꽂힌 채로 저를 째리고 있네요... 언제쯤 저 책을 잡을 지 알 수 없으나, 그 때 한 수 가르쳐주십시오.. ^^
 
신자유주의와 세계화
서울사회경제연구소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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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자유주의와 세계화를 분석한 경제학적 연구들이 일곱 편 실려있다. 딱히 총평을 할 것은 없고 글 하나하나에 대한 정리만 하겠다.

 

양동휴(1)19세기 후반의 1차 세계화 물결과 20세기 후반의 2차 세계화 물결을 비교하고 있다. 현재의 세계화 이전에 얼마나 많은 세계화의 역사적 선례들이 존재했는가에 관해서는 논쟁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교역된 상품은 사치품에 국한되었으며 19세기 이전에는 가격수렴이 관찰되지 않았다”(O’Rourke & Williamson, 2002)는 주장을 근거로 자신의 세계화에 대한 역사적 조망의 범위를 19세기 후반의 1차 물결과 20세기 후반의 2차 물결로 국한시키고 있다. 가격수렴을 시장통합의 증거로 삼고 있다. 따라서 세계화라는 개념이 현재와 같이 학문세계에서 널리 쓰여지는대로 국제적 시장통합의 내용을 지시할 경우, 19세기 후반 이전에서 세계화의 선례들을 찾기란 다소 무리라는 얘기이다.

그는 시장 통합 (상품시장, 자본시장, 노동시장)과 불평등, 두 측면을 통해 두 세계화 간의 비교를 시도한다 (비교는 다소 산만하다).

1.       상품시장 통합의 측면에서, 현재의 세계화는 19세기와 달리, (1) 산업 내 무역의 성장, (2) 부가가치 연쇄고리의 단절, (3) 싱가포르, 홍콩 등 초무역 경제의 등장, 그리고 (4) 저임금 제조업 수출국의 대두 등의 특징을 보인다 (Krugman, 1995).

2.       자본시장 통합과 노동시장 통합에 관한 부분은 비교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특히 20쪽에서는 다소 불명확한, 그리고 황당한 주장을 한다. 19세기 말에는 신대륙으로 노동이동과 자본이동이 동시에 일어났기 때문에 발산의 동력이 되었는 데 반해, 20세기 말에는 직접투자의 비중이 늘어났기 때문에 소득수준이 수렴되었다고 한다발산되는 것은 무엇이냐? 자본주의? , 기술의 이전에 수반되는 반경향들 (이전되는 기술을 구사하는 노동의 가치 절하, 지적재산권과 같은 형태의 선진국 기업들의 독점 지대 추구 등)은 언급되지도 않는다.

3.       이런 서술들은 불평등을 다루는 데에서도 나타난다. 지속적으로 악화되는 세계적 불평등 추세에도 불구하고, 세계화는 기술이전과 요소가격 균등화를 통해 국가간 불평등을 감소시킨 면이 클 것이리라고 추정하면서, 불평등 심화의 원인을 선진국의 성장속도가 빨랐던 것에서 찾는다. 이처럼 선진국의 성장에 외부적인 것으로 세계화를 개념화하는데 별로 설득력이 없다.

4.       backlash를 세계화에 대한 반발이 아닌 세계화의 후퇴로 번역하는 것도 상당히 독특하다.

 

정일용(2)과 안현효(3)는 각자의 글에서 세계화와의 관련 속에서 제3세계 경제발전에 대한 주류경제학적 처방을 비판하는 실증적, 이론적 논의들을 살펴보고 있다. 둘다 대척점을 잘 정리했다. 특히 안현효가 신고전파 경제학의 방법론적 기초를 비판하면서 기든스의 구조화이론에 주목하여 이를 제도주의적 접근과 연결시키려는 시도(88-91)가 무척 흥미로웠다.

 

박승호(4) <<좌파 현대 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에서의 관점과 문제점을 여전히 보이고 있다.

1.       다양한 좌파 이론들을 비판하고 있지만, 정작 그 자신은 그가 비판하는 이론들보다도 현실에 대해 설명하지 못한다.

2.       힐퍼딩의 산업자본과 금융자본의 구분, 아리기의 금융적 축적과 실물적 축적 간의 구분을 형태적 추상이라고 일축하는 부분은 사실 좀 어이가 없다. 그가 의지하고 있는 본펠트의 실체적 추상’, 곧 다양한 형태 속에 존재하는 실체, 특수성 속에 존재하는 일반성, 구체 속에 존재하는 추상이라는 개념화에 기반하여 사회 현상의 내적 연관을 밝히는 방법은 시간성 (따라서 역사)이 사상된 추상적인 이론적 공리계 내에서나 가능한 것이다. 상이한 역사적 국면을 구분하고 있는 아리기에게 그것은 형태적 추상이라고 말하는 것은, 약간 과장하자면, 이승만이나 노무현이나 남한 대통령이기 때문에 똑같다는 말과 다름 없다. 600년에 걸쳐 네 개의 축적체제 (동시에 헤게모니) 싸이클이 교체되어 온 자본주의의 역사를 분석한 아리기는 금융적 축적이 우위를 보이는 시기를 하나의 축적체제가 성숙하여 쇠퇴를 암시하는 징표로 개념화한다. 한 축적체제의 말기 징후로서 (곧 역사적 국면으로서) 금융적 축적의 우위를 설명하는 것이 어떻게 형태적 추상에 기반한 것인가? 실체적 추상을 부정한다는 것이 아니라, 번지수를 잘못 찾았다는 느낌이다.

3.       18세기에는 자본주의가 성립되지 않았다는 단언도 황당하다. 영국의 산업혁명(그 이후에야 비로소 맑스가 개념화한 노동에 대한 자본의 실질적 포섭이 가능했기 때문에)을 자본주의의 출발점으로 보는 이러한 시각은 일국적 분석단위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생산양식을 파악하고, 유럽중심주의적이며, 산업주의적인 것이다. (사실 여기서 박승호는 월러스틴에 대한 브레너의 70년대 비판을 그대로 차용하고 있다.)

4.       셰네의 금융 지배적인 세계적 축적체제론을 비판한다면서, 신자유주의 시대 자본의 금융적 축적전략을 무슨 대안적 이론화쯤으로 격상시키려고 시도하지만, 정작 이론적 설명은 없고, 순 꼬투리 잡기들밖에 없다. 굳이 이론적 설명을 찾으라면, ‘자본의 도주전략에 대한 주목 정도일 것이다. 자본의 이동 (선진국에서 후진국으로의 공간적 이동spatial fix이든, 아니면 산업영역에서 금융영역으로의 영역간 이동financial fix이든)을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자본이 노동의 저항을 피해 도주하는 것으로 개념화고자 하는 것은 계급투쟁의 중심성을 강조하는 저자의 시각의 연장인데, 자본의 이동 원인 중 노동계급의 투쟁은 많은 요인 중 하나일 뿐이다. (재미있는 것은 자본가들이나 정권, 보수언론이 기업 못해먹겠다고 하는 이유가 강력한 노조 때문이라는 건데, 박승호 선생은 뭐라고 할까? 자신의 논지에 따르면, ‘맞다고 해야 한다.)

5.       나중에 시간 나면 한 번 해보고 싶은 것은 신자유주의 시대에 자본의 도주를 강조하는 박승호와 자본의 포섭을 강조하는 이진경 간의 대비이다. 노동계급의 투쟁의 능동성과 이것이 자본에 끼치는 치명성을 강조하는 박승호는 자본의 도주를 이야기하고, 자본에 의한 노동과 활동의 기계적 포섭을 말하는 이진경은 프롤레타리아의 탈주에 초점을 맞춘다. 둘 다 극단적이라는 느낌이다.

 

조복현의 글(5)은 금융자유화와 금융공황의 역사와 이에 대한 기존의 해석들을 잘 소개해주고 있다.

 

이강국(6)은 자본자유화와 경제성장 간의 관계를 둘러싼 계량경제학적 연구들 간의 논쟁점을 잘 정리하고 있다. 정리하면, 사실 별 관계 없다는 얘기이다. 그러나 그는 예의 신중함으로 자본통제만을 옹호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부패가 심각한 나라의 경우에 때로는 자본통제가 경제에 더욱 악영향을 미칠 수 있는 반면, 관료의 질이 높은 나라들에서는 더욱 효과적으로 수행될 수 있기 때문이다 (190). 하지만 동아시아와 같이 경제성장이 자본통제, 국내적 금융통제, 산업정책에 기초한 고부채 모델 (high debt model)’의 경우 자본통제가 경제성장에 유리했음을 밝히고 있다. “상대적으로 강력한 자본통제가 이루어지는 나라에서는 높은 부채가 경제성장을 촉진하며, 또한 고부채 국가에서는 자본통제가 경제성장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자신의 실증분석을 통해 주장한다 (194-5). 그리고 이러한 경우는 동아시아의 경우 뿐만 아니라, 스칸디나비아 반도 국가들의 경우도 마찬가지라고 한다.

 

세계 자본주의 거버넌스의 문제를 다루는 장시복(7)은 중요한 문제에 대한 기초적 논의들을 잘 정리하고 있다. 특별히 새로운 이야기가 있는 것 같지는 않지만, 거버넌스에 대한 좌파적 연구가 절실한 시점에서 좋은 출발점을 제공해주는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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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03-12 10: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7-03-12 10: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님.. 정말 감사합니다.. 꾸벅~ 저도 곧... ^^

다지원 2009-07-08 22: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마포구 서교동에 위치한 대항-대학 다중지성의 정원입니다.
실례인줄 알지만 내일부터 7주간 박승호 선생님의 책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을 중심으로 한 박승호 선생님의 강좌가 개설되어 안내드립니다.

아시겠지만 박승호 선생님께서는 저작에서 조절이론, 브레너의 국제적 경쟁론, 자율주의, 개방적 맑스주의 등 최근의 좌파이론을 분석하고 새로이 재구성된 독창적인 정치경제학을 모색하고 계십니다.

강의 시간은 매주 목요일 저녁 7시 30분이며, 수강료는 7강에 104,000원, 청소년의 경우 50% 할인됩니다. 홈페이지에서 자세한 내용 확인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daziwon.ohpy.com/227090/11

감사합니다.

다중지성의 정원 드림.
 
동아시아 경제변화와 국가의 역할 전환
김대환 외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4월
평점 :
품절


서평 쓰기가 참 쉽지 않다. 서평이랄 것까지는 없고, 짧은 메모를 남긴다는 기분으로 가볍게 시작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은 10명에 의해 쓰여진 14개의 논문들로 구성되어 있는데, 두세가지 정도의 이론적 축에 의지하고 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오랜동안 조절이론과 접목된 맑스주의 국가이론의 재구성을 시도해왔던 봅 제솝의 이론을 발전국가 해체 이후의 남한과 대만에 적용하고자 하는 기획이다.

 

3장을 쓴 제솝은 서구의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Keynesian Welfare National State, KWNS)가 슘페터주의적 근로 탈민족 체제 (Schumpeterian Workfare Post-national Regime, SWPR)로 변형되는 과정을 이론화시키고자 하는 작업을 오래 동안 해왔다. 현재 그와 함께 랭카스터 대학교에 재직중인 섬(6)은 제솝의 작업을 딛고, 이 이론틀을 동아시아(특히, 홍콩)에 확장 적용하려는 시도를 해왔다. 섬에 따르면, 서구의 KWNS 모델이 기반하고 있는 포드주의적 축적체제가 자기중심적 (autocentric)임에 비해 동아시아 경제 모델들은 자기완결적이지 못한 ‘배태된 수출주의’(embedded exportism)로 규정될 수 있다. 이는 지구적 규모의 교환 영역과 지역적 규모의 생산규모 간의 접합이라는 형태를 띤다. 4장에 실린 조희연의 글은 제솝과 섬의 이론화를 창조적으로 한국에 적용하려는 시도이며, 8장의 왕젠환의 글은 이를 대만에 적용하려는 시도이다. 조희연은 남한과 대만의 발전국가 모델을 수출형 축적체제에 조응하는 ‘리스트주의적 준전시국가’ (Listian Warfare State)로 개념화함으로써, 제솝-섬의 이론적 틀의 보편화 (동시에 유연화)를 시도한다.

 

1장의 김대환, 9장의 윤상우의 글은 기존의 발전국가 문헌들을 검토하고 있는데, 발전국가론이 뭔지 궁금한 사람들이라면 정리할 겸 가벼운 마음으로 읽어도 좋을 정도로 잘 정리하고 있다. 한국과 대만을 비교하고 있는 윤상우의 글은, 유사한 경성발전국가였던 두 나라가 상이한 이행경로를 그리며 변화해가는 과정을 보여주는데, 대만의 경우는 연성 발전국가로, 남한의 경우는 탈발전국가로 변모했다고 주장한다.

 

조절이론의 정치학적 측면에 주목한 제솝, , 조희연, 왕젠환의 글들과 달리, 2장과 12장을 쓴 조명래 선생의 글은 조절이론의 경제 분석에 입각해서 쓰여졌다. 여러가지 흥미로운 아이디어들이 제시되는데, 그 중에서도 그의 지구체제 (global regime) 개념화가 특히 주목할만하다. 그는 지구체제를 “선진국에 거점을 둔 금융적 자본에 의해 지배되는 '유통부문(circulation sphere)의 지구적 뻗침'에 의해 이루어지는 지구화와 개발도상국의 사회적 관계 (예, 자본노동관계)에 바탕을 두고 있는 '산업자본에 의해 주도되는 생산부문(production sphere)의 지구적 뻗침'” 간의 교차로 개념화한다 (329). 핵심-주변 관계의 이러한 새로운 개념화에 기반하여, 세계화와 더불어 한국 경제가 맞게 된 어려움을 한국의 수출주의 축적체제의 근본 모순이 발현된 것으로 이해한다. 그에 따르면, 90년대 이후 대기업들이 주도했던 산업생산의 세계화가 “선진국에 의해 주도되는 포스트포디즘적 국제분업체제에서 저기술, 저부가가치의 표준화된 제품을 경쟁적으로 대량생산하는 부문으로 점점 제한”되는 효과를 낳았다. 이에 따라, “개방이나 경쟁압력을 극복하기 위해 생산부문의 세계화를 추진했지만, 선진국이 독점하거나 통제하고 있는 지구적인 상품순환망에 외향적이면서 불평등하게 연루되면서, 그 결과로 이윤실현의 조건이 더욱 불리하게 되었다. 세계화를 통한 한국자본주의의 지위상승은 결국 선진국이 장악하고 있는 자본순환 및 교류망의 함정으로 빠져든 채 '주변부 경제'로의 재하강(reperipheralization)이 강제되었다 (344-5).

조명래 선생이 이 주제와 관련하여, 다른 후속작업들이 있는 지 궁금하지만, 앞으로 빼놓지 말고 챙겨봐야 하겠다는 생각을 했다.

 

14장에 실린 조희연의 다른 글도 흥미롭다. 4장이 발전국가를 조절이론의 해석틀로 새롭게 조명하는 것이라면, 14장은 한국 발전국가의 변화를 소위 ‘세 개의 전선’ (국가-시민사회 전선, 계급전선, 생활세계 전선)에서의 갈등의 변화 양상을 추적함으로써 그 내부동학을 정치사회학적으로 재구성한다. 지은이가 현재까지도 이 틀을 유지하는 것으로 보이는데, 정권교체 시기와 맞물려 이후의 작업이 기대된다. (얼마전 지은이는 [레디앙]에 민주노동당에 대한 정책적 조언을 기고한 바 있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3542). 보면서 공감을 많이 했었는데, 이 책에서 제시된 이론틀 속에서 어떻게 자리매김할 수 있을 지 좀 생각해봐야 할 것 같다.)

 

내가 만약 책을 엮었다면, 테마별로, 이론적 입장별로 다르게 구성했을 것 같다. 따라서 책을 읽을 때에는 1장부터 14장까지 순서대로 읽는 것보다는 관련성이 높은 글들끼리 보는 게 더 좋을 듯 싶다. 먼저 발전국가론에 대한 정리를 포함하고 있는 1 (김대환) 9 (윤상우)을 읽고, 번역이 꽝이긴 하지만, 제솝(3), (6), 조희연 (4), 왕젠환(8)을 읽고, 다음으로 조명래의 2장과 12장을 읽은 후, 한국 발전국가의 변화를 조금씩 다른 관점에서 재구성한 11, 13, 14장을 읽은 후, 나머지 글들을 읽는 게 좋을 듯 싶다.

 

 

같이 읽으면 좋은 글

 

봅 제솝, “슘페터주의적 근로국가를 향하여”, 김호기, 김영범, 김정훈 편역. <<포스트포드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미래>>. 한울

 

윤상우, <<동아시아 발전의 사회학>>, 나남

 

유철규 외, <<박정희 모델과 신자유주의 사이에서>>, 함께 읽는 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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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후사 2006-12-20 16: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래간만의 서평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나이링 섬은 밥 제솝의 부인이라고 하더군요. ㅎㅎ

노부후사 2006-12-20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케인스적 복지국가와 슘페터적 근로국가에 간략하게 설명해 주실 수 있나요? 책 읽다가 언뜻언뜻 스치는 단어들인데 의미를 몰라서요.

에로이카 2006-12-21 09: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metrion님 오랜만입니다. 섬이 제솝의 부인이었군요. 몰랐습니다.

제솝은 대서양 포드주의 (Atlantic Fordism) 축적 체제의 위기가 케인스(주의)적 복지국가 (Keynesian Welfare Nation State)로부터 슘페터(주의)적 근로 탈민족국가 체제 (Schumpeterian Workfare Post-national Regime)로 국가 형태상의 변화를 야기시켰다고 주장합니다. 두 개념 모두 어디까지나 이념형이고, 역사적 실체가 있었던 KWNS에 비해 SWPR은 현재 형성 중인 국가형태입니다. 따라서 현실적으로는 둘다 그 안에 다양한 버젼들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대서양 포드주의 체제의 핵심부 외부 국가들을 어떻게 규정할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한 물음이 당연히 제기되었고, 나이링 섬의 경우, 제솝과 공동작업을 통해 홍콩의 경우를 분석하며, 리카도(주의)적 근로 식민지체제 (Ricardian Workfare Colonial Regime)로부터 슘페터(주의)적 근로 탈식민지체제 (Schumpeterian Workfare Post-colonial Regime)로 변화하고 있다는 주장을 합니다. 제솝은 한국과 대만 같은 국가들은 리스트(주의)적 근로 국민국가 (Listian Workfare Nation State)였다고 봅니다. 조희연의 경우는 반공억압체제에 주목함으로써, 이 개념을 리스트주의적 준전시 국가 (Listian Warfare State)로 변용하여 사용하구요.

아마도 궁금해하시는 것은 ‘케인스적’, ‘슘페터적’, ‘리카도적’, ‘리스트적’ 같은 형용사들이 뜻하는 바일 것 같은데, 생각보다 심오한 뜻이 담겨있지는 않습니다. 1999년에 쓴 논문에서 제솝은 이 말들의 함의를 간략히 요약하고 있는데요. 각 경제학자들이 주장한 아이디어의 일면들을 담고 있습니다. 케인스적 국가는 대량생산, 대중소비, 완전고용의 아이디어를 함축하고 있고, 슘페터적 국가는 경쟁력과 혁신을 강조하며, 리스트적 국가는 국가의 경제개입을 통한 따라잡기식 발전과 유치산업 보호 등을 의미하고, 리카도적 국가는 개방경제 내에서 투입요소를 최적화할 것을 강조합니다. 케인스적 국가를 제외하고는 사실 널리 쓰이는 개념들은 아닙니다. 또, 슘페터적 국가는 지금 벌어지고 있는 국가형태상의 변화를 포착하기 위해 고안된 개념이기 때문에, 그 안에 무수한 버젼들이 존재하고 있을 뿐 아니라 개념 자체가 형성중인 개념으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한국의 경우는 현재까지 리스트주의적 근로국가 (혹은 준전시 국가)로부터 슘페터주의적 근로 국가 형태 중에서도 신국가주의적 경향이 강하게 드러나는 형태로 변모되어 왔다고 합니다.

도움이 되셨다면 좋겠습니다. 또 뵙지요.

노부후사 2006-12-21 10: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단히 감사합니다. 일목요연하게 설명해 주셔서 머리 나쁜 저도 이해가 되네요. ^^ 그런데 제솝이 99년에 쓴 논문이 무엇인지 알 수 있을까요? 귀찮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에로이카 2006-12-21 2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metrion님, 제솝에 관심이 많으신가요? 괜히 반갑네요.
제가 말씀 드린 논문은
Bob Jessop. 1999. “Reflections on Globalisation and Its (Il)logic(s).” in Kris Olds, Peter Dicken, Philip F. Kelly, Lily Kong, and Henry Wai-chung Yeung, eds., _Globalisation and the Asia-Pacific: Contested Territories_. London: Routledge. pp. 19-38.
이고, 이 논문의 25쪽에 제가 말한 부분이 나옵니다.
그리고 제솝은 다작이긴 하지만, 논문 내용들은 엇비슷한 경우가 많기 때문에, 이보다 최근 글들을 구할 수 있다면, 거기도 비슷한 내용들이 나올겁니다.

아직 읽어보지는 못했습니다만, 몇달전에 섬이랑 같이 _Beyond the Regulation Approach: Putting Capitalist Economies in their Place_라는 책을 냈더군요. 혹시 모르셨다면 참고하시기를...

노부후사 2006-12-22 19: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답변 감사드립니다. 1년 전에 정치경제학 스터디를 1달 정도 한 적이 있었는데 그때 이름을 들은 적이 있어서요. ^^

2006-12-30 17: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 - 세계화의 두 경제학
이강국 지음 / 후마니타스 / 2005년 11월
평점 :
절판


정치적 입장이 상반된 세계경제포럼(WEF)과 세계사회포럼(WSF)이 각각 개최된 두 도시의 이름이 들어간 제목이 암시하듯, 세계화의 두 경제학이라는 부제가 암시하듯, 이 책은 세계화의 제 측면을 둘러싼 상반된 경제학적 견해들을 다룬다. 또 마지막으로는 한국의 발전국가 해체 과정과 신자유주의 전개에 대한 역사적 분석을 시도하고 있다.

 

서구에서 신자유주의의 등장의 역사를 간략히 살펴보고 있는 1장에서 지은이는 헬라이너(Eric Helleiner)를 따라, 브레튼우즈 체제 붕괴 이후 자본통제가 해체됨에 따라  서구의 신자유주의적 국내적 전환이 미국의 주도 하에 어떻게 IMF와 국제통화체제의 재편으로 이어져 소위 월스트리트-재무부-IMF 복합체가 탄생하게 되었는지 간략히 살펴보고 있다. 이어서 이들의 금융자유화 구상은 80년대 초반 금융 위기에 처한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로 수출되었고, 채무국들에게 부과된 구조조정 정책의 핵심들은 나중에 존 윌리엄슨에 의해 워싱턴 컨센서스라는 이름으로 정리된다. 가혹한 구조조정에도 불구하고, 라틴 아메리카 국가들의 경제는 별로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았고 (멕시코, 아르헨티나, 브라질 등은 이후 또 경제위기를 맞이하게 된다), 97년 동아시아 경제 위기에 대한 IMF의 처방은 안팎으로 비판을 맞이하게 된다. 경제가 휘청이게 된 국가들의 위기는 피해당사국에게는 말 그대로 위기였지만, 고삐풀린 (단기)금융자본에게는 일확천금의 기회였던 것이다. 이에 문제의 월스트리트-재무부-IMF 복합체의 요직에 있던 스티글리츠 같은 이조차 IMF의 구조조정 처방책을 엉터리 경제학과 어떤 이데올로기의 기이한 결합으로 비판을 하며, 제도의 중요성과 국가의 적절한 역할을 강조하는 포스트워싱턴 컨센서스를 촉구하게 되었다.

 

이처럼 1장의 이야기는 비교적 평이하다. 그런데, 2장부터 5장까지는 세계화의 제 측면을 둘러싼 경제학계에서의 쟁점들이 비교적 상세하게 소개되고 있다 (국가와 대안적 운동을 다루는 6장은 경제학보다는 사회학에 가까울 듯 싶다). 한줄한줄 읽을 때마다 지은이가 어려운 얘기를 쉽게 하고자 했음이 느껴지고, 출판사도 상당히 공을 들여 쪼끔이라도 전문적인 용어가 나오면 바로 용어해설을 붙여서 이해를 돕고 있다. (독자로서 지은이와 출판사의 노력에 경의를 표한다.) 하지만 지은이와 출판사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방대하고 치열한 경제학 논쟁을 어느 정도나마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 문장 한 문장을 읽고, 이게 뜻하는 바가 무엇인지 곰곰히 생각해보는 시간이(적어도 내 경우엔)상당히 필요했다. 금융세계화와 자본자유화 (2), 무역자유화 (3), 세계화가 노동자에게 미치는 영향 (4), 소득분배에 끼치는 변화 (5), 국가의 약화 혹은 역할 변동 (6)을 둘러싸고 전개된 대립적 주장들이 잘 정리되어 있다. 각 장들의 논리전개구조는 대체로 비슷하다. (1) 대립되는 주장, 혹은 모델들이 소개된다. (2) 각 모델들을 증명하고자 하는 실증연구들이 검토된다. (3) 그런다고 문제가 깔끔하게 해결이 되거나, 어느 일방이 논리적으로 우세하다고 볼 수 없는 어려움을 그대로 노정한 채, 하나하나의 경우에 대한 역사적 사례 연구가 이루어져야 할 필요를 역설한다.

 

이러한 논리전개 구조가 암시하듯, 7장에서는 한국의 발전국가 해체와 경제 위기에 대한 지은이의 분석이 이어진다. 앞의 장들은 논쟁의 검토 및 소개 수준에 그치고 있지만, 여기에서는 시장주의자들 (IMF로 대표되는 주류경제학의 입장)과 수정주의자들 (발전국가론자들)의 논쟁은 아주 간략하게만 언급된다. (사실 여기에 논쟁이랄 것은 없다. 좌파든 우파든 한국의 경제발전이 IMF가 권고해온 시장개방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믿는 어리석은 이는 이제 없을 것이다.) [개입의 삼위일체 (321): (1) 자본통제, (2) 국내적 금융통제, (3) 산업정책]

 

지은이는 1960-80년대의 국가주도 경제성장이 수출과 해외자본 조달 (경제 자체의 대외의존)을 통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국가가 강력하고 독특한 자본통제를 할 수 있는 메커니즘을 갖춤에 따라, 외국 자본을 활용하되 해외 자본에 대한 종속은 피할 수 있었다고 주장한다. [서구의 경우, 브레턴우즈체제 하에서 자본통제가 비교적 용이하였으며, 이것이 복지국가 정책시행의 근간을 이루었다. 이에 반해 1960-80년대 한국의 자본통제는 발전국가 정책의 근간을 이루었으며, 이는 냉전체제 속에서 기능하였다.] 한국 상품들은 냉전체제로 인하여 미국 시장에 접근이 용이하였고, 미국을 비롯한 선진국들이 남한 정부의 보호주의적 정책을 관대하게 봐줬다.

 

그러나 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재벌의 신용도 상승은 재벌들이 정부의 보증없이도 외국자금을 빌리게 해주었고, 정부의 통제를 받지 않는 재벌 소유의 종합금융사들이 우후죽순처럼 설립됨에 따라, 그동안 은행시스템을 통해 재벌을 통제해오던 국가의 자본통제 메커니즘은 그 기능을 급격하게 잃게 된다. 여기다가 3저호황(대미무역 흑자)과 냉전종식으로 인해 미국 정부는 한국 국가에 압박을 가하여 소위 개입의 삼위일체를 무력화시켜버리고, 김영삼 정부는 경제 다방면의 자유화(발전국가의 종말) OECD 가입을 맞바꿔버린다. 이제 재벌은 쉽게 빚을 내서 전세계에 걸쳐 문어발확장을 해나갔고, 1992년 증권시장 개방 이후 외국인의 주식보유한도는 증가일로에 접어들게 되었다. 금융시장 개방은 국내 재벌과 (미국 정부의 개방압력으로 대변되는) 국제금융자본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는 것이었고, 정부는 세계화를 통해 선진국 클럽에 학실히가입하기 위해 금융개방을 추구하게 된다. 그리고 97년 경제위기 이후의 구조조정과정은 발전국가를 확인사살한다. 1998년 주식시장이 외국인에게 완전개방됨에 따라, 97 15%였던 자본시장의 외국인 비중은 2004년 상반기 43%로 급등했고, 2004년 하반기 주요 은행의 외국인 지분율은 65%에 이르게 되었다. 2004 1분기의 국내재산반출은 “2년 전 같은 기간에 비해 3.7배나 늘어났 (356). 성장과 분배의 동시악화가 발생하였다. 개방에도 불구하고 투자는 침체되어, “부자/빈자, 대기업/중소기업, 수출/내수 기업의 양극화가 심화되고 수출호황이 국내투자나 소득증가로 이어지지 않았다 (363). [이런 현실을 보면 종속심화-독점강화테제는 오늘날 다시 강력하게 주장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윤소영 교수는 딴짓 그만하시고, 다시 이 중요한 주제로 돌아오시기를… ]

 

[마침 오늘 (2006년 11월 21일) 뉴스들은 10대 재벌의 현금보유액이 150조원에 이른다고 전한다. 재벌이 돈을 벌어도 고용을 창출할 수 있는 생산적 투자로 이어지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끝에서 지은이는 무엇을 할 것인가에 관한 약간의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있다: 투기자본들에 대한 적절한 규제, 외국자본에 대한 선별적 접근, 칠레에서 시행된 것과 같은 가변의무예치금 제도 도입, 동아시아 지역국가간 통화스왑 (치앙마이 이니셔티브), 통화바스켓 제도 등.

 

지은이가 그리고 있는 현재 한국 경제의 모습은 결코 밝지 않다. 지은이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으로 올바른 정책을 편다면 한국경제가 지금보다는 나아질 수 있으리라는 희망을 피력한다. (시원하고 통쾌한 맛은 없다.) 신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이기는 하되, 국가의 정책적 수준에서 약간의 대안이 언급된다주장의 참신함보다는 세계화를 둘러싸고 경제학계 내부에서 진행된 전문적인 논의들을 쟁점별로 정리하여 독자들에게 쉽게 설명하고자 하는 성의, 그리고 이와 결합된 지은이의 광범위한 학문적 통찰이 돋보이는 책이다. (지은이처럼 자기 공부를 쉬운말로 설명하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실력없이는 할 수 없는 일임이 분명하다.) “쾌도 없는 난마라고나 할까? 하지만 지은이에게 쾌도가 없다고 탓하기 보다는, 쾌도로 목을 벨 적의 약점을 성의껏 가르쳐줬다는 것에 감사하자. 

 

가끔 <프레시안>에 세계경제의 불균형에 관한 경제학계의 논의들을 올리기도 하던데, 아마도 다음 책의 주제가 아닐까 싶다. 그것도 기대된다.

 

 

[사소한 꼬투리 하나. 세계은행의 경제학자 밀라노빅을 소개하는 부분 (222-229)에서 지은이는 그가 러시아 출신이라고 하는데, 내가 알기로 그는 옛 유고슬라비아 출신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의 이름은 밀라노비치 (Milanovic)로 발음해야 할 것 같다. 그는 이 책에서 소개된 이전의 연구들을 더욱 발전시켜 2005년에 Worlds Apart라는 책을 펴냈는데, 1978-80년 이후 일국적, 지역적, 세계적 수준에서 소득이 양극화되고 있고, 이는 본격화된 신자유주의 정책 탓임을 명확히 하고 있다. 또 그는 아리기(Giovanni Arrighi)의 논의를 끌어들여 이것이 미국 헤게모니의 쇠퇴와 관련되어 있음을 암시한다. 스티글리츠 이후로 가장 주목할만한 세계은행 경제학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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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11-23 15: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11-23 23: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 감사합니다. 맞아요.. 그런 글쓰기를 해야 하는데... 사실 님 페이퍼의 글맛은 그런 글쓰기 내공이 뒷받침되어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 같아요. 저는 좀 멀었어요. 앞으로도 많이 가르쳐주셔요.. ^^

그리고 저는 님이 무언가 되시리라고 생각한답니다. 무언가 훌륭하신.. 감사합니다.

waits 2006-11-28 01: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멋있다고--;; 보관함에 담았던 책이었는데, 제 수준에는 리뷰로 만족해야겠군요. ^^
전 언제쯤이면 이런 일목요연한 글을 쓸 수 있을지.. 게다가 철 지난 유행어의 적절한 사용과 윤소영 교수의 귀환을 요청하는 센스까지~ 경의를 표합니다.ㅎㅎ
공부에 바쁘신지, 격조하시구만요. 종종 이런 리뷰도 구경시켜주시길~^^

에로이카 2006-11-28 0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철지난 유행어가 무언가 다시 한번 살펴봤지만... 모르겠다는... 이젠 정말 구닥다린가 봅니다... 평택, 나어릴때님도 격조하시더군요... 회색노트 이틀연속으로 빼먹지는 맙시다.. ^^

waits 2006-11-28 0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학실히" 요구를 하시는군요. 이틀은 너무 가혹하지만, 12월엔 노력하겠습니다요~^^
(유행어의 반열에 오르기엔 너무 구린가..;;)

에로이카 2006-11-28 0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게 철지난 유행어였군요.. ㅎㅎ.. 요즘 엄청 바쁘신가 봐요. 바쁜 게 좋은 성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랍니다. ^^

2006-12-05 14: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12-06 07: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님, 무슨 말씀을요.. 사신 날보다 사실 날이 더 많으실텐데.. ㅎㅎ

후마니타스 2007-06-20 1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안녕하세요
도서출판 후마니타스 입니다.
도서에 관한 리뷰를 출판사 홈페이지로 담아갑니다.
미리 허락을 얻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글이 다른곳에 옮겨지는걸 원하지 않으신다면 홈페이지에 글을 남겨주세요.
확인즉시 삭제하도록 하겠습니다.
홈페이지 주소는
http://www.humanitasbook.co.kr
입니다.
건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