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대안없는 자본주의
요아힘 히르쉬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1996년 3월
평점 :
절판
발전국가 이후 한국의 국가를 무엇으로 규정할 수 있을까에 대한 물음은 국가에 대한 근본적, 이론적 고찰들을 살펴보게 하였다. 봅 제솝의 최근 저작들을 두루 살펴보면서 제솝의 전략관계적 국가이론, 슘페터적 근로 탈민족 체제 (SWPR), 지식기반경제 (KBE) 등에 대한 그의 통찰에 무척 감탄하였다. 물론 약간의 불만과 의구심도 동반되었다. 나의 독서는 보통 아주 훌륭한 책을 읽었을 때 그 책에서의 주장이 주로 의지하고 있는 참고문헌들을 찾아보는 것으로 이어진다. (물론 예외도 있다. 맑스의 <<자본>>이나 <<요강>>을 읽고서는 그럴 수 없었다.) 제솝을 읽으면서, 그의 주장이 명시적, 암묵적으로 요아힘 히르쉬 (Joachim Hirsch)의 국가이론에 의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제솝이나 히르쉬 모두 70년대 말부터 지금까지 맑스주의적 국가 이론의 한 우물을 파고 있는 사람들이다 (난 이런 종류의 미련한 인간들이 좋다).
그러나 나의 히르쉬 독서는 아주 짧게 끝날 수밖에 없었다. 1995년 이후 영어로 번역 출판된 히르쉬의 논문은 다섯 개 정도밖에 없었다. 이 책 <<대안없는 자본주의>>도 영어로는 번역되지 않았다. 이 책은 원래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직후인 1990년에 독일에서 출판되었고, 국내에서는 1996년에야 번역 출판되었다. 따라서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때 내가 기대했던 것은 그 어떤 첨단 이론이 아니라, 히르쉬의 최근 논의들과 그가 70년대에 참여했던 서독 국가도출논쟁 간의 매개고리를 더듬어 보는 것이었다. 그리고 매우 만족은 아니었지만 (이것은 번역의 탓이 크다), 상당히 괜찮은 책이었다.
이 책은 조절이론의 틀을 통해 본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적 접근을 시도하는 1부와 현실 사회주의 붕괴 이후 사회주의 정치를 살펴보는 2부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나의 본 관심은 1부에 국한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기존의 맑스주의 국가이론과 조절이론 양자를 지은이 나름대로 비판하면서 둘을 비판적으로 화해시켜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유물론적 이론화를 시도했던 1부보다는 68 혁명의 잔상과 89년 동구 몰락으로 인한 현실 사회주의에 대한 환멸 속에서 좌파 정치를 사고하는 2부가 훨씬 더 재미있고, 오늘날 이 남한 땅에서 당적 실천을 고민하는 좌파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부분이 더 많았다. 사실 2부를 읽으면서, 오래 전에 읽었던 책이 한 권 떠올랐다. 알렉스 칼리니코스의 <<역사의 복수>>. 지금 책의 내용은 거의 잊어먹었다. 그리고 또 다시 이 책을 들춰볼 일도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책을 떠올렸던 것은 “역사의 종말”이라는 나팔소리로 정점에 달했던 신자유주의적 반동과 잡다한 포스트주의들에 맞서 맑스주의와 사회주의적 실천을 옹호했다는 점에서일 것이다.
히르쉬는 자신의 사상에 투철하면서도, 자신이 참여했던 국가도출논쟁(177쪽)과 조절이론(1부 2장)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난 보통 싸움을 걸기 위해 하는 비판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자책의 뉘앙스가 들어가 있는 자아비판을, 그것이 아니라면 내부자의 비판을 신뢰한다. 히르쉬는 이러한 성찰적 비판에 기반하여 자본주의 국가에 대한 이론화를 시도한다 (1부 3, 4, 5, 6, 7, 8장). 90년에 출판된 책이기 때문에 그닥 새로운 내용이 있지는 않다. 하지만 맑스주의와 조절이론의 관점에서 바라본 국가에 대해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기본을 확인하다는 차원에서 읽어봐도 좋을 것 같다.
인터넷을 뒤져보니, 이 책 출판 이후에도 아주 최근까지 독일어로 출간된 히르쉬의 책들이 상당히 많다. 경쟁국가 (der nationale Wettbewerbsstaat), 글로벌리제이션, 유물론적 국가이론 등에 관한 책들인데, 누가 좀 다 번역 좀 해주셨으면 좋겠다.
번역은 별로 안 좋다. 특히, 1, 2, 3장은 참 안 좋다. 역자가 “연관”이라는 말을 시도 때도 없이 즐겨 쓰는데, 이게 도대체 뭘 뜻하는 지 전혀 감이 안 온다. 94-95쪽에는 “사회화 연관”, “행위연관”, “제도화 연관”, “조직 연관”이라는 말이 계속 나오고, 108-9쪽에는 “축적연관”, “조절연관”, “재생산연관”이라는 말이 나오는데, 옮긴이가 영어로든 독일어로든 이게 뭘 뜻하는 지 주를 달았어야 할 것 같다. 맞춤법도 몇 곳 틀렸고, “내전”으로 번역해야 하는 것을 “시민전쟁”으로 번역한다든가, 영어로는 “gentrification”인 것을 “지주화”로 번역한 것은 오역이다. 또 자본의 유기적 구성을 v/c (100쪽)라고 했는데, c/v라고 해야 한다. 번역이 이처럼 문제가 좀 있긴 하지만, 영어로도 번역 안 된 책을 한국어로 읽게 해준 출판사와 옮긴이에게는 감사한다. 그런데 이왕 번역출판할 거면 신경 좀 더 쓰시지… 명예회복을 위해 히르쉬의 최근 책들을 번역해서 내는 것은 어떠실지…? ^^
같이 읽으면 좋은 책 / 글
1. 쏠 피치오토, 존 홀로웨이 엮음, <<국가와 자본>> (청사).
2. 김호기, 김영범, 김정훈 엮음, <<포스트포드주의와 신보수주의의 미래>> (한울)에 실린 히르쉬의 글 두 개.
3. 요아힘 히르쉬, “NGO, 국가의 새로운 외피: 비정부기구와 국가의 국제화”. <<월간 사회운동>> 2005년 5, 6월 (http://journal.pssp.org/bbs/view.php?board=journal&id=1250).
Ps.
꽤 오랜 동안 난 스스로를 온건한 사민주의자로 생각했었다. 또 요즘같은 세상에 내용없이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를 가르는 것은 넌센스라고 생각했다. 이런 이분법을 견지하는 이들은 어느 편에 서건 간에 보통의 경우, 스웨덴 모델과 러시아 모델을 대립시키기 일쑤였다. 또 100여년 전 각 나라에 아주 특수한 상황에서 발생되었던 상황이 자기가 살아 있을 동안, 혹은 죽은 다음이라도 언제건 (어쨌든 미래에 이 한국에서) 일어날 것처럼 떠드는 것도 못 마땅했다. 그랬는데, 이 책의 한 구절을 읽으면서 전깃불이 빤짝하고 들어오는 느낌이 들었다. 길지만 인용한다.
“역사는 이성적인 사회주의 사회가 자본주의적 생산력 수준을 기초로 해서도 부르주아 사회의 제도적 수단들인 정당, 국가, 관료제 등을 유지시키고도 실현될 수 없다는 것을 인상 깊게 보여주고 있다 [번역 참 맘에 안 든다]. 사회를 지배하는 생산관계와 지배관계를 변혁하려 한다면 그것은 기존의 지배적인 생산, 지배관계를 공고히 하려고 하는 제도적 형태들 내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해방적 사회변혁은 혁명가의 지도나 국가 폭력에 의해서는 관철될 수 없다. 국가에 의해 사회가 해방될 수 있다라는 생각은 환상에 불과하다. 지배기구로서의 국가는 사회적 권력관계의 중심 또는 근원이 아니라 단지 표상이다. 국가 정치가 해방으로의 발전을 지원하거나 용이하게는 할 수 있지만 그 토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164).
이런 말을 비단 히르쉬만 했을까? 아마 아닐 것이다. 발리바르도 내가 그의 글을 챙겨보던 옛날에 이런 말을 했을터이고, 다른 사람들도 이런 말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오늘 문득 이 구절을 읽다가 온건한 사민주의자로서의 스스로의 정체성 규정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다.
문: 나는 왜 사민주의자인가?
답: 사민주의자는 신자유주의에 반대하며, 신자유주의를 반대하는 좌파 정당을 지지한다. 신자유주의적 질서가 강요되는 세상에서 사회주의와 사민주의를 구분하는 것은 그것이 정치적으로 드러나는 데에 있어 아무 차이가 없기 때문에 헛된 공상에 기반한 말장난일 뿐이다.
이것이 이전에 내가 갖고 있던 생각이다. 그러다 이 구절을 읽으며 퍼뜩 든 생각은 이것이었다.
1. 사회민주주의자에게는 좌파 정당의 국가권력 획득이 목표이다.
2. 사회주의자에게 좌파 정당의 국가권력 획득은 결코 목표가 아니라, 좌파 정치를 위한 기본이다. 이는 “해방으로의 발전을 지원하거나 용이하게는 할 수 있지만 그 토대를 만들어주지는 못한다.”
3. 그 토대를 만들기 위해 러시아의 볼셰비키들이 두었던 무리수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다. 부르주아 반혁명의 방지라는 미명 하에 (물론 난 그들의 충심을 믿는다) 노동자당의 이름으로 노동자를 착취했던 역사의 시작이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한시적으로 도입된 것이었지만, 고난의 행군 끝에 도달한 곳은 이제 쫌 살만한 세상이 아니라, 또 다른 야만이었다. 따라서 러시아의 혁명 경로는 짜르 치하의 야만에서 스탈린 치하의 야만으로, 그리고 마피아의 야만으로의 긴 노정이었다.
만약 남한의 좌파들이 혁명 / 개량, 폭력 / 비폭력, 러시아 / 스웨덴의 이분법에 의지하지 않고 이런 식으로 사회주의와 사회민주주의의 구분을 사용한다면 어떨까? 그렇다면 사회민주주의자 별로 없겠지… 하긴 말은 쉽지만, 그것을 내용있는 실천으로 바꿔내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일 것이다. (서평 쓰다가 든 딴 생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