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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로 읽는 세기말의 역사 - 밀레니엄총서 1
신채호 지음 / 바다출판사 / 1998년 5월
평점 :
품절
어린 시절 나의 우상이었던 가수는 오랜만에 들고온 앨범에서 노래했다. “언제나 영화처럼.” 지금은 끊임없이 반복되던 이 구절 외의 다른 가사들은 하나도 기억이 안 난다. 가사가 끊임없이 반복되어도 노래는 끝나기 마련이다. 사실 “언제나 영화처럼” 살고 싶다는 꿈은 영화도 노래처럼 결국은 끝나고 만다는 사실에 기반해있다. 내게 좋은 영화와 그렇지 않은 영화의 기준은 아주 단순하다. 영화가 끝나고, 음악이 흘러나오면서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떠나지 못하는 영화는 좋은 영화고, 그렇지 않은 영화는 그냥 그런 영화다.
이 책에는 아주 오래전 극장에 그렇게 끝까지 앉아 모든 게 다 끝나고 환해지는 조명에 서둘러 눈물을 훔쳐야 했던 추억의 명화들이 나온다. 그러나 영화에 관해 말하지만, 영화평론서가 아니다. 사실 난 영화평론가가 쓴 영화평론들은 별로 재미가 없다. 그들은 영화의 여러 장치, 각본의 꼼꼼함, 배우들의 연기에 관해 평하고, 때로는 친분을 통해서 알게 되었을 뒷얘기들을 전한다. 이 책에 그런 얘기는 없다. 심지어 어떨 때 영화란 그저 얘기의 삽화일 뿐이다.
또 영화평론들은 스포일러거나 반대로 스포일러가 되지 않기 위해 노력한 것이 역력하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든다. 영화평론은 영화에 대해 말해야 하지만, 그 짜고치는 고스톱판에 엉덩이를 밀어넣으려면 영화의 중요한 부분에 대해서는 말하면 안된다.
이 책은 독자들의 궁금증을 자아내는 CF성 평론이 아니다. 때로는 스포일러일 수는 있어도 간략한 줄거리만을 전한다. 결코 영화에 대해 주제넘게 떠들지 않는다. 그것은 영화평론가들의 몫일 뿐… 그저 영화가 보여준 만큼을 갖고 세상의 얘기를 전한다. 이 책은 역사책이다. 열한개의 영화가 다루어지고, 그 영화의 배경이 되었던 역사를 담담하고 간결하게, 하지만 깊이있게 보여준다. <아버지의 이름으로>, <푸른연>, <로메로>,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포레스트 검프>,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간디>, <더 파워 오브 원>,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 <인도차이나>, <오피셜 스토리>.
<포레스트 검프>를 제외하고는 다 묵직한 영화들이다. 그리고 후까시 잡기 좋아하는 감독들의 영화와 달리 얘기가 꼬여있지 않고, 말하는 바가 명확한 영화들이다. 지배와 착취, 그리고 그로 인한 희생과 그에 대한 저항의 얘기들이다. 이런 숙연한 영화들을 떠올린다면, “언제나 영화처럼”이라고 노래할 수는 없다. 그래서 지은이는 말한다. “영화는 끝났다. 그러나 역사는 계속되고 있다!”고.
<파워 오브 원>은 주인공이 ‘아프리카너’는 아니지만, 어쨌든 백인이라는 당시 나름대로의 삐딱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참 재미있게 본 영화였다. 수용소에서주인공 PK의 지휘에 맞춰 수천명의 흑인들이 노래하는 씬은 지금도 마음에 강렬하게 남아있다. “아쌈멤마 얌멤메 아쌈멤마 얌멤메, 림보람보 림보람보 아리예 아리예” 뭐 이런 가사의 그 노래는 무슨 뜻인지 전혀 모르지만 그 자체로 영혼의 울림이었다. 영화는 PK가 옥스포드대로의 진학을 포기하고, 흑인해방운동에 뛰어든다는 내용으로 끝이 난다. 이 책은 그 이후 만델라의 당선까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고단한 역사를 돌아본다. 역사는 영화가 끝난 후에도 계속되지만, 그 영화의 시작 전에도 계속되고 있었다. 이 영화를 보기 전까지는 영국인과 ‘아프리카너’, 서로 다른 두 백인 집단 간의 갈등에 대해 들어본 바도 없었는데, 이 책은 그 갈등의 역사적 기원도 자본주의 세계경제의 초기 팽창과정과의 연관 속에서 잘 보여주고 있다.
영화들은 종종 십여년의 세월을 건너뛴다. 아이가 어른이 되고, 어른이 노인이 된다. 이 책은 그 건너뛴 십여년에 실제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보여준다. <인도차이나>에서 의문의 죽음을 당한 장 밥티스트 옆에 있던 갓난 아이 에티엔느는 다섯살 때 할머니를 따라 프랑스로 가는데, 10년 후 다 큰 청년이 되어 등장한다. 그리고는 제네바 협정에 베트민 정부 대표로 온 생모 까미유를 지척에 두고도 만나지 않는다. 이 책의 지은이는 영화에서 건너뛰어버린 시절의 살아있는 역사를 들려준다. 나치 독일에 유린당한 주권과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끈질긴 저항을 펼쳤던 프랑스라 할지라도, 2차대전 종전 이후까지 인도차이나에서는 여전히 제국주의의 면모를 바꾸지 않았다. 마치 오늘날의 이스라엘처럼 당시의 프랑스는 자신의 피해에 민감하고, 가해에 무감한 양심마비 제국주의 국가였던 것이다. 그러나 파리에서는 베트남에 대한 더러운 전쟁을 중지하라는 시위가 벌어졌고,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프랑스군은 ‘디엔비엔푸 최후 결전’에서 아작이 나고 베트민에 항복하고 만다.
한편, 1950년대 말 흐루시초프 시대에 기숙사 생활을 하던 세 명의 젊은 여성 노동자들의 얘기로 시작하는 <모스크바는 눈물을 믿지 않는다>는 20년 정도의 세월을 건너뛰고 이들이 어떤 모습으로 중년을 맞이하는 지를 보여준다. 일찌감치 사람좋은 농부와 결혼했던 이는 나름 안정적인 생활을 하게 되었고, 젊은 시절 수영영웅이었던 남편은 알콜 중독자가 되었고, 미혼모였던 이는 신분상승의 바늘구멍을 뚫고 공장의 관리자가 된다. 영화에서 생략된 이후의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의 시기는 사회주의 혁명에 대한 환멸의 연속이었다. 생활고에 시달리던 노동자들은 부업을 해야 했고, 결근이 잦았으며, 근무를 땡땡이치고 상점에 갔다. 모든 소비재가 부족했지만, 보드카는 언제나 풍족했고 알콜 중독이 큰 사회문제로 등장했다. 이 깝깝한 사회주의 혁명의 후퇴 과정을 지은이는 담담하게 서술한다.
점심을 먹고 저녁을 먹을 때까지 이 책만 봤다. 원래 한 챕터만 보려고 했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반나절만에 다 봤다. 마침 몇몇 영화들은 영화음악 씨디를 갖고 있어서, <원스 어폰 어 타임>이나 <포레스트 검프>를 틀어놓고 그 영화와 관련된 역사얘기를 보니, 영화도, 음악도, 글도 근사했다. 그러고 보니 괜찮은 올드팝들로 채워져있는 <포레스트 검프> 씨디는 아주 오래동안 듣지 않았었다. 5년 전 크리스마스 즈음에 고속도로에서 사고가 났었는데, 그 때 운전할 때 들었던 음악이었다. 영화음악 씨디가 없는 경우에는 비슷한 분위기의 음악을 들었다. <천지인>을 들으면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을 읽었는데, 역시나, 눈시울을 붉힐 수밖에 없었다. 마지막 장인 <오피셜 스토리>를 읽을 때에는다소 뜬금없긴 했지만, 내가 갖고 있는 유일한 (?, 아마도;;) 스페인어 씨디인 <부에나 비스타 소셜 클럽>을 틀어놓았다.
어제, 그제, 연이틀 술먹고, 오늘은 반나절 동안 이 책만 봤다. 한량같이 지내는 와중에 이 책이라도 보게 되어서 다행이었다. 사실 1998년에 출판된 책이고, 제목도 근시안적이기 이를 데 없는 “세기말”의 역사고, 별로 잘 팔리지도 않는 것 같은데, 알맹이는 꽉 차 있다. 이 책의 부제는 “죽음과 사랑, 억압과 희망의 20세기 이야기”인데, 이 부제가 책 내용을 더 잘 반영하는 것 같다. 지은이가 뭐하시는 분인 지 모르겠지만, 부디 다른 영화 얘기들도 좀 이렇게 써주시라… 겉만 삐까리번쩍한 영화평론들은 이제 쫌 짜증나고 지겹다… (2006. 11. 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