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동의 힘 - 1870년 이후의 노동자운동과 세계화
비버리 실버 지음, 백승욱.안정옥.윤상우 옮김 / 그린비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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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오바니 아리기는 The Long Twentieth Century 서문에서 "긴 20세기"의 노동운동에 대해서는 그 책 안에서 다루지 못했음을 말한 바 있다. 그 때 지적된 노동운동의 공백을 이 책이 메꾸고 있다고 이해해도 괜찮을 것 같다.  

 

2003년에 미국에서 처음 출판된 이 책은 1984년에 아리기와의 공저로 출판된 논문(“Labor Movements and Capital Migration: The United States and Western Europe in World-Historical Perspective”)에 그 기원을 두고 있다. 곧 20년 연구의 결실이다. 존경스러우면서도 부러운 일이다. 그 논문에서 아리기와 이 책의 저자인 비벌리 실버는 1960-70년대 유럽을 휩쓴 일련의 노동소요들 (labor unrests)은 193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강력한 힘을 발휘했던 미국의 노동소요들과 닮아 있다는 것 (Déjà Vu)을, 또 이러한 유사성은 미국 자본의 초국적화에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아울러, 운동의 강도(strength)나 성공 여부는 운동 세력의 이념적 급진성과는 별 관련이 없다는 주장을 한다.

 

이 책은 그 논문의 연장이다. 포괄대상 국가가 미국과 유럽 뿐만 아니라, 남미 (아르헨티나, 브라질), 남아프리카공화국, 한국 (일본, 중국) 등에까지 확장되었을 뿐만 아니라, 자동차, 섬유, 서비스, 운수 산업별로 노동소요가 어떻게 전개되어 왔는지 기술된다. 또 개념적 세련화를 통해 여러가지 유형화(typology)가 시도된다 (공간 / 기술·조직 /  제품 / 금융 재정립 (fix), 연합적 힘 / 구조적 힘 (시장교섭력 / 작업장교섭력), 맑스적 유형의 운동과 폴라니적 유형의 운동, etc.). 이 개념들 중에서 연합적 / 구조적 힘의 구분을 제외하고는, 이 책에서 처음 선보이는 것들이다. 비록 재정립 (fix)의 경우는 데이빗 하비의 개념에 기반해 있고, 맑스적 유형과 폴라니적 유형의 운동 구분은 이념형적 범주이긴 하지만, 저자는 이 책을 통해 이 개념들이 어떻게 노동소요의 역사적 전개를 설명하는 데에 있어 유용하게 쓰일 수 있는지 보여준다.

  

공간재정립을 다루는 2장에서는 자동차 산업을 중심으로, 노동의 소요에 맞서 생산설비를 해외로 이전하게 됨에 따라, 새로이 이전된 곳에서도 강력한 노동운동이 발생하게 됨을 보여준다. 일본의 자동차 산업은 예외로 취급되는데, 그 이유를 일본에서는 노동소요가 자동차산업이 발전하기 직전에 한번 전 사회를 휩쓸었고, 이에 따라 자본 측에서는 기술·조직 재정립의 일환으로 유효한 노동통제 전략 (산업평화와 평생고용 간의 교환, 적기생산방식, 하청 네트워크의 발달 등)을 수립하게 된 데에서 찾는다.

 

제품재정립을 주로 다루는 3장에서는 20세기 동안 전지구적 규모에서 펼쳐진 자동차산업 노동소요의 확산을 그 이전의 섬유산업의 노동소요 확산과 그 이후의 운수, 교육 산업에서 발생한 노동 소요의 전지구적 확산과 비교한다.

 

4장에서는 노동운동의 전지구적 전개가 세계정치의 제 측면(헤게모니와 세계전쟁)과 어떻게 관련되어 이루어졌는지가 살펴지고 있다. 지은이는 여기에서 세계전쟁의 동학은 전투적 노동운동의 세계적 폭발을 전쟁 이후 시기에 집중시키고 있는 데에 반해, 제품주기 동학과 결합된 일련의 공간 재정립은 소요의 진앙을 여러 시기에 걸쳐 전세계적으로 분산시키는 효과를 갖고 있다고 주장한다.

 

5장에서는 보호주의와 함께 기술재정립과 제품재정립이 일련의 기술혁신이 집중되어 있는 고소득 국가에 독점이윤을 보장하고, 저소득 국가들을 이로부터 배제함으로써 세계적인 남북분할 (North-South divide)을 재생산하는 데에 반하여, 산업재배치를 통한 공간재정립은 (산업 일반의 주변부화에도 불구하고,) 이 남북분할을 침식시킨다는 일반적인 경향을 앞서의 분석으로부터 도출한다. 그렇다면 금융재정립의 역할은 무엇인가? 저자는 현재의 금융화가 전례가 없는 일이 아님 (19세기 후-20세기 초)을 상기시키며, 금융재정립이 노동의 상품화와 국가의 탈사회화, 노동친화적 국제체제의 붕괴,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한 탄압을 수반한다고 주장한다 [cf. 레비, 뒤메닐, 자본의 반격]. 하지만 또 이는 맑스적 유형의 운동과 폴라니적 유형의 운동 모두의 출현을 야기하며, 그 규모나 속도에 있어 전례가 없는 산업화를 겪고 있는 중국이나, 전세계적으로 갈수록 비중이 커지는 운수, 교육, 서비스 산업 등에서 대규모 노동소요가 터질 가능성이 존재한다고 다소 희망섞인 진단을 내놓고 있다.

 

요약하면, 지은이가 살펴보고 있는 1870년 이후부터 지금까지 자본은 언제나 전투적 노동운동에 맞서, 네 가지 재정립 기제를 통해 위기 해소를 도모하여왔으나, 결코 그 역사적 위기들에 대한 궁극적 해결을 하는 데에는 실패해왔고, 문제를 지연시키면서 더 키워 왔다는 것이고, 이에 따라 노동운동의 폭발 가능성 역시 더 커져 왔다는 것이다.

 

좋은 책이다. 약간의 문제제기를 해보면 다음과 같다. 좋은 분류 (typology)는 그 분류를 통해 포착하고자 하는 대상 전체를 가능한 한 넓게 포괄해야 하며, 또 가능한한 범주간 상호배타성이 관철되어야 한다. 네 가지 재정립들은 이런 측면에서 약간의 곤란함을 유발한다. 곧, 그 안에 포함되지 않는 (위기의 타개를 위한) 자본의 대 노동전략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도 언급되지만, 자본의 역사만큼이나 오래된 이주노동자들을 어떤 재정립으로 설명할 수 있는가? (자본을 수출하는 대신, 노동을 수입함으로써 이루어진다는 측면에서) 공간 재정립? 아니면 조직재정립? 국가의 보호주의 무역정책은 무슨 재정립인가?

 

또, 모든 공간재정립은 자본의 이동이라고 하더라도, 모든 자본이동이 다 공간재정립은 아닌 것이다. (물론 지은이는 모든 자본이동이 공간재정립이라고 주장하지 않는다.) 곧 자본이 이동하는 데에는 노동의 저항에서만 이유를 찾을 수 없다. 얼마전 현대자동차가 미국 앨러배마에 현지 공장을 세운 바 있는데, 이것을 자본의 공간 재정립으로 볼 수는 없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이는 무역장벽 회피와 (한미 FTA 찬성 논자들이 좋아하는) 미국의 내수 시장선점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 자본의 중국 진출은 공간재정립으로 설명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노동의 저항은 그것의 결정에 있어 여러 개 중 하나의 원인일 수는 있어도 유일한 요소는 아니다. 

 

또 다른 아쉬움 하나는 설명 변수로서 국가에 대한 경시이다. 물론 한 책이 모든 것을 다룰 수도 없고, 강조에 차이가 있는 것은 당연하다. 기존에 나온 노동운동이나 노동체제 관련 분석에서 국가는 언제나 중심범주에 속하였다. 이 책은 그렇지 않다. 따라서 기존의 국가중심 분석에서는 보여주지 못한 다른 점들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렇다고 두 가지 분석이 양립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 점에서 본다면, 이 책은 국내에서 이루어진 기존의 노동운동 / 노동체제에 대한 (일국중심적) 연구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넌지시 보여주고 있다. 기존의 일국중심적 연구가 잘못 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양자가 보완되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다만 그 양자의 결합 방식은 내부와 외부의 병치가 아니라, 전체와 부분의 동시적 조망이어야 한다. 21세기 초반 한국 노동운동이 전세계적 흐름인 신자유주의에 의해 어떻게 규정되는가를 넘어서, 또 다른 나라 노동운동과 무엇이 같고 무엇이 다른지를 넘어서, 지금 남한에서 투쟁하는 노동자들이 어떻게 신자유주의와 싸우고, 다른 외국의 노동운동과 연대하며, 또 이 투쟁들이 향후 노동에 대한 신자유주의의 반격에 영향을 끼치는지가 보여져야 한다. 그래야만 노동의 힘은 온전히 보여질 수 있을 것이다.

 

같이 읽으면 좋은 책

데이빗 하비. [신제국주의]

도미니크 레비 / 제라르 뒤메닐. [자본의 반격]

비벌리 실버 / 지오바니 아리기. "남과 북의 노동자". [미국의 세기는 끝났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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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9-01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 얼핏 보니 재밌고 어려워요. 일단 추천 먼저^^ 저녁때 집에 가서 찬찬히 읽어봐야지.

에로이카 2006-09-01 23: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제가 다시 읽어봐도 이 리뷰는 참 재미없네요. 산만하고... 불친절하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추천해주신 나어릴때님 외 세 분께 감사드립니다... 꾸벅^^

2006-09-05 10:3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06-09-05 10:38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동의 저항
이종래 지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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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이종래 선생이 1999년부터 2003년까지 여러 곳에 발표했던 논문들을 수정 보완하여 모아 책이다. 원래 발표 시점에서 다소 시간이 흘러서 출판되었고 (2005 11), 출판을 전후하여 노동운동진영에서 발생한 여러 가지 일들(일부 민주노총 간부들의 수뢰 사건, 민주노총 위원장의 사임, 한미 FTA 반대투쟁, 금속연맹의 산별전환 투표 가결 ) 책에 반영될 없었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책의 문제의식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이는 무엇보다 97 노동체제라 칭해지는 경제위기 이후의 노동 현실이 이러저러한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크게 바뀌지 않았기 때문임과 동시에, 언론의 일회성 보도를 뛰어넘는 지은이의 학문적 통찰, 그리고 거기에 담겨진 현장의 치열한 문제 의식 때문인 같다.

 

얼마전 “87 체제 “97 체제 비교하는 담론이 유행하였는데, 저자는 2장에서 이러한 식의 용법을 처음 사용했던노동체제논의들을 살펴본다. 여기에서 지은이는 송호근의이념형적 접근 노중기의역사주의적 맥락 추적 동시에 고려한 결과로서 장홍근의 연구를 높이 평가하고 있다 (47-50). 장홍근은 1987 노동체제 형성 이전의배제적 국가권위주의 1988-96년을 거치면서배제적 시장권위주의 이행하였으며, 앞으로는 국가의 노동통제전략이 배제전략에서 제한적인 포섭전략으로 바뀔 가능성이 많다고 본다. 지은이는 장홍근의 이러한 주장을 임영일의 전망과 대비시키는데, 임영일에 따르면 1987 노동체제가 온존 강화할 가능성이나 의사코포라티즘으로 전환할 가능성이, 사회조합주의로의 전환이나 노조운동의 재급진화 가능성보다 높다고 전망한다. (임영일의 논의가 장홍근의 논의와 전적으로 상반되는 것은 아니다.) 어쨌든 노동체제의 전환가능성 논의들의 초점은 노동운동이 체제내화 되면서 제도화될 가능성에 맞춰져 있다.    

 

실업 (3), 노동정책 (4), 노사관계(5) 전개와 변화를 살펴보는 2부는 지은이 나름대로 경제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에서 이루어진 노동체제 변화에 대한 고찰을 담고 있다. 5장을 통해 지은이 이종래 선생이 펼치는 주장은 무척 인상적이다. 중소기업과 비정규직 노동자들을 위해 버는 대기업과 정규직 노동자들이 양보해야 한다는 자본과 정권의 이데올로기 공세에 맞서, 저자는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의 소득 차이의 원인을 대기업/정규직의 강성노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찾는다. 일단 대기업과 정규직의 노조가 역할을 제대로 하여 임금이 높은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먼저, 대기업과 중소기업 노동자 간의 임금 격차는 중소기업이 하청을 통해 대기업에 위계적으로 편입되어 있는 기업 지배 의존 구조로 인하여 야기된 기업지불능력의 차이에서 찾아져야 한다: “경제위기 이후 임노동관계는 기업의 지불능력과 생산연관성에 강한 영향을 받으면서 기업의 수직적 위계구조에 따라 재편되는 양상을 보인다” (134). 그리고 정규직과 비정규직 임금 격차 또한 1987 이전의 노동체제의 특징인저임금, 장시간 노동 임금비용의 부담증가를 장시간 노동으로 상쇄하는 자본합리화 방식에 따라 저임금과 장시간 노동의 대상을 분리 - (중소기업 / 비정규직의) 저임금 노동과 (대기업 / 정규직의) 장시간 노동으로 분리  시킨 현실에서 찾고 있다 (146). 원청 대기업의 눈치를 봐야하는 중소기업에 고용된 노동자들은 저임금에도 불구하고, 저임금을 잔업특근을 통해 만회할 기회가 상대적으로 소득이 높은 대기업 노동자들 만큼 없다는 것이다.

 

노동자들의 투표행태를 다룬 6장과, 2003 1 9 손배 가압류에 저항하며 이른 새벽 자신의 몸을 불살랐던 두산중공업 배달호 열사가 촉발했던 투쟁에 대한 사례 연구인 7장도 인상적이었다. 분석적 통찰 와중에도 현장의 문제의식이 살아 있는훌륭한 책이다.

 

Ps.

마지막 장을 읽다 보니, 너무나 당연히 얼마전 경찰에 의해 무참히 살해당한 하중근 열사와, 부당 노동행위를 일삼다가, 지금쯤은 머리속으로 주판알 굴리면서 손배 가압류를 때려야 , 때리면 얼마나 때려야 할지 여론의 추이를 살피고 있을 포스코 사측이 생각났다. 이 일보다 얼마전, 추악한 집안 싸움을 법정까지 끌고가서 죄보다 가벼운 벌을 받은 두산 그룹 오너 일가 박씨 형제들도 생각났다. 경제 위기 이후 김대중 정부에 의해 추진된 공기업 민영화 정책에 따라 숱한 의혹과 더불어 한국중공업을 인수한 , 블랙리스트 만들어 가며 노동자들 차등 관리하고, 정리해고와 손배 가압류를 통해 노조 무력화 정책에 나섰던 두산 중공업에서 힘들게 투쟁하던 노동자들은 패배했다. 몇달이 지난 겨울 추운 새벽 배달호 열사는 혼자 자신의 몸에 불을 붙이는 극한적 행위를 수밖에 없었다. 배달호 열사는 포스코 건설 노동자들 , 명의 미래이다. 절박한 심정으로 투쟁에 나섰다 경찰을 피해 포스코 건물 안으로 도망갈 수밖에 없었던 이들은 대량 구속되었고, 이에 항의하는 집회에 나갔던 노동자 명이 경찰에게 그대로 맞아죽었다. 이상 이들을 토끼 몰지 말라. 귀막고 눈가리고 있는 청와대와 보수언론은 이들의 정당한, 절박한 요구를 이상 외면하지 말라! 그리고 이상 죽이지 말라!!!!

 

 

 

오자:

55: 가지진다고 -> 가진다고

102: 자져왔다는 -> 가져왔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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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8-21 10: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waits 2006-08-21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로이카님 리뷰에 댓글 한 줄이라도 달라믄 공부해야할 것 같아요. 그래도, 마지막에 덧붙인 말들이 너무 감동적인 관계로 뻔뻔히. 투쟁하는 노동자만큼 열사를 가슴에 담은 학자도 아름답네요.

에로이카 2006-08-22 03: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아휴.. 뻔뻔하긴요... 사실 뻔뻔함은, 나어릴때님 페이퍼 보면서, 제가 늘 하는 생각인걸요.. 님 페이퍼 보면서 제가 얼마나 반성 많이 하는데요.. 나도 나어릴때님처럼 열심히 살아야지 ^^, 하고 지금으로서는 기약없는 다짐도 해보고... 여름 막바지, 지치지 말고.. 건강하게 지내세요.

님... 아.. 그러시군요... 이 책이 하종강 선생님 책처럼 독자들에게 친절한 책은 아니예요. 마구 재미있지는 않다는 얘기지요... 하지만 전 이 책을 보면서, 공부를 하고 글을 쓰려면, 이런 마음 가짐과 진정성을 늘 간직해야 하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아.. 그리고.. 무지무지 감사합니다.. ^^
 
자본의 세계화
프랑수아 셰네 지음, 서익진 옮김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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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을 처음 알게 것은 박승호 선생의 [좌파 현대자본주의론의 비판적 재구성] 통해서이다. 책에서는 셰네의 책이 소소한 이유로 비판되는 한편, 책이 제시하는 굵직한 주장은 옹호된다:  새로운 금융주도 글로벌 축적 체제하에서 금융자본의 수입은 지대 형태를 띠며 (61-64, 242), 자본은 새로운 가치와 부의 생산에서 형성되는 일차소득에 대한 실질적인잠식을 통해서 소득을 올리며 성장한다” (295).

 

책은 읽기 쉽지 않다. 이유 하나는 아마도 우리가 익숙해 있던 세계경제의 서술과 다소 다르기 때문일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우리에게 그나마 익숙한 세계경제의 서술에서 주요 행위자는 국가들이다. 그러나 셰네의 책에서 초점은 다국적 기업들에게 맞춰져 있다. 우리가 갖고 있는 대기업에 대한 인상이란, 삼성, LG, SK 같은 브랜드이거나, 이름표 목걸이를 달고 정장을 차려입은 직장인의 회사생활이거나, 끽해야 살인적 노동탄압을 일삼는 POSCO, 정경유착이나 편법 재산상속 같은 주제들이다. 그러나 책에서 다루는 대기업들의 모습은 이처럼 우리가 쉽게 접할 있는 대기업들의 모습이 아니다. 책의 초점은 다국적 기업들이 상호 쟁투를 통해 작금의 금융주도 축적 체제를 어떻게 형태짓고, 이로부터 어떻게 규정받는 지에 맞춰져 있다. 익숙하지 않은 그림이다.

 

셰네는 초국적기업이라는 대신 다국적기업이란 말을 선호하는데, 이는 보통 대기업들이 특정 국가에 의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31) [cf. 박승호 선생이 높이 평가하는 Open Marxism에서의 주장과 일치한다].  금융의 세계화’, 각국의 통화제도들과 금융시장들 간의 상호연계가 더욱 조밀하게 되는 과정은 1979 이후 미국과 영국을 필두로 주요 공업국들에서 채택되었던 자유화 탈규제 조치들의 산물이다. 결과 등장한 단일한 범세계적 금융공간은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1) 대단히 위계적. 미국의 금융제도가 다른 나라들의 금융제도를 지배. (2) 감독과 통제가 결여. (3) 시장들의 통일성은 금융운용자들에 의해서 담보.

 

셰네는 80-90년대 국제 직접투자의 성장이 미국, 유럽연합, 일본의 삼두체 (Triad) 간의 국제교차투자의 성장 힘입은 것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같은 시기에 OECD 국가들 간의 투자에서 다수를 점한 투자 형태는 바로 기존 기업들의 인수, 합병이다” (87). 이러한 추세는 세계적 차원의 양극화를 동반한다: “1980년대 후반이 되면 전세계 직접투자의 유입 총액에서 개도국이 점하는 비중은 가장 낮은 수준으로 떨어진다” (90).

 

셰네는 미샬레(Michalet) 다국적 기업 정의를 따른다: “보통 규모가 거대하며, 일국적 기반을 바탕으로 여러 나라에 걸쳐 해외 자회사를 설립하고, 세계적 차원에서 구상된 전략과 조직을 가지는 기업(또는 그룹)” (96).  그는 자본의 국제적 집적의 구현태라 있는 기업들이 어떻게(“쟁투의 공간이자 시장의 상호의존) 세계적 과점체들을 형성하는 지를 추적한다. 과정에서 산업그룹들이 상당한 수준의 금융적 운용과 국제화된 흐름들 통해 자신 내부의 연속된 금융공간의 이점 누리는 동시에, 브레턴우즈체제 이후 변동환율제가 시행된 외환 시장들에 개입하면서 (외환 투기) 금융 세계화의 능동적 주체로 활동한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끝으로, 그는 세계적으로 통합된 단일한 축적 체제는 차별화된 국민적 상황들에 의존하고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삼극체제 외부의 국가들은 일차재료의 산출국으로서의 역할이나 낮은 임금비용이 드는 해외 하청기지로서의 역할만이 부여되고, 선진국과 다국적기업들에 의해 설치된 시장 접근상의 산업적 장벽들의 존재로 인해 주변부 국가들이 고부가가치 산업으로 이전하기란 무척 힘들다.

 

역자서문에서 역자는 책의 관점에 입각하여 다국적 기업으로서 한국의 재벌을 분석해야 필요를 제기한다. 백번 지당한 말씀이다. 사실 다국적 기업으로서 재벌의 행태는 앞에서 언급한 우리가 갖고 있는 재벌의 이미지들에 반영되지 않은 일종의 blind spot이다. 우리가 봐야 것은 재벌의 글로벌 브랜드 이면에서 벌어지는 것들이다. 세계적 과점체로서 쟁투의 공간에 어떻게 참여하는지, 와중에 금융 운용을 어떻게 하며, 국가와 어떻게 관계 맺는지 하는 것들이 그것이다. 역자의 차후 작업들이 기대된다.

 

몇가지 오역들을 지적하자면,

1.       조세천국 (62, 218). 이는 조세도피처 (tax haven) 명확한 오역이다. haven heaven으로 읽었기 때문이다. [2009. 6. 24 수정: 나중에 알고 보니, 이것은 오역이 아니다. 조세도피처를 불어로  paradis fiscaux라고 한다. 이를 한국말로 직역하면, 조세천국이다. 하지만 이 말의 영역어는 tax haven이 맞다. 간혹 직역해서 fiscal paradise라고도 쓰는 것 같긴 한데... 이럴 경우는 한국말로 뭐라 옮기는 게 맞는 건가? 어쨌든 조세천국이라는 번역어가 tax haven의 오역이라는 나의 애초의 지적은 잘못된 것이다.]

 

2.       똑같은 개념이 "세계체제" (41, 42, 296), "세계-체계" (292), "세계시스템" 여러 번역어로 쓰이는데, "세계체계"로 통일하는 좋겠다. 덧붙여, “경제-세계(economy-world)” (265)라는 말도 나오는데, 이는 월러스틴의 세계경제(world-economy) 불역어인 économie-monde 잘못 옮긴 것이다. “세계경제 해야 맞다.

3.       101쪽을 보면 인용구 뒤에 “(강조는 원저)” 라고 되어 있는데, 정작 강조가 되어 있다.

4.       268 1-2” 그림 1-2” 바꿔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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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aits 2006-08-08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와, 디게 어렵네요. 그냥 보이는 것만 봐도 헷갈리는데 이면까지 봐야한다면... 흡. 리뷰 읽는 것도 어려운데, 이런 책을 보시는 에로이카님. 심히 존경스럽습니다요...^^;;

에로이카 2006-08-08 03: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사실 좀 지루해요... 허벅지 찌르면서 봤다니까요... ^^

balmas 2006-08-08 04: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 책 읽으셨군요. 저는 예전에 이 책하고 [금융의 세계화] 사서 논문 한 두편 보고, 나중에 더 봐야지 하고는 지금까지 못읽고 있답니다. ^^
기회가 되면 다시 읽어봐야 하는데, 통 시간이 안나네요.
(변명 아닌 변명 ...)

에로이카 2006-08-08 04: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발마스님, 저도 그 두 권 사서 안 읽고 책꽂이에 꽂아놓고, 계속 눈길 피하다가... 주말에 짬을 내어 한 권만 급히 읽었어요... 약간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이 책이 94년에 처음 나온 것을 98년에 증보한 것이기 때문에, 얼마전 프랑스를 휩쓸었던 대규모 사회운동도, 또 부시 집권 이후 테러와의 전쟁이나 엄청나게 불어난 미국의 재정적자도, 연일 치솟는 유가도 다루어지고 있지 않다는 점이예요. 이러한 변화를 다루려면, 단순한 개정증보만으로는 안될 것 갖고, 누가 동일한 문제의식과 주제를 갖고 변화된 상황을 바라보는 새 책을 써야하지 않을까 싶어요.

balmas 2006-08-08 0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번 찾아보면 관련된 책들이 벌써 나와 있을지도 모르겠네요. :-)

에로이카 2006-08-08 04: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혹시 아시거든 추천바랍니다..:-)

에로이카 2007-06-14 14: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http://www.isj.org.uk/index.php4?id=43&issue=102
2004년 세계 사회포럼에서 발표되었던 셰네의 글.
 
미-래의 맑스주의 클리나멘 총서 3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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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래의 맑스주의>>는 그의 이전 저작인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어 그 맛을 한 번 본 이들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맛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본 국물맛이 같다고, 이 책이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했던 것과 다름없는 얘기를 되풀이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넘어서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책에 겨누어진 비판들에 대한 이진경의 대답들을 담고 있다.

 

1년 전 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었다. 분명 처음 그 책을 보았을 때의 감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래의 맑스주의>>는 결코 지식인의 자기과시적 저작이라 폄하될 수 없는 읽고 배울 게 많은 책이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었다면, 이 책은 더 쉽게 읽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꼭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략 비슷한 얘기를 이 책에서 보다 심도 깊게 한다고 해야 할지재미로만 따지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더 나았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보고 재미있었던 이들이나, 반대로 의구심을 가졌던 이들이 본다면 좋을 듯 싶다. 이 서평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쏟아진 의혹의 시선에 대한 이진경의 변론(1, 2)을 먼저 살펴보고, 이 책에서 하는 새로운 이야기들(3, 4)을 본 후, 마지막으로 이진경의 내부와 외부의 구분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5).

 

 

1. 노동가치론 비판 / 착취의 재정의 / 화폐 허무주의

 

저자에 따르면, 맑스의 비판해체’ (82)이며, 비판대상의 장점을 최대화하여 대결하는 최대주의적방법 (83)이며, ‘몰입비판’, ‘변환을 반복하여 통과하는 과정(84)이며, 비판대상의 내부에서 외부를 창출해내는 것(85)이다. 그리고 맑스를 통해 비판한다는 것은 맑스의 문제설정을 (1) 오늘의 조건 위에서 다시 작동시키며, (2) 맑스 자신도 그 비판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뜻한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이진경의 비판은, 바로 이처럼 한편으로는 맑스를 노동가치론의 완성자가 아니라 해체자로 독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맑스의 잉여가치론을 오늘의 조건과 대질시킴으로써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맑스주의와 근대성>>, <<자본을 넘어선 자본>>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맑스의 잉여가치론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맑스주의로 간주하려는 모든 시도들(리카르디안 맑시스트, 분석 맑시스트, etc.)은 하나의 동일한 절차를 반복한다. 곧 자본주의 하에서의 착취를 가치론에 의존하지 않고 구성, 설명해내는 것이다. 이진경도 이 점에서 동일하다. 또 이 부분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비롯한 이전 저작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진경은 생산과정 외부에서 발생하는 착취에 주목한다 (97). 첫째, 그는 계급투쟁은 생산의 결과물 분배를 둘러싼 투쟁이 아니라, 활동능력과 활동 자체의 가치화를 둘러싼 투쟁이며, 따라서 생산과정 이전에 시작된다는 오래된 발리바르의 테제를 끌어들인다. 둘째, 화폐 형태를 취하는 노동자의 임금은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속적으로 감가됨에 따라 함께 감가된다. 셋째, 자본으로부터 가치화가 배제된 활동들 - 예컨대, “가사나 공부, 자연-환경적 조건 - 은 가치화의 조건을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지불 없이 착취된다” (98). 따라서 이제 착취는 생산과정 내부의 노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 외부에서도 활동 일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그리고 이 착취 메커니즘의 근원에는 소위 화폐 허무주의”(128-149)가 놓여 있다. 맑스는 <<자본>> 1권에서 상품 일반의 관계로부터 화폐의 특수성을 도출하고, 또 그 상품 일반의 관계로부터 인간의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으로 교환되는 자본 임노동 형식을 도출한다. 그러나 이진경에게 논리 전개의 출발점은 상품이 아니라 화폐이다. “화폐는 생산물에 상품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외적인 초월자이다. … 화폐는 상품세계의 신이다” (129). 따라서 상품의 본질은 화폐(128)이며 (맑스라면 거꾸로 화폐의 본질은 상품이라고 했겠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은 화폐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133)하고, 시장은 화폐에 의해 자동화된 권력의 메커니즘”(142)이다. 화폐 허무주의란, 모든 상품의 가치가 초월적 지위를 지닌 화폐라는 척도를 통해 측정되며,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가치들은 부정되는 것을 뜻한다. 

 

 

 

2.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 활동의 기계적 포섭과 사회적 잉여가치

 

그런데 사실, 이진경의 입장이 애매한 부분이 있다. 맑스의 잉여가치론은 (변증법적으로?) 부정되지만, 그렇다고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팽개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가 무시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맑스의 개념들 위에서 새로운 잉여가치 범주들을 추가한다. 간단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에 의한 포섭                         역사적 계기                     기계화의 계기               잉여가치

(1)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자본주의 성립 (16세기)                                  절대적 잉여가치

(2)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산업혁명 (19세기 이후)    육체노동의 기계화     상대적 잉여가치

(3) 자본에 의한 노동의 기계적 포섭     자동화 (1970년대 이후)    정신노동의 기계화     기계적 잉여가치

(4) 자본에 의한 활동의 기계적 포섭     정보화 (1970년대 이후)    결합노동의 기계화     사회적 잉여가치

 

(1), (2)는 맑스의 개념화이고, (3), (4)는 이진경의 추가적 개념화이다. 특히, (4)는 이 책에서 새로 추가된 내용이다. 이진경은 위에서 착취를 잉여가치론에 기반하지 않은 채 설명하지만, 동시에 여기서는 그 자신의 잉여가치론에 기반하여 착취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자신의 이러한 잉여가치론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반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178-184).

 

 

3. 계급과 비계급 / 프롤레타리아트와 임노동자

 

자본주의는 국가 없이 사고될 수 없다. 본원적 축적이나, 화폐, 전국시장의 창출, 절대군주의 영토 국가의 출현 등은 자본에는 국경이 없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는 국경이 있다”(206)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자본주의 형성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 고려는 부르주아지가 귀족과의 계급투쟁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성립되었다는 식의 신화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역사가들의 연구는 자본주의가 성립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서로 다른 계급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동질화되며,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계급,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계급이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비-계급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자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아주 약간의 예외를 무시하면, “‘인구법칙에 관한 장과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에서만 출현할 뿐인데, 이는 자본에 의해 축출되어 계급적 규정성을 상실한-계급을 뜻한다 (239) [Cf.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서관모 엮음 <<역사유물론의 전화>>(민맥), 특히 216-230쪽을 보라].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주어진 규정의 획득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다수적/주류적 (major) 집단이요 다수자 (majority)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규정의 부재, 척도의 부재, 혹은 수많은 이질적 규정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란 점에서 소수적(minor) 집단이요 소수자 (minority)” (240-1).

 

 

4. 탈주 / 진지전: 아나코-코뮤니즘 (Anarcho-Communism)

 

이러한 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학으로서 코뮨주의는 대항-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 정치학으로서의 사회주의와 대비된다.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를 대체하는 보편적 계급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코뮨주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 노동자나 인민을 하나의 계급으로 구성하고 통합하려는 게 아니라 계급 자체의 해소를 추구한다” (253). 이러한 의미에서 이진경이 말하는 코뮨주의는 아나코-코뮤니즘정도로 생각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의문은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두 전략 - 곧 진지전과 탈주 양자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차이의 정치학을 통해서 이진경이 말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구체적 연대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이진경은 그가 그토록 예찬했던 몰입, 비판, 변환으로서의 맑스의 비판을 따르지 않고, 어설픈 거리두기” (84)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옛날에 했고, 감옥까지 갔다 왔으니, 몰입은 할만큼 했다는 것인가? 나는 여전히 탈주보다는 진지전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본다.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저자가 뜻한 바만큼 탈주전략이 불온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진경의 탈주가 더욱더 불온해지기를, 하지만 또 동시에 진지전에 대해 다시 사고해주기를 감히 바란다. 이진경은 기동전의 시대에서 탈주의 시대로 점프하면서, 현재 진지전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과거 노동계급(LC)” 시절 자신의 실천의 구태와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가 마지막 장에서 펼치고 있는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 나오는 두 가지 종류의 콤뮨, 곧 루비와 수녀원 공동체의 대비는 약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계--존재는 공동체 내의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과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공동체 하나하나, 다른 국가들과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구성하는 국가들 하나하나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나는 타자의 타자로서, 곧 나라는 세계--존재는 또 다른 세계--존재인 타자의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루비와 수녀원은, 진지전을 펼치는 참호 속의 병사와 포탄 속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마타하리는, 민주노동당과 수유+너머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5. 외부의 중의성

 

이 책을 읽다가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이전의 저작들에서부터 무수하게 반복되는 외부라는 말이 [따라서 그것과 대칭되는 내부의 함의도]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외부는 (1) “연기적 조건” [<-> 하나의 원리로 환원 가능한 내부의 영역](40)이기도 하며, (2) “초험적 조건” [<-> 합목적적으로 조작가능한 대상](47)이기도 하고, (3) “클리나멘” [<-> 정해진 궤도를 운동하게 하는 관성] (49)이고, 또 때로는 (4) “단절의 지점, 변환의 문턱” [<-> 동일성의 관념체계]이다. (또 다른 의미들도 있을테지만, 지금 더 찾기 귀찮다.) 어떨 때는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또 어떨 때는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실천에 의해 구성되기도 한다. 나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하나의 유비(analogy)로 이해했다. 곧 불완전한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비교적 명확한 연상을 통해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정도로 이해했는데, 이렇게 다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또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와 같은 식으로 애초의 명확한 연상을 비틀게 된다면, 과연 이 내부와 외부라는 유비가 고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 지 다소 의심스러웠다. 하긴 내부와 외부를 대체할만한 말이 뾰족히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게 무책임하기도 하다.

 

 

딱히 결론이 없는 서평이 되어버렸다. 기대 이상까지는 아니었어도, 기대한 만큼은 읽고 배웠다. 그래도 <<자본을 넘어선 자본>>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 것 같다. 책 어디에선가 맑스의 지대론을 더 다루었어야 했는데, 여기서 못 다루었다는 아쉬움을 표하던데, 다음 저작에서 다룰 수 있으면 한다.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그랬듯, 겉멋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보다 어렵다. 이 책은 일반독자들보다는 맑스주의자를 자처하거나, 자기가 맑스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의구심을 지닌 전문 학자들이 보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 좋을 것 같다. 책의 이 곳 저 곳에 논쟁거리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생산적 논쟁이 가능할 듯 싶고, 또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6. 8. 16. 추기]

이재영은 레디앙에서 박원순을 비판하며, '이탈 공동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 바로 이 책에서 이진경 선생이 펼치는 주장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 싶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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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4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멋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니 안심하고 갑니다.
꿈도 꾸지 않겠다는 거죠.
내부와 외부,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 이런 부분은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흥미롭게 읽힙니다.^^

에로이카 2006-06-2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로드무비님.. 괜히 죄송스럽네요... 근데.. 저는 이 책이 꽤 어려웠어서... 그나저나 로드무비님은 겉멋과는 거리가 머신 분인데요... ^^
 
새로운 한국경제 발전사 - 조선후기에서 20세기 고도성장까지 나남신서 384
이대근 외 지음 / 나남출판 / 200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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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낙성대경제연구소가 조선후기에서부터 97 경제위기까지 200여년에 걸치는 시기의 경제사를 다룬 것으로서, 열일곱 개의 논문이 실린 책이다. 따라서 서평 쓰기가 그리 만만치 않다. 열일곱 개의 글들 중에서도 박이택 (1), 이헌창 (4), 이대근 (5), 이영훈 (6), 장시원 (8), 김낙년 (9), 이상철 (12), 박영구 (13), 신장섭 (14), 김석진 (16) 글들은 괜찮았으며, 몇몇은 아주 훌륭했다. 하지만 나머지 글들 중에는 쓰레기도 있다.

 

상당수의 글들이 일련의 논쟁 구도에 기꺼이 자신을 자리매김한다. 비판의 대상과 자신의 입장을 비교적 명확하게 한다. 박이택은 내재적 발전론을 비판하며, 이의 대안으로 나카무리 사토루의 소농경제론을 채택한다. 이영훈은, 언제나 그랬듯, 수탈론을 비판하며 식민지근대화론을 옹호한다 (그러나 책에 실린 이영훈의 글은 세간에 문제가 되고 있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실린 그의 글과는 달리 훌륭한 편이다). 김낙년은 식민지기 총독부와 박정희 정부의 유사성(‘강한 국가’) 강조하는 Woo, Eckert, Kohli 등의 서구의 논의를 비판함과 동시에, 현행 고등학교 근현대사 교과서의 수탈론적 기술을 문제시한다 (196-299, 304). 주익종은 허수열의 <<개발 없는 개발>> 대한 비판과 길인성의 생활수준 정체론에 대해 비판한다. 신장섭은 독점자본론(이강국) 주주민주주의론(장하성) 대해 비판적이다.  글을 쓰는 사람은 자신의 입장과 전선, 쟁점을 명확하게 해야 한다는 점에서 글들은 입장 자체의 옳고 그름을 떠나 일단 미덕을 갖고 있다고 있다.

 

여러 필자들이 참여했기 때문에 관점이 일관되지는 않다. 개항기를 다룬 1-4장의 글들을 굳이 색안경을 끼고 필요는 없을 같다. 김석진의 글이나 박영구의 글은 사실 기대가 없었는데, 굳이 얘기를 하자면 중도좌파적 시각에서 냉정한 평가를 내리고 있고, 이상철은 대체로 정치적 입장을 배제하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는 다소 싱거운 글을 썼다. 예외들을 제외하면 그래도 전체를 관통하는 관점이 있긴 하다. 그것은 박정희 코드이다. [ 일제강점기 하에서 형성된 반일 민족주의는 무마시키고, 박정희 시기에 형성된 경제발전 지상주의의 남한 민족주의를 전면에 배치하는 민주주의?.. 당근 무시된다노동자? 빨갱이랑 동의어다북한? 책에서는 전혀 고려의 대상이 아니다… ]   

 

인상적이었던 글들 중에서 개만 보자.

 

박이택에 따르면, 18세기 조선, 중국, 일본에는 모두 집약적 소농경제가 확립되어 있었다. “소농이란 단혼소가족 혹은 핵가족이 주로 가족 노동에 의거해서 독립된 경영을 하는 농가이고, 소농경제란 소농이 집약적 농업의 발전주체로 확립되어 있는 농업경제이다” (39). 당시 중국 강남지역에서는 소농경제가 전문화 진전이 주축이 되는 스미스적 성장과 혁신이 주축이 되는 슘페터적 성장과 결합하여  생산성 향상을 갖고 왔다. 그러나 중국의 1/10 안되는 규모를 갖고 있는 조선과 일본이 중국과 같은 규모의 시장 분업체계를 만드는 것은 어려운 과제였다. 조선의 경우는, 후기에 접어들면서 전기의 노비제가 해체되고 소농경영이 널리 퍼지면서 근로혁명과 시장규율을 통해 소농경제가 발전하였다 (46-7). 일본의 경우는, 중국과 조선과 달리, 영주제적 사회편성으로 도시화가 진전되었고, 재정적 물류, 상업적 물류, 그리고 농민적 물류가 하나로 통합된 상업도시망이 발달하게 된다. 이에 비해 18세기 조선 왕조는 시장배제적 재정적 물류가 중심인 재분배적 도덕경제가 집약적 소농경제와 결합하였고, 시장 경제는 농민적 물류 속에서 발전하였으나, 기본적으로 국지적 거래에 제한되어 있는 세포질형 시장경제 모습을 띠었다. 여기에서 스미스적 성장이나 슘페터적 성장을 기대하기란 무리였고, 이것이 19세기에 일본과 조선이 상이한 역사적 길을 걷게 것에 영향을 끼쳤다는 필자의 결론이다. 중국 강남지역과 조선, 일본 간의 다각적 비교가 돋보인다.

 

신장섭의 글은 재벌을 죄악시하는 사회분위기에 대한 반론이다. 정확하게 얘기하자면, 재벌의 비효율성 비민주성비판에 대한 반비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벌 비판의 전제로서 가정되는 신고전파적 자유시장 경제관을 비판하고 있는 점은 옳다고 생각된다. 필자의 논의는 재벌을 기업집단 (business group) 일종으로 다루는 것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리고 기업집단이라는 형태는 개별 기업이라는 형태에 비해 범위의 경제로부터 기인하는 여러 가지 이점을 갖고 있으며, 따라서 이는 보편적인 추세이지, 자체로 한국에만 특이한 어떤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1997 경제위기의 책임을 재벌에게 묻는 비판에 대해서, 필자는 그게 재벌 책임이 맞다고 답한다. 하지만 재벌에게 책임이 있는 부분은 금융위기 관리에 실패했다는 점이지, 구조 자체의 비효율성 아니라는 것이다. 주식을 얼마 갖고 있지도 않은 총수가 전체 그룹을 좌지우지하는 것을 비판하는 주주민주주의논의는 ‘1 1’(democracy) 아니라 ‘1 1’(plutocracy) 대표되는  상법과 주식회사 제도의 기본원칙을  무시하는 것이라고 비판한다.  그는 주주집단이 결코 동질적인 집단이 아니며, 여기에는 국내외 기관투자가들도 있고, 이들은 기업 자체의 운명에는 관심이 없지만, 주식을 상호보유하고 있는 재벌계열사들은 장기적인 안목에서 기업의 운명에 책임을 진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양자간의 입장 차이는 주주들의 합리적인 요구 재벌의 비합리적경영의 차이가 아니라, 내부인과 외부인 간의 갈등으로서 서로 다른 합리성의 대결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끝에서 그는 글로벌 스탠다드 거부할 것을 주장하며, 선진국 수준의 성장률을 유지해서는 결코 선진국이 없다는 멋진 주장을 한다.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통해 재벌에게 면죄부를 주려고 하는 필자의 시도는 참으로 궁색해 보인다. 필자가 하는 얘기란, 국가가, 그리고 사회가 나서서 재벌을 도와주고, (괜히 비효율성이다 비민주성이다 딴지 걸지 말고) 재벌은 국민경제 발전의 기관차 역할을 계속하여 선진조국 창조하자는, 그래서 다시 박정희 시대의 정신으로 살아 보세그런 얘기이다. 올해(2006)처럼 삼성, 두산, 현대자동차 총수들이 줄줄이 사고를 치고 있는 시점에서 보자면, 웃기는 얘기이다. 그들은 민주국가의 법을 1조원 상당의 돈으로 조롱하려 드는데경제위기 사고는 김영삼 정부랑 재벌이랑 쳐놓고, 뒷수습은 국민 전체, 특히 중에서도 하층에게 떠넘기고, 국민의 세금으로 조성된 공적 자금으로 비자금이나 만들고, 나중에 문제되니까, 지갑 꺼내면서 얼마면 ?”하고 말하는 재벌을 경영의 투명성만 확보하면 된다는 식으로 옹호하기에는 부족하다. 그건 신장섭이 공부를 덜해서가 아니라, 재벌이 해도해도 너무했기 때문이다.  

 

Parallax view라는 말이 있다. 시차(視差) 정도로 번역하나 본데, 보는 이의 위치가 달라짐에 따라 동일대상이 다르게 관측되는 현상을 뜻한다. 나는 낙성대경제연구소에서 나온 글들을 읽기 전에는 언제나 마음을 다잡는다. 이들이 세상을 오른쪽 애꾸눈으로 본다고 해서, 나까지 이들의 글을 왼쪽 애꾸눈으로 보아서는 안된다고이들의 주장을 이들의 진심대로 읽어주자고왜냐하면 그래야지만 뭐라도 하나 배울 수가 있기 때문이다. Parallax view 경험은 자신의 시야를 넓히는 것이며, 편협을 교정하는 것이다. 글을 읽다 보면, 설득되는 부분도 있고, 며칠 있다 다시 보면 다르게 생각하기도 하고 그러면서 자기 생각을 발전시켜 나가야지, 어떤 학적, 정치적 권위에 의해 미리 주어진 조야한 잣대를 새로 읽는 글에 처음부터 들이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지난 10 동안 걸로 충분하다. 분명 몇몇 쓰레기 같은 글들이 있긴 했지만, 근현대 경제사 책으로서 책은 훌륭하다. 다만, 다소 다른 관점에서 서술된 여러개의 글들이 각각 전문적인 분야를 다루고 있어서 비전공자가 가볍게 마음먹고 덤벼들 책은 아니다. (그리고 다수의 오자와 편집상의 실수도 있다.)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낙성대경제연구소 멤버들 중 일부가 주축이 된 교과서 포럼과 <<해방전후사의 재인식>>에 대한 한겨레신문 비판기사

 

(1)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24976.html

(2)    http://www.hani.co.kr/arti/culture/religion/124974.html

 

아래는 [레디앙]에 실린 이재영의 재벌비판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1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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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5-20 07: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른쪽 애꾸눈, 왼쪽 애꾸눈, 표현이 멋집니다.^^

에로이카 2006-05-20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로드무비님, 칭찬 감사합니다... 두 눈 똑바로 떠야지요.. @.@

waits 2006-05-20 16: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몇 번을 왔다갔다하다가 완독(--;;, 책도 아니고 리뷰를. 흑~)했어요. 모르는 말이 많군요, 근데... 꼭 성장을 하고 선진국이 되어야하는 건가요? 이미 벌여놓은 판이 있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건가요? 두 눈 똑바로 떠도 모르겠다는...

waits 2006-05-20 2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 수업 마지막 발제 주제가 '한국의 대안발전모델(?)' 중 하나고, 제가 발제인데 얼마전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특별히 다루고 싶은 게 있냐고 물으시더라구요. 물론 다들 잘 모르니 묵묵부답. 저는 전부터 궁금하기도 하고 해서, 오늘 광화문 오가는 길에 '경제성장이 안되면 우리는 풍요롭지 못할 것인가'를 집어들었는데, 경제성장에 관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더 읽고 이 책에서 취할 부분이 있을까 생각해 보려구요. 전에 술자리에서 전 수업에선 대안체제에 대해 어떤 이야기들이 나왔냐고 여쭸었는데, 별 건 없다고 하더라구요. 결국 교실 안의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무기력감 같은 것이나 이야기 한다는 의미 자체 외에 뭐가 있을까 싶기도 하고. 아마 다들 그랬겠죠? 그래도 함께 하는 고민은 중요하겠지만. 선생님께 여쭤보고 말씀 들으면 전해드릴께요.(어인 긴 댓글~;;;)

2006-05-25 0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에로이카 2006-05-26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어릴때님.. 기다리고 있을께요.. ^^

..님, 에이.. 설마 그런 오해를 할까요? 그리고 책 읽는 데에 편식이 어디 있어요? 자기가 좋아하는 것 읽는거지요.. 전 이렇게 재미없는 책만 읽고 살아서... 재미있는 님 서재가서 음악도 들으면서 고개도 까딱까딱, 발도 까딱까딱하며 장단 맞추고 하는 게 큰 즐거움입지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