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래의 맑스주의 클리나멘 총서 3
이진경 지음 / 그린비 / 2006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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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경의 <<-래의 맑스주의>>는 그의 이전 저작인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어 그 맛을 한 번 본 이들이라면 알아볼 수 있는 맛을 지니고 있다. 그러나 기본 국물맛이 같다고, 이 책이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서 했던 것과 다름없는 얘기를 되풀이하고만 있는 것은 아니다.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넘어서 무언가 완전히 새로운 얘기를 하고 있지는 않지만, 그 책에 겨누어진 비판들에 대한 이진경의 대답들을 담고 있다.

 

1년 전 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었다. 분명 처음 그 책을 보았을 때의 감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래의 맑스주의>>는 결코 지식인의 자기과시적 저작이라 폄하될 수 없는 읽고 배울 게 많은 책이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읽었다면, 이 책은 더 쉽게 읽혀질 것이다. 하지만 이 책을 읽기 위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꼭 봐야 하는 것은 아니다. 대략 비슷한 얘기를 이 책에서 보다 심도 깊게 한다고 해야 할지재미로만 따지면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더 나았던 것 같다. 따라서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보고 재미있었던 이들이나, 반대로 의구심을 가졌던 이들이 본다면 좋을 듯 싶다. 이 서평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에 쏟아진 의혹의 시선에 대한 이진경의 변론(1, 2)을 먼저 살펴보고, 이 책에서 하는 새로운 이야기들(3, 4)을 본 후, 마지막으로 이진경의 내부와 외부의 구분의 정당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할 것이다 (5).

 

 

1. 노동가치론 비판 / 착취의 재정의 / 화폐 허무주의

 

저자에 따르면, 맑스의 비판해체’ (82)이며, 비판대상의 장점을 최대화하여 대결하는 최대주의적방법 (83)이며, ‘몰입비판’, ‘변환을 반복하여 통과하는 과정(84)이며, 비판대상의 내부에서 외부를 창출해내는 것(85)이다. 그리고 맑스를 통해 비판한다는 것은 맑스의 문제설정을 (1) 오늘의 조건 위에서 다시 작동시키며, (2) 맑스 자신도 그 비판 대상에 포함시키는 것을 뜻한다. 노동가치론에 대한 이진경의 비판은, 바로 이처럼 한편으로는 맑스를 노동가치론의 완성자가 아니라 해체자로 독해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맑스의 잉여가치론을 오늘의 조건과 대질시킴으로써 해체시키는 것이다. 이 점에서 이 책은 <<맑스주의와 근대성>>, <<자본을 넘어선 자본>>과 동일한 문제의식을 지니고 있다.

 

맑스의 잉여가치론을 부정하면서도 자신의 입장을 맑스주의로 간주하려는 모든 시도들(리카르디안 맑시스트, 분석 맑시스트, etc.)은 하나의 동일한 절차를 반복한다. 곧 자본주의 하에서의 착취를 가치론에 의존하지 않고 구성, 설명해내는 것이다. 이진경도 이 점에서 동일하다. 또 이 부분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을 비롯한 이전 저작들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 것으로 볼 수 있다. 이진경은 생산과정 외부에서 발생하는 착취에 주목한다 (97). 첫째, 그는 계급투쟁은 생산의 결과물 분배를 둘러싼 투쟁이 아니라, 활동능력과 활동 자체의 가치화를 둘러싼 투쟁이며, 따라서 생산과정 이전에 시작된다는 오래된 발리바르의 테제를 끌어들인다. 둘째, 화폐 형태를 취하는 노동자의 임금은 자본으로서의 화폐가 지속적으로 감가됨에 따라 함께 감가된다. 셋째, 자본으로부터 가치화가 배제된 활동들 - 예컨대, “가사나 공부, 자연-환경적 조건 - 은 가치화의 조건을 구성함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지불 없이 착취된다” (98). 따라서 이제 착취는 생산과정 내부의 노동을 통해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생산 과정 외부에서도 활동 일반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으로 개념화된다.

 

그리고 이 착취 메커니즘의 근원에는 소위 화폐 허무주의”(128-149)가 놓여 있다. 맑스는 <<자본>> 1권에서 상품 일반의 관계로부터 화폐의 특수성을 도출하고, 또 그 상품 일반의 관계로부터 인간의 노동이 노동력이라는 특수한 상품으로 교환되는 자본 임노동 형식을 도출한다. 그러나 이진경에게 논리 전개의 출발점은 상품이 아니라 화폐이다. “화폐는 생산물에 상품성을 부여하고,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세계 안에 존재할 수 있게 해주는 외적인 초월자이다. … 화폐는 상품세계의 신이다” (129). 따라서 상품의 본질은 화폐(128)이며 (맑스라면 거꾸로 화폐의 본질은 상품이라고 했겠지만), 자본주의적 생산은 화폐를 매개로 해서만 가능”(133)하고, 시장은 화폐에 의해 자동화된 권력의 메커니즘”(142)이다. 화폐 허무주의란, 모든 상품의 가치가 초월적 지위를 지닌 화폐라는 척도를 통해 측정되며, 화폐화될 수 없는 모든 가치들은 부정되는 것을 뜻한다. 

 

 

 

2. 노동의 기계적 포섭과 기계적 잉여가치 / 활동의 기계적 포섭과 사회적 잉여가치

 

그런데 사실, 이진경의 입장이 애매한 부분이 있다. 맑스의 잉여가치론은 (변증법적으로?) 부정되지만, 그렇다고 잉여가치라는 개념 자체를 팽개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또한 맑스의 관계적 개념화가 무시된다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맑스의 개념들 위에서 새로운 잉여가치 범주들을 추가한다. 간단히 표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자본에 의한 포섭                         역사적 계기                     기계화의 계기               잉여가치

(1) 자본에 의한 노동의 형식적 포섭     자본주의 성립 (16세기)                                  절대적 잉여가치

(2) 자본에 의한 노동의 실질적 포섭     산업혁명 (19세기 이후)    육체노동의 기계화     상대적 잉여가치

(3) 자본에 의한 노동의 기계적 포섭     자동화 (1970년대 이후)    정신노동의 기계화     기계적 잉여가치

(4) 자본에 의한 활동의 기계적 포섭     정보화 (1970년대 이후)    결합노동의 기계화     사회적 잉여가치

 

(1), (2)는 맑스의 개념화이고, (3), (4)는 이진경의 추가적 개념화이다. 특히, (4)는 이 책에서 새로 추가된 내용이다. 이진경은 위에서 착취를 잉여가치론에 기반하지 않은 채 설명하지만, 동시에 여기서는 그 자신의 잉여가치론에 기반하여 착취를 설명하고 있다.

 

또한 이제까지 자신의 이러한 잉여가치론에 대한 비판들에 대한 반비판을 시도하고 있다 (178-184).

 

 

3. 계급과 비계급 / 프롤레타리아트와 임노동자

 

자본주의는 국가 없이 사고될 수 없다. 본원적 축적이나, 화폐, 전국시장의 창출, 절대군주의 영토 국가의 출현 등은 자본에는 국경이 없을지 모르지만 자본주의에는 국경이 있다”(206)는 사실을 웅변해준다. 자본주의 형성에서 국가의 역할에 대한 적극적 고려는 부르주아지가 귀족과의 계급투쟁을 통해서 자본주의가 성립되었다는 식의 신화와 결별할 것을 요구한다. 역사가들의 연구는 자본주의가 성립되면서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서로 다른 계급이 아니라, 국가에 의해 동질화되며, 부르주아지는 자본주의의 보편적 계급, 자본주의에서 존재하는 유일한 계급이다. 이에 반해 프롤레타리아트는 비-계급이다. 발리바르에 따르면, <<자본>>에서 프롤레타리아트라는 말은 아주 약간의 예외를 무시하면, “‘인구법칙에 관한 장과 본원적 축적에 관한 장에서만 출현할 뿐인데, 이는 자본에 의해 축출되어 계급적 규정성을 상실한-계급을 뜻한다 (239) [Cf. <맑스의 계급정치 사상>, 서관모 엮음 <<역사유물론의 전화>>(민맥), 특히 216-230쪽을 보라]. 따라서, “부르주아지가 주어진 규정의 획득에 의해 정의된다는 점에서 다수적/주류적 (major) 집단이요 다수자 (majority)라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규정의 부재, 척도의 부재, 혹은 수많은 이질적 규정의 혼합으로 특징지어지는 존재란 점에서 소수적(minor) 집단이요 소수자 (minority)” (240-1).

 

 

4. 탈주 / 진지전: 아나코-코뮤니즘 (Anarcho-Communism)

 

이러한 비-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정치학으로서 코뮨주의는 대항-계급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트의 (국가/) 정치학으로서의 사회주의와 대비된다.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지를 대체하는 보편적 계급으로 완성하고자 하는 기획으로서의 사회주의와는 달리 코뮨주의는 전 사회적 차원에서 노동자나 인민을 하나의 계급으로 구성하고 통합하려는 게 아니라 계급 자체의 해소를 추구한다” (253). 이러한 의미에서 이진경이 말하는 코뮨주의는 아나코-코뮤니즘정도로 생각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런데 의문은 이것이다. 자본주의 사회에 대항하기 위한 두 전략 - 곧 진지전과 탈주 양자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 것인가? 차이의 정치학을 통해서 이진경이 말해야 하는 부분은 바로 이 구체적 연대이다. 하지만 아무 말도 없다. 적어도 이 지점에서 이진경은 그가 그토록 예찬했던 몰입, 비판, 변환으로서의 맑스의 비판을 따르지 않고, 어설픈 거리두기” (84)만을 하고 있을 뿐이다. 옛날에 했고, 감옥까지 갔다 왔으니, 몰입은 할만큼 했다는 것인가? 나는 여전히 탈주보다는 진지전이 더욱더 필요하다고 본다. 미안한 말일지도 모르지만, 저자가 뜻한 바만큼 탈주전략이 불온해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이진경의 탈주가 더욱더 불온해지기를, 하지만 또 동시에 진지전에 대해 다시 사고해주기를 감히 바란다. 이진경은 기동전의 시대에서 탈주의 시대로 점프하면서, 현재 진지전을 펼치고 있는 이들을, 과거 노동계급(LC)” 시절 자신의 실천의 구태와 동일시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가 마지막 장에서 펼치고 있는 토니 모리슨의 소설에 나오는 두 가지 종류의 콤뮨, 곧 루비와 수녀원 공동체의 대비는 약자들이 공동체를 이루어 세상을 살아가는 두 가지 방법을 보여준다. 그러나 세계--존재는 공동체 내의 개인에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다른 공동체들과 하나의 세계를 구성하는 공동체 하나하나, 다른 국가들과 자본주의 세계경제를 구성하는 국가들 하나하나에도 적용될 수 있다. 나는 타자의 타자로서, 곧 나라는 세계--존재는 또 다른 세계--존재인 타자의 타자로서 존재한다. 그렇다면, 루비와 수녀원은, 진지전을 펼치는 참호 속의 병사와 포탄 속을 요리조리 빠져나가는 마타하리는, 민주노동당과 수유+너머는 어떻게 연대할 수 있을까?

 

 

5. 외부의 중의성

 

이 책을 읽다가 흥미로웠던 점 하나는, 이전의 저작들에서부터 무수하게 반복되는 외부라는 말이 [따라서 그것과 대칭되는 내부의 함의도] 단일한 의미를 지니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는 점이다. 외부는 (1) “연기적 조건” [<-> 하나의 원리로 환원 가능한 내부의 영역](40)이기도 하며, (2) “초험적 조건” [<-> 합목적적으로 조작가능한 대상](47)이기도 하고, (3) “클리나멘” [<-> 정해진 궤도를 운동하게 하는 관성] (49)이고, 또 때로는 (4) “단절의 지점, 변환의 문턱” [<-> 동일성의 관념체계]이다. (또 다른 의미들도 있을테지만, 지금 더 찾기 귀찮다.) 어떨 때는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선험적으로 주어지고, 또 어떨 때는 내부와 외부의 차이가 실천에 의해 구성되기도 한다. 나는 내부와 외부의 구분을 하나의 유비(analogy)로 이해했다. 곧 불완전한 언어로 설명하기 힘든 현상을 비교적 명확한 연상을 통해 설명하는 데에 도움을 주는 것 정도로 이해했는데, 이렇게 다가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면, 또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와 같은 식으로 애초의 명확한 연상을 비틀게 된다면, 과연 이 내부와 외부라는 유비가 고수할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 지 다소 의심스러웠다. 하긴 내부와 외부를 대체할만한 말이 뾰족히 있는 것도 아닌데, 이런 의문을 제기하는 게 무책임하기도 하다.

 

 

딱히 결론이 없는 서평이 되어버렸다. 기대 이상까지는 아니었어도, 기대한 만큼은 읽고 배웠다. 그래도 <<자본을 넘어선 자본>>만큼의 센세이션을 불러일으키기는 힘들 것 같다. 책 어디에선가 맑스의 지대론을 더 다루었어야 했는데, 여기서 못 다루었다는 아쉬움을 표하던데, 다음 저작에서 다룰 수 있으면 한다. 이 책은 <<자본을 넘어선 자본>>이 그랬듯, 겉멋에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다. <<자본을 넘어선 자본>>보다 어렵다. 이 책은 일반독자들보다는 맑스주의자를 자처하거나, 자기가 맑스주의자일지도 모른다는 약간의 의구심을 지닌 전문 학자들이 보고 적극적으로 의견을 개진하면 좋을 것 같다. 책의 이 곳 저 곳에 논쟁거리들이 산적해 있기 때문에, 생산적 논쟁이 가능할 듯 싶고, 또 좋은 볼거리가 될 수 있을 것이다  

 

[2006. 8. 16. 추기]

이재영은 레디앙에서 박원순을 비판하며, '이탈 공동체'라는 개념을 사용한다. 이 개념, 바로 이 책에서 이진경 선생이 펼치는 주장에도 적용할 수 있을 듯 싶다.

http://www.redian.org/news/articleView.html?idxno=24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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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6-06-24 07: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겉멋으로 읽을 수 있는 책이 아니라니 안심하고 갑니다.
꿈도 꾸지 않겠다는 거죠.
내부와 외부, 내부에 존재하는 외부, 이런 부분은
책의 내용과 상관없이 흥미롭게 읽힙니다.^^

에로이카 2006-06-24 21: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로드무비님.. 괜히 죄송스럽네요... 근데.. 저는 이 책이 꽤 어려웠어서... 그나저나 로드무비님은 겉멋과는 거리가 머신 분인데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