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화과나무 뿌리 앞에서 - 캄보디아에서 박정희를 보다 유재현 온더로드 3
유재현 지음 / 그린비 / 2007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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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캄보디아는 이미지의 파편, 정보의 조각일 뿐이었다. 가까이는, 아마 1년도 더 된 일인 것 같은데, **님의 알라딘 서재에서 봤던 인상적인 사진과 글들이었다. 그 전에는 앙코르와트 사원이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화양연화였다. (왕가위도 좋고, 장만옥, 양조위도 좋아하지만, 이 영화는 난 참 별로였다. 서사가 너무 약하다. 글쎄요즘 다시 본다면 어떨지사랑에는 서사보다는 격정과 이미지가 더 중요한 것일텐데이런 소리를 하고 있는 걸 보면 화양연화를 봤을 때보다는 나이가 먹은 것인가? 모르겠다.) 그리고 기억의 아주 먼 저 편, “킬링필드”…

이 책은 이런 캄보디아의 동떨어진 이미지들을 지식과 연결시켜주었다. 6개월 동안 프놈펜에서 머물면서 찍은 사진들과 짧막한 글들을 통해 현재 캄보디아의 독재자 훈센과 정희의 이미지를 오버랩시킨다.

"위대한 박정희는 남한뿐만 아니라 이곳저곳에 살아있고 건재하다. 중국공산당을 훈육한 박정희에 대해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아메리카의 독재자들은 경의를 표하고 있다. … 그 중 캄보디아는 동남아시아에서도 특출하게 박정희유훈을 실현하고 있다는 착각을 불러일으킬 만큼 적극적이다. … 2006 7월에서 그 해 12월까지 6개월 동안 프놈펜에 머물면서, 나는 파노라마처럼 생생하게 펼쳐지고 있는 박정희 시대의 인간들을 목격할 수 있었다. 나는 무엇보다 캄보디아의 훈센 개발독재라는 부활한 박정희 시대가 풍기는 비역하고 참혹한 냄새를 통해 내 자신이 관통했고 우리 모두가 관통했던 그 시대의 벌거벗은 실체를 더듬을 수 있었다. 박정희 시대를 살아야 했던 인간의 얼굴과 체온이 그곳에 있었다." (11-12)

지은이 유재현이 훈센의 캄보디아에서 한국의 6-70년대 박정희와 그 시절의 인간의 데자부를 보았다면, 유재현의 글을 보면서 얼마전 서평을 썼던 조희연의 책을 연상하게 되었다. 유재현이 훈센을 보면서 박정희를 떠올리는 것은, 조희연역사적 박정희현재적 박정희와 대면시키겠다는 문제의식에 기반하여서, ‘개발동원체제라는 개념을 통하여 그러한 체제 성격 – “이런 체제는 사회를 군대식으로 조직화해서 성장효과를 극대화하고, 독재자를 근대화의 영웅으로 만든다” (조희연, 2007: 13) – 이 남한의 박정희 정권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고 했던 것과 일맥상통한다. 유재현의 이 책은 마치 조희연의 주장을 알고서 뒷받침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박정희에 대한 세계의 유명한 독재자들 (북한의 김정일, 파키스탄의 무샤라프, 싱가포르의 리콴유)과 독재정권의 이데올로그들의 찬양을 싣고 있다 (80-81).

유재현박정희 신드롬의 연장 속에서 이명박을 해석한 것도 흥미롭다. 스승이 제자를 두어 후대를 예비하는 데, 첩첩산중에 유폐되었다거나 하는 비상한 경우가 아닌 다음에야 혈육을 적제(適弟)로 삼는 우둔한 짓은 멀리하는 법이다. 근친교배란 열성유전자밖에는 보장할 것이 없기 때문이다. 때문에 후대를 위해 천릿길이라도 헤매야 하는 법인데, 예컨대 무림의 세계가 그렇다. 사정이 여의치 않아 혈육에게 심심풀이로 무공을 전수하는 경우에도 진정한 제자는 어느 날인가 어느 곳에서 흘러들어온 까까머리가 차지하게 마련이다. 무림의 국민교육헌장에 명시된 철칙 조항이다. 누가 박정희의 신실한 제자인가? 이명박이다 (9).

이명박은 2000년부터 현재까지 캄보디아 훈센 총리 경제고문의 직함을 갖고 있다고 한다 (58). 캄보디아 한국 교민지에 실린 말에 따르면 훈센은 죽은 사람 중에서는 박정희, 살아 있는 사람 중에서는 전두환을 제일 존경한다고 한다 (80). 대통령 선거가 있는 내일 저녁, 그는 아마 웃고 있을 거다. 그가 이명박이든, 캄보디아의 훈센이든, 전두환이든, 지하의 박정희든 말이다.

캄보디아가 어떤 나라인 지 알고자 하는 이라면, 쉽게 읽을 수 있는 책으로 권해주고 싶다. 물론 그들이 원하는 게 지식이 아니라, 네이버의 지식인이 친절하게 가르쳐주는 정보 쪼가리라면 이 책은 좀 머리가 아플 수도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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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0 12:5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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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20 13:52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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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 발전의 사회학 나남신서 170
윤상우 지음 / 나남출판 / 200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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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상우 교수가 이전에 발표했던 논문 10편을 모은 것인데, 7-80년대에 유행하던 발전이론들과 동아시아 발전국가에 대한 이론적 검토로부터 시작하여, 개별 발전 국가의 상이한 형성·성숙·쇠퇴의 역사적 경로와 타이밍에 대한 비교를 시도하고 있다. 5(한국의 금융정책 변화와 발전국가해체), 8(대만)에서는 한 국가를 집중적으로 다루지만, 3, 4, 7장에서는 한국과 대만이 비교되며, 6장에서는 한국, 일본, 대만이 비교된다. 9장에서는 1978년 개혁·개방 이후 중국의 발전경로를 기존 동아시아 발전국가 모델과의 비교를 통해서 분석한다. 10장에서는 비교 방법이 아니라, 대만과 중국 간의 양안관계 변동과 이것이 양국의 국가 정책 및 대만 기업에 끼친 영향에 대한 다층적 분석이 시도된다.

사실 예전의 발전 이론들을 검토하는 1장을 보면서 너무나 자의적이고 편의적인 재단 때문에 실망이 컸지만, 이후의 장들은 그 실망을 상쇄하고도 충분히 남았다. 특히 나로서는 한국과 대만 발전국가의 역사적 기원과 전개를 다룬 3장이 제일 인상적이었고, 한국 발전국가의 해체를 금융자유화의 전개 속에서 고찰한 5, 중국의 경제성장을 다룬 9, 중국과 대만 간의 경제통합이 대만의 발전국가 해체에 끼치는 영향을 분석한 10장도 좋았다.

먼저, 일본, 한국, 대만의 역사적 경험으로부터 추출된 발전국가 모델은 다음과 같은 이념적, 조직적, 정책적, 관계적 특성으로 구성된다 (284-285, cf. 46, 324).

(1)    이념적 요소: 경제성장이 국가 정책의 최우선적 고려사항이었으며, 동시에 실적 정당성의 근거.
(2)    조직적 요소: 자율적이고 조직적 응집력을 확보한 유능한 국가관료기구에 의해 행사되는 전략적 시장개입.
(3)    정책적 요소: 여러 적극적인 정책수단을 통해 자원의 전략적 할당과 민간부문의 생산적 투자를 유도하고 경제의 효율성을 강화.
(4)    관계적 요소: 배태된 자율성.

카스텔에 따르면, 이러한 발전국가 모델은 동아시아 국가들이 서구보다 산업화가 늦은 후발산업국가이면서도, 다른 제3세계 국가들의 종속을 모면하며 국제사회 속에서  생존하기 위해 선택한 길이었다 (the politics of survival, 83, 268, 285). 그러나 이 생존의 정치가 다른 제3세계 국가들과 달리 성공을 거둘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국가관료기구의 일관된 방향설정에 의한 것은 아니었으며, 세계체제적인 기회구조, 헤게모니 세력의 개입과 같은 외적 요인, 그리고 최고권력의 리더십, 관료조직 내의 갈등과 같은 내적 요인의 복합적 산물이었다 (67, cf. 137). 이는 발전국가의 성공과 마찬가지로 그것의 해체 또한 복수의 요인들의 복합적 산물이라는 것을 암시한다. 기존의 발전국가론은 발전국가 해체의 요인을 주로 국가자율성의 내적 모순으로부터 야기되는 일종의 '무덤 파는 세력'(grave-digger)의 출현과 국가관료기구의 응집력 및 제도적 능력의 약화에서 찾고 있는데, 지은이는 발전국가론이 발전국가 위기의 원인을 지나치게 사회내적인 요인에서 찾고 있다고 비판한다 (107-109). 윤상우세계체제의 기회구조가 압박구조로 전환되었다는 사실을 주지시키며, 이에 대한 보완적인 설명을 제시하고 있다 (113-114).

윤상우는 세계의 다른 나라들과 구분되는 동아시아 발전국가의 일반적 특성을 위와 같이 제시하면서도, 동아시아 발전국가들, 특히 그 중에서도 한국과 대만의 상이한 발전경로를 비교한다. 간단히 정리하면, 대만이 약탈국가(본토의 국민당 정권 시절과 대만으로 패퇴 후 외삽국가로서 존재했던 1950년대까지) → 발전국가(1960년대 이후 1980년대 중반까지) 연성발전국가(soft-developmental state,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경로를 걸었던 반면, 한국은 약탈국가(이승만 정권) → 발전국가(1960-1980년대 중반) 탈발전국가(post-developmental state, 1980년대 중반 이후)의 경로를 거쳤다 (130-136).

한국의 탈발전국가경로와 대만의 연성발전국가경로 간의 대비는 한국의 1997년 경제위기와 비슷한 시기 대만의 생존 간의 대비로 더욱 강조된다. 그러나 윤상우는 마지막 10장에서 대만의 연성발전국가 모델 역시 중국 경제와의 통합 속에서 위험에 처해있음을 암시한다.

전체적으로 봤을 때, 1장을 제외하곤, 각 장의 질과 완결성이 무척 높다. 좋은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약간의 트집을 잡자면, 비단 이 책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지만, 원래 독립적으로 발표되었던 논문들을 묶은 것이라, 반복되는 내용이 꽤 많다. 출판 업적을 중시하는 한국 사회과학계의 고질병 중 하나이겠지만, 이전에 발표한 논문들을 묶어서 책으로 낼 때에는 원래 논문에서는 지면 제약 때문에 자세하게 못 다루었던 사실을 풍부하게 담아내는 것을 넘어서, 좀더 유기적인 체계를 갖춘 하나의 책의 모습을 갖췄으면 하는 바램이 있다.

이 책의 지은이 윤상우의 후속 작업들이 무척 기대된다. 특히, 그가 탈발전국가연성발전국가처럼 기존에 나온 발전국가와의 대비 속에서 이루어지는 부정적 개념화를 넘어서 현재 등장하고 있는 국가 유형에 대한 좀더 긍정적(affirmative)인 방식의 개념화를 시도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또한 마지막 10장에서 시도된 중국과 대만 경제 간의 연동을 분석한 것을 이제 막 태동하고 있는 남북한 경제 간 연동 분석에 적용하고, 나아가 두 경제 연동 간의 비교를 할 수는 없을까. 물론 어렵겠지만 그럴 수 있다면, 그가 이 책에서 시도한 동아시아 자본주의의 다양성의 추적을 1장에서 잠시 소개되고 있는 필립 맥마이클의 통합적 비교방법론을 통해 재구성함으로써, 21세기 동아시아 자본주의 이해의 새 지평을 열 수도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현재 유치한 수준에 머물고 있는 '분단체제론'을 발전, 지양하는 하나의 길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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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01: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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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23 09:5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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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00: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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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1-30 10:39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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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12-10 01:4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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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희와 개발독재시대 - 5.16에서 10.26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2
조희연 지음 / 역사비평사 / 200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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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1961년 집권해서 1979년 막을 내린 박정희 정권 하의 남한 역사에 대한 다각적 개괄서이다. 20년이 좀 못되는 세월 동안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했던 이 시기는 성공한 쿠데타 5·16으로 시작해서 실패한 쿠데타 10·26으로 끝이 난다. 나는 그 정권의 시작과 끝이, 또 그 사이의 철권적 통치와 경제발전이 도저히 이후의 역사에서는 재현될 수 없는 예외적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남한의 역사란 고작 60년에 지나지 않는다. 60년 중 20년의 세월을 지배한 이 비정상적 정권에 대한 평가는 극단으로 나뉘며, 박정희에 대한 평가는 남한 사회의 좌우를 가르는 중심적 패러미터이다.

이 책의 지은이 조희연 교수는 박정희 시대를 둘러싼 진보와 보수 간의 기존의 소통불가능 상황을 타개하는 것을 염두에 두면서, 진보와 보수의 경계를 넘나들면서 보편적 설득력을 확보하고자 노력하였다고 밝히고 있다. 그리고 내가 읽은 바에 따르면, 난 그의 의도가 비교적 잘 실현되었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박정희에 대한 당대 대중 일부의 자발적 열광의 실체에 대해 잘 설명하고 있는데, 이는 오늘날 그에 대한 향수가 단지 보수세력의 조직적 동원으로만 설명될 수 없다는 것을 뜻한다. 육사생도들 뿐만 아니라, 서울대 총학생회까지도 5.16 군사쿠데타 지지 성명을 했다는 사실이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또 혁신계 언론였던 『사상계』와 『민족일보』마저도 쿠데타에 기대를 표명했다는 사실은 당시 국민들이 쿠데타에 의구심을 품었으면서도 쿠데타세력=나쁜 세력이라는 식으로 (민주주의를 정상적인 체제로 여기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는 식으로) 단순 반응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1963년 대선에서 여순사건에 연루되었던 박정희의 경력이 문제되자, 오히려 이는 진보성향의 표를 흡수하게 하기도 한다

이 책은 박정희 개인과 그 시대의 복합적 모순성에 주목하면서, 이 체제를 위로부터 사회를 조직하고 재편하며 아래의 동원을 이끌어내는 체제개발동원체제”(developmental mobilization regime)로 정의한다 (12). 조희연박정희 체제 뿐만 아니라, 독일의 비스마르크 체제, 스탈린 체제,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경제체제, 현재 중국의 사회주의 시장경제체제, 타이완의 장제스 체제 등이 이 체제의 예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흥미롭게도 그는 남한의 박정희 신드롬과 러시아의 스탈린 신드롬을 병치시키기도 한다 (233)). 이 체제는 국가가 사회의 반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가 사회에 대해 역작용하는 체제이며, “사회에 대한 일종의 국가적 기동전체제이다. 이 체제 속에서 국가는 “‘개발·조국근대화·산업화·수출증대같은 국가의 지상과제를 달성하기 위해, 사회와 그 구성원들을 특정한 방향으로 유도하고 훈육하고 독려하는” ‘훈육국가의 형태를 띠게 된다 (173, 218). 사회체제 (혹은 축적체제)와 국가형태의 이러한 개념화는 이 책이 그 동안에 나온 다른 박정희 시대에 관한 책과 차별되는 지점이라고 생각된다. 이전의 역사책들은 그것이 어떠한 관점에서 서술되든 간에, 역사적 사실에 대한 서술(description)과 서술자의 정치적 입장에 기반한 해석(interpretation)이 무매개적으로 혼융됨으로써, 정치적인 논란을 유발했을지언정 학술적인 논의 구도 성립을 힘들게 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이러한 시류와 달리 조희연은 서술과 해석을 개념적 설명(explanation)으로 매개함으로써 신도, 악마도, 그렇다고 평범한 한국 남자도 아니었던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객관적으로 다가갈 수 있는 기초를 놓은 것으로 보인다.

그 동안 박정희와 그의 시대에 대한 보수진영의 논의는 그 시절의 경제 발전의 성과와 그의 서민적 이미지를 집중 부각시키는 반면, 그 이면의 어두운 부분들 - 일본군 장교 복무, 남로당 활동, 쿠데타, 일체의 민주주의 부정, 노동·인권 탄압, 정치공작, 정경유착, 부패 등 - 을 각색·왜곡하거나 이에 면죄부를 주고자 하였다. 우파들은 박정희를 통째로 지지할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에, 그에 대해 좋아보이는 것만 취사선택하는 입장을 취해온 것이다. 이에 반해 진보 진영은 이 모든 것들이 하나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취사선택 자체가 불가능한 악으로 인식해왔다. 이는 기본적으로 보수진영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는 대결구도이다. 따라서 얼마전 백낙청이 박정희지속불가능한 발전의 유공자로 칭하면서 박정희의 공과 과를 동시에 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던 것은 (진보까지는 아니더라도) 박정희에 대한 반()수구적 해석의 새로운 길을 모색하고자 했던 시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주장은 이번 대선 구도 초기에서 잘 보여졌듯,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라는 양대 기득권 정치세력이 산업화 세력과 민주화 세력으로 스스로를 표상하려는 것과도 맞닿아 있다

조희연은 기존의 보수, 진보, 그리고 백낙청 식의 양시양비론적 절충과 이 책에서 자신이 하고자 하였던 것 간의 차이를 잘 설명하고 있다. 그에 따르면, 오늘날 박정희를 둘러싼 이러한 해석 차이란 결국 산업화 이후의, 그리고 민주화 이후의 대안을 둘러싼 각축전이다 (232). 보수는 민주주의, 인권, 복지를, 진보는 개발, 성장, 개방, 경제 운용의 문제를 고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도달했다는 것이 이 각축전의 배경이다. 그에 따르면, 박정희와 그의 시대는 하나가 아니라 여럿이고 그 여럿 간의 모순과 갈등이 응축되어 있다. 현재적 시각에서 보고 싶은측면만을 봐서는 안된다고 강조한다 (236). 조희연 (백낙청처럼) 박정희를 둘러싼 보수와 진보의 화해를 제시하지 않는다. 그보다는 현재의 소통불가능의 교착국면을 좀 제대로 된 싸움으로 만들기를 원하는 것 같다. 그러기 위해서 보수는 어떻게 역사적 박정희를 뛰어넘을 것인가하는 과제를, 진보는 박정희의 개발독재체제와는 다른 방식으로 어떻게 국가와 경제를 운영할 것인가하는 과제를 풀어야 할 것이라고 말한다.  

이 책의 지은이 조희연 교수는 결코 쉬운 글을 쓰는 양반이 아니다. 그의 글을 보면 고난도 사회과학적 개념이 난무한다. 하지만 이 책은 사회과학 논문이 아니라 역사책이다. 따라서 쉽다. 이 책에서는 개념 사용이 극도로 절제되어 있다. 기본적인 역사적 사실의 서술에 충실하면서도 그 사실이 상이하게 해석되는 현시대적 배경도 잘 서술되어 있다.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박정희 시대에 대한 교양과 지식의 업그레이드를 원하는 독자들에게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박정희 시대나 조희연의 연구에 관심이 많은 학문하는 사람들은 봅 제솝(Bob Jessop)의 설명틀에 의거하여 발전국가를 논의 했던 이전의 글(『동아시아 경제변화와 국가의 역할 전환』(한울) 4)과 곧 후마니타스에서 나온다고 광고하는 책(『한국민주주의와 개발동원체제』(후마니타스, 근간))과 같이 보면 도움이 될 것이다.

 

오자:

23쪽 밑에서 두번째 줄: 조취 조치

129쪽 밑에서7째 줄: 1972년에 → 1972

207 9째 줄: 성장했다는 성장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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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로이카 2008-06-11 01: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http://www.hani.co.kr/arti/SERIES/185/292136.html
원로언론인 임재경이 한겨레 신문에 연재하는 [길을 찾아서]의 한 회인데, 7.4 남북공동선언과 8.3조치 등으로 유신을 정당화하려고 했던 관변먹물들의 시도와 이로 인한 헷갈림에 대해 잘 서술하고 있다. "정말 헷갈렸"지만 그것은 확실히 "위장"이었다가 임재경의 결론.

2008-11-08 04:56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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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에 빠진 세계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14
이강국 지음 / 책세상 / 200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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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 이 글의 지은이 이강국 교수가 좋다. 그의 글을 그렇게 많이 보지는 못했지만, 그는 꼭 필요한 말만 한다. 비약도 없다. 아마도 이 책은 문고판이라 내용이 더 압축적이어서 그랬겠지만, 이전에 낸 책 『다보스, 포르투 알레그레, 그리고 서울』(후마니타스)에서도 어려운 경제학적 연구들을 야무지게 풀어낼 때에도 중언부언한다는 기분이 전혀 들지 않았다. 그 책에 비해 이 책이 갖는 장점은 무엇보다 읽기 쉽다는 것이다. 그러나 평이한 글로 풀어내는 그 내용은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다. 이 책의 주제는 “불평등과 가난”이다.

세계적 차원에서, 외국에서, 그리고 한국에서 다양한 범위 내에서 진행되고 있는 가난과 불평등의 동학을 잘 서술하고 있다. 그 동학의 중심에는 금융화로 정리될 수 있는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놓여 있다. 국제적 자본이동의 증가와 결부된 금융이익(이자와 배당)의 증가는 소득 불평등 뿐만 아니라 자산 불평등을 증가시킨다. 한국의 경우, 부동산 소유 격차 증대로 인한 불평등 증가가 교육의 양극화와 더불어 부의 세습에 중요한 기제로 작용하면서 가난과 불평등이 확대재생산되고 있는 추세이다.

가난을 극복하는 방법에는 안정적인 경제성장이 최선이라는 당연한 답을 내놓으면서도 분배와 성장을 이분법적으로 사고할 것이 아니라, 높은 성장, 균등한 소득 분배, 빈곤 해결의 선순환(193쪽)이 이루어져야 할 필요성을 역설하면서, 이를 위해 다섯 가지 정책적 제안을 내놓고 있다 (182-9쪽).

(1) 정부의 소득재분배 기능을 제고하는 것
(2) 위기 이후 시장지향적으로 변화한 금융 부문의 공공성을 확보하고 빈곤층과 중소기업의 금융 소외를 극복해야 한다.
(3) 근로빈곤 문제와 노동시장 양극화를 해결하기 위해 비정규직의 증대를 억제하고 적극적인 노동시장 정책을 도입해야 한다.
(4) 공교육을 강화하고 가난한 이들에게 평등한 교육과 보건의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5) 거시경제라는 구조적인 관점에서 자유화와 개방으로 폭주하는 구조조정 방향에 대해 재고하고 이를 적극적으로 관리해야 한다.

모두 맞는 말이다. 그런데 너무 맞는 말만 함에도 불구하고, 이 말들이 더 와닿는 이유는 이 다섯 가지 제안에 대한 현실 정치세력들의 입장이 분명하게 갈라진다는 것이다. 물론 한나라당과 대통합민주신당이 립서비스 수준이 아닌 실제 정책에서 갈릴 지는 잘 모르겠다. 어쨌든 현실 속에서 이 다섯 가지 제안들은 진보적 경제정책의 시금석인 것 같다.

지은이는 책의 앞부분 어딘가에서 경제학자는 ‘차가운 이성’과 함께 ‘더운 가슴’을 가져야 한다는 알프레드 마샬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 둘을 이강국 교수에게서 발견하는 것 같아 그의 앞으로의 작업이 더욱 기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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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로그인 2007-09-22 10: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지는 책이군요. 그리고 추석 잘 보내세요.

에로이카 2007-09-22 16: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유님, 오랜만입니다. 반갑습니다. 한가위 동안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시기를 빕니다. ^^
 
한국 자본주의의 축적체제 변화 (1987-2003) -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사회과학연구총 26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0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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꾸준하게 한국경제에 대한 좌파적 실증분석을 펴내고 있는 경상대학교 사회과학연구원이 2006년에 펴낸 책이다. 편집서들이 대개 그렇지만, 이 책 역시 각각의 논문 저자들이 공통의 주제를 다룬다고 하더라도 매 사안에 대해 동일한 의견을 보이지 않는다. 그렇다고 이 책에 실린 다른 이와의 입장 차이를 자신의 글에서 부각시키는 이도 없다. 이 책의 총론 격인 1장에서 정성진은 97년 경제위기 이후 진보진영 내에서 회자되고 있는 “새로운 통념” - 곧 경제위기 이후 신자유주의가 노골화됨에 따라 “금융주도 축적체제” 혹은 “금융화”가 진행되었고, 이에 대한 대안으로 케인즈주의적 정책수단을 도입하여 “나쁜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로 대체해야 한다는 생각 –을 비판한다. 그러나 뒤에 실려있는(남한 사회에서 금융화 추이를 고찰하는) 김의동이나 (케인즈주의적 단계를 생략한 남한 사회에 케인즈주의적 정책을 도입할 것을 주장하는) 장상환의 글은 정성진이 비판해 마지않는 그 “새로운 통념”을 잘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캘리니코스는 신자유주의나 금융주도 축적체제를 하나의 자립적 축적체제로 볼 수 없다는 견해를 제시하는 데 반하여, 장상환은 “신자유주의적 축적체제”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또, 장상환은 발전국가를 자유주의 국가로 규정(105)하는 데 반하여, 김의동은 1970-80년대의 국가정책을 케인스주의적인 것으로 본다 (164). 이처럼 주장들이 제각각이어서, 책 전체를 관통하는 뚜렷한 주장을 정리해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러나 오히려 이처럼 대립되는 주장들 덕분에, 특히 금융화에 관한 부문은, 어떤 주장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 이전에 기존의 논쟁 구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는 장점이 있다.

개인적으로는 제일 흥미있게 읽었던 논문은 한국 경제의 장기침체 원인을 다루고 있는 김창근의 5장이었다. 김창근은 한국 경제에 관한 네 개의 구분되는 입장들 (신자유주의, 제도학파, 포스트케인시언, 마르크스주의)을 잘 요약하고, 실증 연구로 자신의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을 옹호한다. 그는 1997년 경제 위기 이후 “금융에 의한 산업 지배”가 한국에서 나타났다는 금융화론의 주장을 일축하며, “경제 위기 이후에 산업자본의 자율성이 더욱 증대하고 있다”(218)는 흥미진진한 주장을 개진한다. 그는 경제위기 이후 산업자본의 부채비율이 급격히 낮아지고 있다는 사실을 들어, 산업자본이 국가 뿐만 아니라 금융자본으로부터도 자율성을 획득해가고 있는 과정으로 해석한다. 대자본(재벌)만 두고 보면, 맞는 말일 듯 싶다.

응집성과 일관성은 다소 떨어지지만, 여러가지 중요한 쟁점들을 잘 제시하고 있는데, 이 귀중한 연구성과들이 메아리 없는 외침으로 끝나지 않기를 바란다. 금융화론자든 신자유주의자든 이 책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는 작업들의 저자들과의 진지한 논쟁으로 이어질 수 있기를 바란다.

사족으로 한 마디 덧붙이면, 나쁜 자본주의를 좋은 자본주의로 대체하는 것은 대안이 아니므로, 진보진영은 반자본주의, 반제국주의 운동과 연대해야 한다는 식의 결론은 다소 맥이 빠진다. 사람들이 나쁜 자본주의를 비판하고 자본주의를 개량하는 것을 대안으로 사고하는 이유는 단지 자본주의가 나쁘다는 것을 몰라서뿐 아니라, 운동의 전망과 대안을 신뢰하지 않기 때문이고, 과연 그 운동의 전망과 대안이 존재하는 지에 대해 회의적이기 때문 아닌가? 오래전 보았던 영화 [동정 없는 세상]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주인공이 신문을 팔던 노인에게 묻는다. “뭐 새로운 일 있나요?” 노인은 대답한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아. 새로운 게 뭐 있겠어? 자본가는 노동자를 착취하고, 이윤율은 떨어지고….” 이 책을 읽으면서 새로운 일 없는 세상에 ‘新’聞을 팔던 노인이 생각났다고 하면, 지나친 비아냥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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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드무비 2007-06-18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나도 안 지나칩니다.^^
<동정 없는 세상> 제목에 끌려 어렵게 본 영화인데 님도 보셨군요.
나쁜 자본주의 좋은 자본주의라는 표현이 전 말장난처럼 느껴집니다.

로드무비 2007-06-18 13: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바뀐 후 처음 들어와보는데 이 방은 여전하군요.
전 어제 벽지를 새걸로 발랐습니다.^^

waits 2007-06-18 16: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반부의 이야기들은 솔직히 무슨 차이가 있는지도 잘 모르겠고, 저도 <동정 없는 세상>이 반갑네요.ㅎㅎ 동숭아트센터 예술영화전용관이 있었던 그 시절이 갑자기 그리워진다는...^^

에로이카 2007-06-19 1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동정없는 세상> 내용은 지금 거의 기억이 안 나요. 그런데 그 장면은 참 인상적이었어요. 이윤율은 계속 떨어져도, 세상은 그대로고, 그래도 신문은 나와 팔리고... 노인의 그 대답에 그야말로 벙찐 표정을 짓던 주인공의 모습은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저는 영화를 볼 때 주연보다는 주로 조연들에 감정이입이 많이 되는데, 내 모습이 그 노인 같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었지요. 세상이 고깝지만 바꿀 힘은 없는...

로드무비님 서재는 정말 시원하게 잘 꾸미셨더라구요.. 뭐 제가 그렇지요.. 그런 것 어떻게 하는 줄도 모르고, 귀찮고.. ㅎㅎ..

나어릴때님, 저는 이걸 어디서 봤는 지 잘 기억이 안 나네요. 동숭아트센터, 아니면 코아아트홀 뭐 그쯤 될 것 같은데... 극장 간 지도 참 오래됐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