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장의 잎사귀처럼 - <사이보그 선언문>의 저자 다나 J. 해러웨이의 지적 탐험, 다알로고스총서 2
사이어자 니콜스 구디브.다나 J. 해러웨이 지음, 민경숙 옮김 / 갈무리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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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역들을 걸러가면서 재미있게 읽고 있다. 오역이 주는 짜증보다는 글이 주는 재미가 더 크다. 


자신의 Situated Knowledge를 사람들이 오독하는 것에 대해서 해러웨이가 이렇게 말한다.

내가 말하려고 하는 건 그게 아니라 이거다... 친절한 다나씨 되시겠다.

"상황적(situated)"이라는 말이 반드시 장소를 의미하는 게 아님을 이해하는 게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위치(standpoint)라는 표현은 잘못된 은유일 수 있지요. 가끔 사람들은 "상황적 지식" 챕터를 약간 평면적인 방식으로 읽는 것 같습니다. 단지 당신의 신분확인 표시가 무엇인지, 그리고 당신이 문자 그대로 무엇인지를 의미하는 거라고 읽지요. 이런 의미의 "상황적"은 한 장소에 있는 것만을 의미하게 됩니다. 반면 제가 강조하고 싶은 건 상황적이 상황적이라는 사실입니다(what I mean to emphasize is the situatedness of situated). 달리 말하자면 저는 장소와 공간을 모두 망라하는 다층적인 끼여 넣기 양태에 도달하려는 거지요. 지리학자들이 장소와 공간의 특성을 그리는 방식 같은 겁니다. - P126

또 달리 말하자면 과학적 객관성의 컨텍스트 안에서 페미니즘의 설명가능성(feminst accountability; 페미니스트로서의 책임)에 대해 말할 때 이분법이 아닌 공명에 맞추어진 지식(a knowledge to resonance, not to dichotomy)을 요구한다고 토론하는 겁니다. (영어판, p. 71) - P126

리차드 도킨스의 저서 『확장된 표현형』(The Extended Phenotype)...에서는 기생충의 관점에서 볼 때 숙주가 그 기생충의 표현형(phenotype)의 일부입니다. 거는 그런 일종의 확장됨 몸에서는 자기와 타자가 어떤 의미에서는 관점의 문제라는 주장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무엇이 자기라고 간주되는지, 그리고 무엇이 타자라고 간주되는지의 문제는 관점의 문제이거나 혹은 목적의 문제입니다. 어떤 경계들이 어떤 컨텍스트 안에서 견고하겠습니까? 그러므로 기생충의 관점에서 보면 숙주는 자기자신의 일부입니다. 그리고 숙주의 관점에서 보면 기생충은 침입자처럼 보입니다. ... 숙주의 관점에서 보면 치명적인 친근한 관계가 존재합니다. ... - P130

서로를 인식하지 못하면 감염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어떤 관계도 없는 거지요. 질명은 관계입니다. - P131

환상적인(fantastic) 것, 신화적인(mythological) 것, 이데올로기적인(ideological) 것 등 이 세 개를 다른 상상적 관게의 등록으로 유지하는 게[하나의 상상적 관계의 세 가지 상이한 기입으로 분류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환상적인 것은 개별적으로 일어날 뿐 아니라 문화 속에서 벌어지는 정신역학(psychodynamic) 과정들과 관련이 있어야 합니다. 이데올로기적인 것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의미와 관련이 있어야 하며, 사회적 이해관계를 재현하거나 잘못 재현한 관념들을 따르는 것입니다. 적어도 이 말은 이데올로기에 대한 하나의 괜찮은 정의이지요. 그리고 신화적인 것은 서사(narrative) 및 이야기하는 실천(storytelling practices)과 그 안에 들어 있는 스토리들과 관계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세 개는 서로 연관이 있지만 상대방의 상태로 환원될 수 없어요. 이들은 다른 종류의 의미작업(meaning work)을 합니다. - P134

생물학은 분명 메타포로 가득 차 있으나 메타포 이상의 것이지요.

구디브: ... "메타포 이상의 것이다"라는 게 무슨 뜻입니까?

해러웨이: 생물학에서 발견되는 생리학적∙담론적 메타포들뿐 아니라, 스토리들도 의미하는 겁니다. ... 생물학은 어떤 다른 걸 밝혀주는 메타포일 뿐 아니라, 문자 그대로가 아닌 세계에 접근할 수 있게 하는 고갈되지 않는 원천이에요. 또한 저는 사실과 픽션, 물질성과 기호성(semioticity), 대상(object)과 전의(trope, 비유) 등의 동시성에 주목하기를 원하지요.

구디브: 당신은 이런 문자 그대로의 생물학적 실재물들(entities)이 또한 "생명," 즉 생물학적∙존재론적 체계들을 이해시키는 매우 강력한 은유라고 말하시는군요. - P140

G: ... "세속적 실천"이라고 말할 때 무엇을 의미하는 겁니까?
H: 몸의 생리현상, 혈액과 호르몬의 흐름, 화학적인 것의 작용 - 유기체의 육체성 - 이 그 유기체의 전체 삶과 서로 맞물리는 내파된 물체들의 집합을 의미합니다. ...

G: ... 왜 "세속적"이란 단어를 선택했는지 궁금하군요.
H: 저는 실재론과 상대주의간의 논쟁을 피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 단어를 선택했어요. ... 저는 죽어야 할 운명, 유한성, 육체성, 역사성, 우발성 같은 것들에 몰두하기 때문에 "세속적"이라는 단어를 선택하기를 잘 했어요.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또한 권력과 돈 같은 것들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는 것도 의미하지요.
G: ... 세속적이라는 단어는 이 세상에 관한(earthly) 단어이며 근거가 확실한(grounded) 단어입니다. 그 단어는 공공연하게 허세부리지 않습니다. - P181

실뜨기놀이는 당신 손으로 할 수 있는 놀이예요. 그러나 다른 사람과 함께 하면 더 재미있어요. 그것은 결투가 아닌 관계성을 구축하기 위한 형상입니다. ...

실뜨기 놀이는 유일의 모델이 되지 않는다는 게 중요하지요. 우리에게는 반대의 적대적 입장을 취하고 싶은 많은 기술과학적 실천들이 있어요. 우리에게는 가끔 경쟁과 싸움, 그리고 군대 은유들이 필요할 수 있기 때문에, 조화와 집합성이라는 은유는 둘 다 이야기 전체가 아니지요. 그런데 그동안 기술과학 내에서는 결투(agonism)을 지나치게 강조해 왔어요. 저는 구체적으로 브루노 라투르의 책 Science in Action의 여러 양상들에 대해 반대하여 그 논문("포스트모던 몸의 생명정치")을 쓰고 있었어요. 라투르의 책은 결투와 전토의 은유들에 지나치게 의존하고 있거든요. 실뜨기놀이의 비유는 그것에 대한 직접적인 대응이에요. 그러므로 그것은 컨텍스트적인 은유지요. - P242

사람들은, 겸손의 이중적 의미 - 사라지기, 혹은 무능력한 것으로 잘못 듣게 되는 숨기 - 때문에, 겸손을 희생자가 되는 거라고 오해해요. 진정한 겸손은 당신이 특정한 재주를 갖고 있다고 말할 수 있는 거지요. 달리 말하자면, 강력한 지식 소유권을 주장할 수 있는 거예요. 어리석은 상대주의가 아니라 목격과 증언에 굴복하는 겁니다. 제가 주장하는 종류의 겸손한 목격자는 상황적임을 고집하는 사람이에요. 여기에서 상호아적이라 함은, 위치가 그 자체로 유산일 뿐 아니라 복잡한 구성물인 곳을 말하지요. ... 목격자는 참여하지 않는 관찰자가 아니며 화성인도 아니에요. ... 목격자는 어떤 진리들과는 다른 진리들을 증언하는 것이므로, 언제나 위험에 처합니다. 당신은 목격을 인내합니다. ... 그들은 또한, 목격하고 진실을 말하는 걸 자신들의 책임으로 삼으며, 진실을 말하는 필요조건 속에 연루되지요. ... 여기에서 진실(truth)은 ... 역사를 초월하거나 역사 밖에 있는 진리가 아니에요. - P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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