녹색 계급의 출현 - 스스로를 의식하고 자랑스러워하는
브뤼노 라투르.니콜라이 슐츠 지음, 이규현 옮김, 김지윤 외 해설 / 이음 / 2022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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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자연에 관해 말한다는 것은 평화협정에 서명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대륙과 온갖 층위에서 일상생활의 모든 영역에 많은 갈등이 실재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것이다. 자연은 통합을 고취하기는커녕 분열을 조장한다.

4. ... 기후와 에너지 그리고 생물다양성에 대한 관심은 도처에서 이야기되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에 자유주의와 사회주의가 이끈 변화가 그랬던 것과 달리, 이런 이슈들을 둘러싼 갈등들은 아무튼 지금까지는 대중의 결집, 대중봉기라는 형태를 띠지 않았다. 이 점에서 생태주의는 어디에나 있으면서도 어디에도 없다. ... - P12

4. ... 생태운동이 더 견실해지고 더 자율적이게 되려면, 그리하여 과거에 못지 않은 역사적 도약으로 나타나려면 이 모두가 생태 운동을 모든 갈등을 이해할 수 있는 통일된 행동으로 모아냄으로써 자신의 기획을 인정하고 파악하고 이해하고 효과적으로 재현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우선 생태주의가 분열을 내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다음으로 생태주의가 낳은 새로운 유형의 갈등들의 지도를 설득력 있게 그려내야 한다. 끝으로 단체행동을 위한 공동의 지평을 규정해야 한다. - P13

6.
"계급" ... 개념의 이점은 정치 역학을 사회의 갈등과 경험의 형성 그리고 집단의 지평이라는 관점에서 제시하도록 함으로써 사회적·물질적인 세계의 구조를 명확하게 해주는 것이었다. 역사의 흐름 속에서 계급투쟁의 개념의 역할은 분명코 기술적이면서 수행적이었다. 이 개념이 사회 현실을 묘사하는데 사람들이 자신의 위치를 정할 수 있게 자처하더라도 계급투쟁의 개념은 결코 사회를 변화시키려는 시도와 분리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계급"에 관해 말하는 것은 언제나 전투대형을 갖추는 것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녹색계급"에 관해 말하기는 불가피하게 행동을 새롭게 기술하는 것이면서 동시에 우리가 "녹색"이라 부르는, 형성 중인 이 계급을 위한 분류(classement) 작업은 필연적으로 수행적이다. 이 용어가 많은 혼동을 초래한다 해도 다시 사용하는 것은 이 때문에 유용하다. - P15

7.
"계급투쟁"의 개념을 다시 사용하는 것이 그토록 어려운 이유는 그것이 생태학적 문제로 말미암아 분류투쟁으로 변했기 때문이다. ... 생태학적 문제와 관련해서는 아군과 적군이 분명하게 구별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화가 난다. 따라서 녹색계급을 출현시키려면 이와 같은 분류를 둘러싼 투쟁을 받아들이고 전통적인 계급갈등을 때로는 횡단하거나, 반대로 그것과 합류하는 구별의 기준을 찾아낼 필요가 있다. - P16

8.
생태학이 더 자율적이려면 계급이라는 용어에 새로운 의미가 부여되어야 한다. 그런데 현재 녹색계급은 지난 두 세기의 투쟁들과 관계를 설정하지 못할까봐 두려워한다. ... 그렇지만 모든 녹색 계급이 관계의 경제화에 저항하는 사회적 투쟁들을 역사적으로 이어받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녹색계급은 생산의 개념에 이의를 제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를 희생시켜 경제를 자율화하는 것에 대한 전반적인 거부를 증폭시킨다고 할 수 있다. 확실히 이 점에서 녹색 계급은 한 치의 어긋남도 없는 좌파이다. - P20

9.
그렇지만 생산의 개념과 이상에 여전히 깊이 연계된 "계급투쟁"의 전통에 보조를 맞추어야 할 때에는 이야기가 달라진다. 새로운 상황을 기존의 틀안에 밀어넣는 것은 언제나 유혹적이지만 녹색계급이 그저 "반자본주의" 투쟁의 연장선 위에 있다고 서둘러 단언하지 말기로 하자. 생태주의가 이러한 조건반사적인 단언으로 자신의 가치들을 제한하지 않은 것은 옳았다. 그러므로 이 논쟁을 종결짓고 왜 이 점에서는 필연적으로 연속성이 없는가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 P20

10. ...
마르크스는 여전히 이 분야에 뛰어들기 위한 길잡이이다. 역사적으로 매우 뚜렷하게 구획된 어떤 시기 동안 "계급이론"은 사람들에게 무엇이 그들의 삶을 지탱하는지, 그들이 사회적 풍경에서 어디에 위치하며, 누구와 싸움을 벌이는지에 대해 분명한 방향을 제시하는 나침반 역할을 했다. ... 자유주의처럼 마르크스주의도 역사에 의미를 부여했다. 녹색계급 또한 존재하고자 한다면 적어도 마르크스주의만큼은 해야 하고 특히 역사, 자기 역사의 방향을 규정해야 한다. - P21

11.
계급에 대한 마르크스주의적 정의는 물질적 조건 - 사회적 조건은 물질적 조건의 표현일 뿐이다 - 을 이해하는 데 기여했다. 마르크스의 나침반이 유용했다면 이는 사회가 지속되는 데 필요한 과정을 비교적 분명하게 묘사하는 데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는 먼저 사회를 재생산하는 메커니즘을 묘사하며, 이어서 이 재생산 과정에서 행위자들이 대립적으로 위치하는 방식을 평가한다. 계급에 입각한 분석이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다. 그러므로 녹색계급이 이 전통을 이어받고자 한다면 녹색계급은 마르크스주의의 전통이 주는 교훈을 받아들여서 자기 존재의 물질적 조건과 관련하여 자기규정을 시도해야 한다. 새로운 계급투쟁은 옛 계급투쟁만큼 유물론적인 접근을 토대로 전개되어야 한다. 연속성은 바로 이 본질적인 점에서 존재한다. - P22

12.
그러나 정말이지 그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성이 아니다! 여기에서 사회주의의 전통과 오늘날 떠오르게 하는 것이 문제인 관심의 대상 사이에 상대적 불연속성이 생겨난다. ... 마르크스에게는 인간의 생존과 생식이 모든 사회와 사회사의 기본 원동력이었다. 그래서 인간 사회와 사회사에 대한 모든 분석의 첫 단계는 필연적으로 인간을 태어나게 하는 과정과, 인간 사회 및 집단에 존속을 허용하는 물질적 조건 - 인간이 먹는 것, 마시는 물, 입는 옷, 거주하는 집 등 -을 설명하는 것이었다. 맑스가 사회사의 토대로 간주한 것은 바로 이 물질적 재생산 조건의 생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문제가 되는 것은 바로 사람들의 재생산이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전혀 다른 역사의 지형 안에 놓여 있다. 이제 우리는 동일한 역사를 좇지 않는다. 생산은 이제 우리의 유일한 지평을 규정하지 않는다. 그리고 특히 우리가 대면하고 있는 것은 이제 동일한 물질이 아니다. - P23

13. ...
사회주의의 나침반은 거의 배타적으로 생산과 재생산에 입각해서만 사유하기 때문에, 오늘날 계급의 풍경이 형태를 달리하는 방식을 설명할 수 없다. 기계 문명이 생겨날 때 그랬듯이, 오늘날 신기후체제는 우리에게 사회가 재생되거나 존속하는 과정을 다시 그리도록 강제한다. 또다시 "견고성과 영속성을 지녔던 모든 것이 연기처럼 사라진다." 19세기에 그랬듯이 현재 우리는 사회의 하부구조가 엄청나게 변화하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 녹색 계급에 입각한 분석은 여전히 유물론적이지만, 인간만의 생산과 재생산 이외의 다른 현상 쪽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 P25

14. 제2차 세계대전 직후에 이 생산체계가 몹시 거세게 가속화되어 지구와 기후의 체계를 불안정하게 했다. ... 생산체계는 파괴 체계와 동의어가 되었다. 인간이 아닌 것의 재생산에도 집중될 맑스주의적 분석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오늘날 유물론적이라는 것은 인간에게 유리한 물질적 조건의 재생산 이외에도 지구라는 행성의 거주가능 조건을 고려하는 것이다. 후자의 조건은 전통적인 정당의 정치경제학이 자원의 이름으로 단순화하려고 애쓴 것뿐만 아니라 지구의 새로운 물질적 현실을 고려하도록 강제한다. ... 지구의 거주가능조건을 유지하는 방향으로 돌아설 수 있는, 달리 말해서 생산에 대한 이 배타적 관심에 등을 돌려 거주가능 조건의 탐색이라는 더 큰 틀로 나아갈 수 있는 경제학은 존재하는가? 이것이 새로운 녹색계급의 관건 전체이다. 이 점에서, 다들 이해하다시피, 전통적인 "계급투쟁"과의 불연속성이 크게 돋보인다. - P26

15. ...
생산만을 지향하는 이러한 관심에서 벗어나 경제화에 대한 (칼 폴라니의 표현을 빌리건대) 사회의 저항을 확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20세기의 몇몇 투쟁은 명백히 맑스주의의 전통에 의해 고취되었지만, 다른 많은 투쟁은 단순히 생산의 확대에 대한 거부를 명분으로, 그리고 생산이 나머지 사회생활의 틀 밖으로 벗어난다는 그 끔찍한 주장을 거슬러 수행되었다. ... Lucas Chancel이 말했듯이, "노예제의 폐지, 사회보장, 보통선거권, 무상교육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물질 생산의 조직화 문제에 관해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인간 사회가 경제화에 의해서만 규정될 수 없다는 대단히 중요한 표현이다. 따라서 맑스주의적 발상의 유물론이 갖는 몇몇 한계를 비판하는 것은 또한 경제화에 대한 다양한 투쟁의 전통을 갱신할 수 있게도 해준다. 그러므로 사실 결정적이지만, 이 미묘한 차이를 제외하면, 녹색 계급은 해방을 주장하는 좌파의 역사를 이어받아 확대한다고 주장할 수 있다. - P27

16.
현 상황을 요약하자면, 이제는 모두가 파국을 막기 윟나 결정적인 행동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해했지만, 행동을 가능하게 해줄 중계점, 동기, 지침이 없는 상황이라고 말할 수 있다. ...
예전에는 이상이 정열을 끓어오르게 했고 상황의 이해가 동원을 충분히 가능하게 했다. 오늘날에는 파국의 확실성이 오히려 행동을 마비시키는 것 같다. 어쨌든 세계의 재현, 에너지의 용출, 가치의 수호 사이에 본능적인 동조는 없다. 반대로 모든 본능이 생산을 이해하는 옛 방식의 완전히 동일한 "되풀이" 쪽으로 향해 있다. 이러한 마비 상태를 진단하고 불안, 집단행동, 이상과 역사의 방향 사이에 새로운 동조 관계를 찾아내는 것이 녹색 계급의 의무이다. - P30

17.
물론 자유주의의 다양한 형태와 대다수 사회주의의 전통 사이에 수많은 알력이 있어 왔다. 하지만 생산량을 높이는 데에는 양쪽이 완전한 일치를 이루었다. ...
갑자기 생산의 증대, 발전의 개념 자체, 진보의 개념이 고쳐야 할 착오로 나타난다. 생산이 지구에 거주할 수 있는 조건의 파괴와 연결되면서 동원의 역량은 위기에 처한다. ...
오늘날 관심의 방향이 바뀌었지만 행동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해줄 새로운 장치는 아직 고안되지 않았다. 누구나 불안, 죄의식, 무력감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 장치를 제공하는 것이 녹색계급의 역할이다. - P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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